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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자기주도형 공부법

‘자기주도 학습’의 허와 실


『공부의 신을 이기는 공부의 락』(김찬기 저, 국일미디어, 출처: 네이버)


대한민국의 ‘자기주도 학습’ 열풍


1960-70년대 서양 교육학자들이 처음 개념화한 ‘자기주도 학습’이 최근 대한민국에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 그 배경으로 첫째, 10여 년 전부터 정부가 추진해온 ‘학습자 중심’ 교육 개혁 정책을 들 수 있다. 둘째, 수능 고득점자들이 공부 노하우를 전수하기 위해 2010년 전후로 공부법 관련 책들을 출간하며 일으킨 소위 ‘공부의 신’ 신드롬이다. 2001년도 수능에서 단 두 문제를 틀리며 전국 상위 0.01%를 차지했던 한 수험생이 공부 노하우 전수를 위해 2006년 오픈한 ‘공신닷컴’이 엄청난 인기를 끌며 『공부의 신』이라는 책을, 또 희귀병을 앓던 한 수험생이 서울대 경제학부에 입학한 뒤 2010년대 초반 『공부의 신을 이기는 공부의 락』이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공부의 신이 되는 비결이든 공부의 신을 이기는 방법이든 그들이 말하는 효과적인 학습전략을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는 공통적으로 스스로 학습의 동기와 목표, 계획과 실천을 철저히 주도하고 관리하는 ‘자기주도 학습’이다. 이후 최근까지 연령별, 학교급별, 과목별로 수백 권에 달하는 자기주도 학습 관련 서적이 쏟아지듯 출간되고, 한 때 ‘야간 자율학습’은 ‘야간 자기주도학습’이란 용어로 대체되었으며 방학 때마다 ‘자기주도학습 캠프’가 성행하기도 하였다. 또 2010년 무렵 ‘자기주도 학습 지도사’라는 새로운 직업이 탄생하면서 지자체별로 ‘자기주도 학습지원센터’가 속속 개설되고 있다.


‘자기주도 학습’은 수능 이후의 삶에도 과연 효과적일까?


이처럼 대한민국이 자기주도 학습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기주도 학습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인 학습전략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에 ‘효과적’일까? 단연, ‘수능 성적’이다. 서점에 진열된 자기주도 학습법을 소개한 수백 권의 책들에는 물론 교육에 대한 예리한 통찰과 대한민국 수험생과 학부모, 교사들이 교훈 삼을만한 유의미한 경험담들도 곳곳에 담겨있다. 그러나 대부분 책의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에게 초미의 관심사는 결국 ‘성적’으로 귀결된다. 공부를 열심히 해도 성적이 오르지 않는 이유는 자기주도 학습법을 모르거나 제대로 실천하지 않기 때문이며, 자기주도 학습의 성공 여부를 판단하는 유일한 잣대는 성적으로 치부되곤 한다. 그렇게 ‘공신’들의 경험담과 노하우에 힘입어 자기주도 학습법을 철저히 마스터한 수험생들은 덕분에 수능에서 높은 점수를 받고 명문대 입학에 성공한다. 그런데 문제는 수능 그 이후의 삶이다.


(출처: 픽사베이)


‘자기주도 학습’ 열풍과 ‘대 2병’의 공존


많은 대학생이 대한민국의 신종 사회적 질병인 이른바 ‘대 2병’을 앓고 있다고 한다. 미래가 보장된다는 어른들의 말만 믿고 명문대 유망 학과에 진학한 학생들은 대학 2학년이 되어서야 막상 전공이 자신의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는 누구인지, 내 꿈은 무엇인지 고민하며 자신의 정체성과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방황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는 비단 명문대생들에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꿈과 적성보다 점수에 맞춰 맹목적으로 대학에 진학한 대한민국 대학생들에게 매우 보편적인 현상이다. 그 결과 ‘대 2병’이라는 신조어가 포털 어학사전에 등재되는가 하면, 최근 인터넷에는 ‘대 2병 자가진단 체크 리스트’, ‘대 2병 클리닉’ 등의 용어가 성행하며, ‘대 2병’을 소재로 한 다큐 프로그램들이 공중파, 유튜버, 대학생 등 다양한 주체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생산되고 있다.

