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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재기와 소문, 그리고 혐오
: 진짜 공포는 무엇인가 전염병에 대처하는 조선의 자세에 비추어

사재기와의 전쟁 : 바이러스의 전성시대


음원 사재기로 떠들썩한지 몇 주 만에 마스크 사재기가 문제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이하 코로나)가 퍼지면서 마스크 품귀현상이 벌어지던 가운데, 지난 5일부터 정부는 사재기를 통한 폭리행위를 단속하기 시작했다. 마스크와 손 소독제를 사재기하는 경우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 원 이하의 벌금형 선고를 받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경고에도 사재기가 끊이지 않는 것이 실태다. 39만 개의 재고를 두고도 품절로 표시하는 온라인 마켓이 있는가 하면, 수십억 원 단위의 마스크 사재기상도 등장했다. “코로나에 걸렸다”며 몰래카메라를 촬영하는 유튜버까지 있다고 하니 공포심을 이용한 사리사욕의 아수라, 지금은 <사재기와의 전쟁 : 바이러스의 전성시대>다.


2020년 2월 11일 JTBC 뉴스룸의 한 장면


여러 독자도 느끼겠지만, 코로나로 인한 공포심은 남의 일이 아니다. 단톡방에서 했던 친구의 말처럼, “기침만 해도 눈칫밥”인 이 시국에 취업 면접은 보러 가야겠지만 이동 경로가 걱정이고, 가산점 부여를 위해서는 불안해도 여러 사람이 모인 시험장에 가야 하는 게 취준생의 현실이다. 다음 달이면 대학생이 될 동생은 오리엔테이션은 커녕 개강 날짜가 미뤄졌다며 걱정이란다. “나다니기가 무섭다”는 어머니께는 평소 즐겨 쓰던 소셜커머스를 추천해드렸다. 돋보기를 낀 눈으로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이따금 신기해하는 분께 한창 설명하다가 흠칫하고 만다. 식구 모두의 눈길을 사로잡은 낯익은 문구 하나, ‘이불 밖은 위험해’.

사실 전염병 자체에 대한 본원적 공포,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여러 현상은 오래전부터 많은 예술작품에서 상상되던 문제였다. 치사율 100%의 호흡기 바이러스를 소재로 삼아 대중의 물건 사재기 모습과 국가의 안일한 대응을 그려낸 영화 <감기>, 인간의 뇌를 조종하는 변종 기생충 감염을 소재로 삼아 인간성을 상실해가는 군중과 그 혼란을 틈타 이익을 추구하려는 기업의 모습을 그린 영화 <연가시>, 정부 지원 복지시설에 격리된 전염병 환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웹툰 <무균리구역 AA아파트> 등이 그러한 사례다. 전염병과 약간의 결을 달리하지만, 한 알에 200원 하던 약이 사재기 되고, 가격이 200만 원으로 폭등해버린 가운데 섬 주민들이 혼란을 겪는 웹툰 <하르모니아>도 있다.


영화 <감기> 2013


영화 <연가시> 2012


웹툰 무균격리구역 AA아파트


웹툰 하르모니아


영화 속 상상이 현실로 되어가는 요즘, 코로나로 인해 발생하는 여러 현상이 무서운 진짜 이유는, 최소한의 방역 체제를 위협하는 것을 넘어 군중심리를 숙주로 삼아 차별과 멸시, 혐오 등의 문제로 빠르게 전파되는 까닭일 것이다. 마치 숙주에 기생하며 영양분을 빼앗던 영화 속 연가시처럼. 수십억 단위로 마스크를 사재기하고, 코로나 확진 뉴스의 댓글에 특정 지역을 비하하며, ‘밥 먹다 감염됐다’ 식의 헛소문으로 식당 주인을 협박하는 것은 공포심을 부추겨 결국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고 죽음에 이르도록 할 뿐이다. 이미 온ㆍ오프라인을 막론하고 사회 곳곳에서는 차별과 멸시, 혐오 등의 문제가 불거져 ‘사회적 백신’이 요구된다는 진단이 내려지고 있다.

