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묏자리 소송, 삶과 죽음 사이에서

김성갑


어떤 산소 싸움의 기록


시린 대청마루 바닥을 짚고 있던 왼손은 저렸고, 오래도록 간 먹물은 진하였다. 조선 후기 어느 계미년(癸未年) 정월(正月), 흐린 겨울날 아침 하늘이 벼루에 담긴 먹물에 반사되어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송씨 집안에서 어렵사리 구한 상서(上書, 청원서) 쓸 종이는 당최 볼품이 없어 보였다. 그래도 글씨는 정갈한 듯 날렵하게 상서 한 장 다 써낸 것이다.


산송관련 암행어사 상서(上書) - 토지주택박물관 소장본


조선 후기 경상도 언양에 살고 있던 송 아무개 집에서는 난리가 났다. 조상대대로 장사를 지내면서 조상을 묻어오던 선산(先山)에 얼마 전 울산부 소속의 하찮은 아전 하나가 어이없게도 자신의 조상을 매장한 것이었다. 대대로 내려오는 선산의 영험한 기운이 꺾이고 다른 집안으로 흘러 자신들 집안에 큰 변괴나 생기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온 집안이 들썩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불길한 상황이 지속되게 된다면, 죽어서도 조상님을 뵐 면목이 없어 집안 분위기는 침울하기 짝이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언양 현감을 찾아가 하소연을 하고 온갖 악다구니도 써봤지만, 그는 그동안 이일 저일, 차일피일 미뤄가며 똑 부러지는 속 시원한 판결문 하나 못 내려주고 있던 터였다. 물론 울산부 아전 조상의 시신을 이장(移葬)해가라는 처분은 받아 내었지만, 그 처분조차 이 어디 종이에 쓰인 글일 뿐, 상대방인 울산부 관리는 그 글귀뿐인 처분에 콧방귀도 안 뀌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마이동풍(馬耳東風)이었다. 그에 대해 송씨 집안에서 짐작건대 일반 백성들도 아니고 바로 이웃 고을인 울산부에 소속된 한 관리가 저지른 일이라 내심 덮어주고 싶은 마음 구석도 있지 않나 싶은 것이었다. 분하고 분했다.

그런데 근자에 들리는 풍문에 귀하디귀한 암행어사께서 언양에 곧 당도한다고 했겠다. 이 어찌 가뭄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단비 같은 소식이 아니랴. 암행어사님이라니!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타는 마음에 생수라도 부은 듯이 집안의 분위기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언양 북면(北面) 천소리(泉所里)에 있는 큰집에서는 암행 어사또에게 올릴 청원서를 작성할 굵고 튼튼한 백지를 장터 지전(紙廛)에서 샀다. 집안 어른들은 집안의 장년층 중 글씨깨나 쓰는 몇몇을 골라 불러들여 대청마루에 앉히고 밥도 든든히 먹이며 긴긴 이야기 끝에 이윽고 절절한 청원서를 써 내려가게 하였다. 글씨는 꽤나 잘 써갔지만, 절박한 맘에 청원서 종이가 참 볼품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궁여지책인 것을…. 암행어사에게 올리기 위해 그들이 썼던 청원내용을 아래와 같다.

“어사님, 엎드려 바라옵기는 저희들이 여러 대 동안 성심을 다해 돌봐오던 정말로 소중한 선산에 어느 날엔가 울산부 소속 하급관리 하나가 자신의 할아버지를 몰래 이장시켰습니다. 몇 번이고 이 억울하고 황당한 사건에 대하여 시신을 파내어가라고 관청에 나가 탄원서를 올리고 호소하여, 시신을 이장하라는 처분을 받아 내었지만, 그 하급관리는 자신 상관의 권세를 이용하여 떡하니 버티고 미동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놈이 법을 어기고 권세에 빌붙는 버르장머리를 고쳐주시고 옥에 가두고 엄히 처벌하여 주시기를 어사또님께 엎드려 울며 청원 드리오니, 부디 명철하신 판단을 내리시어 그놈이 자신의 조부 시신을 파내어 이장해 가도록 명령 내려주십시오. 그리하시면 우리 후손들의 뼈를 깎아내는 슬픔이 씻길 것이옵니다. 부디 저희의 청원을 들어주십시오.”