자기주도 학습법을 철저히 마스터하여 수능 점수 따기에 성공한 뒤 대학생이 되어 ‘자기’를 잃어버리는 이 모순적인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성적을 올리는 데 가장 효과적인 학습 전략이자 수능 점수 따기의 만능 치트키가 자기주도 학습법의 실체라면 과연 인생에도 효과적인 공부법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진정한 자기주도 학습이란 무엇일까?


‘진정한 자기주도 학습’이란


자기주도 학습의 가장 근본적인 토대이자 출발점은 학습자의 ‘자발성과 능동성’이다. 자발성과 능동성은 내면의 성장과 그로 인한 희열을 학습자 ‘스스로’, ‘직접’ 경험할 때 저절로 발생한다. 성장의 경험을 통해 촉발된 자발성과 능동성은 이후 학습에서 또 다른 성장을 낳는 계기가 되며 그 성장은 또다시 동기를 자극하고 강화하는 선순환을 계속해서 일으킨다. 구체적인 외적 보상이 주어지지 않더라도 스스로 계속해서 성장하는 습관이 부지불식간에 형성된다. 이때 내적인 성장이란 동기, 태도, 기쁨, 열정과 같은 정서나 마음의 작용을 말한다. 즉, 자기주도 학습 이론의 핵심은 학습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인이 동기, 태도, 습관과 같은 감정, 마음이며 이것이 인지작용과 유기적으로 결합할 때 비로소 계속적 성장을 견인하는 유의미한 학습이 일어난다는 데 있다.

그런데 자기주도 학습의 목표와 범위를 표준화된 평가 시스템인 ‘수능 점수’와 대학 입시라는 외적 보상에 한정하는 순간 내적 성장은 더 이상 수반될 필요가 없어지며, 외적 보상이 달성되는 순간 학습의 동기 역시 동시에 사라진다. 즉 점수 따기의 수단으로만 해석되는 한, 자기주도 학습은 이미 진정한 의미에서 자기주도 학습이 아닌 것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에게도 실패작으로 여겨진 최악의 공부는 바로 ‘자기’를 상실한 채 수단화된 공부, 내면의 성장과 관계 맺지 못하는 공부였다. 그렇다면 선비들의 공부에서 가장 핵심적인 화두는 무엇이었을까? 그들에게 자기주도적 공부법이란 과연 어떤 의미로 해석되고 실천되었으며 현대의 자기주도 학습과는 어떻게 달랐을까? 또 현대의 수능보다 훨씬 경쟁이 치열했던 과거시험 공부는 선비들의 자기주도적 공부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선비의 자기주도형 공부법의 특징


퇴계와 어느 제자의 일화


어느 날 정유일(鄭惟一)이라는 제자가 스승 퇴계에게 편지를 보내 가난하여 농토를 사고파는 등 사소한 집안일에 신경 쓰느라 공부에 방해가 된다며 고민을 토로하였다. 이에 퇴계는 공부를 일상의 삶과 무관한 것으로 여기는 태도를 꾸짖으며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가난하여 농토를 사고파는 것은 본래 의리에 크게 손상되는 일이 아니며, 값의 고하를 따질 때에 지나친 것을 깎아 알맞은 시세에 따르려는 것도 또한 당연한 이치입니다. 다만 한 번이라도 자기를 이롭게 하고 남을 이기기 위해 부당한 이익을 취하려는 생각이 일어난다면, 이것이 곧 순임금과 도척이 분별되는 분기점인 만큼, 그 순간 반드시 재빨리 정신을 차려 義냐 利냐를 판별하여야 비로소 小人을 면하고 君子가 될 수 있습니다. 굳이 농토를 사지 않는 것만이 고상하다고 여겨서는 안됩니다.”(『퇴계집』, 권 24, 「답정자중」)

여기서 퇴계는 공부의 최종 목표가 ‘일상에서 벗어나 고원한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무의미하고 하찮아 보이는 ‘일상의 삶을 매순간 조화롭게 살아내는 데’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선비의 자기주도형 공부법의 최종 목표: ‘올바른 관계 맺음’


선비들의 자기주도적 공부법의 첫 번째 특징은 공부의 궁극적 목표를 바로 ‘올바른 관계 맺음’에 두었다는 것이다. 일상에서 맺는 모든 관계가 조화를 이루지 못할 때 이는 곧 마음공부에 결함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였으며. 마음공부가 제대로 되었다면 일상에서 접하는 모든 일 처리와 대인관계는 일어나는 그 순간 즉시, 저절로 순리에 맞고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여기서 ‘관계’의 범위는 ‘앎과 삶, 몸과 마음,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모두 아우른다.

