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무적(魚無迹)은 가던 길을 멈추고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서 있는 어느 집 앞을 기웃거렸다. 그 집 쪽에서 쩡쩡, 하는 도끼질 소리가 났다.
대체 무얼 하는 걸까?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보니 도끼질하는 사내를 아내인 듯한 여자가 울며 붙잡고 있었다. 그 옆에는 어린 자녀들이 울고 섰다. 마을 사람들은 구경만 할 뿐 뭐라 간섭도 하지 않는다.
사내는 다시 도끼를 집어 들었다.
“아니 멀쩡한 매화나무를 왜 도끼를 찍지?”
어무적은 사내가 하는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사내는 자기 집 튼실한 매화나무를 도끼로 찍어 쓰러뜨리고 있었던 것이다.
“왜 찍긴, 이 사람 아무것도 모르는군 그래.”
옆에 서 있는 마을 노인이 누군가를 비아냥거리는 듯한 말투로 대꾸해 주었다. 어무적이 영문을 몰라 하자 노인은 다시 투덜거린다.
“아전이란 작자가 말이야, 이제 세금을 걷어들일 게 없으니까 매화나무에 세금을 매겨 버린 거야. 낼 세금이 없으니 방법이 없지 않나, 세금을 안 내려면 매화나무를 베어 내 버릴 수밖에.”
어무적은 맥이 풀려버렸다. 새 현감이 온 지 채 한 달도 안 된 때였다. 처음에 민심을 살핀다고 매일 말을 타고 나가 관내 지역을 두루 살피는 부지런을 떨더니 그게 다 세금을 더 많이 걷기 위한 수작이었던 것이다.
어무적은 서얼 처지라 더 이상 벼슬길에 나설 수 없는 신분이었다. 그러나 말 그대로 백성을 위한 정치가 가능하다고 믿고 싶었다. 새로 사또가 부임해 올 때마다 언제나 설레는 마음으로 맞아들이곤 했다. 하지만 그 기대는 번번이 배반으로 무너졌다. 오는 사또마다 더 많은 세를 거두어 떵떵거리며 호화판으로 지내는 한편으로 도성의 명문 세도가한테 공물을 잘 올려 보내 높은 자리로 이직하는 데만 열을 올렸다. 백성의 고혈을 짜는 방식도 다양했다. 그래도 그냥 두면 꽃이나 피우고 잘 해서 약재로 쓸 매실이나 건질 뿐인 매화나무에까지 세금을 매기는 ‘고혈 짜기’는 정말 처음이었다.
매화는 선비들에게는 완상과 수양의 대상이었지만, 힘없는 백성들에게는 과세의 대상이기도 했다.
허련(1808~1893)의 ‘홍백매도 10곡병’으로 1888년도 작품. 호암미술관 소장
어무적은 분노와 한탄이 어우러지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한때 율려습독관이라는 말단 관직으로 임금(연산군)에게 백성이 겪는 어려움을 낱낱이 상소로 고해 올렸다가 관아에 끌려가 혼쭐이 난 적이 있었다. 그 뒤로는 글 쓰는 일이 두려워 애써 참아 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시 솟구치는 붓 욕심을 막지 못했다.
매화나무를 도끼로 찍어 잘라내는 노래, 이름하여 <작매부(斫梅賦)>는 이렇게 탄생된다.
세상에 향기가 나는 관리는 없다.
뱀이나 호랑이 같은 잔인한 법만 휘두른다.
참혹함은 이미 숨어 사는 꿩에 이르고
정치는 뿔 없는 양들에게 더욱 참혹하다.
백성이 한 사발 밥에 배부르면
관리는 군침을 흘리며 분노한다.
백성이 한 번 솜옷으로 따뜻하면
아전은 팔을 걷어붙이고 살을 벗긴다.
내 향기는 들판에 굶어죽은 영혼을 덮고
꽃잎은 떠도는 백성의 백골에 뿌려진다.
지금 눈앞이 이러한데 초췌함을 읊은들 무엇하리!
어찌 하나,
농부들이 도끼날에 치욕을 당하고 있구나!
바람도 매섭고 달빛도 괴로우니
누가 단장의 영혼을 불러주나.
황금 같은 열매는 아전의 창고에 흘러넘친다.
