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시대 무신정권기에 설립되었던 정방(政房)이라는 기구가 있다. 1170년에 정중부(鄭仲夫, 1106~1179) 등 일군의 무장들이 정변을 일으켜 무신들이 중심이 되는 정권을 설립했다. 이후 무신정권은 최고 권력자가 바뀌면서 100년간 이어졌다. 1225년에 당시 무신정권 최고 권력자 최우(崔瑀, ?~1249)는 자기 개인 집에 정방을 차리고 조정의 문관과 무관에 대한 인사행정을 마음대로 했다.
고려 시대에 문관 인사는 전리사(典理司)에서, 무관 인사는 군부사(軍簿司)에서 주관했다. 전리사는 조선 시대 이조(吏曹)에, 군부사는 병조(兵曹)에 해당한다. 최우는 자신이 최고 권력자인데 왜 별도로 정방을 자기 집에 설치했던 것일까? 공적인 국가기관은 권한에 상응하는 책임을 지게 마련이다. 아무리 무신들이 권력을 농단했던 시기라도 인사권이 공적 기관에 있으면 최고 권력자 뜻대로 자유롭게 인사행정을 펼치기는 어렵다. 정방은 최고 권력자가 그 권한에 따르는 책임에서 벗어나 인사를 실시하기 위해서 설치되었다.
무신정권은 100년만인 1270년에 무너졌다. 무신정권기에 높은 원성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 정방이다. 고려 왕조의 정사(正史)인 『고려사(高麗史)』는 정방이 나라에 끼친 해악을 이렇게 말했다.
“권신(權臣)이 사사롭게 정방을 두면서부터 뇌물로 정치가 이루어져 인사고과가 크게 무너지고, 과거시험으로 선비를 뽑는 것도 함께 함부로 하여…고려의 왕업(王業)이 드디어 쇠약해졌다.”
정방이 최종적으로 폐지된 것은 1388년이다. ’위화도 회군’이 단행된 해이고 4년 뒤 새로 세워지는 조선 왕조의 건국 세력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해이다. 말하자면 정방은 실질적으로 고려가 패망할 즈음까지 존속했다. 무신정권이 붕괴한 이후에도 118년이나 유지되었다. 물론 이 기간에 계속 지속되지는 못했다. 워낙 논란이 많은 기구였기에 설립과 폐지를 반복하면서도 끈질기게 되살아났다. 정방이 폐지될 때마다 되살아난 이유는 분명했다. 누가 권력을 쥐든, 권력의 핵심인 인사권을 사유화하고자 하는 유혹이 너무나 강렬했기 때문이다.
조선 왕조 건국은 사유화 되었던 권력을 공적인 것으로 되돌려 놓는 과정이었다. 조선 왕조의 인사행정을 도목정사(都目政事)라고 했다. 조선 시대 문관과 무관은 원칙적으로 1년 중 6월과 12월에 이조와 병조에서 두 번 인사고과를 받았다. 고려 시대 말에 시도 때도 없이 실시하던 인사행정을 정례화했다. 조선 초에 인사행정의 공공성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강화되었다. 중종 때에는 도목정사하는 자리에 사관(史官)이 참석했다. 인사에 관한 참석자들의 논의를 모두 기록하기 위한 것이었다. 요즘으로 말하면 인사에 관한 회의를 모두 촬영하여 기록으로 남겼던 셈이다. 인사권자들끼리의 타협이나 담합이 있을 수 없었다.
언양현감 윤병관의 수령칠사(출처: 유튜브_울산박물관)
도목정사에서 관리들을 평가하는 주요한 기준은 ’수령7사’였다. 조선 시대에 백성들의 구체적 삶에 가장 가까이 있는 권력은 각 고을 수령(守令)이었다. 지금과 달리 조선 시대에 수도 한양의 인구는 조선 전체 인구의 1% 안팎에 불과했다. 때문에 수도 한양에 있는 조정과 국왕의 권력은 백성들 입장에서 추상적인 권력이었다. 고을 수령이야말로 백성들 삶의 현실에 들어와 있는 권력이었다. ’수령7사’는 조정이 수령에게 부여한 7가지 임무였다. 농상성(農桑盛, 농업과 양잠에 힘씀), 호구증(戶口增, 호구를 증가시킴), 학교흥(學校興, 학교를 일으킴), 군정수(軍政修, 군정을 정비함), 부역균(賦役均, 부역 부과를 균등하게 함), 사송간(詞訟簡, 사송을 신속하고 분명하게 처결함), 간활식(奸猾息, 교활하고 간사한 버릇을 그치게 함)이 그것이다.
