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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목가구에 나타나는
아름다운 비례미

목가구, 공간에 스며들다


조선 시대 민가의 주거공간은 크게 안방, 사랑방, 부엌으로 구분할 수 있다. 안채와 안마당으로 이루어진 공간은 부녀자를 중심으로 한 가족들만의 생활이 이루어지는 곳으로 외부와 거리를 둔 공간이며, 사랑채와 사랑 마당으로 구성되는 공간은 외부와 소통될 수 있도록 배치되어 거실 및 손님맞이 공간으로 사용되므로 비교적 개방적이라 할 수 있다. 부엌은 바닥 면이 지면보다 낮고 별도로 독립되어 있어 음식을 만들어 마당을 거쳐 실내로 운반해야 하는 구조로 여기에 따른 적절한 가구가 발달하였다. 이처럼 안방, 사랑방, 부엌 등 각각의 공간에서 사용되는 가구 또한 개성 있는 여러 가지 형태로 그 모습이 나타난다.


광산김씨 쌍벽당종택 원경(출처: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


이곳에 사용되는 가구는 대부분이 화려한 장식이나 조각 등을 배제하고, 자연스러운 나뭇결을 살린 것이 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목재가 나뭇결이 아름다운 이유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지형으로 목재의 수종이 다양하고, 계절의 변화가 뚜렷하여 나이테가 선명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나무로 제작된 조선조 가구에서 드러나는 맞춤의 구조와 실용성은 최소주의의 간결한 면 분할에 의한 잘 정리된 조형미로 장인의 숨결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 가구를 만든 장인들의 노력과 땀이 스며있는 조선조 가구를 마주할 때 우리는 표면으로 드러나는 형태는 물론 내면의 아름다움으로 숙연해지는 마음을 가진다. 그러므로 겉모습의 아름다움만을 강조하기보다는 단순하고 소박한 비례에서 우러나는 내면의 아름다움과 자연에 순응하는 정신과 삶을 가구에 담아내는 것에 가치를 두는 것이 바람직할 수 있다.

유럽이나 중국의 가구는 입식 생활과 넓고 높은 실내공간으로 인하여 가구 또한 크고 육중하며 장식적인 면을 띄고 있다. 반면 한국은 차분하고 아담한 분위기를 선호하는 기질과 온돌로 인한 좌식생활의 영향으로 천정이 낮고 비교적 실내도 좁다. 그래서 가구들은 생활공간을 조금이라도 많이 확보하기 위해 키가 작고 간결하게 제작되었다. 그리고 방의 가운데에 놓이는 가구들도 효율적인 공간 활용성을 위해 이동성을 고려하여 제작되었다. 예를 들어 서안과 연상, 문갑, 반닫이, 소반 등이 모두 키가 작고 세로 폭이 좁은 것은 평좌 자세에서의 실용성을 고려한 결과이다.



목가구에 스며있는 선조의 얼


조선조 가구의 안방 가구를 대변하는 장(欌)과 농(籠)의 기본 틀인 기둥과 쇠목, 동자, 마대, 족대 부분은 느티나무, 참죽나무, 소나무를 주로 사용하였다. 또한 가구의 구성 중 아름다움이 가장 잘 드러나는 앞면의 복판과 쥐벽칸 그리고 머름칸 등은 가장 좋은 나뭇결을 선택하여 행여 단순할 수도 있는 조선조 가구의 조형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반닫이는 두껍고 폭이 넓은 판재로 주로 구성되어 있어 장이나 농보다 그 크기는 작지만 무거운 편이다. 구조는 천판, 앞널, 뒷널, 측널, 문판 등으로 단순하게 제작되어 있지만, 수납을 염두에 둔 짜임새로 그 구조에 맞게 야무지게 구성되어 있다.


반닫이(출처: 국립민속박물관)


문갑(文匣)은 안방에서 사용되던 여성용 문갑과 사랑채에 사용되었던 남성용으로 구분되는데, 전자는 재료와 장식이 화려하고, 후자는 남성의 공간에 어울리게 검소하고 소박하게 제작되었다.


