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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말

평양, 언젠가 혹은 조만간

천준아


우리가 흔히 수를 셈할 때 쓰는 ‘계산기’가 북에서는 ‘컴퓨터’를 뜻한다고 합니다. 많은 이들과 교류하는 인맥 넓은 이를 칭하는 ‘마당발’도 북에서는 그저 발이 큰 사람을 가리키는 표현이라고 하죠. 그럼 ‘말밥’은 어떻게 다를까요? 엄청나게 많은 밥, 혹은 말의 사료를 우리는 ‘말밥’이라 부르지만, 북에서는 사람들 사이에 오가는 구설수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누구누구가 남들의 말밥으로 오르내린다’ 할 때 쓰는 표현이라는 겁니다. 우리 식으로 하면 술자리 안줏감과 비슷할까요? ‘말밥’ 그럴싸하죠? 내친김에 하나 더 알아볼까요? ‘별로’라는 단어를 우리는 부정적인 말과 함께 씁니다. ‘별로 달갑지 않다’ 이런 식으로요. 그런데 북에서는 특별히 좋다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연습을 열심히 했더니 실력이 별로 좋다’ 이렇게 말이죠.

지난 4월 27일, 남북정상회담 생중계를 지켜본 많은 이들이 깜짝 놀랐던 장면 중의 하나가 군사분계선 장면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김정은 위원장이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는 것은 우리도 예상했던 그림이었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쪽 땅을 밟는 장면은 미처 상상 못 한 것이었죠. 비로소 남과 북이 하나의 땅 위에 있구나, 이토록 가까웠구나를 실감했다고나 할까요? 한민족이었으나 지금은 동일한 단어를 두고도 전혀 다른 의미로 쓸 만큼 거리가 멉니다.

사실, 바다를 사이에 둔 일본을 떠올리면 ‘가깝고 먼 나라’라는 수식이 자연스레 연상됩니다. 그런데 북한에 대해서는 이런 관용적 표현조차 쓰지 않습니다. 북한은 우리에게 너무나 가깝지만 맘먹는다고 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래서 북한에 대해서는 일본보다 더 아는 것이 없기도 하고, 오히려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더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비정상회담’이라는 TV 프로그램에 노르웨이 대표로 출연했던 ‘니콜라이 욘센’은 지난해 여름, 북한을 여행하고 그 후기를 자신의 SNS에 올렸는데요. 평양 옥류관의 평양냉면은 기본이고, 함흥 막국수까지 그야말로 진짜 평양냉면, 진짜 함흥 막국수더군요. 평양 중앙동물원, 주체사상탑 위에서 평양 시가지를 내려다본 광경, 심지어 오락실로 보이는 게임센터도 있습니다. 사진으로 본 평양은 상상 그 이상입니다. 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갈 수 있는 그곳을 우리는 여전히 갈 수 없기 때문이죠.

담談의 54호 주제는 ‘평양, 그곳’입니다. 남북정상회담 이후에 조금이나마 북한과의 심리적 거리가 줄었다는 느낌입니다. 포항에서 기차를 타고 유라시아 대륙으로 떠나는 여행을 꿈꾸는 이들도 많습니다. 모두 북한과의 자유로운 왕래가 머지않았다고 희망적인 내일을 고대하고 있죠. 해서, 조선 시대 평양으로 떠나는 기획을 해보았습니다. 연일 40도에 육박하는 가마솥더위에, 잠시나마 평양으로 피서를 떠나는 기분 좋은 상상을 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먼저, 조선 시대 평양으로 시간 여행을 떠나봅니다.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이은주 교수님은 당일치기로 평양에서 놓쳐선 안 될 여행코스를 소개합니다. 대동문을 지나 연광정을 둘러보고, 부벽루와 북성 일대를 거닐다가, 대동강 뱃놀이를 즐긴 이후, 해가 뉘엿뉘엿 지면 애련당으로 향하는 코스입니다. 읽다 보면 실제로 그곳을 여행하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언젠가 평양에 가게 된다면 조선 시대 이곳의 정취가 지금은 얼마나 달라졌는지 확인하고 싶어졌습니다.

그리고, 서울사대부고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주인우 선생님은 여전히 우리에게 낯선 평양을 키워드로 설명합니다. 평양냉면의 유래부터, 왜 전국팔도에서 평양기생을 제일로 알아줬는지, 또 ‘평안감사도 제 싫으면 그만’ 이라는 속담에서 알 수 있듯, ‘누구나 탐내는 솔깃한 자리’를 왜 평안감사에 비유했는지도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해 재미있게 풀어냈습니다.

이밖에, 드라마와 시나리오를 집필하는 홍윤정 작가님은 영화 ‘국경의 남쪽’, ‘조선마술사’, ‘평양성’에서 그려진 평양의 모습을 흥미롭게 분석했습니다. 또, ‘이달의 일기’에서는 권벌의 [조천록]에서 발견한 대동강 부벽루 잔치에 관한 일기를 들여다봅니다.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에서는 조선 시대 화가 김홍도가 그린 [평양감사향연도]에 대해 알아보고요. ‘스토리이슈’에서는 콘텐츠에 관심이 많은 20대 청년들을 위한, 제4회 스토리테마파크 창작 콘텐츠 공모전 1차 교육캠프의 현장을 생생하게 전달합니다.

