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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예를 익혀야 나라를 지킬 수 있다

명의 무예를 익혀라



임진왜란 기록화 동래부순절도(東萊府殉節圖)(출처: 문화재청)



선조 25년인 1592년 4월에 조선은 이전에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을 만났다. 일본이 쳐들어온 것이다. 우리가 임진왜란이라 부르는 7년 전쟁의 시작이었다. 임진왜란 초창기 일본과의 전투에서 계속 밀리는 상황이 이어지자, 근접전에서 활용할 수 있는 무기 학습의 필요성이 조선 내에 대두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 당시 상황과 관련해 정조대에 편찬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의 「기예질의(技藝質疑)」에는 “오직 우리나라에는 바다 바깥에 치우쳐져 있어 예로부터 전해오는 것이 다만 활과 화살 한 가지뿐이니 칼, 창 등에 이르러서는 한갓 그 기계만 있고 도리어 그 익혀 쓰는 법은 없다……그러므로 왜군과 대진할 때 왜군이 갑자기 죽기를 각오하고 돌진하면 우리 군사는 비록 창을 잡고 칼을 차고 있더라도 칼은 칼집에서 뽑을 틈이 없고, 창은 겨루어 보지도 못하고 속수무책인 상태로 적의 칼날에 꺾여버리니, 이는 모두 검과 창을 익히는 법이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하여 일본 병사와의 전투에서 칼 한 번 써보지 못하고 무참히 짓밟히는 조선의 처참한 현실을 전해준다. 오랫동안 큰 변란이 없던 조선은 병사들의 훈련을 체계적으로 하는 방법을 잊어버리고 제대로 된 군사를 양성하지 못했음을 알려준다.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출처: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선 정부는 전쟁이 다소 소강상태에 들어간 틈을 타 일본군의 조총 전술에 대응하기 위해 포수 수백 인을 양성하는 동시에 왜구를 막기 위해 명의 장수 척계광(戚繼光)이 편찬한 『기효신서(紀效新書)』를 받아들여 그 책에 실린 여러 무기와 근접전에 효과적인 전법을 익히기 위한 노력을 본격적으로 기울였다. 근접전의 전투방식에 익숙하지 않은 조선은 낙상지(駱尙志)에게 이를 가르칠 수 있는 무예에 능한 이들의 파견을 요청했다. 이와 관련해 기록을 보자.

임진년 겨울에 명군이 와서 구원해 줄 때 낙상지 공이 강남 병사들을 거느리고 와서 먼저 평양을 공격하였는데, 공이 가장 현저하였다. 계사년 4월에 내가 한성의 묵사동(墨寺洞)에 병으로 누워 있었는데 낙공이 내가 누워 있는 데를 찾아와서 본래부터 잘 아는 사람같이 하루종일 차분하게 이야기를 하여 군대 훈련시키는 일이며 왜적을 방비하는 일이며 나라를 지키는 비결까지도 자세하게 일러 주었다. 이에 내가 서울에 있는 사람 70여 명을 모아서 군관 두 사람을 시켜 통솔하게 하고 두 부대로 나누어 낙공의 휘하에 보내 강남 지방의 기예인 조총ㆍ랑선(筤筅)ㆍ장창ㆍ검술을 배우기를 청하였다. 낙공이 자기 진영에 있는 남방 장교 10인을 시켜 나누어 가르치게 하고, 또한 간혹 공이 친히 병사들 가운데에 가서 칼춤과 창쓰는 법을 몸소 가르치기를 매우 부지런히 하였다. 나는 이 일을 행재소에 장계를 올렸다. 이는 우리나라의 군대를 훈련시키는 유래이다. 얼마 후 낙공이 본국에 돌아가려고 하기에 내가 교사 두어 사람을 머무르게 해 줄 것을 청하니, 공이 떠날 무렵에 서교(西郊)에 있으면서 문유(聞愈)와 노(魯)씨 성을 가진 사람을 머무르게 하여 놓고 돌아갔다. 두 사람은 낙공의 뜻을 받들어 2년 동안 서울에서 밤낮으로 군사를 훈련시켜 거의 쓸 만한 인재를 양성시켰으며 또한 진을 치는 법을 가르쳤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잇달아 죽자 성내에 거적에 싸서 장사지내 주었는데, 이 때에 두 사람의 친척이 와서 관을 호위하고 떠났다. 그 때에 낙공은 계주(薊州)에 있으면서 나에게 글을 보내 그들의 상구를 호송해 달라고 청하기에 내가 위와 같이 써서 답하였다