사랑채의 문갑(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안방의 문갑(출처: 경기도박물관)


소반(小盤)은 우리나라가 좌식생활이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가구로 평평한 통판의 널과 여기에 연결되는 다리로 이루어진다. 반의 바로 밑에는 여러 가지 조각이나 구름 문양 등으로 장식한 운각(雲脚)이 있고, 대부분은 다리를 견고하게 잡아 주는 중대(中臺)와 족대(足臺)가 있다.

이동이 쉬운 자그마한 소반이 조선 시대에 사용된 것은 그 당시 남녀유별·장유유서의 유교 사상으로 겸상보다는 독상이 주로 쓰였고, 부엌과 방이 분리되어 있고 규모가 작은 공간적 구조와 좌식생활을 하는 온돌방에 적합하였기 때문이다.

소반의 종류는 산지·형태·용도에 따라 수십여 종으로 분류할 수 있으며, 명칭과 구조가 조금씩 다르게 나타난다. 각 지역은 그 지방에서 생산되는 목재와 생활양식에 따른 지방색을 띠며, 그중에서도 지역성, 형태, 구조 등 특색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 통영반·나주반·해주반으로 각 지역을 대표하는 특색을 지니고 있다.

소반을 만들 때 쓰인 목재는 가래나무·느티나무·오동나무·은행나무·피나무·호두나무 등이 반의 윗면에 주로 사용되었고, 다리에는 단풍나무·버드나무·소나무 등이 많이 쓰였다.


소반 1(출처: 최용신기념관)


소반 2(출처: 미리벌민속박물관)


조선 시대 유교 사상의 윤리관은 그 당시 예술에 판연히 반영되어 있다. 특히 남녀유별의 유교 관념에 따라 주택의 공간구조도 안채와 사랑채로 나뉘었고, 그곳에서 쓰였던 가구들도 제각기 다른 개성을 지니며 발전해 왔다.

조선조 목가구는 우리 선조의 얼이 고스란히 스며있으며, 일상 속에서 사용되고 다듬어지면서 주변 환경에 적합한 비례의 아름다움을 스스로 간직하고 있다. 나지막한 키와 간결함으로 생기는 내부 벽면의 여백과 조화를 이루며, 같은 공간에 있는 다른 기물과도 부담 없이 어우러지도록 제작되어 한국적이면서 단순하고 가지런한 아름다움을 만들어 냈다.

목재는 계절에 따라 수축과 팽창이 커서 함수율이 높거나 폭이 넓은 판재는 뒤틀리거나 갈라지는 등, 변형이 심해 가구의 재료로 사용할 때는 구조적 개선이 필요하다. 이와 같은 이유로 전면의 넓은 면은 좁게 나누어 재구성함으로써 수축과 팽창을 줄였으며, 좁은 면이기에 아름다운 무늿결의 나무를 쉽게 얻을 수 있었다. 또한, 가구 전체에서 받는 하중을 분산시키는 역할도 겸하였다. 이로써 여러 가지 조건에 맞는 구조와 역학을 고려한 시각적 효과를 살린 격조 높은 기법으로 발전되었다.



간결한 선, 정확한 면


사랑방가구는 크지 않은 공간에 단순한 구조, 쾌적한 비례, 간결한 선을 지닌 목가구가 제작되었다. 종류로는 서안, 문갑, 탁자류, 책장, 연적, 향꽂이 등 문방용기가 주를 이룬다. 가구의 배치를 보면 벽면에는 고비와 문갑류 그리고 사방탁자가 배치되어 있고, 아랫목의 보료 앞에는 글을 읽거나 쓰는 용도 외에 손님과 마주 앉은 주인의 위치와 경계를 지켜주는 서안과 그 측면에 문방사우(文房四友)를 넣은 연상(硯床)이 놓였다.

공간 전체와 어떤 부분, 또는 부분들 사이의 크기의 관계가 비례이며, 이 비례의 원리와 깊은 관계를 지니는 것은 균형이다. 균형은 어느 한쪽으로 기울거나 치우치지 않은 고른 모습으로 서로 반대되는 힘이 평형을 유지하는 안정된 상태를 말한다. 이러한 논리에서의 조선조 목가구는 나뭇결의 자연스러움이 많이 나타낼 수 있고, 수직의 상하 대칭은 시각적 착시에 의한 정확한 파악이 어려우므로 좌우대칭을 선호하였다.


