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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이 알고 싶다

- 네 가지 키워드로 만나는 평양 -

주인우


2000년,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윤리 시간 수행평가로 통일과 관련된 기사를 스크랩해야 했다. 18년 전, 그때만 해도 종이로 된 신문을 가위로 오려 풀로 붙여서 스크랩해야 했다. 인터넷 기사를 인쇄할 수도 있었으나 인터넷 기사보다 지면 신문을 신뢰하던 때였다. 통일 관련 기사를 찾는 것은 꽤 어려웠다. 기자들에게 통일은 시의적인 주제가 아니던가. 작은 기사들을 오려 붙여보았으나 큰 스케치북을 몇 페이지 채우지 못했다.

그리고 6월이 되었다. 전 세계의 언론이 평양으로 눈을 돌렸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이 악수를 했다. 쉴 새 없이 플래시가 터졌고 한 신문사는 신문 1면에 광고도, 날짜도, 제호도 내지 않은 채 오로지 두 사람이 악수한 사진으로 전면을 장식했다. 신문은 찍히는 족족 팔려나갔다. 이후로 이산가족이 상봉했고, 금강산 관광이 추진되었다. 나의 스케치북은 스크랩할 페이지가 부족해졌고, 통일이 오는 것만 같았다.

18년이 흘렀다. 역사를 공부했던 선후배들과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였다. 식당 TV에는 뉴스가 방송되고 있었고, 북한사를 전공하는 후배에게는 뉴스보다 빠르게 톡 메시지가 오고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판문점에서 두 손을 맞잡았다. 두 사람은 군사분계선을 한 발씩 넘었다. 식사하던 사람들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드라마틱한 순간이었다.

이런 역사적인 순간 떠오르는 것은 평양냉면이었다. 평양 옥류관에서 직접 냉면이 왔다고 하니 그 맛이 궁금하기도 했지만, 이 순간 목이 메는 뜨겁고 벅찬 감정을 다독이자니 슴슴하고 시원한 평양냉면 국물 한 모금이 절실했다. 다음 날 평양냉면집은 북새통을 이루었다. 냉면을 먹기 위해 두세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SNS와 포털에는 종일 평양냉면에 대한 글이 연이어 올라왔다. 기대는 한껏 부풀었고, 서로에 대한 갈증은 예상보다 깊었다.


첫 번째 키워드. 왜 평양냉면인가?


왜 평양 하면 냉면이 떠오를까? 몇 년 전부터 평양냉면을 즐기지 않는 사람은 미식가 축에도 못 끼게 되었고, 사람들은 진짜 평양냉면의 맛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열띠게 토론을 했다. 뚝뚝 끊어지는 메밀의 면발과 향긋한 메밀 향, 소고기와 돼지고기의 육향이 섞여 단순하지만 단조롭지는 않은, 그래서 슴슴하면서도 감칠맛이 있어 왜인지 모르게 자꾸만 마시게 되는 육수의 맛을 논하며 어느 집이 진짜 평양냉면의 맛을 이어오고 있는가 모두 자신감 넘치게 자신의 주장을 펼친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실향민이나 탈북자가 아닌 다음에야 우리 세대는 평양에서 만든 면이란 것은 한 번도 먹어보지를 못했는데도 이렇게 확신에 차 있으니 말이다. 아마도 먹지 못하니 그 진짜 맛에 더욱 집착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싶다.

글루텐이 풍부하여 쫄깃한 밀가루 면이 넘쳐나는 요즘, 뚝뚝 끊어지는 메밀로 만든 평양냉면이 어쩐지 더 건강한 느낌이 들고, 또 자주 맛볼 수 없는 그 매력 때문인지 메밀 면이 엄청 특별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조선 시대에 면이란 것은 대부분 메밀이었다. 밀가루는 너무 비싸고 귀해서 왕도 자주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고, 왕부터 서민들까지 사랑했던 국수의 면은 거의 메밀 면이었다.