(『서애집』권9, 「답낙총병서」)


이 인용문은 류성룡이 저술한 『징비록』의 내용 일부로, 류성룡이 명나라 참장(參將)인 낙상지(駱尙志)에게 부탁해 무기를 익히게 하는 과정을 제법 자세하게 전하고 있다. 『선조수정실록』에 의하면, 낙상지는 호가 운곡(雲谷)이고 절강(浙江) 소흥부(紹興府) 여요현(餘姚縣) 출신으로, 이여송의 휘하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천근의 무게를 들 수 있는 용력을 지녔다고 한다. 그 때문에 별명도 ‘낙천근’이었다. 그의 힘이 얼마나 셌는지는 『기재잡기』의 “낙상지가 일찍이 우리나라 사람 12명이 대장군전(大將軍箭) 1좌(座)를 운반하려 하는데, 움직이는 것조차 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왼쪽 겨드랑이에 끼고 나무 한 단 들 듯 5리나 되는 곳에 운반하여 놓고도 힘들어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는 서술에서 엿볼 수 있다.


국보 제132호 『(초본)징비록(懲毖錄)』(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이 기록에 보이는 임진년은 선조 25년(1592)이고 계사년은 선조 26년(1593)이다. 선조 26년인 1593년 4월에 류성룡이 서울 묵사동 지금의 성북구 성북동 부근의 자택에서 낙상지를 만나 군사훈련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사실과 그 이후 조선 정부가 70여 명의 사람을 모아 두 부대로 나누고 낙상지의 휘하에 있는 교사들을 통해, 강남 지방의 무예를 익히게 한 사실을 말해준다. 이것이 조선 병사에게 각종 무기를 훈련시키는 유래였다. 『선조실록』의 선조 26년 6월 기록을 보면, 낙장(駱將), 즉 낙상지가 의주에 있을 때, 조선 사람들에게 손수 칼을 잡고 가르쳤다는 서술이 나온다. 조선인들에게 무예를 직접 가르칠 정도로 열정적이었고 우호적이었음을 알려준다.

그래서인지 그에 대한 조선인들의 평도 좋았다. 정경운의 『고대일록(孤臺日錄)』을 보면, “낙상지는 나이가 65세이고 신장은 7척이나 되며, 풍채가 크고 눈빛은 광채를 발했다. 근육의 힘이 무척 강해 능히 천근을 들어 올릴 수 있기 때문에 ‘낙 천근’이라 불렸다. 사졸들과 고통과 즐거움을 함께했다. 매일 6되 분량의 밥과 몇 근의 고기를 먹고서는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변방에서 창칼을 익히면서 일찍이 조금도 휴식하지 않았으며, 처신이 청렴하고 전쟁에 임해서는 용맹하니 명나라 제일의 장수이다.”라고 기재하고 있다. 그의 인격 등이 매우 훌륭하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음을 말해준다. 아마도 류성룡도 이러한 사실을 알고 부탁을 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당시 낙상지가 휘하에 있던 이들 가운데 교사로 보낸 이들은 장육삼(張六三) 등 10여 명이었다. 인용한 글에 보면, 낙상지가 명으로 돌아간 뒤에는 그의 휘하에 있던 문유와 노씨 성을 가진 인물이 무예 훈련을 맡았음을 알 수 있다. 『징비록』에는 이름이 기재되어 있지 않은 노씨 성의 인물은 노천상(魯天祥)이다. 문유와 노천상은 안타깝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고 말았다. 조선에서 이들에게 후한 대접을 해 준 것은 물론이다.

무예훈련을 전담으로 하는 훈련도감(訓練都監)이 선조 27년(1594) 2월에 설치되었다. 훈련도감에서 명나라 교사들은 왜구를 막기 위해 고안된 절강(浙江)지역의 기예를 가르쳤다. 맨손 무예보다 당장 전장에서 사용할 수 있는 무기술이 위주였음은 당연하다. 당시 배운 기예가 무엇인지는 훈련도감의 낭관(郎官)인 한교(韓嶠)가 『기효신서』를 저본으로 삼아 선조 31년(1598)년에 만든 『무예제보(武藝諸譜)』를 통해 알 수 있다.


