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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

풍속화로 보는 ‘평양’
평양감사향연도(平壤監司 饗宴圖)

하해빈


이번 호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에서는 조선 시대 화가 김홍도가 그린 평양감사향연도에 대해서 설명해드리려고 합니다. 평양감사향연도는 월야선유도(月夜船遊圖), 부벽루연회도(浮碧樓宴會圖), 연광정연회도(練光亭宴會圖)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평양을 그린 그림들이 많은데요, 문화재청에서 보물로 지정하고자 하는 평양성도 병풍(平壤城圖 屛風)을 함께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평양감사향연도에 대해서 한국국학진흥원 김형수 선생님과의 인터뷰를 통해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Q1. 평양감사향연도는 무엇인가요?


평양감사향연도는 김홍도의 그림으로 평안감사가 벌이는 화려한 향연 장면을 그린 것입니다. [월야선유도], [부벽루연회도[, [연광정연회도]의 세 폭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평안도 관찰사 부임을 환영하기 위하여 대동강 변에 나와 있는 수많은 사람들, 성곽과 건물, 연회에 참여한 인물들의 다양한 모습 등 당시 연회의 장면을 파노라마식으로 구성한 대규모의 그림입니다.

[월야선유도]는 달밤에 대동강 변에서 벌어지는 선상연회의 장면입니다. 강기슭과 성 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손에 횃불을 들고 있습니다. 강 위의 감사가 탄 큰 배를 중심으로 앞에는 관청 소유의 배들이, 그 뒤로는 춤과 노래를 하는 관가의 기생들이 탄 배도 보이는데요. 능라도에 나온 환영 인파가 횃불을 밝히고 서 있으며 평안감사 부임 축하 뱃놀이를 하는 장면이 장대한 파노라마 형식으로 연출되어 있습니다. 멀리 대자연의 풍경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어 당시 대동강 주변의 산세를 파악할 수 있는 그림입니다.


[월야선유도]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월야선유도] 선상 연회부분 확대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부벽루연회도]는 부임한 관찰사를 모시고 부벽루에서 열린 연회의 장면을 그린 것입니다. 부벽루에 평안감사가 앉아있고 악사와 무용수, 기녀, 구경나온 사람들을 다채롭게 묘사하여 떠들썩한 잔치 분위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성 뒤로는 능라도와 대동강 그리고 강기슭 멀리 숲과 마을을 담고 있습니다. 상류에는 크고 작은 배가 떠 있고 능라도에는 소를 몰아 밭을 가는 농경 장면도 보입니다.


[부벽루연회도]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부벽루연회도] 부벽루 연회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부벽루연회도] 배가 떠 있는 장면 확대 부분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연광정연회도]는 평안감사가 중앙의 연광정에 앉아 기녀들의 춤과 노래를 즐기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 밑의 마당에서는 두 선비가 손에 나뭇가지를 들고 놀이를 하는 모습이 보이는데, 시합을 하는 것 같으며 그 주위로 많은 인파가 구경을 하고 있습니다. 대동문 앞 시가지에는 물지게를 메고 있는 사람, 엿을 파는 아이까지 다양한 풍물이 담겨 있다. 연광정은 관서팔경(關西八景)의 하나로 대동강변 덕바위 위에 있어 덕광정이라고도 불렸으며, 두 채를 비켜 붙여 지어 뛰어난 건축미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정자로 꼽히고 있습니다. 오른쪽 누각은 문루에서 손을 내밀어 대동강의 맑은 물을 떠올릴 수 있다는 데서 지어진 대동문, 즉 읍호루(挹灝樓)입니다. 연광정의 좌우에는 이 [평양감사향연도]에서 처음으로 백성들이 사는 민가가 그려져 있습니다.


[연광정연회도]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연광정연회도] 연광정 위 연회(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연광정연회도] 읍호루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Q2. 평양감사향연도에서는 평안감사가 벌이는 화려한 향연 장면을 보여주는데요, 평양은 부유한 도시였나요?