옛날에도 그랬다지만 올해처럼 심한 해는 없었네                  縱云誰昔然 未有如今歲
염병도 아니고 마마도 아닌 것이 온 세상 끝까지 덮쳤어라     非瘟亦非疹 彌天網無際
돌림감기라 억지로 이름 붙였지만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렵네 強名曰輪感 難以一言蔽
열흘 만에 천하에 퍼져 풍우 같은 기세로 몰아쳤네                 旬月遍天下 驟如風雨勢
… (중략) …
듣자니 중국에서 시작하여 처음엔 더 많이 죽었다지              傳聞自大國 始初尤多殪
여파가 조선에 미쳐 곳곳마다 맹위를 떨쳤네                         餘波及左海 所向厥鋒銳

『무명자집(無名子集)』 제4책의 시고(詩稿) 중에서


요즘 상황과 묘하게 닮은 듯하지만, 우스개로 지은 한시가 아니다. 조선 후기의 학자 무명자(無名子) 윤기(尹愭, 1741~1826)가 무오년(1798) 겨울에 유행하던 독감이 예사롭지 않았기에 시로 남긴 것이다. 사태를 가볍게 여기기란 무리였다. 중국에 독감이 유행했던 탓에 죽은 이가 유독 많았는데, 청나라 황제 건륭(乾隆)이 사망하는 사건도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 기세는 우리나라로 전해졌는데 열흘 만에 서울까지 번져서 걸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죽은 이가 열에 두셋이나 될 정도로 상황은 심각해져만 갔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독감이 ‘려기(沴氣)’이자 ‘겁운(劫運)’이었기 때문에 시로 지어 남겼다고 한다.
(전문과 상세한 내용은 한국고전번역원 사이트(http://db.itkc.or.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전염병에 대한 공포와 경계심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것으로 보이나, 대처하는 자세는 달랐던 것으로 여겨진다. 검역과 치유의 수단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 전염병에 따른 피해는 훨씬 컸다. 특히 양란(兩亂)을 겪은 조선 후기의 사회는 전염병과 기근(飢饉)의 연속이었다. 그럼에도 조선에는 역병이 도는 고을을 돌보려 애쓴 관리가 있었고, 악조건에서 사람의 도리를 고민한 청년이 있었다. 홀로 남아 환자를 구료(救療)한 여성도 있었다. 그러한 내용을 실록이나 문집 등의 옛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때로는 그들의 정성과 고민이 너무 간절해서 심금을 울린다.


역병(疫病)에 대한 어느 지방관의 간절한 호소


『조선왕조실록』에는 전염병에 관한 내용이 수백여 건 기록되어 있다. 태조가 창건한 양주 회암사에서 역질(疫疾)이 유행하는 바람에 왕사(王師)의 거처가 옮겨졌다는 기록부터 현종 때 경상도에서 굶주리던 5천여 명의 백성 가운데 역병이 잇달아 번져 200여 명이 사망했다는 기록까지 다양한 내용이 실려있다. 영조 때는 몇천여 명의 사망이 10년 안에 2차례나 발생했다. 당시 기록에는 ‘기근(飢饉)이 들고 역병이 돌아…’란 식으로 두 단어가 쌍을 이루는 경우가 많다. 앞서 언급한 역질은 천연두에 해당하는데, 당시 유행했던 전염병으로 콜레라, 천연두, 마마, 홍역, 장티푸스 등이 있었다. 관련 자료의 범위를 개인 문집에 실린 글, 예컨대 제문(祭文)과 일기와 같은 자료까지 포괄해서 찾아보면 당시 유행했던 전염병의 종류와 피해사례를 더 많이 확인할 수가 있다.

우리나라의 제도를 살펴보니 여제(厲祭)는 중사(中祀)에 들어 있어 일 년에 세 차례 제사를 지내게 되는데, 그 지역에 역병이 유행할 경우에는 특별히 나라에서 향과 축문을 내려 제사 하루 전날에 성황당에 고하는 것이 예禮이다.