사랑방(출처: 『국립민속박물관-National Folk Museum of Korea』, 국립민속박물관, 2009, p.168-169)


사랑방가구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간결한 선과 정확한 면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는 바로 구조적인 측면과도 연관이 된다. 또한 간결한 골격 구조로 선과 면이 만들어 내는 알맞은 비례의 수수한 아름다움은 고요한 안정감을 지니고 있다. 이처럼 선과 면이 주를 이루는 사랑방가구의 구조적인 형태미는 골재와 판재의 짜맞춤에서 파생된 것으로 탁자, 책장 등 골재(骨材)를 기본으로 하는 가구와 농, 문갑, 반닫이, 서안 등 판재(板材)가 주가 되는 가구로 분류할 수 있다.

사랑방에서 사용되었던 가구는 우리가 눈으로 보기에 단순한 형태미를 지니고 있다. 선과 면으로 구성된 요소들은 반복과 대칭적 표현으로 질서와 통일성 그리고 조화성을 함축하고 있어 정돈된 비례의 짜임새 있는 모습을 보인다. 이처럼 비례미를 엿볼 수 있는 면 분할과 대칭의 형태에서는 장식을 최소화하고 순수한 자연의 나뭇결을 살린 우리만의 자연주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책장의 구조는 문변자로 테두리를 두른 복판의 여닫이문이 좌우로 열리며 가로세로 같은 간격으로 면 분할된 여닫이문 양옆으로 쥐벽칸이 있어 문 안쪽으로 공간이 생기는 구조이다. 내부에는 전체적으로 상하를 구분하는 선반이 놓여 있고, 다리와 바닥은 책장의 무게를 고려하여 굵은 기둥으로 다리까지 하나로 연결된 것이 대부분이다. 책장의 가로와 세로의 비율은 1:1~2이다. 이상과 같은 책장의 형태와 구조에서 골재의 선과 판재의 면이 만들어 내는 나눔과 더함의 면 비례를 엿볼 수 있다.


삼층 책장(출처: 2012 국립민속박물관 특별전, 『선의 미감, 목가구』, 2012, p.35)


삼층 책장 내부(출처: 2012 국립민속박물관 특별전, 『선의 미감, 목가구』, 2012, p.35)


서안(書案)은 조선 후기 사랑방 공간에서 꼭 필요한 가구로 선비들의 학문 활동에 필수적으로 사용되었다.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좌식책상의 역할을 하던 서안의 크기는 책 한 권을 펼 수 있을 정도의 작은 크기이다. 서안의 형태는 평평하고 가로로 긴 판재와 좌우 면에 다리 역할의 판재로만 구성되어 단순미를 강조하고 있다. 가로와 세로 폭은 2:1에서 3:1의 비율로 나지막하지만, 안정감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서안(출처: 2012 국립민속박물관 특별전, 『선의 미감, 목가구』, 2012, p.17)



여백과 비례의 정수, 사방탁자(四方卓子)


조선 시대 가구 중 여백과 비례를 대표하는 가구는 당연히 사방탁자(四方卓子)이다. 사방탁자는 수직 방향으로 길게 뻗은 골재 구조 사이에 층널이 끼워진 형태를 지녔고, 층널에 사용된 판재로 상, 하 공간을 나누는 분할의 의미를 드러내었다. 골재의 기둥은 입면(立面)을 열어놓아 수평적 방향으로 주변으로의 공간 확장을 의미하고 있다. 이렇듯 네 기둥과 층널로만 구성된 사방탁자는 사방이 열려 있어 시각적으로 시원하고 그 형태에 따라 다양하게 사용될 수 있다.


사방탁자(출처: 2012 국립민속박물관 특별전, 『선의 미감, 목가구』, 2012, p.49)


조선 후기의 사방탁자에 나타난 조형적 특징은 일반적으로 3∼4층으로 제작되었고, 가로와 세로의 비율은 대략 1:4로 다른 가구에 비하여 폭이 좁고 키가 높은 형태이다. 사방탁자는 면보다는 선을 두드러지게 표현한 가구로 그 구성미는 가느다란 기둥과 가로지른 쇠목의 비례가 우수하고, 장식을 배제한 단순미를 강조하였으며, 여기에 사용된 짜맞춤 기법도 뛰어나 조선 시대의 공예미(工藝美)를 대표하고 있다.