수많은 사람들을 동원해서 잔치를 열 수 있었다는 것은 바로 평양이 경제적으로 번영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평안도와 함경도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중앙으로 가는 세금이 없기 때문에 이를 군비나 자체적으로 쓰게 되었는데요. 특히 중국사신 접대비용을 평안도에서 담당하였습니다. 중국 사신들이 머문 곳은 평안감사가 있는 평양이었으므로 이곳에는 평안도의 물력이 총동원되었습니다. 1750년대 평안도에 상업 발전이 전성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1774년 인구가 경상도 다음으로 많아 인구와 물자가 몰리게 되면서 경제적으로 매우 번성하였는데요, 서울 다음으로 지방에서는 평양이 제일 부유한 동네였습니다. 그리고 조선 시대의 3대 상인 중 평안도 의주에 만상이 있습니다. 이는 평안도 의주에 물류가 많고 사람이 많아 부가 쌓이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조선 후기에 평안도는 번성하였는데요, 그중에서 평양은 부를 가지고 있는 동네였다고 합니다.


Q3. 평양감사행연도 그림 중 [연광정연회도]에서 백성들의 민가가 처음 나오는데, 실제 그 당시 백성들의 삶은 어땠나요?


[연광정연회도] 민가 부분 확대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백성들의 민가를 살펴보면 초가집이 대부분이지만 안에 기와집으로 되어 있는 곳도 있습니다. 초가집과 기와집이 함께 있기 때문에 백성들의 삶이 부유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이나 그림에 나온 사람들이 입은 옷들은 보면 색깔이 다양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평양이 부유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증거인데요, 색깔이 다른 옷들은 비단이나 다양한 색으로 염색을 한 옷이라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하얀색 옷보다는 색깔이 들어간 옷이 더 비싼데요, 그림에는 여러 색의 옷이 있기 때문에 이 또한 평양에 사는 백성들이 부유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Q4. 평양감사행연도말고도 평양의 모습을 보여주는 그림은 많은데요, 그중에서 평양성도 병풍에 대해서 소개해주세요.


[평양성도 병풍] (출처 : 문화재청)


평양성도 병풍은 평양 전경을 하늘에서 내려다본 것처럼 그린 전도식 읍성도(全圖式 邑城圖)입니다. 그림에 평양성과 시가지, 대동강이 집약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평양성도 병풍 1폭과 2폭에는 영명사와 부벽루 등 명승지가 그려졌으며 병풍의 중심인 3폭에서 5폭에는 성벽에 둘러싸인 평양의 도시적인 모습이 담겼습니다. 6폭에서 8폭에는 사당 등 제례 장소, 화면 아래에는 평양성을 에워싸듯 흐르는 대동강과 그 주변의 섬 양각도와 능라도가 묘사됐다. 주요 관청과 명승지 부근에는 한자로 명칭이 표시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1804년 화재로 소실된 대동강 주변에 애련당(평양 대동문 인근 정자) 등이 묘사됐고, 명암이 거의 없는 예스러운 화법으로 제작된 점을 미뤄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이 예고된 상태입니다.


[평양성도 병풍에 그려진 애련당(좌)과 장대(우)] (출처 : 문화재청)



Q5. 조선 시대에 평양은 어떠한 도시였나요?


평양은 고조선 이래로 여러 왕조가 터를 잡은 역사적 고도(古都)이자 조선 시대 서울 다음가는 지방의 거점 도시였습니다. 평양은 서울 다음으로 부유한 도시였으며 평양뿐만 아니라 평안도 전체는 거두어가는 세금이 없어서 백성들의 부담이 줄었습니다. 그리고 상업을 통해 평양과 평안도는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는데요, 평안도 의주의 상인이 조선의 대표적인 3인의 상인 안에 들어가는 것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평양이라는 도시는 부유한 도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리  :  하해빈 (한국국학진흥원 국학정보센터)

도움말  :  김형수 (한국국학진흥원 기록유산센터 수석연구원)

“단군과 기자, 동명 세 왕의 도읍지, 평양”

