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뽕밭이나 만들까 하고 그 땅을 쌀 200 가마니 주고 샀는데, 그 자리에 잠실 놀이동산이 들어서더라고요. 풍광 좋은 데 정자나 지으려고 헐값에 샀던 배 밭이 지금 압구정동 아파트 단지가 되었고요. 당시 강남은 한양에 속하지도 않았어요. 당연히 땅값도 한양인 강북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저렴했고요. 삼성동만 해도 당시에 세 개 마을로 나뉘었거든요. 근데 거기 사는 사람 다 합쳐도 200명이 될까 말까…. 말 그대로 허허벌판, 불모지 중에 불모지였지요. 아마 그때 살던 사람이 지금 삼성동을 보면 기절할 겁니다. 천지개벽 수준이니깐요.”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 2013~2014(출처: SBS)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의 주인공 ‘민준’은 강남의 땅 부자로 그려진다. 특별한 혜안(慧眼)이 있다거나 재테크에 대단한 소질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조선과 현재를 관통하여 400여 년을 살아오면서 자연스레 부(富)가 축적되었을 뿐이다. 시대에 따라 이름을 고치고 직업을 바꾸며 신상을 지워야 하는 불편함도 있었으나, 이만하면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삶임이 틀림없다. 강남 땅을 소유한 젊은 교수의 삶이라니. 그의 변호사이자 오랜 벗인 ‘영목’의 말대로 애꿎은 조상님을 탓하고 싶을 정도다. 예부터 ‘잘되면 제 탓, 못되면 조상 탓’이라지 않던가. 매체에서 그려지는 조선의 선비는 청렴하고 검소한 삶의 아이콘이 될 때가 많다. ‘선비’라면 오히려 〔성균관 스캔들〕의 ‘이선준’을 떠올리는 게 더 빠를지도. 그렇다면 조선의 선비는 물욕(物慾)을 경계하여 부유한 삶에는 한 치의 관심도 없었을까. 그들이 청빈(淸貧)한 삶만을 고집했다면, 그 많던 가솔들을 어떻게 거느리고 부모에게 효도하며 글공부를 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뽕나무를 심으려던 ‘민준’이 집주름과 땅을 보러 다니고 헐값에 매입했던 건 터무니없는 상상에 불과한 것이었을까.
위의 의문을 여러모로 해소해줄 책을 추천하자면, 식니당(食泥堂) 이재운(李載運, 1721~1782)이 쓴 『해동화식전(海東貨殖傳)』이다. 화식(貨殖), 재물을 모으고 늘린다는 뜻이다. 재산을 증식시킨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는 차원에서는 현대용어인 ‘재테크’에 견줄 만한 용어다. 부의 특장을 전면화하고 아홉 거부(巨富)의 일화를 소개한 이 책은, 소위 ‘부자 되는 길’을 알려주는 당대의 재테크 서적이었다. 『해동화식전』의 원문은 2019년에 번역되어 출간된 바가 있어서 관심 있는 독자들이 쉽고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이재운 지음, 안대회 옮김, 『해동화식전』, 휴머니스트, 2019).
『해동화식전』(출처: 네이버)
이 책에서 부자 되길 적극적으로 권장하는 필자의 의견은 조선의 사회적 통념에 대한 도전이란 점에서 꽤 충격적이다. 부와 부자를 흠모하고 찬미하는 주장을 당당히 펼쳤을 뿐만 아니라, 부자와 상인에 대한 조선 사회의 지나친 왜곡과 편견에 맞서 떳떳하게 부를 추구하고 상행위를 인정하자고 제언하는 까닭이다(위의 책, 23쪽 참고).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필자는 이재(理財)의 방법을 설명하고, 탁월한 경영 역량으로 거부가 된 사례를 함께 실어 이해를 도왔다.