낱알의 수를 늘려 곱절로 징수하니
반항하면 바로 채찍으로 얻어맞는다.
아내는 원망하여 낮에 울부짖고
아이들은 울며 밤을 지새운다.
이것이 모두 매실 때문이라니,
매실이 아주 좋은 물건이 되었구나.
남산에 가죽나무 북산에 상수리나무
관원도 아전도 돌아보지 않는구나.
매화는 도리어 없는 것만도 못하니
어찌 잘라버리지 않을 것이냐.
어무적은 김해 관비의 아들이다. 할아버지는 어변문, 아버지는 사직 직책을 지낸 어효량으로 알려져 있다. 어릴 때부터 어문에 소질이 있는 데다 아버지의 덕을 보아 관노 신세를 면하고 살면서 미관 말직인 율려습독관이라는 벼슬을 얻었다. 하지만 과거에는 나갈 수 없어 높은 관직은 꿈도 꾸지 못했다.
어무적은 관아에 돌아다니는 지필묵을 주워 혼자서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걸 취미로 살았다. 되도록 마음 속 깊은 얘기는 글로도 말로도 드러내지 않으려 했다. 그동안 써온 시편들은 세상에 내놓지 않고 혼자 간직해 두었다. 더 이상 꿈꿀 세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어무적을 결국 매화 찍는 도끼소리가 움직이게 하고 만 것이다. 탐관오리의 가혹한 세금 착취가 한 농부의 ‘작매’를 낳았고, 그리고 어무적의 명시 ‘작매부’를 낳았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어무적의 시 <작매부(斫梅賦)>는 글줄 깨나 읽는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이를 두고 ‘명편의 부로다!’ 하고 감탄하기만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나마 마음의 여유가 있는 선비들이었다. 문제는 ‘이거 참 좋은 글이구나’ 하고 글을 읽다가는 마침내 ‘이건 바로 내 얘기구나’ 하고 깨닫고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사람들이 있다는 데 있었다. 관아의 아전이 그랬고 현감이 그랬으며 그들에게 아부해 이를 취하고 있던 토호들이 그러했다. 그들의 창고는 황금의 매실로 가득차 있었던 것이다.
“작매부라는 글을 쓴 놈을 당장 잡아 오너라!”
마침내 김해 현감의 입에서 불호령이 떨어지고 말았다.
어무적은 졸지에 죄인 신분이 되었다. 잡혀간다면 현감이나 아전에게 당당히 해줄 말도 많았다. 그런 사람들 정도는 충분히 설복할 만한 언변과 논리가 어무적에게 있었다. 문초를 당할 육체도 어느 정도 당당했다. 그러나 도가 땅에 떨어진 이 세상에 그런 떳떳함이 다 무엇이랴 싶었다. 어무적은 결국 도망가는 길을 택했다.
어무적은 이 고을 저 고을 돌아다닌다. 가진 돈도 다 떨어지니 그냥 굶어죽는 도리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토호들 집에서 며칠씩 식객 노릇을 하면서 글도 써주고 그림도 그려주는 걸로 연명했다. 적당한 수준이면 되었으나 그게 또 그렇게 되어지지 않았다. 원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어무적의 이름은 점점 높아져 갔다. 어무적은 이름도 갈고 변색도 하면서 세상을 주유했다.
더 큰 문제는 바로 그 세상이었다. 가는 곳마다 탐관오리가 그득했다. 가혹한 착취는 어디나 있었다. 매화나무 찍는 도끼 소리도 자주 들렸다. 그 소리는 어무적의 마음 깊은 곳에서도 우러났다. 어무적은 또 다시 붓을 잡았다. 김해에서 쓴 작매부는 어무적이 머무는 고을에 맞게 개작되었고, 글씨 외에 그림까지 자주 곁들여졌다.
<작매부(斫梅賦)>는 이제 단순히 한 서얼 문사의 한 편 작품에 머물지 않았다. 한 장 한 장 고가로 판매되는 문화상품이었다. 어떤 사람은 노래로 만들어 불렀고, 어떤 광대패는 공연물로 제작했다. 마을 사람들이 모이는 곳마다 변형된 ‘작매부’가 넘쳐났다.