끝으로, 북한식 단어들을 곁들여 인사를 전합니다. 간간이 무더기비라도 쏟아지면 좋을 8월, 랭동기에서 시원한 밥감주를 내어 드시거나 그것도 성에 안 차면 찬물미역이라도 하면서 건강한 여름 나시기 바랍니다. (무더기비: 소낙비, 랭동기: 냉장고, 밥감주: 식혜, 찬물미역: 냉수욕)


참고 문헌


  • 평양에 언제 가실래요 (박기석 지음, 글누림)



“단군과 기자, 동명 세 왕의 도읍지, 평양”

미정, 계산기정, 1803-11-02 ~

인현서원(仁賢書院)은 평양 외성(外城) 안에 있어 기자의 영정(影幀)을 모시고 있는데, 미목(얼굴 모습)이 또렷하고 머리에는 후관(冔冠)을 쓰고 있다. 관제(冠制)는 근자에 부인들이 늘 쓰는 묵모자(墨帽子)와 같다. 서약봉(徐藥峯)이 일찍이 연(燕)에 들어가, 기자가 홍범(洪範)을 진술하는 그림 한 폭을 얻어 와 갑에다 넣어서 이곳에 수장(收藏)하였다. 집의 계단과 초석이 웅장하고 선성(先聖)의 얼굴과 가르침을 간직하고 있어, 실로 사람으로 하여금 우러르게 한다. 왼쪽에는 ‘어서각(御書閣)’이 1칸 있는데, 이것은 효종(孝宗)이 왕위에 오르지 않았을 때 서원의 자리를 찾은 것으로, 붉은 부전을 붙인 갑(匣) 가운데 ‘봉림대군모년모월일(鳳林大君某年某月日)’ 등의 글자가 씌어져 있었다.충무사(忠武祠)는 을지문덕(乙支文德)과 김양언(金良彦) 두 사람을 받들기 위해 설립한 것이다. 당 태종(唐太宗)이 고구려를 정벌하자 문덕이 손을 떨치고 홀로 나서서 일변 싸우고 일변 전진하여 수(隋)나라 백만의 무리가 손을 떼고 북쪽으로 달아나게 했다. 동쪽 땅의 생령들이 지금까지 안도하고 지내는 것은 다 문덕의 공이다. 양언 역시 갑자년 이괄(李适)의 난에 본 읍의 사람으로 분전한 공이 있어 지금까지도 향불이 끊이지 않는다.

“옛 성인 기자의 도읍, 평양 - 기자궁 옛 터에 여전히 궁궐이 우뚝하다”

미정, 계산기정, 1803-11-02 ~

1803년 11월 2일, 평양(平壤)은 옛 성인 기자(箕子)의 도읍이다. 그 유풍과 발자취가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 있으니, 그 기이한 구경거리를 샅샅이 찾아보지 않을 수 없다. 마침내 주작(朱雀)ㆍ함구(含毬) 2개의 문을 통해 길을 나섰다. 성은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이 있는데 각각 성 1개에 문이 1개씩 있었다. 외성을 나가는 길로 정전(井田)의 옛터를 방문하였다. 밭길은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였고, 질서 정연한 구역은 그린 것과 같았으며, 사방은 등성이가 없어 툭 트여 있었다. 모퉁이에 돌을 세워 1정(一井)의 한계를 표시하고 있었다. 밭 두덩에는 기자궁(箕子宮)의 옛터가 있었는데 궁전이 우뚝하였다. 동구(洞口)에 ‘인현리(仁賢里)’란 비석이 세워져 있었고, 궁전 문에는 ‘팔교문(八敎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동구를 경유해서 문으로 들어가면 제단이 설치되어 있고 거기에 돌을 쌓아 한 면에 ‘구주단(九疇壇)’이라 새겼다. 또 비석이 세워져 있었는데, ‘기자궁구기(箕子宮舊基)’라는 5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 비석에는 음각(陰刻, 조각에서, 평평한 면에 글자나 그림 따위를 안으로 들어가게 새기는 일, 또는 그런 조각)으로 기록한 글이 있었는데, 옛 관찰사 이정제(李廷濟)가 지은 것이다. 여기서부터 또 앞으로 얼마쯤 가면 기자의 우물이 있고 우물 옆에는 돌을 세워 ‘기자정(箕子井)’이라고 새겨 놓았다. 우물의 깊이는 대략 10길(길 : 길이의 단위. 한 길은 사람의 키 정도의 길이다) 가량이나 되는데, 우물 난간에서 굽어보면 다만 푸른 물빛만이 보일 뿐이다. 구삼문(九三門)을 경유해서 내전(內殿)으로 들어가니 그 당급(堂級)의 제도는 서울의 학교와 같아 북쪽은 삼익재(三益齋), 남쪽은 양정재(養正齋), 좌우의 재방(齋房)은 의인재(依仁齋)ㆍ지도실(志道室)이었다. 재실에는 경의생(經義生)이 있어 1개의 큰 족자를 받들고 나와 펼쳐 보여 주었는데, 이것이 바로 정전구혁도(井田溝洫圖)였다.