이러한 사연에 대해, 암행어사는 아래와 같은 처분을 내렸다.

“관리의 위세에 기대어 양반을 업신여기며 해하는 이런 일에 놀라울 따름이다. 즉시 그놈을 잡아들이고, 시신은 다시 파내어 가게 할 것이다. 선산을 관할하는 기관장은 이에 따르라.”

암행어사는 자신의 마패(馬牌)를 꺼내어 붉은 인주에 찍더니 마패 도장을 탄원서에 쾅쾅쾅, 세 번 찍어 증명을 해 주었다.

과연 송씨 집안은 그들이 주장했듯 그 못된 관리로부터 자신들의 선영(先塋)의 온전성을 회복하였을까? 그리고 정말 송씨 집안의 주장은 사실이었을까? 그 울산부 소속 관리는 정말 고의로 그런 못된 관리였을까? 여러 의문이 남는 고문서 한 장이다.


조선 나라, 산송 나라


조선 시대에 산소 등 분묘와 관련된 소송을 산송(山訟)이라고 불렀으며, 이러한 소송은 현존하는 분쟁 관련 고문서 내용 중에 거의 80% 이상 가장 많은 빈도를 보이는 부분이다. 조상의 산소를 좀 더 좋은 명당에 모시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는 인지상정(人之常情)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생기는 분쟁인 산송이라는 다툼은 특정 집안 간에 길게는 백 년, 이백 년이 넘도록 지루하게 계속되기도 하였고, 관아와 지역사족 간의 힘겨루기 장면도 제법 펼쳐져 이를 ‘향쟁(鄕爭)’이라고 부르기까지 하였다.

당시 사람들에게 산소(山所)라는 곳은, 그 집안 조상의 시신을 모신 유형적인 공간이면서 동시에 같은 집안 사람들의 혈연적인 맥락을 이어주는 정신적인 영역으로서 자리매김하였다. 산소는 사대부 집안 사람들을 불문하고 ‘쉬라인(Shrine)’ 곧 사당(祠堂)이요, 성역(聖域)이었던 것이다.

삼국시대와 고려 시대에 한반도를 지배하고 있었던 불교의 장례풍습이었던 화장(火葬)이 유교를 기치로 했던 조선 시대에 들어오면서 매장(埋葬)으로 바뀌어 갔다. 이와 함께 풍수지리설의 영향으로 인해 음택(陰宅)으로 좀 더 좋은 산지와 위치를 정하여 조상을 매장하고자 했다. 한편으로는 부모와 조상의 신체와 혼백을 잘 모시고자 하는 효(孝)의 정신과 함께, 또 한편으로는 자식들과 후손들이 오래도록 평안하고 영화롭기를 바랐던 것이다. 즉 돌아가신 조상을 좋은 산지에 잘 모시는 것이 곧바로 당시 사람들의 효의 척도였다.