농상성, 호구증이 ’수령7사’의 첫 두 항목이라는 것은, 조선이 백성들의 민생 개선을 최우선으로 했음을 뜻한다. 농상성은 농업과 길쌈, 즉 백성들의 먹고 입는 문제를 수령이 책임지라는 뜻이다. 먹고 입는 문제가 해결되면 해당 지역에서 사는 백성들 수가 늘게 마련이었다. 호구증은 농상성 성과에 대한 일종의 지표였다.
군정수와 부역균은 국가가 백성들에게 부여하는 가장 무거운 부담 영역이다. 이것은 지금도 과거와 다르지 않다. 병역의 의무를 다하고 세금을 내는 문제이다. 사실 이것은 국가 존립의 문제이기도 하다. 조선은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해서 최대한 가볍고 공정한 방식으로 처리할 것을 수령의 임무로 삼았다.
영천향교 유래루(출처: 문화재청)
군정수와 부역균 앞에 학교흥을 둔 것은 흥미롭다. 태조는 즉위 교서에서 향교 설치를 강조했다. 향교는 전국 각 행정단위에 있는 국립학교이다. 조선 초에는 양반뿐 아니라 양인들도 향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수령들은 향교 설립, 향교 건물의 수리, 향교 학생의 모집과 교육 내용 등을 점검하고 조정에 보고해야 했다. 조선이 향교 설치를 강조했던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근본적인 것은 조선왕조의 백성들에 대한 기본 인식과 관련된다. 조선 왕조는 백성들을 억압적인 지배 대상으로만 보지 않았다. 전근대사회였기에 조선 시대의 백성이 오늘날의 국민과 같을 수는 없다. 하지만 조선은 백성들을 법과 무력으로 다루어야 할 통치 대상 이전에 공적 원리에 근거한 설득의 대상으로 보았다. 전 근대 사회에서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사례이다.
’수령7사’에 사송간과 간활식이 있는 것은, 사회 현실에 두루 퍼져있는 불평등을 조선 조정이 알고 있었고 이를 공정하게 처리하려는 의지를 가졌었음을 뜻한다. 조선 시대 소송에는 사송(詞訟)과 옥송(獄訟)이 있었다. 모두 해당 지역 수령이 주관했다. 전자가 개인 간 사적 분쟁에 대한 것이라면 후자는 강도, 살인, 반역 등 중범죄에 관한 것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사송은 민사사건에, 옥송은 형사사건에 가깝다. 당연히 옥송보다 사송이 훨씬 자주 발생하고 백성들 삶과 더 깊이 연관된다. 사송은 재화의 소유권 분쟁에 대한 것인 전답(田畓)・전택(田宅)・산지(山地)・노비(奴婢) 등에 관한 것과 상속(相續)・처첩(妻妾)・혼인(婚姻)・양자(養子) 등 신분상 문제들이었다. ’간활식’은 각 지역마다 뿌리박은 토호 세력에 대한 억제를 뜻한다. 예를 들어서 어떤 지역에 힘 있는 토호 가문과 힘없는 양인이 그 지역 땅에 대한 소유권을 두고 소송이 벌어졌다고 가정해보자. 여러 가지 조건으로 보아서 토호 가문이 승리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 본래 부자는 권력과 가까운 법이다. 그런데 조선 조정은 이 문제를 처리하는 원칙으로 사송간, 간활식을 가지고 있었다.
경연청의 좌목 현판(출처: 고궁박물관)
수령이 백성의 삶에 밀착해 있기는 해도 국가권력의 공공성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결국 임금이었다. 조선 건국 세력은 건국 당시부터 이를 충분히 알았다. 조선이 건국된 지 7년 후인 1399년(정종 1)의 『정종실록』 기사는 이를 잘 보여준다.