이때 ‘올바른 관계 맺음’의 성패를 좌우하는 기로는 다름 아닌 ‘마음’이다. 그 기로는 농토를 사고팔 때 부당한 이익을 취하려는 욕망이 싹트는 찰나 그것을 즉시 알아차리고 포착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려 있다. 마음이 그 찰나를 포착할 수 있는 이유는 마음 안에 ‘관계의 원리[理]’가 본성[性善]으로서 이미 갖추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욕망이 싹트는 순간 즉각적으로 그 원리가 작동하게 하려면 평상시에 그 원리를 보존, 확충하여 늘 마음이 깨어있도록 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특히 발달단계가 낮은 동몽에게 이 ‘마음공부’는 ‘몸과 마음의 관계’에 대한 훈련을 통해 이루어졌다.


‘몸과 마음의 관계’를 위한 공부법


욕망은 몸의 감각기관이 외부의 자극과 접촉할 때 발생한다. 자극을 접촉하는 것은 몸인데 마음에서 욕망이 싹트는 이유는 바로 ‘몸과 마음’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비들의 ‘마음공부’는 항상 ‘몸 공부’와 긴밀히 연동되어 있었다. 다음은 19세기 화서학파의 강학에서 동몽의 하루 일과를 규정한 문서다.


19세기 화서학파의 강학에서 동몽의 하루 일과를 규정한 「동몽정과(童蒙定課)」(출처: 강원대학교 박물관)


독서한 내용을 ‘베껴 쓰는 것’이 매일 동몽들에게 부과된 매우 중요한 과제였다는 사실은 ‘몸공부와 마음공부의 관계’에 대한 유학자들의 믿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베껴쓰기’라는 손동작과 마음의 관계에 대해 조선후기 유학자 이덕무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무릇 글이란 눈으로 보고 입으로 읽는 것이 결국은 손으로 한번 써보는 것만 못하다. 대개 손이 움직이면 마음이 반드시 따르는 것이므로 비록 20번을 읽어 왼다 하더라도 한 차례 힘들여 써보는 것만 못하다.”(『사소절(士小節)』, 권3, 사전(士典)3, 「교습(敎習)」)

여기에는 ‘모든 손동작에는 사유의 요소가 들어 있으며, 모든 손일은 사유에 뿌리박고 있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이를 통해 ‘발달단계에 따라 지식의 의미를 체화시키기 위한 공부법을 어떻게 달리 할 것인가’라는 선비들의 공부법에 대한 고민을 엿볼 수 있다.


‘독서와 예악’: ‘올바른 관계맺음’을 위한 공부의 두 축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옛날의 이른바 학교는 예(禮)를 익히고 악(樂)을 익히는 곳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예도 무너지고 악도 무너져서 학교의 교육은 독서에 그치고 있을 뿐이다’라며 ‘예악’을 상실한 당시 교육을 비판한 바 있다. 독서를 통한 ‘지식 전수’와 ‘예악’을 통한 전인적 성장은 예부터 유학교육의 두 축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서원에서는 비록 ‘악’ 교육은 사라졌지만 독서를 통한 지식의 전수와 의례를 통한 교육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채 시행되고 있었다. 여기서 ‘의례’란 제향의례가 아닌 ‘강학’ 절차 안에서 문자를 매개로 한 지식 전수 뿐 아니라 다양한 ‘강학 의례’들이 통합적으로 시행되었음을 뜻한다. 그 예로 정읍례(庭揖禮)와 상읍례(相揖禮), 경독(敬讀), 수창시(酬唱詩) 등이 있다.


