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의 메르스(중동호흡기중후군) 유행은 현대 의학이 충분히 대처하지 못하는 미숙함과 취약함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최고의 진료를 받을 수 있는 병원이 도리어 신종 전염병 전파의 공간이 될 수 있다. 전염병이 창궐하는 동안 두려움 또한 창궐한다. 사실 어떤 사회도 전염병이라는 미지의 습격을 충분하고도 성숙하게 대처하기란 어려울른지도 모른다.
신종 전염병 창궐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신속히 전파 경로를 차단하고 체계적인 검역 체계를 갖추는 것이다. 그러나 격리와 검역 수단은 한 사회 내로 전염병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데에는 유용하나, 이미 사회 내에서 전염병이 유행하는 상황에서는 취약하다. 메르스 유행에 대한 두려움이 컸던 것은 소위 방역 ‘저지선이 뚫린’ 것, 내 주변의 누군가가 병에 걸렸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컸기 때문이기도 하다.
격리와 검역 수단조차 갖추지 못했던 과거, 조선 시대에는 어떠했을까? 오늘날과 같은 의미의 전염병 대책이 갖춰져 있지 않은 상황에서 전염병에 따른 피해는 훨씬 컸을 것으로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조선 초기보다 조선 후기의 역병 발생이 더 잦았는데, 두 번의 왜란과 호란 등 전쟁의 빈번한 발발은 전염병 발생의 호조건이 되었다.
특히 주로 많이 유행한 전염병으로 오늘날에는 지구상에서 완전히 퇴치된 것으로 선언된 바이러스성 두창(천연두)이 있었다. 그 외 장티푸스나 발진티푸스 등 티푸스 계통의 역병, 성홍열 등이 주기적으로 빈번히 사람들을 괴롭혔다. 전쟁 외에도 사회·경제적 조건 또한 조선 후기의 역병 유행을 부추겼다. 도시의 성장과 인구의 증가, 교역의 증가 등이 전염병 유행을 더욱 촉진시켰던 것이다.
전통 사회에서는 전염병 유행에 대응할 만한 격리와 검역 등 체계적 수단이 없는 가운데 개인적 차원의 금기가 컸다. 금기는 대부분 두려움에서 비롯되었고, ‘나쁜 기운’을 하루빨리 몰아내기 위해서 또는 몸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제사, 범염(犯染, 초상집에 가는 일), 연회, 방사(房事), 외인 출입 등을 금했다. 전염병을 피하기 위한 초보적 수단으로 피접(避接)도 행해졌다. 즉, 전염병 환자가 발생한 마을의 주민들이 일시적으로 다른 집을 구해 한동안 지내면서 전염병을 피하는 것이다.
부유한 양반가는 물론 일반인들도 피난을 감행했다. 하지만 일반인들의 경우 그동안의 생계 터전을 당분간이라도 떠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전염병이 유행하면 농사를 지을 수 없어 기근이 발생하고 유민들이 떠돌면서 더욱 더 혼란이 심해졌다.
당장 사는 곳을 떠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함부로 환자를 만나거나 사람을 접촉하는 것은 꺼려지는 일이었다. 김택룡의 <조성당일기>에서는 전염병을 피하여 김택룡 일가에 온 구찬숙 일가에게 문안 인사마저 꺼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환자를 치료하는 노력조차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김택룡의 <조성당일기>에는 또 일가의 며느리가 임신한 상태에서 전염병에 걸리자 김택룡이 청심원(淸心元)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는 모습이 나온다. 여기서 전염병 치료에 온역(瘟疫, 급성 열성 전염병)의 특효약인 청심원도 곧잘 쓰였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전염병이 유행할 때 약이나 의원을 구하는 것 또한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문건의 <양아록>에서는 생후 9개월 된 손자가 이질에 걸렸지만 찾아갈 의원도 없고 본인도 쓸 수 있는 약이 없다고 한탄하고 있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전염병 발생은 사회의 위기이며 국가의 위기이기도 하다. 전통 사회에서도 전염병이 발생하면 1차적으로 환자와 낭인들을 구휼하는 노력이 수행되었다. 조선시대에는 활인서나 혜민서 등 국가 기관이 그 역할을 담당하였다. 역병 유행에 대응하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의서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간이벽온방>(1524), <신찬벽온방>(1613) 등의 의서가 전염병에 대응하여 편찬되었고 역병 유행지에 보급되었다. 이 중 <신찬벽온방>을 제외하고는 한글 번역이 함께 곁들여져 일반인들도 읽을 수 있도록 하였다.
조선시대 국가의 전염병 대응 제1 임무는 살아 있는 (환)자에 대한 치료와 죽은 자의 매장이었다. 귀천에 상관없는 치료와 구휼, 매장의 원칙은 법제적으로 보장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생존율을 높이고 전염병을 차단하는 데에 어느 정도 효과를 발휘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군사훈련과 같이 여러 사람이 모일 수밖에 없는 행사들을 취소하는 기민함도 있었다.
전염병이 유행할 때 각지의 사람들이 대이동하고 접촉할 수 있음을 우려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더욱 독특했던 것은 유교 통치를 근본 이념으로 삼았음에도 불구하고 전염병 창궐 시 여제(厲祭), 즉 여귀(厲鬼, 전염병을 불러일으키는 귀신)에 대한 제사를 지내도록 한 것이었다. 여제는 1400년부터 1902년까지 늘 치러졌다. 실제로 여제가 효과가 있었을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임금이나 고을 원님 등 공동체의 장이 앞장서서 전염병이 물러날 것을 기도함으로써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는 효과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메르스 유행은 전염병에 대한 사회적 공포와 두려움이 현대 의학이 고도로 발달한 오늘날에도 비슷함을 보여주었다. 주변에 있는 누군가가 그 병에 걸렸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리고 치료가 쉽지 않다는 두려움이 합쳐져 전염병 창궐에 대한 사회적 두려움이 형성된다. 현대 의학은 효과적인 구제 수단을 개발하고 정확한 정보를 투명하게 유통함으로써 이러한 두려움을 상쇄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아무리 합리적이고 정확한 정보가 생산된다고 하더라도 불안과 두려움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다. 정확한 정보가 유통되고 있다는 믿음을 갖기 어려운 한, 완전히 치료되어 사회로 복귀할 수 있다는 믿음이 없는 한, 전염병 유행에 대한 두려움은 여전히 반복된다. 그러므로 전염병의 최전선에서 싸우는 것은 의학일지라도 전염병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은 사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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