본래 전통사회에서는 [맹자(孟子)]에 나오는 “산림천택 여민공지(山林川澤 與民共之)” 즉 ‘산림과 하천 등은 백성들과 공유하여 널리 이용하는 것’이라는 사상이 지배적이었다. 즉 임야는 그 누구의 사유(私有)가 아닌 공유(共有)의 영역이던 것이다. 그러나 “경국대전”의 법률에 의하면, 예법적(禮法的) 차원에서 사대부의 선영지역 일정 범위 안에서는 목축이나 경작 등을 금지하였다. 그러면서도 산소의 영역을 해당 산지의 용호(龍虎)지역 바깥으로까지 광범위하게 소유할 수 없도록 하여 무분별한 임야의 사유화를 막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념은 이념, 법은 법일 뿐, 현실은 급격히 변해갔다. 무주공산(無主空山)의 산지에 분묘를 먼저 쓴 사람들이 그 지역 주변의 임야들을 무분별하게 소유하게 되는 관행이 늘어났고, 국가에서도 이를 법률적 차원을 넘어 사회적 차원에서 용인해주는 상황이 되어갔다. 만약 갑돌이가 먼저 자신의 조상을 명당자리에 매장했더라도, 명당은 명당이니, 을돌이도 그 근처에 제 조상을 묻고 싶은 것이요, 명당의 기운을 빼앗길까 두려우니 다툼과 싸움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양반과 양반 사이에 분쟁은 물론, 양반과 상민의 사이에서도 서로 양보하는 바가 없었다. 선점된 분묘 근처에 누군가가 몰래 조상 시신을 매장하면 이는 남의 땅을 훔쳐 몰래 매장했으니 ‘투장(偸葬)’이요, 자신의 지위나 권세를 이용하여 타인의 인격을 능멸하며 억지로 묻었으니 ‘늑장(勒葬)’이라고 불렀다. 이 두 단어가 조선 시대 산송관련 고문서에서 가장 많이 등장한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당시 사람들은 왜 그렇게 산송을 일으키고 거기에서 승리하고자 안간힘을 썼던 것일까? 단순히 조상에 대한 효와 집안의 성역을 지킨다는 것이 그들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을까? 이러한 분쟁들의 원인을 단순히 ‘명당’이나 조상에 대한 ‘효’ 사상이 다일까? 물론 답은 ‘아니올시다’이다.

일단 조상을 특정 산지에 매장하고 나면 그 후에는 그 분묘의 주변에 있는 토지, 즉 산지와 그곳에 생장하고 있는 소나무, 참나무 등등의 송추(松楸) 즉 수목에 대한 소유권을 동시에 획득하게 되었는데, 이는 당연지사, 산소를 위시한 주변 지역을 보호, 보장해 조상을 모시는 분묘의 존엄성과 평온성에 대한 침범과 침해를 막고자 했던 목적에서였던 것이다. 이로 인해 분묘 주변의 토지와 그곳의 수목들은 관행적으로 분묘를 선점한 집안의 소유로 되어갔던 것이다. 조선 정부의 행정적, 사법적 방관을 등에 업고 특정 분묘가 있는 임야에 대한 사유화는 점점 더 심화되어 갔다. 산지에 대해서는 화전(火田)화하여 작물생산을 할 수가 있었고, 취사와 난방, 건축 등을 목재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상황에서 산지의 나무는 매우 귀중한 재화였던 것이다. 그래서 산소 주변의 일정 지역은 금양(禁養)지역으로 여겨져, 그곳에서 자라난 소나무 등 목재까지 산소 주인의 후손들이 차지하여 사용, 수익할 수 있었다. 여기에 자라난 수목들은 주인의 허가 없이 타인이 벌목할 수 없는 배타적(排他的)인 소유물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래서 산송의 한 일면으로 수목에 대한 불법적 벌목인 작벌(斫伐)사건도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조상에 대한 효와 체면, 예식의 차원을 넘어 실리적인 차원에서도 산소는 포기할 수 없는 중요한 재산이었고, 그러한 희소가치 때문에 관련 분쟁인 산송은 더욱더 끊임없이 발생하고 심화되어 갔던 것으로 보인다.