사관(史官)이 비로소 경연(經筵)에 입시(入侍)했다. 처음에는 임금이 사관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문하부(門下府)에서 상소하여 두 번 청하였는데, 소(疏)는 대략 이랬다.
“사관의 직책은 임금의 언동(言動)과 정치의 득실(得失)을 사실대로 써서 숨기지 않고 후세에 전하니, 반성하고 경계할 바를 남기자는 것입니다. 고려 말년에 임금이 술과 여자에 빠져서 비윤리적 행위를 일삼아 부녀자와 내시를 가까이하고 충성스럽고 어진 신하를 멀리했습니다. 사관이 사실대로 쓰는 것을 꺼리어 왕의 곁에 있지 못하게 했으니, 너무나 무도(無道)한 일이었습니다. 마땅히 고려의 잘못된 정치를 거울삼고 관직을 설치한 의의를 생각하여, 특히 사관으로 하여금 날마다 좌우에서 (임금의) 언어 동작을 기록하고, 그때그때의 정사를 적게 하여 만세의 큰 규범을 삼도록 하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지경연사(知經筵事) 조박(趙璞)이 나와서 말했다. “임금이 두려워할 것은 하늘이요, 사필(史筆)입니다. 하늘은 푸르고 높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천리(天理)를 말하는 것뿐입니다. 사관은 임금의 착하고 악한 것을 기록하여 만세에 남기니, 두렵지 않습니까?” 임금이 그렇게 여겼다.
조선 시대에 임금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대개 임금들이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바로 경연이었다. 학술과 문필을 담당한 신하들과 함께하는 임금의 공부 자리이다. 어차피 과거시험 합격이 공부 목적이 아니었기에 유학 경전을 읽으며 그것의 현실적 시사점에 맞춰서 공부하게 마련이었다. 또 술자리나 환담의 자리가 아닌 공부 자리였던 만큼 현실의 다양한 사안들이 가장 원칙적인 기준점에서 검토되었다. 사실 임금에게 경연은 편한 자리가 아니었다. 경연에서 임금은 신하들의 엄숙하고 간절한 권고와 경계를 들어야 했다. 심지어 육체적으로도 힘든 일이었다. 신하들은 순서를 바꾸어 들어오는 데 비해, 왕은 늘 참석해야 했다. 그런데 위 기사는 이미 정종 때부터 그런 공부 모임 자체를 모두 기록하게 했다고 말한다.
왕과 신하의 경연(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지경연사 조박의 말은 한술 더 뜬다. 왕조 국가에서 나오기 어려운 말이다. 왕조 국가란 곧 주권이 왕에게 있음을 말한다. 그런데 그는 임금의 권력 위에 하늘, 천리(天理)를 두고 그것의 지표로 사필 즉 사관의 기록을 두고 있다. 듣기에 따라서는 하극상으로 볼 수 있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공정하고 평평한 현실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현실은 대개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시대와 지역에 따라 기울어진 정도가 다르고 변할 뿐이다. 오늘날이 옛날보다 덜하다고 볼 수도 없다. 오히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해서 부의 불균등은 전근대사회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극단적이 되었다. 국제구호기구 옥스팜(Oxfam)에 따르면 재산의 합이 세계 전체의 하위 50%와 동등한 최상위 부자의 수가 이미 2017년에 8명이었다고 한다.
(출처: 중부일보. 2021.05.12)
조선 시대에 토호 세력의 발호를 경계하여 사송간이나 간활식을 두었던 것이나, 왕조 국가 조선에서 임금의 권력을 억제하려 했던 것의 목적은 분명하다. 기울어진 정도가 더욱 심해져서 현실이 파국에 이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정상적인 권력은 마치 경사진 길에 주차된 차 뒷바퀴를 받치고 있는 받침돌과 같다. 바른 권력의 목적은 공동체를 지키는 것이다. 문제는 그것을 사유화 하면 가장 큰 이득을 얻을 수 있다는 역설 또한 성립한다는 점이다.
시기 |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 장소 | 출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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