『연암집(燕巖集)』 제1권 연상각선본(煙湘閣選本) 중에서


나라에 전염병이 돌면 조정에서는 자가自家 격리부터 치료서 배포까지 다양한 구휼책을 내세웠다. 그중 한 대책이 하늘에 잘못을 고하거나 전염병을 퍼뜨리는 귀신을 달래던 여제(厲祭)였다. 지금의 관점으로 본다면 합리적인 대책이 될 수 없으나 상대적으로 의학 발달이 미흡했던 당대에는 우주와 음양의 기운이 바른길을 잃고 정사(政事)의 시행이 타당성을 잃었기 때문에 전염병이 창궐한 것으로 여긴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왕은 책임을 통감하고 전염병을 퍼뜨리는 여귀(厲鬼)나 역신(疫神), 온신(瘟神)에게 제사를 지내게 했던 것이다. 역병을 예방하기 위해 서울과 각 지방에 여단(厲壇)을 쌓고 한 해에 세 차례씩 제사를 지냈다. 전염병이 돌 때 지낸 제사는 비정기적인 별려제(別厲祭)였던 셈이다.

천지는 만물을 살리는 것으로 마음을 삼고, 귀신은 화육(化育)으로 덕을 삼으니, 사랑하는 것을 어찌 미워하며 살리려는 것을 어찌 죽이시겠습니까. 백성을 기르는 지방관이 비록 어리석고 못나 천지에 죄를 지었더라도 불쌍한 이 백성들은 죄도 없고 허물도 없는데, 갑자기 큰 재앙을 만나 날마다 죽어가고 있습니다. 백성을 기르는 지방관이 진실로 이것을 차마 그대로 보고 있을 수 없지만, 상천上天은 지극히 존엄하므로 감히 구구한 사정을 우러러 하소연할 수 없습니다.

『동주집(東洲集)』제4권의 제문(祭文) 중에서


그런데 이 별려제에서 읽힐 제문의 내용이 무척이나 구구절절해서 자꾸만 눈에 밟힌다. 위의 기록은 조선 중기의 학자 동주(東洲) 이민구(李敏求, 1589~1670)가 쓴 여제문(厲祭文)이다. 인물에 관한 정보를 찾기가 쉽지 않으므로 문집 서문의 내용을 바탕으로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그는 여섯 살에 옆 사람이 읽던 수천 자의 글을 틀리지 않게 외우고 일곱 살에 문장을 엮을 정도로 영특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열다섯에 초시를 치른 뒤, 비교적 이른 나이에 장원을 차지하고 관직에 진출했는데 그의 나이가 스물하나 되던 해였다. 젊어서부터 글짓기를 좋아하여 쓴 것이 4천여 편에 이르고, “머리가 하얗게 세도록 계속 이어갔다”고 한다. ‘남을 대신하여 짓다(代人作)’란 주석으로 미루어 보아 제사를 담당하던 관리가 따로 있었고, 평소 글솜씨가 빼어난 그가 제문을 대신 지은 것으로 추측된다.
(전문과 상세한 내용은 한국고전번역원 사이트(http://db.itkc.or.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을마다 퍼진 역병이, “한 해가 다 지나도록 멈추지 않아 걸리지 않은 사람이 없는” 시기였다. 인명(人命)이 “아침저녁으로 자라나는 초목처럼 쉽게 나고 죽는 것이 아님”에도, 아무 손도 쓰지 못한 채 백성들이 죽어가는 광경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심경은 어떠할까. “구렁마다 시신이 가득할” 상황에서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기에 자신의 부덕(不德)을 탓하고 재앙의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로 돌려 본다. “내버려 둔 채 돕지 않는다면 어찌 천지의 마음이며 귀신의 덕(德)”이겠냐며 하늘을 추궁해보기도 한다. 원망하고 달래길 반복하던 끝에 “백성들이 액운(厄運)의 때를 만났기 때문”이냐며 체념하려는 듯 보이지만, 아직 포기하기엔 이르다. 다시 “정성을 다 기울이고 간절한 마음을 펼쳐서 호소”해본다. “아픈 자의 몸에서 병이 사라지고, 신음소리가 노랫소리로 변하며, 어두운 기운이 말끔히 걷혀 온 나라가 평온할” 때까지. 이토록 간절하고 안타까운 애민(愛民)이 또 있을까.