산송 분쟁의 해결절차


우선 타인 소유의 산소 지역을 침범하여 매장을 하거나, 그 주변의 수목을 벌목하는 등의 사건이 발생하면, 산소의 소유자는 원고의 입장에서 그에 대한 해결을 위해 관할 관청에 청원서이자 소장인 소지(所志)를 제출하게 된다. 소지를 접수한 관청은 원고의 주장에 의거하여 피고인 상대방을 소환하여 심문을 하여야 하기 때문에 원고가 제출한 소지의 좌측 하단에 관행적으로 ‘피고를 성화(星火)처럼 잡아들여 오라’라는 처분 문구를 기재하여 원고에게 돌려주게 된다. 여기서 ‘성화’는 별똥별, 즉 유성을 말하는데, 별똥별이 하늘에서 떨어지듯이 신속하라는 의미이다. 이는 소송 관청이 적극적으로 사건을 해결해나가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잡아 데려오라.’ 이 문구는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관청에서 공권력을 실행하는 포졸이나 누군가를 보내주겠거니 생각되지만 실제로는 소지를 제출한 원고 측 당사자가 직접 피고를 데리고 와야 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원고가 피고를 찾아가 관청의 지시가 적힌 소장을 제시하며 관청으로 출석할 것을 요구했을 때 과연 피고는 그에 응했을까? ‘네, 얼른 같이 가서 시비곡직을 따져 보시지요!’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도 또는 분명히 피고는 원고를 피해 이미 자기 집에서 자취를 감추었을지 모를 일이다. 그리하여 어디 사는지는 알고 있으나 어디로 갔는지 모를 ‘피고 찾아 삼만 리’가 시작되는 것이다. 다급해진 원고 측은 몇 번이고 피고를 불러들이기 위해 노력할 테지만 연기처럼 자취를 감춘 피고를 원고의 자력으로 찾고 잡아 송정으로 데려오는 일은 녹록지 않았다.

그래서 이런 경우 원고는 몇 차례 피고를 찾아보았으나 출석에 응하거나 협조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재차 소지로 제출해 관청에 보고하며, 공권력의 조력을 구하게 되었다. 그러면 그제야 관청은 피고 소환의 담당자로 ‘면주인(面主人)’이나 ‘두민(頭民)’, ‘유향소(留鄕所)’ 등을 지정해 주었는데, 이들은 피고가 거주하는 면리 단위의 행정과 민정, 풍속을 담당하는 사람이나 단체였다. 그러나 이들의 소환에도 피고가 응하지 않을 경우 관청에서는 최종적으로 범인 체포나 조세 체납자를 소환하는 등의 업무를 보는 ‘차사(差使)’를 발령해주어 피고를 잡아들이게 했다.

산송에서는 원고와 피고, 양 당사자가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경우 해당 산지가 있는 지역을 관할하는 수령에게 요청해 피고를 잡아들여 원고의 관할 지역 송정으로 송치시켜 서로 대질신문을 하도록 해야 했다. 즉 원고가 소지를 자기 거주지 관할 관청에 올렸을 때 그에 대해 기관장은 피고를 소환하라는 내용의 처분을 써주며 소송의 대상물인 산지가 있는 곳의 관할 수령에게 전달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한 뜻으로 ‘산재관(山在官)’이라는 용어를 추가로 써주었다. 그러나 그러한 처분에 따라 해당 관할 수령의 요구에도 피고 측이 나오지 않을 경우 이를 적극 해결하려는 기관장은 사건과 관련한 공문인 관문(關文)을 산재관 측에 발송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여 원고와 피고가 관청에 출두하게 되면 대질신문과 각종 증거문서 제출, 증인 등의 진술을 근거로 하여 심리를 시작하게 된다. 투장 등의 사건의 경우, 원고는 관청에 사건의 현장인 산소 지역에 대한 현장검증을 요청할 수 있었고, 이에 대해 관청에서는 차사를 파견해 원피고의 입회하에 현장 검증 간략한 도면인 산도(山圖) 혹은 도형(圖形)을 그려오게 하였다. 원고 측의 산소로부터 피고가 투장한 곳까지 일정 거리 이내인 경우, 피고는 곧바로 패소할 가능성이 높았다. 다양한 심리를 통하여 관청에서는 최종판결을 내리게 되는데 이때 사용된 판결문을 결송입안(決訟立案)이라고 불렀는데, 대부분의 경우 결송입안이라는 판결문 작성까지 가지 않고, 소지 상에 내려진 처분만으로 사건이 종결되는 경우도 많았다. 물론 소송이 진행되면서 피고 측이 자진하여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때 피고는 ‘다시는 투장 등의 불법행위를 저지르지 않겠다’, 혹은 ‘투장한 시신을 며칠 내로 파내어 가겠다.’ 등의 다짐[侤音]이라는 각서를 작성하여 원고 측에 주었다.