또한 아홉 거부의 사례에 비추어 ① 치산(治産)을 잘해 재물을 늘리는 것, ② 아끼고 절약하는 것, ③ 변화를 일으켜 형통하는 것, ④ 고생을 참고 근면하게 형통하는 것 등의 화식 방안을 제시했다. 당대만 하더라도 이러한 저술이 큰 학문적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으나, 경영 및 이재의 기술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는 점, 여러 지역의 경제 지리와 물산을 정리하여 소개했다는 점, 탁월한 경영 사례를 생생하게 제시했다는 점 등은 조선의 선비를 향한 우리의 시각을 전환시키기 충분하지 않을까. 적당한 부는 학문을 익히고 실천하는 데 도움이 된다. “군자가 덕을 좋아하더라도 처지가 곤궁하면 자기 홀로 선량하게 살아가는 길 밖에 없기에”.
그렇다. 문제는 ‘적당히’다. 유학적 가르침과 현실적 문제 사이에서 고민해야 했던 선비들은 적당한 치산의 방안을 궁리해야 했고, 물욕에 휘둘리지 않도록 늘 경계해야 했다. 흔히 말하는 부동심(不動心)이다. 부동심이 있다면 세속의 이익에 눈이 멀 일 없이, 선현(先賢)의 가르침을 잘 따를 수 있으리라.
퇴계의 가서(家書)에 말하기를, “생산을 경영하는 등의 일은 사람이면 누구나 해야 한다. …(중략)… 만일 격조 있고 고상한 것을 완전히 잊고 경영하는 데에만 몰두한다면 이는 바로 농부의 일로서 향리(鄕里)의 속인(俗人)이 될 뿐이다.”
『임하필기(林下筆記)』제8권 인일편(人日編) 중에서
그러한 마음가짐을 어기고 경제 활동의 전선에 뛰어드는 것은 곧 사회적 체면의 훼손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따라서 『해동화식전』에 제시된 방안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름의 방안으로 치산하고 가계를 잇고자 했다. 어떤 방법이었을까.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유배지에서 그의 자식들에게 편지를 보낼 때 “뽕나무를 심어 키움으로써 생계를 이어가라”는 내용을 담았다고 한다. 이는 제갈공명이 은거할 때 뽕나무를 심었던 것에서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이 외에도 자식들에게 채소를 심고 아욱을 뜯는 법, 양계하는 법 등의 원예와 농사의 근간이 되는 지식을 두루 알려주었다고 한다. 평소 근검(勤儉)을 강조했던 정약용의 자식에 대한 내리사랑과 실학자다운 면모를 함께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누에치는 모습, 〔노숙경직도(樓璹耕織圖)〕(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양잠에 대한 애착과 가르침은 제자들에게도 전해졌다. 가난한 선비가 품위를 잃지 않는 방법으로 과일과 채소를 기르고, 누에를 칠 것을 제안했다. “뽕나무를 심고 누에를 치는 일은 선비의 품위를 잃지 않으면서 큰 이익을 남길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는가.”라며 “선비가 한 해를 나는 데에는 엽전 100 꿰미면 충분하다”는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그들이 뽕나무를 심으려 했던 이유는, 양잠을 통해 비단을 얻는 일련의 과정이 선비의 성품에 잘 부합하면서도, 실리를 구할 수 있는 비결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별에서 온 그 남자, 민준의 눈에도 조선 선비들의 그러한 모습이 고매(高邁)해 보였을까.
정약용이 양잠을 통해 얻고자 했던 건 엽전 100 꿰미 정도였다. 적당한 조건과 여력, 적당한 양잠의 규모, 그로 벌어들인 적당한 수입. 언제나 그렇듯 ‘적당히’가 참 어렵다. 그런데 여기, 집안 여력을 헤아리지 못한 채 과다하게 누에를 친 것을 후회하는 또 한 명의 선비가 있다. 온 집안 노비들이 누에치는 데만 전력해야 해서 밭 갈고 김매는 일은 돌아다 볼 겨를이 없다. 농사철은 이미 늦어서 묵은 밭을 일구는 일은 포기한 지 오래다. 조를 심은 밭은 풀이 무성한데 제때 메주지 못해 쑥밭이 될 것이 뻔했다.