도산서원 정읍례(출처: 문화재청)


의례를 통한 서원의 공부법


정읍례와 상읍례는 매일 아침 공부를 시작하기 전 강당 앞마당에 도열하여 스승과 학생들이 서로 인사를 주고받으며 읍양과 상호존중의 예를 익히는 절차로 경건한 분위기와 매우 까다로운 격식 속에서 수행되었다. 엄격히 규범화된 행위절차에 참여하여 직접 보고, 듣고, 느끼고, 흥기하는 것을 통해 학문 행위에 대한 경건한 태도, 스승과 동학에 대한 ‘상호존중’의 정신을 ‘체험적’으로 습득하고 ‘관계를 훈련’하는 공부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상호존중과 관계’의 훈련을 위한 절차는 ‘스승 존숭’만을 위한 일방적, 수직적인 것이 아닌 ‘상호적’ 의례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스승도 학생들에게 읍양의 예를 행함으로써 ‘학생 존중’의 태도와 정신을 배우고, 학생들 각자는 내면에 진리를 담지한 독립적 인격체로, 예우하고 존중받아 마땅한 대상임을 반복적으로 인식하고 확인하는 의미가 있었다.

정읍례 직후에는 ‘경독’이 시행되었다. 경독은 매일 아침 본격적인 강학에 앞서 서원의 강학이념과 공부법의 핵심을 제시한 글을 경건한 자세로 앉아 다 함께 성독하는 강학 의례이다. 경독의 교재로는 서원의 교육이념과 공부법을 체계적으로 제시한 주자의 ‘백록동규’, 퇴계의 ‘이산원규’, 시공간에서 마음공부의 방법을 제시한 ‘경재잠’, ‘숙흥야매잠’ 등이 활용되었다. 유생들에게 이를 날마다 반복적으로 성독하게 함으로써, 공부의 의미와 목적을 내면화하고 그 방법론을 몸과 마음에 체득시키기 위한 방법이었다.


소수서원 내 백록동서원규(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서원강회의 마지막 절차는 언제나 ‘수창시’로 갈무리되었다. 스승이 운자를 내면 유생들이 강학하면서 느낀 소회 및 배움의 성과, 공부의 뜻과 포부 등을 담아 함께 돌아가며 수창시를 짓고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이처럼 강회의 마지막 절차가 ‘평가나 시험’이 아닌, 스승과 학생이 함께 하는 ‘시 짓기’로 갈무리된다는 사실은 근대교육이 결하고 있는 서원교육의 목표와 함의를 드러내는 중요한 지점이다. 또 이를 반드시 기록에 남겨 자신의 성과뿐 아니라 타인들의 배움의 성과를 공유함으로써 서로를 감동시켜 분발하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마음공부와 과거공부의 조화를 위한 노력


이상과 현실의 괴리: 마음공부 vs 과거공부


그러나 ‘올바른 관계 맺음’이라는 선비들의 공부 목표가 현실에서 언제나 완벽하게 실현되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그중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과거공부였다.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하는 조선에서는 원칙상 지식과 덕성의 결합을 통해 일상에서의 올바른 관계 맺음에 성공한 사람, 즉 ‘수기(修己)’와 ‘내성(內聖)’의 과업을 성취한 사람만이 ‘치인(治人)’과 ‘외왕(外王)’의 자격을 획득할 수 있었다. 그 원칙 아래 국가의 관리를 뽑는 조선의 관리 선발 제도가 바로 과거였다. 그러나 16세기의 관학은 덕성의 함양은 도외시한 채 이미 과거 준비 기관으로 전락하여 심각한 폐해를 드러내고 있었다. 16세기 퇴계 이황은 관학의 무력화, 사림 세력의 성장 등으로 새로운 교육이 요청되던 시대적 배경 속에서, 중국 남송 대 주자의 서원 설립 정신을 계승하여 당시 관학의 폐해와 왜곡상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과거 공부가 아닌 의리 탐구와 내면 수양이라는 목표 아래 향촌 선비들의 자치로 운영되는 새로운 형태의 학교, 즉 서원 설립 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러나 서원에서도 대다수 유생이 과거를 준비하는 현실을 무조건 외면할 수는 없었기에 퇴계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 사이에서 적당한 타협점을 찾고자 하였다.