조선 말 보부상들이 주막에서 식사하는 모습. 처마에 걸어 놓은 넒은 끈 다발이 냉면을 판다는 표시.
ⓒ 한국일보


메밀국수를 뽑으면 여름에는 얼음이 없으니 외려 끓여서 육수와 먹거나 비빔으로 먹는다. 겨울에는 집집마다 있는 침채, 즉 동치미 국물에 메밀 면을 말아 먹었다. 그것이 냉면이다. 그러니 일반적으로 냉면이란 것은 면이 메밀로 되어 동치미 국물에 말아 먹는 것이었고, 팔도에서 먹는 냉면의 모습이 이와 같았다. 다만 메밀의 주산지인 평안도 지역에서 냉면을 가장 많이 소비할 수 있었고, 또 좋은 면이 나왔다. 『동국세시기』에 보면 골동면(비빔국수)에 대한 설명에서도 ‘관서지방의 면이 가장 좋다.’고 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메밀은 끈기가 없으니 반죽할 때 밀가루, 녹말, 달걀 등을 써서 탄성 있게 해주어야 하는데 밀가루는 비싸니 녹말을 같이 넣고 뜨거운 물로 반죽해 탄성을 늘리고 압착면을 뽑을 때 바로 뜨거운 물에서 삶아 내고 냉수에 헹구었다. 『동국세시기』, 『진작의궤』, 『부인필지』 등 1800년대부터 1900년대의 냉면에 대한 재료구성을 보면 대체로 무 동치미에(배추 동치미로 소개된 책도 있다) 돼지고기나 양지머리고기를 넣고 배, 꿀, 잣을 넣은 것이 거의 비슷하다. 조금씩 다른 것은 고춧가루를 넣는지 여부이고, 1915년에 쓰인 『부인필지』의 냉면은 명월관 냉면이라고 하는데 달걀지단이 들어가 있는 것이 다르다. 약 20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냉면이라고 하는 음식은 지금 우리가 평양냉면이라고 부르는 모양과 비슷하다.

기록들에는 돼지고기를 넣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꿩고기를 넣어 먹기도 했는데 서민들에게는 꿩이 더 구하기가 쉬웠을 것이다. 내가 어린 시절만 해도 할머니 댁 뒷산에는 꿩이 많았고, 근처의 밭을 매고 있으면 곡식을 주워 먹으러 장끼와 까투리가 내려오는 일이 흔했다. 겨울에는 아이들이 새총을 하나씩 들고는 꿩 사냥을 다니기도 하였으니 꿩고기를 고명으로 얹는 것도 일반적인 것이다. 기록들에는 소고기는 없는데 조선 시대에 소는 국가의 허락 없이 잡을 수가 없었고, 소고기를 먹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으니 소고기를 넣게 된 것은 근래의 일이다.

평양에 유흥을 즐기러 온 양반들은 겨울에는 냉면을 많이 먹었다고 한다. 면이 좋은 관서지방의 냉면은 별미이기도 했고, 술을 마신 다음 날 해장용으로도 먹었다. 심지어 국숫집에서 기방으로 냉면을 배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지게에 냉면 그릇을 가득 진 사내가 국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마치 묘기를 하듯 그 추운 겨울에 냉면을 배달하였을 생각을 하니 생각만 해도 몹시 춥다.


두 번째 키워드. 왜 팔도의 미인은 평양으로 모였을까?


평양은 냉면도 유명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기생이 유명했다. 전국의 기생 중 가장 뛰어난 사람들은 평양으로 모인다고 하였다. 집안이 개성에서 손꼽히는 갑부였으나 개성 출신이라는 이유로 과거에 합격하지 못한 ‘한재록’은 1820년 『녹파잡기』를 지어 기생들의 재능과 그들의 삶의 모습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한재록은 품성이 좋고 자부심이 있는 기생들을 위주로 하여 지금으로 말하자면 유명 기생들 66명과 인터뷰를 하여 기생들의 재능과 그녀들의 삶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녹파잡기』에 의하면 기생들은 춤, 노래, 연주가 출중했을 뿐만 아니라 사대부와 시(詩), 서(書), 화(畵)를 주고받을 수 있을 정도로 학식을 갖춘 기생들도 꽤 많았다고 적고 있다. 기생들은 양반들의 성적 노리개이기도 하였으나 또한 예인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전통문화를 지켜온 매우 중요한 집단이었다.


요시다하츠사베로(吉田初三郎)가 1929년 제작한
‘평양을 중심으로 그린 평안남도 조감도’(平壌「平壌を中心とせる平安南道鳥瞰図」)에 표시된 ‘기생양성소’.