누에 농사를 쥐떼로 인해 망친 모습(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조선 중기의 학자 비연(斐然) 오희문(吳希文, 1539~1613)의 『쇄미록(𤨏尾錄)』에 실린 내용이다. 평소 글 읽는 것 외에는 관심 없던 그가 뒤늦게 가계를 경영하려니 여러모로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으리라. 설상가상 집안사람들 가운데는 앓아누운 자가 더 많았기에 심란한 마음이 더 커져만 갈 뿐. 그의 글에서는 가계 경영의 난항과 무리한 시도에 대한 자책감 등이 절절하게 묻어난다(상세한 내용은 스토리테마파크 http://story.ugyo.net에서 읽어볼 수 있다). 한해살이를 적당히 보장해줄 만큼의 농사를 권한 정약용의 모습과는 꽤 대조적인 모습이다. 물론 가계 규모의 차이도 감안해야 하겠지만, 그래도 언제나 그렇듯 투자는 적당히.
『쇄미록』에는 양잠부터 양봉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선비들이 할 수 있었던 다양한 재테크 활동이 담겨 있다. 치산을 위해 여러 방면에서 노력한 흔적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어서 읽다가 보면 감탄할 정도다. 예컨대 꿀을 어떤 과정을 통해 재배해서 누구에게 팔았는지, 얼마에 거래가 되었는지 등 매우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겪은 시행착오, 큰 고생에 비해 반 토막 난 소득에 관해 쓴 대목을 읽을 때면 탄식이 절로 새어 나온다. 매를 얻어 키우며 사냥을 도모하거나 지인에게 팔았던 일화도 여러 편 실려 있다.
목화(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면화의 솜이나, 누에고치에서 실을 잣는 물레(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은 목화 농사에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목화로 만든 면포는 옷감의 재료이자 화폐 구실을 했다.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기후에 따른 목화 파종의 일정 조정과 목화의 분배 등의 내용이 담겨 있어서 목화 농사를 통한 치산을 짐작케 한다. 이처럼 조선의 선비들은 사회적 품위와 현실적인 문제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했고, 성품에 걸맞은 방법으로 치산에 힘썼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 선비는 조선 사회에서 양반 계층에 속했다. 양반으로서 선비는 노비와 토지를 경영하여 재산을 늘리기도 했다. 그러한 내용은 분재기(分財記)나 추수기(秋收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과전법(科田法) 시행 이후로 토지를 경영해서 재산을 늘렸고, 토지를 개간하는 노비를 가계 경영의 핵심 자산으로 삼았다. 따라서 많은 노비를 확보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고 때때로 인적 네트워크를 구성하기도 했다. 토지와 노비는 양반들에게 중요한 경제적 기반이었던 것이다.
다시 『해동화식전』의 문구를 빌리자면, “군자는 재물을 이용하여 자신을 돋보이게 하고, 소인은 재물을 얻으려고 자신을 희생한다.” 이 책에 실린 일화 중 흥미로운 이야기는 흉년을 예측하여 축재하고 이웃을 구제하여 거부가 된 한양 최선비의 이야기였다(위의 책, 28쪽 참고). 인색하게 돈을 모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타인을 도움으로써 부를 일구었다. 그렇게 일군 부는 주위의 찬사를 받아 마땅하리라. 이 외에도 우리는 흉년에 굶주리는 백성을 구제했다거나 전 재산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내놓았다는 선비의 일화를 어렵지 않게 들을 수가 있다. 한 지역의 내로라하던 거부가 인색과 욕심으로 인해 멸문(滅門)해버렸다는 옛이야기와 대조적인 내용이다. 이러한 일화들은 결국 어떻게 벌어서 어떻게 쓰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어떻게 재물을 모으고 늘리며, 또 나누어야 할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시기 |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 장소 | 출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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