『무예제보』 중 「곤보(棍譜)」(출처: 국립중앙도서관)



『무예제보』에는 「곤보(棍譜)」, 「패보(牌譜)」, 「선보(筅譜)」, 「장창보(長槍譜)」, 「파보(鈀譜)」, 「검보(劍譜)」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곤보는 곤봉이라고도 불리는 나무막대기를 사용하는 법, 패보는 등나무로 만든 방패인 등패를 사용하는 법, 선보는 대나무 가지에 쇠철편을 달아 적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으로, 낭선이라고도 불린다. 장창보는 긴 창을 사용하는 법, 파보는 창끝이 세 갈래로 갈려져 있는 당파라 불리는 무기를 사용하는 방법, 그리고 검보는 칼을 사용하는 법에 해당한다. 여러 가지 무기의 사용법을 가르쳐 왜적을 효과적으로 막고자 했던 것이다.

무예 습득에 대한 필요성은 당시 임금이었던 선조의 다음 언급에서 살필 수 있다.


(선조가) 「비망기(備忘記)」로 승정원에 전교하기를, “어제 당병(唐兵, 명나라 군)들의 진을 친 곳을 보았는데 그 중의 1대(隊)는 모두 목곤(木棍)를 휴대하고 있었다. 일찍이 명 조정에서 목곤의 기술이 긴 창이나 칼을 쓰는 것보다 낫다고 하는 말을 들었으니, 그 기술을 익히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권법은 용맹을 익히는 무예인데, 어린아이들로 하여금 이를 배우게 한다면 마을의 아이들이 서로 본받아 연습하여 놀이로 삼을 터이니 뒷날 도움이 될 것이다. 이 두 가지 무예를 익힐 아동을 뽑아서 종전대로 이중군(李中軍)에게 전해 받아 익히게 할 것을 훈련도감에 이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기효신서』의 목곤과 권법에 관한 두 그림에 표를 붙여 내리면서 이르기를, “이 법을 훈련도감에 보이라.”고 하였다

(『선조실록』 권124, 선조 33년 4월 정해)


선조 33년 4월 기록을 보면, 선조는 「비망기」(임금의 명령을 적어서 승지에게 전하는 문서)를 통해, 명나라 병사들이 나무 막대기인 목곤을 사용하는 방법이 긴 창이나 칼을 사용하는 것보다 낫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어린아이들에게 용맹을 익히는데 효과적인 맨손 무예인 권법을 익히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했던 것이다. 선조가 아이들에게 권법을 교육하도록 한 것은 당장 전장에서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아이들이 이를 놀이하듯 익혀두면 뒷날 언젠가는 도움이 될 것이라는 미래를 염두에 둔 방안이었다.


적의 검술도 익혀야 한다



일본도 3D(출처: 한국국학진흥원_스토리테마파크)



명의 무예를 익히면서도 조선은 왜인들의 검술도 배우고자 했다. 『선조실록』의 선조 25년 10월의 기록을 보면, 선조는 “총통 제조와 방포하는 방법 및 적의 정황을 상세히 따져 묻고 혹 검술을 아는 자이거든 배워서 익히면 어떻겠는가”라고 하며 적의 기법까지도 습득하길 원했다. 2년 뒤인 선조 27년(1594) 2월에도 조선에 항복한 한 왜인이 포수로 방포하는 법이 귀신처럼 빨라 견줄 바가 없으며, 칼과 창을 쓰는 법 또한 꽤 잘 이해하고 있으니, 훈련도감에 소속시켜 급료를 주어서라도 전수케 하자고 하거나, 같은 해 7월에 항복한 왜인 47인 가운데 야질기(也叱己)라는 인물이 칼쓰기에 능하고 화약을 만드는데 들어가는 염초를 달일 줄 안다는 점을 들어 비변사에 머무르게 하자고 하기도 했다. 승리하기 위해 적의 기술이라도 배우고자 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 다음 기록을 보자.