16세기 과거공부의 명소가 된 소수서원


1543년 풍기군수 주세붕에 의해 조선 최초로 창건된 백운동서원의 교육관은 퇴계와는 조금 차이가 있었다. 백운동서원은 설립된 지 3년 만에 “이 서원에서 공부하면 5년도 안 되어 모두 과거에 급제한다”고 회자될 만큼, 과거 공부를 가장 효율적으로 시키는 과업(科業)의 명소로 급부상하고 있었다. 또한, 1558년 스무 살의 나이에 소수서원에서 과거를 준비하던 학봉 김성일은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과거 공부만 하고 위기 지학을 알지 못한다면 이는 아주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하며 과거에 뜻을 접고 도학을 탐구하기 위해 소수서원을 떠나 도산서당으로 가서 퇴계의 문하가 되었다. 또 조선 중기 이제신은 당시 소수서원을 ‘과거공부를 하는 사람이 아니면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라 칭하며 과거 공부의 명소처럼 인식하고 있었다.

이처럼 16세기 소수서원은 무엇보다 과거 공부를 충실히 수행하는 곳이었다. 이는 ‘제왕학(帝王學)과 치용론(治用論)’의 관점에서, 당시 쇠퇴한 관학을 대신하여 국가의 관리를 길러내는 인재 양성소이자 관학의 보조기구처럼 서원을 인식했던 백운동서원의 설립자 주세붕의 서원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학생들의 공부방, 소수서원의 일신재와 직방재(출처: 한국국학진흥원)


퇴계가 찾은 타협점: 마음공부[道學]와 과거공부[科業]의 조화로운 병행


주세붕과 달리 ‘도학의 탐구와 실천’을 위한 교육기관으로서 서원의 교육 이념을 확립한 사람은 퇴계 이황이다. 그는 서원 교육의 궁극적 목적을 ‘도학의 탐구와 실천’에 두되, 주객과 본말이 전도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도학을 위한 공부를 우선으로 하고 여력이 있을 때 과거공부를 병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후 퇴계의 관점을 계승한 조선후기 대부분의 남인계 서원들은 도학과 과업을 병행하였다. 동시에 ‘어떻게 하면 유생들로 하여금 과거공부를 하더라도 학문의 뜻을 빼앗기지 않고, 도학에 종사하면서도 과거공부라는 현실 문제를 외면하지 않음으로써, 그 두 가지 공부를 조화롭게 실천해가도록 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하였다.


과업과 도학의 조화를 위해 고군분투한 19세기 소수서원의 일화


1826년 11월 소수서원에서는 이가순이 스승의 자리에 앉아 5일간 강회를 열었다. 매일 퇴계의 『주자서절요』와 『통감절요』를 통독하고, 그중 3일은 통독 후 과거시험 과목의 하나인 시부(詩賦) 제술을 시행한 뒤 성적 우수자를 뽑아 방목을 작성하고 시상하였다. 그런데 이때 강회를 파하면서 이가순은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강독하는 사이에 과거 문체로 시부 각 다섯 개의 시제로 시험하였다. 오직 화려한 문장으로 선후를 다투는 것에 대한 경계를 조금 범하였으니 부끄럽고 두려워할 만하다.”

여기서 ‘선후를 다투는 것에 대한 경계를 범하였다’고 한 것은 제술 시험 후 소수의 우등생만 뽑아 시상한 것을 말한다. 이는 본의 아니게 성적순으로 유생들을 서열화하는 결과가 되어, 유생들 사이에 지나친 경쟁심을 유발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이 고백은, ‘과업과 도학의 갈등과 조화’ 사이에서 이를 어떻게 극복해나갈 것인가에 대한 이가순의 고민의 일단을 드러낸다.


시험을 통해 시험의 폐해를 가르치다


1827년 12월에는 강운이 스승을 맡아 소수서원에서 11일간 강회를 개설하였다. 매일 통독과 제술을 병행하고 제술 시행 후 역시 우수자를 뽑아 방목을 작성하였다. 그런데 열흘간 제술에서 유생들의 경쟁이 점점 과열화되자 마지막 날의 제술에서 강운은 ‘시험을 통해 시험의 폐해를 비판하게 하는’ 우의적인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이에 대한 돌파구를 찾고자 하였다. 그는 제술의 시험 문제로 ‘경쟁’, ‘의(義)와 이(利)’를 주제로 ‘쟁(爭)’자로 압운하는 문제를 출제하여 유생들 스스로 경쟁의 폐해에 대해 성찰하게 하는 전략을 구사하였다. 이때 그가 출제한 시험 문제의 전거는 논어와 소학의 다음과 같은 구절이었다.