조선조 가구의 미의식에서 우러나는 비례미는 사상적 배경과 함께 많은 연구자에 의해 연구되어왔다. 그동안 진행되어온 연구 결과를 종합해보면, 조선조 가구의 비례미는 자연관을 바탕으로 한 소박함에 기본을 두고 기본적인 아름다움을 강조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인식하는 자연관은 어떠한 원리에 의해 구성되고 있는가에 대한 논리적인 해답을 찾으려는 노력은 상대적으로 부족하기에 앞으로는 이 부분에 관한 연구도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편집자 소개

김정호
홍익대학교 목공예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가구디자인을 전공했으며, 박사는 목재공학으로 충남대학교에서 취득했다. 현재는 (국립)공주대학교 예술대학 교수로 24년째 재직하고 있으며, (사)한국미술협회목칠위원장, (사)한국공예가협회목칠분과위원장, (사)한국가구학회부회장, 공주대학교예술대학학장 및 홍익대학교목조형가구학과 동문회장을 역임했다. 작품경력으로는 개인전 6회 및 기획/초대/단체전에 250여 회 출품했으며, 학술활동으로는 가구/목제품/목재공학/환경 관련 논문 38편이 있다. 현재 활동 중인 위원회는 대한민국명장심사위원회, 공주시명장심사위원회, 충청남도 및 세종시 무형문화재위원회, 조달청 평가위원 등이다.
“동생과 함께 옛 터에 집을 짓다”

노상추, 노상추일기,
1774-01-10 ~ 1774-03-03

노상추와 동생 노억(盧檍)은 새해부터 새집을 짓느라 분주했다. 두 형제가 집을 한꺼번에 지으니 신경 쓸 일도 많고 돈이 한꺼번에 나가게 되어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옛집의 자재를 재활용하는 데에는 한 번에 두 채를 새로 짓는 것이 더 합리적이었다. 노억은 집터를 월판(越阪)에 잡았다고 알려왔고, 노상추는 남자종 일만(日萬)을 점쟁이에게 보내 공사를 시작할 길일을 잡아 오게 시켰다. 점쟁이는 1월 15일이 터를 닦는 데 길하고, 18일이 대들보를 올릴만한 날이라고 점지하였다.

그래서 터를 닦기 전에 먼저 자재부터 준비하기로 했다. 1월 13일에 노상추는 남자종들에게 종기(宗基)에 있는 옛집과 도개(桃開)에 있는 옛집을 헐게 했다. 종기 집에서 나온 목재로는 노상추의 집 곁채를 지을 것이고, 도개에서 나온 자재로는 노억의 집을 지을 예정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에는 공사를 전체적으로 책임질 사람을 정하였는데, 송만(宋萬)이 노상추의 집을, 일돌(日乭)이 노억의 집을 짓게 되었다.

마침내 공사가 시작된 1월 15일, 노억은 남동쪽을 향한 방향으로 집터를 정하고, 터를 닦기 시작했다. 이전에 이곳에 세워져 있던 집은 주춧돌의 방향으로 짐작건대 정남향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다음날에는 노상추도 자기 집의 터를 닦았다. 노상추가 새집을 짓기 시작한 터는 긴 사연이 있는 곳이었다.

노상추의 조부인 노계정(盧啓禎)이 자신의 부모가 돌아가신 뒤 옛집을 헐값에 팔고, 이곳에 있던 초가삼간을 사서 5~6년간 살다가 1725년에 과거시험에 합격하였다. 노계정은 이후 위원(渭原) 군수를 하면서 1737년에 이 자리에 큰 집을 지었고, 그로부터 약 20여 년 후인 1759년에 제사를 지낼 때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큰 집을 헐었다. 그래서 이 터가 공터로 남아 있게 되었으며, 이번에 노상추가 이곳에 다시 거처를 지으려 계획한 것이다.