미정, 계산기정, 1803-11-02 ~

인현서원(仁賢書院)은 평양 외성(外城) 안에 있어 기자의 영정(影幀)을 모시고 있는데, 미목(얼굴 모습)이 또렷하고 머리에는 후관(冔冠)을 쓰고 있다. 관제(冠制)는 근자에 부인들이 늘 쓰는 묵모자(墨帽子)와 같다. 서약봉(徐藥峯)이 일찍이 연(燕)에 들어가, 기자가 홍범(洪範)을 진술하는 그림 한 폭을 얻어 와 갑에다 넣어서 이곳에 수장(收藏)하였다. 집의 계단과 초석이 웅장하고 선성(先聖)의 얼굴과 가르침을 간직하고 있어, 실로 사람으로 하여금 우러르게 한다. 왼쪽에는 ‘어서각(御書閣)’이 1칸 있는데, 이것은 효종(孝宗)이 왕위에 오르지 않았을 때 서원의 자리를 찾은 것으로, 붉은 부전을 붙인 갑(匣) 가운데 ‘봉림대군모년모월일(鳳林大君某年某月日)’ 등의 글자가 씌어져 있었다.충무사(忠武祠)는 을지문덕(乙支文德)과 김양언(金良彦) 두 사람을 받들기 위해 설립한 것이다. 당 태종(唐太宗)이 고구려를 정벌하자 문덕이 손을 떨치고 홀로 나서서 일변 싸우고 일변 전진하여 수(隋)나라 백만의 무리가 손을 떼고 북쪽으로 달아나게 했다. 동쪽 땅의 생령들이 지금까지 안도하고 지내는 것은 다 문덕의 공이다. 양언 역시 갑자년 이괄(李适)의 난에 본 읍의 사람으로 분전한 공이 있어 지금까지도 향불이 끊이지 않는다.

“옛 성인 기자의 도읍, 평양 - 기자궁 옛 터에 여전히 궁궐이 우뚝하다”

미정, 계산기정, 1803-11-02 ~

1803년 11월 2일, 평양(平壤)은 옛 성인 기자(箕子)의 도읍이다. 그 유풍과 발자취가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 있으니, 그 기이한 구경거리를 샅샅이 찾아보지 않을 수 없다. 마침내 주작(朱雀)ㆍ함구(含毬) 2개의 문을 통해 길을 나섰다. 성은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이 있는데 각각 성 1개에 문이 1개씩 있었다. 외성을 나가는 길로 정전(井田)의 옛터를 방문하였다. 밭길은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였고, 질서 정연한 구역은 그린 것과 같았으며, 사방은 등성이가 없어 툭 트여 있었다. 모퉁이에 돌을 세워 1정(一井)의 한계를 표시하고 있었다. 밭 두덩에는 기자궁(箕子宮)의 옛터가 있었는데 궁전이 우뚝하였다. 동구(洞口)에 ‘인현리(仁賢里)’란 비석이 세워져 있었고, 궁전 문에는 ‘팔교문(八敎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동구를 경유해서 문으로 들어가면 제단이 설치되어 있고 거기에 돌을 쌓아 한 면에 ‘구주단(九疇壇)’이라 새겼다. 또 비석이 세워져 있었는데, ‘기자궁구기(箕子宮舊基)’라는 5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 비석에는 음각(陰刻, 조각에서, 평평한 면에 글자나 그림 따위를 안으로 들어가게 새기는 일, 또는 그런 조각)으로 기록한 글이 있었는데, 옛 관찰사 이정제(李廷濟)가 지은 것이다. 여기서부터 또 앞으로 얼마쯤 가면 기자의 우물이 있고 우물 옆에는 돌을 세워 ‘기자정(箕子井)’이라고 새겨 놓았다. 우물의 깊이는 대략 10길(길 : 길이의 단위. 한 길은 사람의 키 정도의 길이다) 가량이나 되는데, 우물 난간에서 굽어보면 다만 푸른 물빛만이 보일 뿐이다. 구삼문(九三門)을 경유해서 내전(內殿)으로 들어가니 그 당급(堂級)의 제도는 서울의 학교와 같아 북쪽은 삼익재(三益齋), 남쪽은 양정재(養正齋), 좌우의 재방(齋房)은 의인재(依仁齋)ㆍ지도실(志道室)이었다. 재실에는 경의생(經義生)이 있어 1개의 큰 족자를 받들고 나와 펼쳐 보여 주었는데, 이것이 바로 정전구혁도(井田溝洫圖)였다.