『논어』의 “군자는 경쟁하는 일이 없으나 반드시 활쏘기에서는 경쟁한다. 읍양하고 올라갔다가 내려와 술을 마시니, 그것이 군자의 경쟁이다.”
『소학』의 “학교는 예의를 가장 우선시 하는 곳인데, 달마다 시험으로 경쟁하게 하니 이는 선비를 가르치고 기르는 도리가 아니다. 청컨대 시험을 과제로 바꿔 혹 이르지 못한 유생이 있거든 학궁에 불러 가르치게 하고, 다시는 점수의 높고 낮음으로 유생들을 정해서는 안 된다.”

그는 ‘군자의 경쟁과 소인의 경쟁이 어떻게 다른지’를 다룬 논어의 구절과 ‘학교에서 선비를 대우하는 도리는 경쟁이 아니라 먼저 예와 의를 익히고 실천하도록 하는 데 있음’을 강조한 소학의 구절을 인용하여 시와 부에서 모두 ‘쟁(爭)’자를 주제로 출제하고 있다. 즉, 당시 과열화된 경쟁에 사로잡혀 있는 자신에 대해 스스로 성찰하지 않고서는 쓸 수 없는 문제를 출제함으로써 유생들에게 제술시험으로 경쟁을 시킴과 동시에 경쟁의 폐해에 대한 글을 직접 쓰게 하여, 스스로 글을 짓는 과정에서 자신의 문제를 성찰하고 자발적으로 해결하기를 꾀한 고도의 전략이었다. 이를 통해, 19세기 소수서원에서는 과업과 도학을 병행하되, 과업이 서원 본래의 교육 목적인 마음공부에 누를 끼치지 않으면서, 두 가지 공부가 최대한 조화롭게 운용되도록 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자기주도 학습’에서 ‘관계의 교육학’으로


조선시대 선비들에게 공부법의 최대 화두는 ‘앎과 삶’, ‘학습자와 마음’, ‘몸과 마음’, ‘과거공부와 마음공부’가 어떻게 하면 조화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에 있었다. 즉, 선비들에게 ‘자기 주도적 공부’란 결국 ‘관계의 교육학’으로 집약된다고 할 수 있다. 진정한 자기주도 학습의 성패도 결국엔 ‘관계’의 문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최근 코로나로 비대면수업이 증가하면서 공교육의 학력 격차 문제가 연일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 해법의 하나로 ‘자기주도 학습 역량’의 중요성이 또다시 부각되고 있다. 그러나 자기주도 학습법이 학생과 학부모들에게 점수 따기의 수단으로 해석되고 소비되는 한, 학습자가 자신의 내면, 세계와 관계 맺으며 계속해서 스스로 성장하는 공부는 어쩌면 영원히 요원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보다는 보다 근본적으로 ‘어떻게 해야 학습자와 지식이, 학습자와 마음이 관계 맺도록 도울 수 있을까’로 관심의 초점이 옮겨가야 하지 않을까.


(출처: 픽사베이)





집필자 소개

김자운
김자운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조선시대 소수서원 강학 연구」로 교육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공주대학교 교육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대표 논문으로는 「조선시대 호계서원의 위상과 강학활동」, 「조선 서원의 강학 의례와 교육적 의미」, 「19세기 소수서원 중용 강회의 특징과 퇴계학의 분화」, 「퇴계와의 대담-우주론에서 교육론까지-」 등이 있으며, 대표 저서로는 『석실서원』(공저), 『조선의 서당에서 배우는 사회적 교육의 지혜』(공저), 『사라진 스승, 다시 교사의 길을 묻다』(공저) 등이 있다. ‘관계의 교육학’을 키워드로 동서양 교육이론의 소통과 접목을 시도하고 있다.
“꿈으로 공부를 완성하다”