(선조가) 전교하기를, “왜인이 투항해 왔으니 후하게 보살피지 않을 수 없다. 외방으로 보낼 자는 빨리 내려보내고 그중에 머물러 둘 만한 자는 서울에 머물러 두고 군직을 제수하여 총과 검을 주조하거나 검술을 가르치거나 염초를 달이게 하라. 참으로 그 묘술을 터득할 수 있다면 적국의 기술은 곧 우리의 기술이다. 왜적이라하여 그 기술을 싫어하고 익히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고 착실히 할 것을 비변사에 이르라.”하였다

(『선조실록』 권53, 선조 27년 7월 을사)


선조가 조선에 투항해 온 항왜들에게 군직을 제수하여 총과 검을 만들도록 하거나, 검술을 가르치거나 염초를 달이게 하라는 명을 내리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적국의 기술이라 하더라도 적을 막아 내는데 유용하기만 하다면 조선의 기술로 만들어야만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따라서 왜적이 보유한 기술이라고 얕보거나 무시하지 말고 착실히 그 기술을 익힐 것을 명령하였다. 그렇게 해서 왜적을 무찌를 수만 있다면 그것이 조선의 안녕을 지키는 최선이었던 셈이다. 선조는 이틀 뒤인 8월 정미에는 항왜 가운데 사고수계(沙古愁戒)‧간내비운소(幹乃飛雲所)‧간노수계(幹老愁戒)‧조암묘우(照音妙牛) 등이 칼을 잘 사용하는 인물들이 조선의 살수(殺手)를 보고 아이들 놀이와 같다고 한 사실을 언급하면서 이들을 머물게 해서 그들이 가진 기예를 배우지 않은 것에 대하여 지적하기도 했다. 그만큼 선조는 왜적에 의해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처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자존심을 굽히는 것도 감수할 만큼 절박한 심정이었다고 할 수가 있다. 선조는 아이들의 부대를 별도로 설치하여 이를 전문적으로 교육하자고까지 하였다.


(선조가) 「비망기」로 이르기를, “우리나라 습속은 남의 나라의 기예를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고 더러는 도리어 비굴하게 여긴다. 왜인의 검술은 대적할 자가 없다. 전일 항왜 다수가 나왔을 때 그에 검술이 극히 묘한 자가 많이 있었으므로 적합한 자를 뽑아 장수로 정하여 교습시키도록 별도로 한 대열을 만들라고 명령을 전하기도 하고 친히 명령하기도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끝내 실시하지 않고 그 항왜들을 모두 흩어 보냈다. 원수의 왜적이 아직 물러가지 않고 있는데 시속의 습관이 이와 같으니 가히 한탄할 일이다. 지금 이조판서(이덕형)가 도감에 있으니 족히 그 일을 할 만하다. 별도로 한 장수를 뽑고 아동 약간 명을 가려 뽑아 한 대(隊)를 만들어서 왜인의 검술을 익히되 주야로 권장하여 그 묘법을 완전히 터득한다면, 이는 적국의 기예가 바로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인데, 어찌 유익하지 않겠는가. 훈련도감에 이르라.”고 하였다

(『선조실록』 권53, 선조 27년 12월 경오)


적의 검술까지 익히게 하려는 선조의 절박함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선조는 그동안 조선의 습속이 다른 나라의 기예 배우기를 꺼려할 뿐만 아니라 비굴하다고 여기는 이까지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이조판서인 이덕형에게 훈련도감에 어린아이를 뽑아서 이를 훈련하는 부대를 별도로 창설할 것을 명령했다. 아마도 어린아이들이 편견이 없으므로, 잘 습득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던 것이라 짐작된다. 그러면서 다시 한 번 적국의 무예가 우리의 것이 된다고 하면서 그 이익됨을 언급하였다. 이후 실제로 아동대가 설치되었고 왜검술의 교육이 이루어졌다. 당시 아동대의 대략 35명을 변(邊)이라는 하나의 단위로 해서 2개의 변, 즉 70명 정도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며, 이들은 서로 경쟁을 시켜 실력향상을 도모하도록 하였다. 당시 이에 공이 많은 항왜로는 여여문(呂汝文)과 산소우(山所佑)라는 인물이 있었다. 선조는 아이들의 검술 성취가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높았는지, 교육에 공이 컸던 산소우에게 잘 훈련된 말 1필을 내려주기도 했다.