“대동강에서 평안감사의 환대를 받다”

『평양감사향연도』 중
「월야선유도(月夜船遊圖)」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정태화, 임인음빙록, 1622-08-04 ~

1662년 8월 4일, 정태화(鄭太和)는 청나라로 가는 사행길에 있었다. 서울을 떠나 온지 보름 남짓한 기간 동안 일행은 이미 평안도에 이르러있었다. 오늘은 중화 고을에 도착하였는데, 평안감사 임의백과 평안도도사 이관징 및 평양부의 여러 양반들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이들과 함께 대동강에 이르니, 평안감사가 마련해 놓은 배가 한 척 있었다.
배에는 기생들을 가득 채워 놓았는데, 기생들은 정태화 일행이 도착하자 곧바로 과일 쟁반을 올리고서 탁자를 열 준비를 하였다. 그리곤 막 풍악을 울리려 하였다. 정태화는 이런 광경이 썩 내키지 않았고, 더구나 자신은 그럴 처지가 아니었다.
“풍악을 울리는 것이 때에 맞지도 않을뿐더러, 본인의 형편이 기복(朞服)을 입고 있는 사람이니 잔치는 어려울 듯합니다.”
이 말을 들은 평안감사가 곧바로 풍악을 중지시키고는 판관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판관이 날마다 음악을 익힌 뜻이 헛되게 되었네 그려.”
그러자 평양 판관의 얼굴이 붉어지며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배에서 내려 정태화 일행이 묵을 별당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옛 정자가 있던 터였는데, 감사가 거기에 새로 별당을 지은 것이었다. 별당으로 숙소를 정해 주고는 대접을 매우 후하게 하였다. 비단 정태화에게 극진할 뿐 아니라, 사신단이 요구하는 것이 있으면 듣자마자 바로 시행하였으니 사행에 참여한 역관들도 이런 일은 과거에 없는 일이라고 입을 모아 말하였다. 영의정이란 자리의 권세란 것이 저절로 느껴지는 환대였다. 정태화는 불편한 마음을 숨기고는 내일 일정을 위하여 잠자리에 들었다. 밤새 보슬비가 내렸다.

“평양성에 승전보가 울려퍼지다! 비밀리에 묻은 선왕의 신주를 찾아라”

『평안도변성지도』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정탁, 피난행록,
1593-01-07 ~ 1593-01-10

1593년 1월 7일, 왕세자 광해는 아픈 몸을 이끌며 정사(政事)를 돌보았다. 내의원 의관들은 매일이다시피 왕세자와 세자빈의 몸 상태를 돌보아야 했다. 그러던 중 1월 8일, 조·명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했다는 소식이 분조(分朝)에 들렸다. 다음 날인 1월 9일에는 조·명연합군의 단순한 승리가 아니라 매우 큰 승전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리고 평양성과 평양성 부근에 토굴을 쌓거나 뚫어 은거한 적들까지도 평양을 탈출하여 도망갔다는 기별이 들렸다. 정말이지 조선은 이 전쟁에서 크나큰 전기를 맞이한 것이다.
왕세자가 이끈 분조에서도 소식을 듣고 기쁘기가 한량이 없었다. 하지만 곧장 해야 할 일이 생겼다. 이전 왜적들의 공격으로 평양성을 떠날 때 종묘 각 실(室)에 있는 선왕들의 신주와 영정들을 너무나도 급하여 비밀리에 평양에 묻게 한 것이다. 이를 묻은 사람은 송언신(宋言愼)이었다. 따라서 송언신만 신주와 영정을 묻은 위치를 알고 있었다. 빨리 송언신을 데려와 선왕의 신주와 영정들을 발굴해야만 하였다. 분조에서는 대조(大朝)에 이를 고하여 빨리 일을 해결해야 함을 고하였다.
그리고 이 때, 평양 주위의 왜적들은 축출되었지만 여전히 함경도 쪽으로 진출한 적들은 남아 있었다. 명나라 장수가 군사의 일부분을 차출하여 함경도의 적들을 공격하겠다고 하였다. 또한 체찰사(體察使) 유성룡(柳成龍) 역시 왕세자에게 왕세자를 호위하던 정예병 300명을 뽑아 중요한 길목을 차단하자는 장계를 올려 왕세자의 허락을 받았다.

“꿈속의 그곳, 흠모하던 도산서원을 찾아 평양에서 내려온 유생들”

김령, 계암일록, 1625-04-20 ~

안개가 짙게 끼었다가 갰다. 평양(平壤) 유생 아무개가 그의 동료 두 사람을 데리고 도산서원(陶山書院)을 흠모하여 걸어서 서원까지 왔으니, 정성이 독실할 만하다.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와 《주자어록(朱子語錄)》을 구해보려 했으니, 또한 먼 지방의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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