산송 관련 도형(圖形) - 토지주택박물관 소장본


파내어 가라!


1900년 한여름에 전남 고흥군 관아의 대문 옆 벽에 방(榜) 하나가 붙었다.

“(고흥군) 두원면 반산리에 소재한 점암지역 임야는 송씨 집안의 선산(先山)인데, 그 용꼬리(산줄기가 발원하는 지점)에 어느 놈이 몰래 자신의 조상을 매장한 분묘가 발견되었다. 이번 달 15일 내로 해당 분묘를 파내어 가도록 하라. 만약 기한을 넘길 시에는 결단코 관청에서 담당하여 강제로 파내어 버릴 것이니 그리 알라. 경자년 윤8월 2일 고흥군수”


불법 분묘를 이장하라는 공지문인 게방(揭榜) - 토지주택박물관 소장


경자년 윤8월에 작성된 이 게방(揭榜) 역시 송씨 집안에서 자신들의 선영지역에 다른 사람이 몰래 분묘를 쓴 것에 대하여 이를 퇴거시켜달라는 청원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에 대해 고흥군수는 몰래 묘를 쓴 사람이 자진 신고를 하고 시신을 직접 이장할 것을 지시하면서, 불응 시에는 강제로 분묘를 철거하겠다는 방을 내건 사례이다. 보기에 너덜너덜한 고문서이지만, 이러한 내용의 게방은 현존하는 유일 문서로 추정된다.

조선 시대의 산송은 그 발생원인이 집안의 체면과 효의 문제였건, 아니면 재화에 대한 욕망과 실리의 문제였건 간에 당시 정신적 존엄과 물질적 권리에 대한 끈질긴 인간들의 군상을 투영해주는 치열한 싸움이었다. 누군가는 생명을 버리고 목숨을 얻기 위해, 누군가는 목숨을 버리고 생명을 얻기 위해…. 당시 사람들은 산송 관련 고문서 속에서 일제히 이렇게 외치고 있는 것이다. “파내어 가라! 우리는 살아야겠다!”


참고자료


  • 박병호, [한국법제사고], 法文社, 1974
  • 전경목, [조선후기 산송 연구], 전북대 박사학위논문, 1996
  • 전경목, [고문서, 조선의 역사를 말하다], 휴머니스트, 2013



집필자 소개

김성갑
김성갑
토지주택박물관 학예사.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조선시대 계약문서인 ‘명문(明文)’으로 박사논문을 썼고, 「소송과 분쟁으로 보는 조선사회(공저)」와 「19세기 부안김씨 가사전장 환퇴분쟁」(「장서각」12), 「조선후기 적몰 위토 회복과정 연구」(「고문서연구」28) 등을 썼다.
“명당을 지켜라! - 묏자리 쟁탈전으로 인한 산송 사건”