조선의 청년, 도리와 실리의 기로에 서다


정성을 기울이는 마음이야 간절하다지만, 굿하고 제사 지내는 것이 전염병 전파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는 노릇이다. 더 합리적이고 효과적인 대책이 요구되었고 의학적인 고민은 깊어져만 갔다. 그 고민은 의료수준의 향상으로 이어져, 동의보감으로 잘 알려진 허준은 광해군의 두창(痘瘡, 천연두)을 치료해 명의로서 이름을 떨쳤고, 정약용은 홍역과 천연두 퇴치를 위한 『마과회통(麻科會通)』이란 책을 저술했다. 의료수준이 높아졌음에도 국가 차원의 관리 책임은 여전했다. 전염병 발생이 곧 국가 차원의 재난인 까닭이다. 앞서 언급한 여제(厲祭) 외에도 『벽온방(僻瘟方)』 등의 치료서를 언해(諺解)해서 보급하고, 환자를 격리하는 방안도 모색했다. 주로 병막(病幕)을 세워 격리했는데, 도성 안에 전염병이 돌면 환자나 시신을 밖으로 내보내는 방식이었다. 이때 병세의 호전(好轉)은 활인서(活人署)의 의원과 의무(醫巫)가 맡았다.

조정에서는 지방의 상황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했다. 약재를 준비하고 명의를 파견하여 증세에 따라 치료하도록 했다. 실록에 따르면, 단종 때는 석 달마다 악질을 치료해 인명을 많이 구한 의원에게 포상하고, 소홀했을 경우 책임을 물었다. 신속하고 정확하게 전염병을 대처한 것으로 알려진 세종 때는 향소산(香蘇散)ㆍ십신탕(十神湯)ㆍ승마갈근탕(升麻葛根湯) 등의 약을 수령들에게 보내고 굶주린 백성이 없도록 구휼(救恤) 대책을 세웠다. 각 지방을 다스리는 수령들에게 구료(救療)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유민(流民) 관리였기 때문이다. 한 고을에 전염병이 돌면 백성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마을은 폐허가 되어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운봉현과 그 소속 읍에 크게 기근이 들고 역병(疫病)이 돌자 군이 한탄하며 말하기를, “우리 고향에 관직 진출이 막힌 지가 오래되었다. 내가 이번에 성상의 후한 은덕을 입고서 병부(兵符)와 인끈을 차고 일산(日傘)을 덮고 오마(五馬)를 몰아 부임한 것은 우리 고향의 영광이 되겠으나, 이 나라 백성들을 하나라도 살리지 못한다면 우리 고향의 수치가 될 것이다” 하고는 녹봉을 모두 털어서 구제하고, 그래도 부족하자 관할하는 다섯 고을에서 두루 빌려 와서 진휼하면서, 지극한 정성으로 하고자 힘썼다. 그리하여 해마다 풍년이 들었으며 병들어 죽는 백성이 없었다.

『연암집(燕巖集)』 제7권 종북소선(鍾北小選) 중에서


그런데 여기, 역적을 물리친 공로를 인정받아 긴 세월 동안 고향 선배들이 얻지 못했던 출사의 기회를 어렵사리 잡은 청년이 있다. 위의 기록은,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 쓴 운봉현감(雲峯縣監) 최군(崔君)의 묘갈명(墓碣銘)이다. 무덤 앞에 세우는, 머리 부분이 둥그스름한 비석을 묘갈명이라 하는데, 망자의 인적사항을 담고 있기 때문에 생전의 훌륭한 행적 또는 성취를 그 내용으로 삼는다. 묘갈명의 주인은 양천최씨(陽川崔氏)로 말타기가 날렵하고 활쏘기가 정교하여 솜씨를 앞설 만한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영조 4년(1728)에 영남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대장부로 태어났으면 마땅히 나라를 위해 죽어야 한다”며 스스로 관부(官府)의 장사(壯士) 무리에 끼어 역적을 물리쳤다고 한다.

최군은 반란을 진압한 공을 인정받아 분무공신(奮武功臣)에 녹훈(錄勳)된 데에 이어, 19세가 되던 해에 무과를 통과했다. 이후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오른 그는 오위장(五衛將)을 거쳐 운봉현감(雲峯縣監)이 되었다. 조선이 세워진 이래 자신이 태어난 개성(開城)은 상대적으로 소외되던 지역이었고, 고향 선배들의 관직 진출이 막힌 지 오래였다. 그런 상황에서 한 고을을 다스릴 현감 자리에 오르게 된, 그 벅찬 감정이야 말할 수 있으랴. 소회(所懷)와 포부가 남달랐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야 뜻을 펼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으려던 그때, 운봉현에 그만 큰 기근이 닥치고 역병이 돌고 만다.