그런데 왜 서울이 아니라 평양의 기생이 더 유명하였을까? 그것은 아마도 뒤에 살펴볼 평안 감사직이 인기가 있었던 것과 같은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조선 시대에는 경기·충청·황해·전라·경상도는 조운선을 이용하여 서울로 세곡을 옮겨왔다. 그러나 함경도와 평안도는 관향곡이라 하여 세곡을 그 지방 국방비에 충당하였다. 이는 두 도가 너무 멀어 조운을 하기에 적절하지 않기도 했지만 수확량도 보잘것없었다. 조선 후기에 와서도 함경도, 평안도, 제주도는 세율을 다른 지역에 비해 저율로 수세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세금을 적게 내는 지역이면 돈이 없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세금이 중앙에 상납 되지 않고 평안도에서 자체적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그만큼 관료들에게 자율권이 주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권력과 돈이 모이는 곳에는 술과 유흥이 따르고,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기생들은 모두 평양으로 모였다. 이춘풍전에서 이춘풍은 평양의 기생에게 재산을 모두 탕진하였고, 다른 고전들에서도 상인들이 물건을 팔러 평양에 왔다가 기방에 가서 재산을 다 탕진하고도 다시 돈을 벌어 평양의 기생을 만나러 오겠다는 풍자적인 내용들을 보면 평양의 기생들이 무척이나 매력적이었던 모양이다.

1930년대 평양에 있던 기생 학교의 교과 과정을 보면 기생들이 춤과 노래, 시. 서. 화를 모두 배우도록 하였다. 예술적 재능이 뛰어났던 기생들은 근대화가 되면서 초창기의 가수나 배우가 되기도 하였다. 이토록 아름답고, 재능이 뛰어난 여성들은 전통 문화를 이어왔던 예인이었으나 결국은 돈 많은 남성들의 성적 착취의 대상이었다. 겉으로는 화려해 보이는 그네들의 삶은 늘 불안정했고, 그래서인지 행복하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평양기생학교 수업장면 ⓒ 문화콘텐츠닷컴


을밀대로 나들이 나온 평양기생의 모습 ⓒ 문화콘텐츠닷컴


1923년 가장 큰 스캔들은 평양 기생 강명화의 죽음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서는 살 수 없고, 그렇다고 그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은 사회와 가정이 배척하니 사랑하는 이를 위해 죽는다는 강명화의 죽음은 큰 이슈가 되었고, 나혜석은 라정월(羅晶月)이라는 이름으로 강명화의 죽음에 대한 칼럼을 실었다. 기생의 삶을 잘 모르나 그 번민과 고통이 공감이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숨은 중한 것이니 자살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한재록이 제목으로 인용한 녹파(綠波), 푸른 물은 정지상의 ‘임을 보내며(送人)’에서 대동강을 상징하는 것이다. 대동강의 푸른 물은 어쩌면 평생 기댈 곳 없이 슬픔을 껴안고도 낯선 남자 앞에서 늘 웃어야 했던 기녀들의 눈물이 마르지 않아 흐르는 것은 아닐까.


세 번째 키워드. 왜 평안 감사에 대한 속담은 유달리 많을까?


‘평양 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다.’
‘평양 감사보다 소금 장수’

유독 평양 감사에 대한 속담이 참 많다. 아니, 평안 감사다. 평안도 감사가 평양에 주재하여 백성들은 평양 감사라고 불렀지만 평안감사 혹은 평안 관찰사라고 해야 옳다. 감사, 즉 관찰사는 종2품 외관직으로 각 도에 1명씩 있어 경기 관찰사, 충청 관찰사 등 각 도의 이름을 붙여야 한다. 하여튼 관찰사란 민정. 군정. 재정. 형정 등을 통할하였으니 자기 관하의 도에서는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모든 지역의 관찰사가 권력이 있는데 왜 유독 평안 감사에 대해서만 저리도 속담이 많았을까?