김택룡, 조성당일기,
1616-07-24 ~ 1616-09-20

1616년 7월 24일, 김택룡의 생질 정득(鄭得)이 조상 묘가 있는 산의 산송(山訟) 때문에 영천으로 갔다.
8월 9일, 김택룡은 누님에게 가서 인사했다. 생질 정득이 산송 때문에 영주에 간 뒤로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 10일, 김택룡은 여러 곳에 편지를 쓰면서 생질 정득에게도 편지를 써서 빨리 돌아오라고 통지했다. 이날 경복(景福)이 영주 이산(伊山)에서 말을 끌고 돌아왔는데, 경복의 족아(族兒)인 이름이 충남(忠男)이라는 놈이 김택룡을 찾아와 말하기를, 생질 정득이 산송(山訟)과 그 조상 묘에 참배하고 소제하는 일 때문에 머무르고 있어서 와서 알린다고 하였다. 정득이 김택룡에게 보내는 편지도 전해 주었다. 이틀 뒤 8월 12일, 정충남이 돌아가기에, 김택룡은 그 편에 생질 정득에게 할 말을 전하였다. 그러나 편지는 따로 쓰지 않았다.
8월 23일, 이손(李孫)이 영주에서 돌아와 김택룡에게 인사하러 와서 생질 정득이 보낸 편지를 전해주었다. 편지에는 산송 사건 때문에 들어오기가 쉽지 않다고 하였으며, 애남이를 이산(伊山)에서 만났는데 오늘 김택룡이 있는 곳에 도착할 것이라는 말이 있었다.
9월 7일, 김택룡이 장세훈(張世勳)을 만나 생질 정득의 산송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박씨 집에서 근래 산소를 조성하는 일을 시작하였으므로, 일꾼을 동원하는 패자(牌子)를 마을 이장이 가지고 갔다. 다음 날 8일, 김시성이 김택룡을 찾아 와서 만났는데, 그가 박가(朴家)의 산송사건에 대해 말하였다. 그러면서 전하길 김택룡이 정문(呈文)을 작성하여 생질 정득에게 주었기 때문에, 박가네에서 김택룡을 원망한다고 하였다. 김택룡은 그에 대해 풀어서 이야기해 주고, 또 술을 대접하고 보냈다.
9월 20일, 산송 사건에 대해서는 영주에서 무덤을 파서 묘지석(墓地石)을 얻는 여부에 따라 진위를 증명하여 보고하라는 지시가 있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판결문이 다음과 같이 내려져서 일단 산송 사건은 종결되었다.

“박가와 정가의 묏자리 쟁탈전 - 마침내 타협점을 찾다”

김택룡, 조성당일기, 1616-09-25

1616년 9월 25일, 김택룡의 생질 정득이 영주 이산(伊山)에서 돌아와 소지동(蘇池洞) 할아버지 산소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김택룡에게 말하길, 오늘 박가가 감사의 판결을 따르지 않고 송사가 걸렸던 산에서 묘소를 만들기 시작했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정씨 친족들이 모두 모여 금지시키고 중지시킬 계획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김택룡이 이미 박가가 산송 다툼이 일어난 바로 그 곳에 묘를 쓰지 않고 다른 곳으로 다시 묘자리를 잡았으니, 두 집안 모두 장례를 허용하기 위해 서로 모이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정수 등 여러 공들이 김택룡의 집 앞을 지나면서도 그를 만나러 들어오지 않았다. 김택룡이 정소(呈訴)에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혐의를 피하고자 해서였다. 생질 정득만 김택룡을 찾아 왔다.

“사람을 불러 함께 아들의 묏자리를 돌아보다”

김택룡, 조성당일기,
1617-03-01 ~ 1617-03-03

1617년 3월 1일, 김택룡의 노비 강아지가 산을 보고 묏자리를 잡는 일 때문에 이자정을 초대하러 말을 끌고 회곡(檜谷)으로 갔다. 김택룡은 편지는 쓰지 않고 말로만 강아지에게 해 주면서 이자정에게 전달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저녁에 이자정을 기다렸는데 오지 않았다. 지난 번 이날 쯤 오겠다는 약속이 이미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택룡은 강아지와 말이 바로 들어가 이자정에게 도착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다음 날 3월 2일, 이자정이 김택룡의 집으로 왔다. 와서 말하길, “사람과 말을 보내주지 않으셔서 오늘에서야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김택룡은 이자정과 말을 끌고 간 강아지가 길이 어긋났나보다고 생각했다. 김택룡과 이자정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밤이 되자 사랑채에서 잤다. 김택룡의 셋째 아들 김각도 함께 잤다.
3월 3일, 아침 식사 후에 김택룡은 이자정과 김숙·김각 두 아들, 권전룡과 함께 가동(檟洞)으로 갔다. 그리고 사현(砂峴)을 지나 산의 형세가 융결(融結 : 산의 기운이 뭉쳐 모여 있음)함을 보았다.