“대동강에서 평안감사의 환대를 받다”

『평양감사향연도』 중
「월야선유도(月夜船遊圖)」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정태화, 임인음빙록, 1622-08-04 ~

1662년 8월 4일, 정태화(鄭太和)는 청나라로 가는 사행길에 있었다. 서울을 떠나 온지 보름 남짓한 기간 동안 일행은 이미 평안도에 이르러있었다. 오늘은 중화 고을에 도착하였는데, 평안감사 임의백과 평안도도사 이관징 및 평양부의 여러 양반들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이들과 함께 대동강에 이르니, 평안감사가 마련해 놓은 배가 한 척 있었다.
배에는 기생들을 가득 채워 놓았는데, 기생들은 정태화 일행이 도착하자 곧바로 과일 쟁반을 올리고서 탁자를 열 준비를 하였다. 그리곤 막 풍악을 울리려 하였다. 정태화는 이런 광경이 썩 내키지 않았고, 더구나 자신은 그럴 처지가 아니었다.
“풍악을 울리는 것이 때에 맞지도 않을뿐더러, 본인의 형편이 기복(朞服)을 입고 있는 사람이니 잔치는 어려울 듯합니다.”
이 말을 들은 평안감사가 곧바로 풍악을 중지시키고는 판관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판관이 날마다 음악을 익힌 뜻이 헛되게 되었네 그려.”
그러자 평양 판관의 얼굴이 붉어지며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배에서 내려 정태화 일행이 묵을 별당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옛 정자가 있던 터였는데, 감사가 거기에 새로 별당을 지은 것이었다. 별당으로 숙소를 정해 주고는 대접을 매우 후하게 하였다. 비단 정태화에게 극진할 뿐 아니라, 사신단이 요구하는 것이 있으면 듣자마자 바로 시행하였으니 사행에 참여한 역관들도 이런 일은 과거에 없는 일이라고 입을 모아 말하였다. 영의정이란 자리의 권세란 것이 저절로 느껴지는 환대였다. 정태화는 불편한 마음을 숨기고는 내일 일정을 위하여 잠자리에 들었다. 밤새 보슬비가 내렸다.

“평양성에 승전보가 울려퍼지다! 비밀리에 묻은 선왕의 신주를 찾아라”

『평안도변성지도』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정탁, 피난행록,
1593-01-07 ~ 1593-01-10

1593년 1월 7일, 왕세자 광해는 아픈 몸을 이끌며 정사(政事)를 돌보았다. 내의원 의관들은 매일이다시피 왕세자와 세자빈의 몸 상태를 돌보아야 했다. 그러던 중 1월 8일, 조·명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했다는 소식이 분조(分朝)에 들렸다. 다음 날인 1월 9일에는 조·명연합군의 단순한 승리가 아니라 매우 큰 승전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리고 평양성과 평양성 부근에 토굴을 쌓거나 뚫어 은거한 적들까지도 평양을 탈출하여 도망갔다는 기별이 들렸다. 정말이지 조선은 이 전쟁에서 크나큰 전기를 맞이한 것이다.
왕세자가 이끈 분조에서도 소식을 듣고 기쁘기가 한량이 없었다. 하지만 곧장 해야 할 일이 생겼다. 이전 왜적들의 공격으로 평양성을 떠날 때 종묘 각 실(室)에 있는 선왕들의 신주와 영정들을 너무나도 급하여 비밀리에 평양에 묻게 한 것이다. 이를 묻은 사람은 송언신(宋言愼)이었다. 따라서 송언신만 신주와 영정을 묻은 위치를 알고 있었다. 빨리 송언신을 데려와 선왕의 신주와 영정들을 발굴해야만 하였다. 분조에서는 대조(大朝)에 이를 고하여 빨리 일을 해결해야 함을 고하였다.
그리고 이 때, 평양 주위의 왜적들은 축출되었지만 여전히 함경도 쪽으로 진출한 적들은 남아 있었다. 명나라 장수가 군사의 일부분을 차출하여 함경도의 적들을 공격하겠다고 하였다. 또한 체찰사(體察使) 유성룡(柳成龍) 역시 왕세자에게 왕세자를 호위하던 정예병 300명을 뽑아 중요한 길목을 차단하자는 장계를 올려 왕세자의 허락을 받았다.

“꿈속의 그곳, 흠모하던 도산서원을 찾아 평양에서 내려온 유생들”

김령, 계암일록, 1625-04-20 ~

안개가 짙게 끼었다가 갰다. 평양(平壤) 유생 아무개가 그의 동료 두 사람을 데리고 도산서원(陶山書院)을 흠모하여 걸어서 서원까지 왔으니, 정성이 독실할 만하다.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와 《주자어록(朱子語錄)》을 구해보려 했으니, 또한 먼 지방의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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