김홍도의 ‘부벽루에서의 연회’를 보면 평안감사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하였는가 알 수 있다. 부벽루에 평안감사가 앉아있고 악사와 무용수, 기녀, 구경나온 사람들을 다채롭게 묘사하여 떠들썩한 잔치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 연회에 초대받지 못한 백성들도 좋은 구경을 하고자 각자 자리를 잡았다. 물론 이 그림의 가장 재미있는 점은 성 뒤로 보이는 능라도의 농민들은 무슨 일이 있거나 말거나 밭을 갈고, 물고기를 잡고 있는 것이다.

앞서 잠깐 언급한 것처럼 평안도는 세곡을 경창으로 보내지 않고 평안도 내에서 사용하였다. 운송의 어려움, 군수물자 비축의 필요, 낮은 생산량, 중국에서 오는 사신 접대 비용 부담 등 여러 문제들 때문에 평안도의 세곡은 수도로 가져오는 것보다는 지방에서 사용하는 것이 나았다. 평안도의 감사는 비록 외관직이나 도의 세금을 걷고 사용하는 전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많은 관료들이 가고 싶어 했던 꿀보직이었던 것이다. 감시가 되지 않는 곳에 한 사람이 전권을 가지고 있는 경우 재정이 유용된다. 그러니 평안 감사직은 모두가 한 번쯤은 앉고 싶어 했던 직책이 아니었나 싶다. 대동강 푸른 물이 내려다보이는 모란봉의 부벽루에서 저런 잔치의 주인공이 한 번씩은 되고 싶지 않았을까?

필자는 평안 감사하면 박규수가 떠오른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 당시의 평안 감사였던 박규수는 통상개화론자로 분류한다. 총을 쏘아댄 파란 눈의 외국인들을 보고도 왜 그는 문호를 개방하자고 하였을까? 할아버지인 박지원의 영향도 있었겠으나 아마도 직접 보았으니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박규수는 미국의 어마어마한 함대를 보았다. 쇠로 된 배가 물에 떠 있고, 그것을 우리 손으로 아직 만들 수 없음을 깨달았다. 저들이 우리와 친구가 된다면 모를까 적이 된다면 결단코 이길 수 없음을 알았을 것이다. 임진왜란도 물리친 배였으나 이제 조선의 배 따위로는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싸움이 시작될 것임을 그는 예견하였을 것이다. 중국에서의 소식도 더 빨리 들었을 것이다. 작은 섬 몇 개로 구성된 신사의 나라가 대국인 청국을 이겼다고. 그리고 우리가 부순 함대를 가진 나라에서 더 많은 함대를 끌고 조선으로 향할 것임을 그는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무기를 배워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제너럴셔먼호의 쇠 닻줄은 평양 대동문에 걸렸고, 전국에 척화비가 세워졌다.

평안 감사도 저 싫으면 안 한다는 말이 있지만 진실로 개화기 때의 평안 감사는 너무 힘들었을 것 같다. 이양선이 주변을 다니고, 정부는 재정이 없고, 백성들의 아우성에 방곡령을 내리면 배상금으로 갚아야 했던 그 시절에 어떤 자리에 있건 마음이 편하였을까. 조선의 앞날은 풍전등화와 같았고, 공자님도 부처님도 천주님도 조선의 앞날에 대해 가르쳐 주지 않고 있었으니 위정자들은 어찌해야 나라를 지킬 수가 있는 것인지 알기 어려웠을 것이다.


네 번째 키워드. 왜 한국 교회의 대부흥은 평양에서 일어났을까?


‘평양’이라고 하면 개신교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다섯 글자가 먼저 떠오른다. ‘평양대부흥.’ 100년 전, 나라의 큰 변화를 이끌었던 종교가 이제는 많은 변화의 걸림돌이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들이 벌어지고 있지만 1900년대의 개신교는 애국계몽 운동과 결합하여 큰 파급력을 가지고 있었다. 개항기와 일제강점기의 종교는 단순한 신앙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3.1 운동의 독립선언서에 사인한 33명의 민족 대표들은 종교계의 대표들이었다. 국호도 빼앗기고, 왕도 빼앗겼지만, 신앙은 빼앗기지 않았던 것이다. 나라를 잃어버린 상황에서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이들은 사상적으로 무장되어 있어야 했고, 종교가 그들을 무장시켜주었다. 그것이 전통적으로 익숙한 유교이거나 불교이기도 했고, 새로 만든 대종교 같은 것이기도 했고, 서양에서 들어와 더욱 강해 보이는 천주교와 개신교이기도 했다. 비유하자면 종교는 정신적인 갑옷 같은 것이었다.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평양대부흥운동’에 참여한 신도들의 모습. ⓒ한국교회사연구소