“묘자리 송사 때문에 길을 나서다가 물에 빠져 죽은 시아버지의 원한, 며느리가 풀어드리다”

미상, 임천서당중건일기,
1806-05-03 ~ 1806-05-04

1806년 5월 3일, 임천서당 회원인 나천(羅川)의 조원열(趙元烈)이 산송을 하러 가던 길에 그만 물에 빠져 죽었다. 애통하고 참담한 이 소식이 임천서당 중건 현장에까지 전달되었다.
그 다음날인 5월 4일에 임천서당 회원 일부가 약속한 대로 중건 현장에 모여 전병과 떡, 그리고 술을 나누며 담소를 나누던 때였다. 갑자기 한 상놈이 두건이 벗겨진 채로 급히 와 절을 하며 하회 서방님을 찾았다. 하회 서방님은 김명운(金明運)을 일컫는 말이었다. 김명운은 참석하지 않았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급한 행색을 보고 궁금하게 여겨 그 까닭을 물어보았다. 이에 그 하인은 사연을 이야기하였다.
“소인은 나천에 사시는 조 생원 댁 종입니다. 소인의 상전께서 어제 산송을 하러 가던 길에 물에 빠져 돌아가셨습니다. 시신을 찾아 수습한 후, 청상으로 계시던 부인께서 원통해하시며 친히 소송 상대편 놈의 최근 무덤과 예전에 투장한 무덤 3기를 파내고 곧바로 관가에 가서 직접 고발하였습니다.”
청상은 곧 김명운의 사촌 여동생이였고, 익사한 조원열의 며느리를 말한다. 이 사연을 듣고 모두들 놀라 슬퍼하였고, 그 며느리의 효성과 정열(貞烈)을 칭찬하였다.

“투장한 무덤을 파서 옮기게 하다”

권상일, 청대일기,
1739-08-05 ~ 1739-08-19

1739년 8월 5일, 권상일이 관직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온 후 신경 써야 할 일은 한둘이 아니었다. 지역 서원의 인사 문제에도 일일이 관여하고 있었으며, 지역 인사의 부고 소식이 전해지면 가문을 찾아가 일일이 뵙는 것도 노령의 권상일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어떠한 문제보다도 자기 집안의 대소사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대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권상일은 아침밥을 먹은 뒤에 바로 소지(所志)를 올렸다. 이어서 권상일 문중의 모든 사람들이 관청에 들어가 아뢰고, 또한 배자(牌旨)를 내어 소송의 상대편이었던 황야(黃埜)라는 자를 잡아오자마자 일제히 나아가 심문하여 보름날 전에 무덤을 파서 옮기겠다는 진술을 받아내었다. 그리고 황야는 곧 관청에 하옥되었다.
일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자 문중 사람들의 분이 조금은 풀리는 듯했다. 이미 여러 해 전에 황야라는 자가 문중의 묘소에 몰래 투장(偸葬)을 한 일이 있었는데, 그는 관청에서 투장한 묘를 당장 이장하라는 명령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이장하지 않고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문중에서 직접 황야를 잡아 확답을 받고 나서야 일이 풀릴 기미가 보인 것이다. 황야가 감옥에서 풀려난 것은 그의 종이 무덤을 파간 다음에 땅을 고르고 원 상태로 되돌린 뒤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황야가 또 다시 버티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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