장흥효, 경당일기,
1616-05-09 ~ 1616-05-14
1616년 5월 9일, 장흥효의 성리학 공부는 꿈속에서 완성되었다. 아무리 논어와 맹자를 들여다보아도, 이황과 김성일, 정구와 같은 선현들의 글을 들여다보아도 이해되지 못하는 부분이 있는 것은 너무 당연했다. 그는 공부하는 내내 그 문제를 궁극적으로 파헤쳐 보았지만 알 수 없는 것들이 분명히 존재했다.
문제는 선현들에게 직접 질문을 할 수 없다는 데 있었다. 이미 그들은 고인이 된지 오래되었으므로 남아 있는 선현들의 글 속에서 스스로 찾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장흥효에게는 자신만의 독특한 공부 방법이 있었다. 바로 꿈이었다.
하루는 꿈에 학봉 김성일 선생께서 나오셔서 집에서 도(道)를 강론하셨다. 이틀 뒤에는 꿈속에 한강 정구 선생님을 모시고 산에 들어가 약초를 캤다. 다음날에는 꿈속에 북송시대 유명한 유학자였던 소순이 나타나 집 근처의 상이 나서 하관하는데 호상(護喪)을 하고 있었다.
그는 연일 세 번이나 꿈속에 나타난 선현들을 보고 자신의 공부가 미진한 것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한강 정구 선생께서 몸소 약초를 캐서 자신에게 보여준 것은 장흥효 자신의 마음속 병을 고치고자 하는 선생의 깊은 마음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였다. 그래서 장흥효는 삼가 충(忠)과 서(恕) 두 글자로 마음을 치료하는 약방(藥方)으로 삼고 이 마음을 죽을 때까지 계속하면서 성현께서 타일러 주신 말씀으로 자신을 위로하였다.

“오늘 공부한 내용이 꿈에 나오다”

장흥효, 경당일기, 1617-02-20 ~

1617년 2월 20일, 장흥효는 마을 친구들과 더불어 『논어』의 이인 편을 읽고 있었다. 여기서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삼아. 나의 도는 하나의 이치로 만 가지 일을 꿰뚫고 있다”라고 하니 증자가 말하기를, “예”라고 하였다. 처음에는 하나의 도로 만 가지 일을 볼 수 있다는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는 친구들과의 『논어』 강론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잠을 청하는데 꿈에 류성룡 선생이 나타나셨다. 선생께서 당에 앉아 있는데 그는 띠와 주머니를 드리며 예를 갖추자 선생께서 앉으라고 청하셨다. 선생께서는 장흥효가 낮에 공부했던 일을 말씀하셨다. “공자께서 천하의 일을 어찌 감당하셨던가.” 장흥효가 이해하지 못했던 바로 그 내용이었다. 그러자 장흥효가 궁금했던지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하지만 선생은 대답하지 않으시고 장흥효가 생각한 바를 말하도록 했다. 그는 “하늘은 하나일 뿐인데 무슨 번거로움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선생께서는 바로 답하지 않으시고 “예전에 이(理)와 기(氣)로 나누어 말한 사람이 있었다.”고 하셨다.
장흥효는 그제야 공자가 말한 말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즉 기로 말하자면 만 가지 변화가 한결같지 않을 수 있지만 이로 말하자면 굳이 그러한 번거로움 자체가 불필요해지기 때문이다. 그는 꿈속 선생의 말씀을 통해 공자의 말의 의미를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중용혹문을 외우고 다시 중용을 외우다”