대구에서 서상돈이 시작하여 대한매일신보가 앞장섰던 국채보상운동은 개신교의 포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서상돈이 주장한 금연, 금주 운동은 기독교적 윤리와도 연결된 것이었고, 대한매일신보는 기독교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사설을 쓰기도 했다. 승동교회는 계몽운동을 추진하는 동시에 독립 운동가들의 만남의 장이 되기도 했다. 한국 근대 여성 교육은 개신교 선교사들이 없었다면 얼마나 더 늦춰졌을지 알 수 없다. 세브란스 병원은 당시 아시아 지역에서는 가장 최신 시설을 갖춘 병원이었다. 성도들은 서양에서 온 하나님은 서양의 함대보다 더 막강한 힘으로 나라를 지켜주실 것이라고 믿었다.

원산에서 처음 부흥 운동이 시작된 것은 원산이 개항지였던 것과 관계없지 않을 것이다. 원산은 주민들이 주도가 되어 최초의 근대식 학교를 세운 곳이다. 원산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고, 그 변화를 잘 받아들이고 있었다. 원산과 평양에서 시작된 사경회와 부흥 운동 이후로 교회에서의 양반과 상민들 간의 좌석 차별 같은 것이 사라졌다. 사경회를 듣기 위해 먼 길을 걸어오고, 매일 새벽마다 기도회를 열었다. 이러한 종교적 열정은 죄에 대한 회개와 함께 큰 운동이 되어 전국에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네 가지 키워드로 평양을 살펴보았다. 남과 북 두 정상의 만남을 보며 역사를 공부하고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우선은 문화적 교류가 빨리 되었으면 하는 기대를 가장 먼저 해본다. 고조선 시대의 왕검성 유적도, 고구려의 평양성 유적도, 낙랑군의 유적도 우리는 북한이 내어주는 자료만 보아야 하는데 가서 직접 볼 수 있다면 역사 연구에, 특별히 고대사 연구에 큰 발전이 있지 않을까 싶다.



참고 자료


  • 김상보, 조선시대의 음식문화, 2006
  • 이용재, 냉면의 품격, 반비, 2018
  • 이해조 지음, 김동우 편저, 평양 기생 강명화전, 새움, 2015
  • 한재락 지음, 안대회 옮김, 녹파잡기, 휴머니스트, 2017
  • 유홍준, 나의 북한 문화유산답사기, 중앙M&B, 1998
  • 옥성득, 한반도 대부흥, 홍성사, 2009
  • 동아일보 1923년 6월 15일, 6월 16일, 7월 8일 기사(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집필자 소개

주인우
주인우
서울사대부고 역사 교사. 서울대학교 역사교육과 졸업. 서울시립대학교 교육대학원 역사교육 석사 과정. 2008년부터 교단에서 한국사와 세계사를 가르치고 있다. 비판적 사료 읽기, 협동 학습, 프로젝트 수업, 도서관 협력 수업 연구에 중점을 두고 연구를 하며, 학생들의 마음 읽기와 소통하기에 가장 큰 가치를 두고 있는 열혈 교사다.
“단군과 기자, 동명 세 왕의 도읍지, 평양”