점지를 받아 놓은 날인 1월 18일에는 차질 없이 노억의 집 대들보가 올라갔다. 노상추도 이틀 후에 기둥을 세우고 들보를 올렸다. 이제 뼈대 공사는 끝났으니 흙을 바르고 기와를 올릴 차례였다. 노상추는 기동(耆洞)의 토공(土工) 정발(鄭發)을 불러와 노상추와 노억의 집 벽과 천장에 흙을 바르게 했다. 흙을 바르고 기와를 이는 작업은 비가 오는 날을 피해서 하다 보니 거의 한 달이 넘게 걸렸다. 집안의 여러 문과 기물을 만드는 목수를 불러온 것은 3월이 되어서였다. 아직도 집이 완성되려면 여러 날을 기다려야 했다.

“기울어 넘어질 것 같은 행랑채를 수리하다”

남붕, 해주일록,
1926-04-23 ~ 1926-04-27

1926년 4월 23일. 남붕은 며칠 전 방구들을 새로 놓는 공사를 하였는데, 이참에 미루었던 집수리를 더 하기로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쓰러질 듯 기울어 있는 행랑채를 수리하기로 했는데, 일이 시작되기 전에 일해 줄 사람과 몇 가지 정해야 할 일이 있어 종일 기다렸다.

다행히 저녁이 다 되어 정 목수가 찾아왔다. 남붕은 정 목수와 공사를 해야 할 행랑채를 살피며 어느 정도 공사를 해야 할지와 치러야 할 비용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합의를 본 후 내일부터 일을 시작하기로 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정목수는 일꾼들을 데리고 남붕의 집으로 와서 집을 고치기 시작했다. 남붕은 그들이 하는 일을 살펴보며 필요할 때마다 일손을 보탰다. 행랑채 공사는 작은 일이 아니었다. 앞 행랑채 4칸이 기울어 넘어져 가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바로 세우려면 기둥부터 새로 세워야 했기 때문이다. 정 목수는 일꾼들과 함께 다 썩은 긴 기둥 10개를 모두 잘라내고 주춧돌 위에 큰 돌을 얹어놓아 튼튼하게 하였다.

1926년 4월 27일 아침을 먹은 후에 정 목수가 돌아가면서 그날 일한 값을 달라고 했다. 남붕은 지난번에 2원을 주었고 이날도 2원을 지급했는데, 정 목수는 8원을 달라고 청하였다. 남붕은 아직 일을 다 마치지 않았으므로 일이 끝나면 나머지 돈을 주겠다고 했다. 정 목수가 일을 잘하고 있긴 했지만, 이런 공사라는 게 일이 다 끝나기 전에 돈을 미리 주는 법은 없었기 때문이다.

“짐승의 털을 넣은 방석을 만들게 하다”

방석(출처: 국립민속박물관) 남붕, 해주일록, 1926-06-21

1926년 6월 21일, 남붕은 언제나 그렇듯이 새벽에 일어나 치성을 드리고 책을 읽고 어머님께 문안을 드리고 사당에 배알을 했다.

날이 어찌나 더운지 밤잠도 설쳤고, 아침부터 땀이 흘렀다. 입맛도 떨어져 겨우 아침을 몇 술 뜬 후 남붕은 아이들을 불렀다. 방에서 사용할 커다란 방석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자루 모양으로 만든 안감 안에는 틈틈이 준비해 다락에 두었던 짐승의 털을 꺼내 잘 펴 넣었고, 겉감은 푸른 베를 준비해 앉거나 눕기에 적당한 크기로 만들게 했다. 잠자리라도 편하면 잠을 설치는 일이 덜할듯해서 시킨 것인데, 아이들도 땀을 뚝뚝 흘리며 바느질을 했다.

남붕은 아이들을 보며 아내 생각이 났다. 아내가 살아 있었다면 미리 살피고 마련해 주었을텐데 이토록 아내의 빈자리가 크다는 것을 갈수록 더 크게 느끼게 되었다.

잠시 지켜보던 남붕은 아무래도 오늘 안에 만들기는 어려울 듯하여 천천히 만들라 이르고 논과 밭을 살펴보기 위해 집을 나섰다.