일본의 검술 등에 대한 관심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인 선조 40년(1607)에 ‘회답겸쇄환사’로 일본에 갔던 정희득(鄭希得)이 지은 『해상록(海上錄)』의 “우리나라 남자로서 전후에 잡혀 온 자가 방포를 익히고, 검술도 익히며, 배 몰기도 익히고 달리기도 익혀서 강장하고 용맹하기가 진짜 왜놈보다도 나으니 비록 우리나라에서 10년 동안 훈련해도 이러한 정예는 쉽게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제 만일 모조리 찾아 모으면 무려 3~4만 명은 되겠고, 늙고 약한 여자는 그 수가 갑절이나 될 것입니다.”를 통해서도 살필 수 있다. 임진왜란 때 잡혀갔다가 돌아온 이들 가운데 일본에서 검술을 포함한 다양한 기예를 익힌 이들이 있었고 이들을 활용해 국방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기법을 책으로 남겨라



임진왜란이 한창인 시점에서 조선은 왜적을 무찌르기 위해 명의 기법이나, 적인 일본의 검술이나 화포 등을 익힐 것을 강조하고 교육하게 하였다. 이는 적의 것이라 해도 우리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다는 자세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전쟁은 자존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조선은 병사들의 효과적인 무예 수련을 위해 책으로 남겼다. 가장 먼저 나온 것이 앞서 언급한 한교가 편찬한 『무예제보』였다. 그 후 최기남(崔起南, 1559~1619)이 『무예제보』에 빠진 무예를 모아 광해군 2년(1610)에 『무예제보번역속집(武藝諸譜飜譯續集)』을 간행하였다. 『무예제보번역속집』에는 맨손 무예인 대권(大拳), 길고 무거운 칼인 언월도(偃月刀), 짧은 창의 일종인 구창(鉤槍) 그리고 왜적들의 검술로 명나라에서 체계화된 왜검(倭劍) 등의 기법을 포함하였다. 무예서의 발간은 체계적인 무예 수련을 통해 임진왜란과 같은 전쟁이 조선 내에서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혹 일어나더라도 효과적으로 방어해 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무예도보통지』 중 본국검(本國劒)(출처: 국립중앙도서관)



『무예도보통지』 중 마상편곤(馬上鞭棍)(출처: 국립중앙도서관)



무예서의 발간은 영조와 정조대에도 이어진다. 영조 35년(1759)에는 사도세자에 의해 18가지 기예가 정리된 『무예신보(武藝新譜)』와 정조 14년(1790)에 『무예신보』를 증보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가 그것이다. 『무예신보』에는 『무예제보』의 6가지 기예에 죽장창(竹長槍)‧기창(旗槍)‧예도(銳刀)‧왜검(倭劍)‧교전(交戰)‧월도(月刀)‧협도(挾刀)‧쌍검(雙劍)‧제독검(提督劍)‧본국검(本國劒)‧권법(拳法)‧편곤(鞭棍) 등의 12기, 모두 18가지 기예가 실렸으며, 『무예도보통지󰡕는 다시 『무예신보』의 18가지 기법에 말을 타고 익히는 6가지, 즉 기창(騎槍)‧마상월도(馬上月刀)‧마상쌍검(馬上雙劍)‧마상편곤(馬上鞭棍)‧격구(擊毬)가 더해져 총 24가지의 기법으로 구성되었다.


『무예도보통지언해』(출처: e뮤지엄)



조선은 조선의 것만 고집하지 않았다. 명나라 교사들에게 배운 기법과 일본의 기법까지도 포함된 무예교본을 편찬했다. 아울러 한문에 능하지 않은 이들이더라도 누구나 배울 수 있게끔 『무예제보번역속집』을 한글로 제작하거나, 『무예도보통지』 가운데 1권은 한글로 풀어 쓴 언해본을 덧붙였다. 자존심보다는 그러한 일이 다시 발생한다면 실제로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란 것이다. 철저한 실용의 태도였다. 군사훈련법의 쇠퇴로 인해 외적의 침입 앞에서 큰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던 조선으로서는 다시는 그러한 일이 다시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 무예서를 지속적으로 편찬한 것은 아닐까.