남붕, 해주일록,
1922-05-15(윤) ~ 1922-05-19

남붕은 아침마다 어머님께 문안을 드리고 사당을 배알하는 일로 하루를 시작한다. 1922년 윤5월 15일, 이날도 잠자리에서 일어나 세수를 마친 남붕은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어머님께 문안을 올리고 사당에 배알을 했다. 그리고 집을 나섰다. 오늘은 마을 안에 있는 선조의 사당에도 찾아다니며 두루 배알하였다.
집에 돌아 온 남붕은 책부터 펼쳤다. 아침에 어머님께 문안인사를 올리고 사당을 배알한 후에 책을 보면 마음이 차분해 지고 머리가 맑아 글이 더욱 잘 외워지기 때문에 이미 오래된 습관이 되었고, 게다가 아침밥을 먹기 전에 아이들이 공부를 하러 오기 때문에 이 시간은 그야말로 금쪽같은 시간이었다. 요즘 남붕은 『중용혹문中庸或問』을 외우고 있다. 이젠 꽤 많이 외웠기 때문에 며칠 내에 책을 뗄 작정으로 집중하여 외웠다.
아이들을 가르친 후 하루 일과를 마친 후엔 『심경心經』을 읽었는데 내용이 친절함을 자못 깨달았다. 밤에는 온 집안사람들을 가르치고 훈계하였다.
사흘 뒤에 드디어 『중용혹문』 외우기를 마친 남붕은 며칠 전 읽었던 『심경』이 떠올랐다. 과연 이렇게 부지런히 읽고 음미하며 체득한 학문을 한결같이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을지... 이날 밤엔 『중용』을 외우기 시작했다.
5월 19일(윤) 아침 일찍 어머님께 문안드리고 사당에 배알을 한 남붕은 전날부터 외우기 시작한『중용』을 다시 펼쳤다. 아침을 먹기 전에 아이에게 공부를 가르쳐 주고 하루 종일 집안일과 마을 일을 돌본 후에 저녁에 집에 돌아왔다. 밤에 다시『중용』을 외웠다.

“아들이 공부할 책을 직접 쓰다”

금난수, 성재일기,
1585-06-04 ~ 1585-08-12

금난수는 막내아들 금각을 유별나게 아꼈다. 금각은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이미 7살에 『논어』를 읽었다. 그 뒤로도 형들을 따라다니며 공부를 열심히 하는 기특한 아이였다. 금난수는 아이가 어릴 때부터 하루에 책 10장씩을 암기하도록 하였는데, 일견 가혹한 처사인 것 같지만 금각은 책을 곧잘 외우곤 하였다. 금난수는 그런 막내아들을 무척 귀여워하여 임지에도 데려가 여러 어른들에게 인사시켰고, 금각의 총명함을 특별하게 여긴 주위 어른들은 금각이 읽을 책을 직접 구해다 주기도 하였다.
이번에도 금난수는 임지에 금각을 데리고 갔다. 이번에는 『강목(綱目)』, 즉 주희가 지은 『통감강목(通鑑綱目)』을 아들이 읽도록 할 참이었다. 열다섯 살이 되었으니 이제는 좀 어려운 책을 읽을 필요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들은 공부를 하는데 자신이 노는 것도 교육에 좋지 않겠다고 여겼는지 금난수는 『강목』을 날마다 7장에서 10장씩 베껴 쓰기로 하였다. 금각은 아버지의 결심을 듣고 자신은 매일 『강목』을 15장에서 17장씩 외우겠다고 하였다. 두 부자의 굳은 약조는 일단 순조롭게 지켜지는 것처럼 보였다.
금난수는 약속한 날로부터 보름쯤 지난 6월 12일까지 『강목』 1권을 베껴 썼다. 또 12일이 지난 24일에는 2권을 베껴 써서 아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6월 말에서 7월 초까지는 손님도 많고 제사도 있어서 다음 책을 베껴 쓸 때까지는 조금 더 기일이 소요되었다. 금난수가 『강목』 필사를 끝낸 것은 8월 12일이었다. 공무로 바빴기 때문에 아들의 공부를 매일 봐 주지는 못하였지만 아버지가 바쁜 와중에도 매일 조금씩 필사해 나간 『강목』을 읽으며 금각은 아버지의 사랑을 물씬 느꼈을 것이다.

“책을 널어 말리다”

김광계, 매원일기,
1607-05-25 ~ 1607-05-27

1607년 5월 25일, 요 며칠 날씨가 계속 맑았다. 김광계는 오전에 기제사를 지낸 후에 방으로 들어가 방안 곳곳에 있던 서책을 모두 마루로 가지고 나왔다. 그동안 벼르고 있던 책 말리기를 하려는 것이다. 꺼내 온 책을 마루며 마당이며 곳곳에 펴서 널어놓기 시작하는데 덕유(김광업) 형이 와서 찾아 왔다. 덕유는 김광계가 펼쳐 놓은 책을 간간히 넘겨가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돌아갔다.
이틀 뒤에는 집에 있는 옛날 책을 모두 점검하였다. 한동안 펼쳐보지 않은 책들이라 얼룩이 지거나 벌레를 먹은 곳이 없는지 꼼꼼히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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