“종이를 보관할 지통을 만들다”

권별, 죽소부군일기,
1626-08-26 ~ 1626-08-30

1626년 8월 26일, 을축. 맑음. 권별은 용문에 가서 지통(紙桶)을 만들 판자 11립(立)을 떠왔다. 능내 형님이 도촌에 왔기에 가서 그를 만나보았다.

1626년 8월 30일, 기사. 맑음. 초간에 갔다. 새로 지통을 만들었다. 박 좌수 형님이 오셨다. 이술·이망도 왔다.

“불난 집에서 지붕 없이 지내다”

노상추, 노상추일기,
1772-05-14 ~ 1772-06-03

사랑에 앉아 식사를 기다리고 있던 노상추는 벌떡 일어났다. 타는 냄새가 진동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부엌에서 음식을 잘못해서 태우는가 싶었는데, 그 정도 냄새가 아니었다. 창문을 여니 사람들이 불을 끄러 다니느라 분주했다. 노상추는 일단 중요한 문서들과 아이들을 챙겨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다행히 곧 불길이 잡혔고, 노상추와 가족들이 기거하는 건물에는 불이 옮겨붙지 않았다. 하지만 부엌과 연결된 행랑 10여 칸이 다 타버렸다. 이엉을 이어놓은 지붕은 모조리 다 무너져 내렸고, 행랑채 뼈대만 앙상하게 남았다.

노비들이 기거하는 행랑채에 지붕이 없으니 사람이 살 만한 모습이 아니었다. 빨리 새로 지붕을 얹어야 하는데 5월이라 지붕을 덮을 짚이 있을 시기가 아니었다. 마구간 지붕도 모두 타버렸기 때문에 말들은 비가 내려도 비를 피할 수가 없었다. 노상추는 궁리 끝에 차라리 이번에 화재에 강한 기와와 벽돌로 집을 짓기로 했다. 노상추의 옛집 한편에는 오래된 기와가 쌓여 있었는데, 이 기와는 20년 전에 불이 났을 때 역촌(驛村)에서 사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이후로 집안에 초상이 계속 났고, 기와를 얹을 엄두를 못 내서 그저 쌓아두기만 했었다.

일단은 지붕을 무엇으로든 덮어 비바람을 막기는 해야 했다. 노비들의 원성이 자자했기 때문이었다. 노상추는 관아에다가 불에 탄 건물이 수십 칸이라는 내용의 문서를 제출하여 곡식을 담는 데 쓰는 빈 섬 300닢(立)을 내려달라고 청하였다. 일단 이것도 짚은 짚이고, 다행히 여름이니만큼 바람만이라도 임시로 막아두자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관아에서는 고작 15닢을 내려줄 뿐이어서 노상추는 해도 해도 너무한 수령의 처사에 분통을 터뜨렸다. 얼마 전 새집을 짓는 사람은 화재를 당하지도 않았는데 관아에서 빈 섬 300닢을 얻어갔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기에 더욱 화가 났다.

노상추가 화를 내 봤자 관아에서 빈 섬을 더 내려줄 것도 아니었다. 일단 노상추는 집으로 돌아가 집을 짓는 데 쓸 못 등을 만들 야장(冶匠)과 기와를 만들 목수 신덕기(申德器)를 불러왔다. 엿새 만에 기와를 모두 만든 신덕기에게 노상추는 100동(銅)을 주었다. 기와를 이을 개장(盖匠) 소통(小通)은 벽돌이 운반되기 전에 도착하여 일을 바로 시작할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역촌에 있는 기와와 벽돌을 옮겨오게 하고 싶었으나, 당장 급한 일은 지붕보다는 모내기였다.

닷새 후에 드디어 모내기까지 일단락되자 노상추는 동군(洞軍)들에게 역촌의 기와를 옮겨오게 하고, 일단 돌아갔던 개장 소통을 불렀다. 소통은 다음 날 노상추의 집으로 와서 바로 기와 얹는 일을 시작했다. 기와를 얹는 일도 하루 이틀 만에 되는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날씨도 도와줘야 했다. 날이 맑으면 작업이 수월하지만, 비라도 내리면 전혀 작업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노상추의 노비들은 불이 난 이래로 거의 한 달 가까이 지붕 없는 집에서 매일 지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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