집필자 소개

허인욱
허인욱
역사학도로서 전통무예, 애니메이션에도 깊은 관심을 가진 저자는 이들 주제에 관해 다채롭고 흥미로운 역사서를 집필해 왔다. 저자는 평소 사람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고, 이를 다양한 매체를 통해 새롭게 풀어내고자 여러 가지 재미있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옛 그림에서 만난 우리무예풍속사』,『관을 중심으로 살펴본 태권도 형성사』,『한국 애니메이션 영화사』 등이 있다.
“조선시대 군인들의 강무”


마상재(馬上才)는 달리는 말 위에서 사람이 행하는 갖가지 재주로, 농마(弄馬), 희마(戱馬), 마희(馬戱), 곡마(曲馬), 원기(猿騎), 무마(舞馬), 표기희(驃騎戱), 마기(馬技), 마기(馬伎), 입마기(立馬技), 마술(馬術) 또는 말광대, 말놀음 같이 다양한 용어로 불린다. 이들 용어 가운데 훈련된 말에게 여러 기예를 익히게 하는 무마(舞馬)를 제외하고, 그 나머지 용어는 기수가 달리는 말 위에서 여러 가지 동작을 취하여 재주를 부리는 기예를 뜻하는 말이다. 특히 마상재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붙여진 명칭으로 민간에서는 주로 마기(馬伎)라 불렀다. 하지만 마기가 아니라 희마(戱馬)가 옳다는 주장이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서 확인되는 것으로 미루어 희마가 옳은 표현으로 보인다.

“사족의 필수교양, 활”

금난수, 성재일기,
1592-11-20 ~ 1592-12-29

금난수와 그 벗들은 젊을 적부터 간간히 활을 쏘며 놀았다. 활쏘기는 사족들이 반드시 익혀야 할 교양 중 하나였다. 나라에서도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도 향사례(鄕射禮)를 「군례(軍禮)」 의식으로 규정하여 매년 3월 3일과 9월 9일에 여러 도, 주, 부, 군, 현에서 행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성종 때 까지도 제대로 시행되지 않다가, 이후 향촌사회의 안정을 도모하는 정책이 논의되면서 향사례가 시행되었다. 활쏘기는 단순히 화살로 과녁을 맞히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뜻을 바로 하는 예의와 덕과 선을 권하는 데 의의가 있었다.
그리하여 금난수를 비롯한 사족들은 젊을 때부터 활을 쏘는 데 익숙하였다. 비록 평소엔 붓보다 무거운 것은 들지 않는 백면서생이라 할지라도 모두 활은 쏠 줄 알았던 것이다. 금난수는 활쏘기를 구경하는 것도 좋아했는데, 11월 20일에는 이성여의 집으로 가서 활쏘기를 구경하였다. 활을 쏘는 사람들은 젊은이들이 아니었다. 젊은이들은 왜적에 대항하기 위해 의병으로 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향촌을 지키고 있는 것은 노인들이었다. 노인들은 오랜만에 활을 들어 보았다. 모인 사람들은 금응훈, 이공숙, 박몽담 등 10여 명이었다.
활쏘기 구경만 하고 돌아왔던 금난수는 12월 29일에는 직접 아들들을 거느리고 집 뒤 정자에서 활쏘기를 익혔다. 오랜만에 활을 든 이유는 둘째 아들 금업이 두 손자 정일(貞一)과 일생(一生)를 데리고 왔기 때문이었다. 어린 손자들과 세 아들 앞에서 금난수는 노익장을 가감 없이 발휘하였다. 손자들은 과녁에 화살을 꽂아 넣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천진하게 박수를 쳤다..

“활 입문자에게 무과응시는 아직 먼 이야기”

노상추, 노상추일기,
1770-11-03 ~ 1770-11-11

무과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지난 5월부터 활쏘기에 여념이 없었던 노상추는 슬슬 좋은 활을 가지고 싶었다. 마침 공성(功城)에 사는 궁인(弓人) 김룡(金龍)이 노상추가 활을 쏘러 다니는 고남(古南)에 왔다고 하기에 김룡을 만나러 갔다. 노상추는 김룡과 더불어 한동안 활 이야기며, 무과 시험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노닥거렸다. 하지만 노상추는 지금 노닥거릴 때가 아니었다. 곧 과거시험이 열릴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왕이 한동안 병환에 시달리다가 얼마 전 병을 털고 일어났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한 정시(庭試)의 초시가 열흘 뒤인 11월 17일에 치러진다는 소식이 횡성(橫城)으로부터 전해졌다. 노상추와 함께 활을 쏘며 과거시험을 준비하던 동접(同接)들이 모두 술렁였다. 신포(新浦)의 활터에서 언제 과거를 보러 출발할 예정이냐는 등, 지금부터 출발하면 도성에서는 어디에서 묵을 것이냐는 등 서로 대화를 나누는 동접들을 보면서 노상추는 자신도 과거시험을 보러 가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아직 무과를 위한 준비를 한 지가 반년밖에 안 된 터라 자신이 없었다. 노상추는 잠자코 활을 집어 들고 과녁을 향해 활을 쏘면서 상념에 빠졌다.