미정, 계산기정, 1803-11-02 ~

인현서원(仁賢書院)은 평양 외성(外城) 안에 있어 기자의 영정(影幀)을 모시고 있는데, 미목(얼굴 모습)이 또렷하고 머리에는 후관(冔冠)을 쓰고 있다. 관제(冠制)는 근자에 부인들이 늘 쓰는 묵모자(墨帽子)와 같다. 서약봉(徐藥峯)이 일찍이 연(燕)에 들어가, 기자가 홍범(洪範)을 진술하는 그림 한 폭을 얻어 와 갑에다 넣어서 이곳에 수장(收藏)하였다. 집의 계단과 초석이 웅장하고 선성(先聖)의 얼굴과 가르침을 간직하고 있어, 실로 사람으로 하여금 우러르게 한다. 왼쪽에는 ‘어서각(御書閣)’이 1칸 있는데, 이것은 효종(孝宗)이 왕위에 오르지 않았을 때 서원의 자리를 찾은 것으로, 붉은 부전을 붙인 갑(匣) 가운데 ‘봉림대군모년모월일(鳳林大君某年某月日)’ 등의 글자가 씌어져 있었다.충무사(忠武祠)는 을지문덕(乙支文德)과 김양언(金良彦) 두 사람을 받들기 위해 설립한 것이다. 당 태종(唐太宗)이 고구려를 정벌하자 문덕이 손을 떨치고 홀로 나서서 일변 싸우고 일변 전진하여 수(隋)나라 백만의 무리가 손을 떼고 북쪽으로 달아나게 했다. 동쪽 땅의 생령들이 지금까지 안도하고 지내는 것은 다 문덕의 공이다. 양언 역시 갑자년 이괄(李适)의 난에 본 읍의 사람으로 분전한 공이 있어 지금까지도 향불이 끊이지 않는다.

“옛 성인 기자의 도읍, 평양 - 기자궁 옛 터에 여전히 궁궐이 우뚝하다”

미정, 계산기정, 1803-11-02 ~

1803년 11월 2일, 평양(平壤)은 옛 성인 기자(箕子)의 도읍이다. 그 유풍과 발자취가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 있으니, 그 기이한 구경거리를 샅샅이 찾아보지 않을 수 없다. 마침내 주작(朱雀)ㆍ함구(含毬) 2개의 문을 통해 길을 나섰다. 성은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이 있는데 각각 성 1개에 문이 1개씩 있었다. 외성을 나가는 길로 정전(井田)의 옛터를 방문하였다. 밭길은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였고, 질서 정연한 구역은 그린 것과 같았으며, 사방은 등성이가 없어 툭 트여 있었다. 모퉁이에 돌을 세워 1정(一井)의 한계를 표시하고 있었다. 밭 두덩에는 기자궁(箕子宮)의 옛터가 있었는데 궁전이 우뚝하였다. 동구(洞口)에 ‘인현리(仁賢里)’란 비석이 세워져 있었고, 궁전 문에는 ‘팔교문(八敎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동구를 경유해서 문으로 들어가면 제단이 설치되어 있고 거기에 돌을 쌓아 한 면에 ‘구주단(九疇壇)’이라 새겼다. 또 비석이 세워져 있었는데, ‘기자궁구기(箕子宮舊基)’라는 5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 비석에는 음각(陰刻, 조각에서, 평평한 면에 글자나 그림 따위를 안으로 들어가게 새기는 일, 또는 그런 조각)으로 기록한 글이 있었는데, 옛 관찰사 이정제(李廷濟)가 지은 것이다. 여기서부터 또 앞으로 얼마쯤 가면 기자의 우물이 있고 우물 옆에는 돌을 세워 ‘기자정(箕子井)’이라고 새겨 놓았다. 우물의 깊이는 대략 10길(길 : 길이의 단위. 한 길은 사람의 키 정도의 길이다) 가량이나 되는데, 우물 난간에서 굽어보면 다만 푸른 물빛만이 보일 뿐이다. 구삼문(九三門)을 경유해서 내전(內殿)으로 들어가니 그 당급(堂級)의 제도는 서울의 학교와 같아 북쪽은 삼익재(三益齋), 남쪽은 양정재(養正齋), 좌우의 재방(齋房)은 의인재(依仁齋)ㆍ지도실(志道室)이었다. 재실에는 경의생(經義生)이 있어 1개의 큰 족자를 받들고 나와 펼쳐 보여 주었는데, 이것이 바로 정전구혁도(井田溝洫圖)였다.