한탄하던 최군은 고을을 구하기로 결단을 내린다. 오래전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화살을 통에 꽂고 말에 가슴걸이를 갖추며, 활을 멘 채 칼을 쥐고서” 스스로 관부에 뛰어간 그때의 각오로. “부임한 것은 고향의 영광이 되겠으나, 이 나라 백성들을 하나라도 살리지 못한다면 고향의 수치가 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녹봉을 모두 털어서 환자를 구제하고, 그래도 부족하면 관할하던 다섯 고을에서 두루 빌려 진휼(賑恤)했다. 정성을 지극하게 쏟으니 해마다 풍년이 들었으며 병들어 죽는 백성이 없었다고 한다. 따라서 박지원은 최군의 묘갈명에 다음과 같이 썼다. “고향은 슬프고 자신은 크게 떨치지 못했어도 그만큼 후손은 창성하리”라고. 최군 역시 전염병의 공포에서 벗어나고 싶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도리와 실리의 기로에서 망설임 없이 도리를 선택했다. 자신을 희생하고, 지역을 넘어 환자를 구제했다. 그의 묘갈명은 그 공로를 인정하여 후손의 발복(發福)을 바라는 염원인 셈이다.


“당신 잘못이 아니다.” : 그들은 왜 22번 환자를 감쌌을까


22번째 코로나 확진자 A씨가 지난주 완치 판정을 받은 뒤로 마을에 미안함부터 전했고, 주민들은 “당신 잘못이 아니다”며 감쌌다는 소식이 있다. 22번째 확진자의 마을 이장은 “A씨가 완치 판정을 받고 전화를 걸어와서 자신 때문에 마을 주민들에게 피해를 줘서 미안하다는 말을 계속 해왔다”며 “코로나에 걸린 것이 당신 잘못도 아닌데 너무 미안해하지 말라고 했다”며 말했다(중앙일보 2020년 2월 16일 기사 참고). 이 기사를 본 누리꾼들은 “훈훈한 기사다”, “마을 분들이 존경스럽다”, “성숙한 인품에 박수를 보낸다”, “코로나 퇴치에 힘을 합치자”는 반응이다. 그 외에도 “00번 확진자는 배워야 한다”, “이제야 우리나라가 옛 정을 찾는 모습이 보인다”, “재난 속에 시민들의 의식은 한층 성숙해진 듯하다”는 댓글도 있다. 이러한 반응은 A씨가 마을 주민들과 접촉이 없었고, 주민들 역시 스스로 위생에 신경 썼던 덕분이다.

이 글은 환자를 무작정 감싸 안으라거나 물품을 사두지 말라는 원고가 아니다. 의술 발달이 훨씬 미진했던 조선시대의 기록에도 담겨 있듯이, 병가(病家)에서 나온 사람들과의 접촉을 망설이는 것이 당연하고[김택룡(金澤龍, 1547~1627), 『조성당일기(操省堂日記)』], 전염병에 걸린 사람 또는 가족이 있으면 병막을 짓고 격리해서 약물을 마련해주어야 한다. [유중림(柳重臨, 1705~1771),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 이후 인심 좋은 마을에서는 더러 장로(長老)와 의논하여 상의한 뒤 각자 농기구를 갖추고 병자의 전답을 대신 경작해 주는 일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중림, 위의 책 참고) 시어른의 병세를 돌보며 약을 달여 드리는 것[김상헌(金尙憲, 1570~1652), 『청음집(淸陰集)』]이나 부모상을 치르는 것[이덕홍(李德弘, 1541~1596), 『간재집(艮齋集)』]도 모두 그러한 조건을 갖추었을 때 가능한 것이다. 군사훈련과 같은 집회 활동을 진행하지 않는 것[조재호(趙載浩, 1702~1762], 『영영일기(嶺營日記)』]은 물론이다.