“활쏘기 시합에서 첨사에게 멋지게 복수하다”

박계숙, 부북일기,
1606-04-03 ~ 1606-04-04

1606년 4월 3일, 함경도 최북단 회령에도 완연한 봄이 찾아왔다. 박계숙(朴繼叔)이 이곳 보을하진에서 근무한지도 어언 4개월이 되었다. 부임 초 몸에 병도 들고, 습진에 참석하지 못해 곤장도 맞아 곤경에 처한 일도 있었지만 이제 이곳에서 생활도 제법 익숙해져가고 있었다.
어제 3일에는 보을하진의 무사들과 박계숙(朴繼叔)처럼 남쪽에서 온 일당백장사들 사이에 큰 내기가 벌어졌다. 바로 활쏘기 시합을 하기로 한 것이다. 보을하진에서는 첨사 민열도가 주장이 되고, 남쪽 장사들 중에서는 박계숙(朴繼叔)이 주장이 되었다. 한 사람이 활 5순씩 쏘아 종일토록 쏘았다. 시합 결과 박계숙(朴繼叔)과 남래장사들이 14발을 더 맞추어 이겼다. 박계숙(朴繼叔)은 총 48발을 명중시켰고, 첨사는 46발을 명중시켰다. 항상 원칙을 내세워 부하들을 엄하게 다루는 첨사(僉使)이지만, 활쏘기에서 지고 나니 크게 멋쩍어 하였다.
어제의 패배가 분했던지 오늘 첨사가 다시 한번 활쏘기 시합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오늘도 역시 박계숙(朴繼叔)과 남래장사들이 11발을 더 맞추어 이겼다. 첨사가 3순씩만 더 쏘아 승부를 겨루자하여 하는 수 없이 3순씩을 더 쏘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래도 남래장사편이 4발을 더 맞추어 이겼다. 첨사는 분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하였다. 보을하진 소속 무사들 중에 토병군관인 서기충이란 자가 있는데, 두 번 시합에서 모두 꼴찌를 하였다. 가뜩이나 분한 마음이 들었던 첨사는 서기충에게 곤장 5대를 치도록 지시했다. 박계숙(朴繼叔)은 쌀 1석과 콩 1석을 상으로 받았다. 몇 달전 첨사에게 곤장을 맞고 분해했던 것을 멋지게 복수한 것 같아 박계숙(朴繼叔)은 마음이 뿌듯해졌다.

“김덕령의 군대 구성과 그의 복장”

정경운, 고대일록,
1594-02-07 ~ 1594-02-08

1594년 2월 7일, 김덕령(金德齡)은 함양에 이르렀다. 김덕령의 군대는 왼쪽에는 충용기(忠勇旗)를 세우고, 오른 쪽에는 익호기(翼虎旗)를 세웠으며, 또 삼군사명표(三軍司命標)를 세웠다.
군(軍)은 충용군(忠勇軍)이라 하고, 군관(軍官)은 부절사(赴節師)라 부르고, 대장 밑에 있는 군사인 아병(牙兵)은 첩평려(捷平旅)라고 불렀다. 군의 모습이 매우 엄숙했고, 호령이 엄정하고 분명하여 참으로 옛 양장(良將)의 풍모가 있었다.
2월 8일, 김덕령의 복장과 그의 풍모를 기록하였는데, 철립(鐵笠)을 쓰고 두 겹의 갑옷을 입었으며, 철혜(鐵鞋)를 신었고 철상(鐵裳)을 둘렀고, 칠척의 장검을 쥐었다고 한다. 또한 말에 뛰어올라 앞서 달리면서 스스로 진법(陣法)을 펼치고 몸소 지휘한 연후에, 산으로 올라가 명령을 내려 싸우고 달리고 격돌하는 것을 익히게 하니, 그 진법은 그가 스스로 만든 것이었다고 한다. 김덕령의 사람됨은 매우 무게가 있으며, 완력이 뛰어나, 그의 날랜 용맹은 비할 데가 없어서 사람들이 한계를 알지 못했다고 한다.
낮엔 흐리고 비가 내렸지만 저녁에는 날이 개고 달빛이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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