“대동강에서 평안감사의 환대를 받다”

『평양감사향연도』 중
「월야선유도(月夜船遊圖)」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정태화, 임인음빙록, 1622-08-04 ~

1662년 8월 4일, 정태화(鄭太和)는 청나라로 가는 사행길에 있었다. 서울을 떠나 온지 보름 남짓한 기간 동안 일행은 이미 평안도에 이르러있었다. 오늘은 중화 고을에 도착하였는데, 평안감사 임의백과 평안도도사 이관징 및 평양부의 여러 양반들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이들과 함께 대동강에 이르니, 평안감사가 마련해 놓은 배가 한 척 있었다.
배에는 기생들을 가득 채워 놓았는데, 기생들은 정태화 일행이 도착하자 곧바로 과일 쟁반을 올리고서 탁자를 열 준비를 하였다. 그리곤 막 풍악을 울리려 하였다. 정태화는 이런 광경이 썩 내키지 않았고, 더구나 자신은 그럴 처지가 아니었다.
“풍악을 울리는 것이 때에 맞지도 않을뿐더러, 본인의 형편이 기복(朞服)을 입고 있는 사람이니 잔치는 어려울 듯합니다.”
이 말을 들은 평안감사가 곧바로 풍악을 중지시키고는 판관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판관이 날마다 음악을 익힌 뜻이 헛되게 되었네 그려.”
그러자 평양 판관의 얼굴이 붉어지며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배에서 내려 정태화 일행이 묵을 별당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옛 정자가 있던 터였는데, 감사가 거기에 새로 별당을 지은 것이었다. 별당으로 숙소를 정해 주고는 대접을 매우 후하게 하였다. 비단 정태화에게 극진할 뿐 아니라, 사신단이 요구하는 것이 있으면 듣자마자 바로 시행하였으니 사행에 참여한 역관들도 이런 일은 과거에 없는 일이라고 입을 모아 말하였다. 영의정이란 자리의 권세란 것이 저절로 느껴지는 환대였다. 정태화는 불편한 마음을 숨기고는 내일 일정을 위하여 잠자리에 들었다. 밤새 보슬비가 내렸다.

“평양성에 승전보가 울려퍼지다! 비밀리에 묻은 선왕의 신주를 찾아라”

『평안도변성지도』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정탁, 피난행록,
1593-01-07 ~ 1593-01-10

1593년 1월 7일, 왕세자 광해는 아픈 몸을 이끌며 정사(政事)를 돌보았다. 내의원 의관들은 매일이다시피 왕세자와 세자빈의 몸 상태를 돌보아야 했다. 그러던 중 1월 8일, 조·명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했다는 소식이 분조(分朝)에 들렸다. 다음 날인 1월 9일에는 조·명연합군의 단순한 승리가 아니라 매우 큰 승전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리고 평양성과 평양성 부근에 토굴을 쌓거나 뚫어 은거한 적들까지도 평양을 탈출하여 도망갔다는 기별이 들렸다. 정말이지 조선은 이 전쟁에서 크나큰 전기를 맞이한 것이다.
왕세자가 이끈 분조에서도 소식을 듣고 기쁘기가 한량이 없었다. 하지만 곧장 해야 할 일이 생겼다. 이전 왜적들의 공격으로 평양성을 떠날 때 종묘 각 실(室)에 있는 선왕들의 신주와 영정들을 너무나도 급하여 비밀리에 평양에 묻게 한 것이다. 이를 묻은 사람은 송언신(宋言愼)이었다. 따라서 송언신만 신주와 영정을 묻은 위치를 알고 있었다. 빨리 송언신을 데려와 선왕의 신주와 영정들을 발굴해야만 하였다. 분조에서는 대조(大朝)에 이를 고하여 빨리 일을 해결해야 함을 고하였다.
그리고 이 때, 평양 주위의 왜적들은 축출되었지만 여전히 함경도 쪽으로 진출한 적들은 남아 있었다. 명나라 장수가 군사의 일부분을 차출하여 함경도의 적들을 공격하겠다고 하였다. 또한 체찰사(體察使) 유성룡(柳成龍) 역시 왕세자에게 왕세자를 호위하던 정예병 300명을 뽑아 중요한 길목을 차단하자는 장계를 올려 왕세자의 허락을 받았다.

“꿈속의 그곳, 흠모하던 도산서원을 찾아 평양에서 내려온 유생들”

김령, 계암일록, 1625-04-20 ~

안개가 짙게 끼었다가 갰다. 평양(平壤) 유생 아무개가 그의 동료 두 사람을 데리고 도산서원(陶山書院)을 흠모하여 걸어서 서원까지 왔으니, 정성이 독실할 만하다.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와 《주자어록(朱子語錄)》을 구해보려 했으니, 또한 먼 지방의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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