2020년 2월 13일 중앙일보 기사 사진


의학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전염병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는 오히려 퇴보한 듯하다. 한동안 호전 기사가 읽혀 안심할 수 있을까 싶더니 불과 일주일 지나지 않아 하루에도 재난 경고 문자가 몇 통씩 날아오고 핸드폰 알람이 울릴 정도로 사태가 심각해졌다. 수십억 단위로 방역 도구를 사재기했는가 하면, “밥 먹다 코로나 걸렸으니 소문내지 않은 대신 입금 하라”는 신종 사기도 등장했다. 지역뉴스 아래에는 “홍ㅇ폐렴으로 변종”, “고담ㅇ구 한국에서 지우고 싶다”는 혐오 댓글이 판을 친다. 그렇다면 조선은 어떠했던가. 비록 검역과 치료의 수단은 미진했으나, 중앙행정과 의학기술이 교류하여 구휼 대책이 지방에까지 이르도록 했고, 민간에서는 병막을 짓고 격리하거나 집회 활동을 지양(止揚)하면서 개인 차원의 방역에 신경 썼다. 때때로 인심 좋은 마을에서는 병자의 전답을 대신 경작해주는 일도 있었고, 지역을 가리지 않고 녹봉을 털어 환자를 구제한 현감도 있었다. 공포심을 숙주로 삼아 사회 곳곳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백신을, 옛 책에 담긴 우리 조상의 혜안(慧眼)에서 찾아볼 때이다.




집필자 : 강선일


“전염병으로 괴로워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어머니와 넋을 잃은 아들”

김택룡, 조성당일기,
1616-07-17 ~ 1616-07-21

1616년 7월 17일, 저녁때였다. 정희생(鄭喜生)이 발광하여 김택룡의 집으로 뛰어들어 난동을 부렸다. 온 집안이 놀라고 당황해 어쩔 줄을 몰랐다. 택룡은 정희생을 겨우 달래서 돌려보냈다. 택룡이 듣자하니, 그의 집안에 전염병이 크게 발생하여 마을 사람들이 모두 피하고 상대를 해주지 않아 이런 뜻밖의 일을 저지른 것이라고 했다. 택룡은 너무 놀라 어찌 할지 고민했다. 상황이 진정되자 아들 각 등은 모두 사랑에서 머무르고 나머지는 모두 안으로 들어왔다. 다음 날 7월 18일, 정희생이 또 택룡의 집 앞에 나타났다. 그러나 바깥에만 있다가 들어오지 않고 바로 돌아갔다. 밤에 정희생의 어머니가 밤나무에서 목을 매 죽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택룡은 너무 참혹스럽다고 생각했다.
7월 19일, 택룡은 아침에 정희생의 어머니가 죽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놀라고 슬퍼했다. 그래서 심씨 일가의 여러 사람들을 역정(櫟亭)으로 불러 모이도록 한 후, 정희생의 모친상을 어떻게 치를 것인지 의논했다. 모두들 말하길, “정희생이 지난번처럼 크게 광란하면 범접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모두 힘을 합해 그의 손을 등 뒤로 단단히 묶어 두고 나서야 일을 치를 수 있을 듯한데요.”라고 했다. 택룡의 아재 심인이 택룡을 찾아와 정희생의 어머니를 어떻게 염습(殮襲)할 지에 대해 의논하고 갔다. 다음 날 20일에 심운해 등이 정희생을 묶어 결박했다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하루가 지났다. 누가 와서 택룡에게 전하길, 정희생은 묶어 두었더니 더 이상 소란을 피우지 않아 그 사이에 정희생의 어머니를 입관하고 염했다고 하였다.

“문안 인사마저 두렵게 만드는 전염병”

김택룡, 조성당일기,
1617-04-27 ~ 1617-05-03

1617년 4월 27일, 김택룡은 구찬숙 일가가 전염병을 피하여 와운서재에 와서 묵은 지 이미 수삼일이 되었다고 들었다. 그래서 사람을 시켜 문안을 보내려 했는데, 다시 생각하기를 ‘병가(病家)에서 나온 사람들이라 접촉하기가 어려우니 그만두어야겠다. 이 병은 부포에서 크게 번진다고 하는데... 몹시 두렵구나!’
라고 하였다.
6일 뒤 5월 3일, 김택룡의 아들들인 김숙과 김각 형제가 와운서재에 가서 구찬숙의 아내를 만났다. 병을 피해 와서 임시로 거처하기 때문에 이제야 비로소 가서 만난 것이었다.