쿵, 쿵, 쿵, 쿵
나는 오늘 우리 집
매화나무를 찍어 쓰러뜨리네. 쿵, 쿵, 쿵, 쿵
어릴 때 봄 가뭄에 초가삼간 다 탈 때
간신히 뿌리를 남겨 다시 자란 매화나무. 쿵, 쿵, 쿵, 쿵
숨어 사는 꿩처럼 소리 낮춘 우리 식구
향기 그득 피우던 매화나무를 쓰러뜨리네. 쿵, 쿵, 쿵, 쿵
뿔 없는 양처럼 고개 숙인 우리 식구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던 매화나무를 쓰러뜨리네. 쿵, 쿵, 쿵, 쿵
남산에 가죽나무 북산에 상수리나무
관원도 아전도 돌아보지 않고 쿵, 쿵, 쿵, 쿵
나는 오늘 우리 집
매화나무를 찍어 쓰러뜨리네.
새로운 작매부를 접한 사또나 아전들은 치를 떨었다.
“이 작매부는 웬 놈의 짓이냐! 이놈을 잡아 오렷다!”
고을마다 어무적을 잡으라는 방이 붙었다. 어무적은 갈 곳이 없어졌다. 이곳저곳 헤매던 어무적은 어느날부터 자취를 감추었다. 어무적은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어무적은 그렇게 사라졌다.
그러나 놀랍게도 어무적이 남긴 여러 편의 작품이 오늘날 남아 있다. 중종 때 이미 <속동문선(續東文選)>에 시가 실렸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을 남긴 허균도 <국조시산(國朝詩刪)>에 어무적의 시를 여러 편 실었다. 이때 흉년이 들어 못 살게 된 백성의 탄식을 노래한 어무적의 <유민탄(流民歎)>을 조선 전기의 최대 걸작이라 평하기도 했다. 허균이 엮은 책은 중국에까지 전해져 어무적 역시 중국에서도 인정하는 조선의 시인으로 기록된다.
어무적의 시가 담겨 있는 <속동문선>과 <국조시산>
한편, 뒷날 이 <작매부>는 짝패와 같은 명시 한 편을 만난다. 그것은 바로 다산 정약용의 <애절양(哀絶陽)>이란 시다. 다산이 어느 농촌에서 아이를 낳는 대로 갓난아기한테까지 세금을 매기는 통에 자기 양물을 잘라내 버린 농부를 보고 지은 시가 바로 <애절양>이다. 공교롭게도 조선 전기에는 <작매부>가, 조선 후기에는 <애절양>이 각각 백성을 착취하는 세금 부과에 대한 힘없는 백성의 처절한 항변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문학 작품으로 살아 있다.
가진 것 없는 백성들에게 가혹한 세금을 매겨 못 살게 구는 현실에 대한 한탄을 글로 남긴 일로 일종의 필화사건의 주인공이 된 어무적. 죽은 때와 곳을 알 수 없는 흔적 없는 시인 어무적은 이렇게 살아남았다.
어무적은 조선시대 연산군 때 살았던 시인으로 생몰연대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서얼 신분으로 김해의 관노였으나 면천한 것으로 추측된다. 미관말직인 율려습독관이라는 직함으로 국왕에게 나라가 잘못 되고 있음을 알리는 올린 상소가 조선왕조실록에 남아 있다. 매화나무에조차 세금을 매기자 그 나무를 도끼로 찍어 내버리는 주인의 울분을 우연히 목격하고 쓴 <작매부>로 필화사건의 주인공이 되어 도망다니는 중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작매부> 등 대표작이 허균이 엮은 책 등 몇 곳에 실려 오늘까지 전해진다. 위 글은 이에 상상력을 더한 픽션이다.
자문[尺文] : 조세·부과금·수수료 등을
받고 교부하는 조선시대 영수증서 김령 <계암일록>, 1624-07-22
1624년 7월 22일, 세곡을 독촉하는 관청의 명령이 매우 급박하였다. 세곡선(稅穀船)에 싣고 받은 자문[尺文]을 이달 26일까지 납부하지 않으면 형문할 것이라는 엄포를 놓았다. 어찌된 일인가. 김령은 얼마 후 지인들을 만났는데, 그 가운데 이신승(李愼承)이라는 자가 한탄하며 근심을 털어놓았다.
시기 |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 장소 | 출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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