“전염병을 피해 도망 다니다”

장흥효, 경당일기, 1618-02-25 ~

1618년 2월 25일, 평소 잘 찾아오지 않던 이즙이 장흥효를 찾아왔다. 그는 다른 일이 있어 그를 찾아온 것이 아니라 지나는 길에 들르게 된 것이다. 그래서 장흥효를 그가 왜 이곳에 왔는지 궁금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온 것은 다음 아닌 전염병 때문이었다.
장흥효가 살던 당시에는 전염병이 너무 흔했다. 그가 살던 일생 동안에도 그가 사는 마을에 수차례 전염병이 마을을 휩쓸기도 했다. 어쩌면 당시의 삶 자체가 전염병과 더불어 살았다는 것이 더 정확한 설명일 지도 몰랐다.
이즙이 살고 있던 마을에 전염병이 돌았다. 당시 전염병이 마을에 돌기 시작하면 별다른 대체 방법은 없었다. 도망 다니는 것이었다. 백신이 존재하지 않았던 조선후기에는 전염병의 존재조차 알 수 없었다. 지금의 기준으로 너무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병도 당시에는 너무 무서운 질병이 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병이 발생했다는 말을 들으면 무조건 피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이즙도 마을에 병이 돌기 시작했다는 말을 듣고 집을 나와서 다른 마을로 피신하는 도중에 장흥효의 집에 들르게 되었다. 그는 장흥효에게 하직인사를 드렸다. 도망 다니다 보면 언제 다시 찾아뵐지 몰랐기 때문이다. 짧게는 한 달이면 돌아올 수도 있지만 길어지면 수개월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홍역이 사람을 가리지 않다”

권상일, 청대일기,
1720-03-03 ~ 1720-03-07

1720년 3월에 홍역(紅疫)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한번 발생한 홍역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보통 소아에서 발생하여 20세까지 생존자의 거의 90%가 이 병에 걸리는데 일생 동안 걸리지 않는 자는 거의 없을 정도였다. 왜냐하면 홍역은 한번 발생하면 전염성이 아주 강한 질병이었다. 그러다 보니 성역이 없었다.
세자에게서 발열 증세가 나타났다. 발열 증상이 다소 오락가락 하기도 했다. 홍역이었다. 홍역은 처음에 열이 나기 시작하여 물집이 잡히기 시작하는데 세자의 경우에는 얼굴과 등 가슴에 물집이 났고 후에는 팔과 다리에도 나타났는데 열이 떨어진 뒤에는 물집이 거의 다 사라졌다고 한다.
몇일 뒤 세자의 홍역은 거의 다 사라지고 점차 회복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고향에서 전해졌다. 우리 집은 편안했고 권상일의 아들인 만도 홍역을 순조롭게 잘 치렀는데 사촌인 천응이 7일 동안 크게 앓고도 아직 반점이 나타나지 않아 매우 걱정스럽다는 소식이었다. 세자든 일반 백성이든 모두 홍역을 잘 치루었지만 유독 사촌인 천응만 그러지 못했으니 속상할 만했다.

“흉년과 전염병으로 인해 군사훈련을 연기할 것을 요청하다”

조재호, 영영일기, 1752-02-10 ~

1752년 2월 10일, 통제사와 좌우병사(左右兵便)가 올봄 수군과 육군의 훈련은 전례대로 거행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조재호 경상감사는 계속되는 흉년과 전염병으로 군사훈련을 연기할 것을 청하는 장계를 올린다.
지난해에 보리 흉년이 매우 심했고 가을보리 역시 한발로 말라죽어서 전혀 싹트지 못한 까닭에 곤궁한 백성이 바라는 것은 봄보리를 때맞춰 다시 파종하는 것이니 그 시기를 놓치게 할 수 없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다. 또한 전염병이 근래에 또 더욱 퍼져서 사망하는 참혹함과 전염병에 대한 근심이 고을마다 심각한데 이런 때에 수만 명의 군사가 섞여서 훈련하게 되면 전염병이 더 창궐하게 될까봐 걱정되는 것이 두 번째 이유다. 앓다가 겨우 소생된 부류들이 열흘 넘도록 바깥에서 잠을 자며 뒤섞여 처하다 전염되면 큰일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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