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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래할 책

금정연


신문물에 대해 쓰는 데 내가 가장 적당한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겠다. 나는 서른아홉살이고, 직업은 서평가, 백일이 채 되지 않은 아기를 아내와 함께 돌보고 있다. 그전에도 바깥으로 나도는 성격은 아니었는데 지금은 거의 집 안에 틀어박혀 필요한 물건은 인터넷으로 주문한다. 그래봤자 책, 책이랑 책, 또 책, 책과 약간의 식재료가 대부분이긴 하지만.

물론 인생에서 이것이 없던 시절로 돌아갈 수 없어!,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물건들이 내게도 있다. 나를 신세계로 인도해준 문물들이라고 해야 할까. 얼른 떠올려 본 목록은 다음과 같다.


-자동차
-무선 청소기
-블루투스 이어폰


나를 신세계로 인도해준 문물들 : 자동차, 무선 청소기, 블루투스 이어폰
어쩔 수 없이 자동차를 갖게 되었지만, 운전을 하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이 생겼다. /
청소는 더 이상 귀찮은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한 무선 청소기 /
지금은 줄 달린 이어폰을 어떻게 썼나 싶은 생각이 들 만큼 당연한 블루투스 이어폰


작년 여름 인생 첫 차를 샀다. 평소 나는 뒷자석을 선호하는 사람, 운전을 하지 않는 대신 죄책감 없이 택시를 타고 다닌다고 호언하며 [아무튼, 택시]라는 제목의 책을 내기도 했지만 아내가 임신한 이상 더는 승객으로 남아 있을 수는 없었다. 자율주행차를 살 수 있다면 960개월 할부라도 했을 텐데. 대신 나는 전기차도 하이브리드카도 아니고 차선이탈경보시스템은커녕 후방카메라 하나 없는 10년 된 중고 SUV를 구입했다. 그러자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16년 동안 장롱에서 잠자고 있던 운전면허증을 꺼내 지갑에 넣고 운전대를 잡은 다음 브레이크가 오른쪽인지 왼쪽인지 잠시 고민하다가 마지못해 시동을 걸고 도로로 나간다면 아마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었다. 기차가 사람들이 시간을 인식하는 방식을 완전히 바꾼 것처럼, 나는 자동차와 함께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다. 성격이 급해졌고 욕이 늘었다. 그렇다면 내 2009년식 기아 뉴스포티지를 신문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최신식 전자기기로 무장한 요즘 차들보다는 헨리 포드가 1913년 미국 미시건에 설립한 공장에서 처음으로 대량 생산을 시작한 T형 포드에 더 가깝긴 하지만.

포디즘이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영영 바꿔놓기 6년 전인 1907년, 오하이오에 살던 백화점 관리인 제임스 스팽글러는 최초의 휴대용 진공청소기를 발명한다. 그전에도 진공청소기는 있었다. 하지만 크기가 마차만 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집에는 마차를 놓을 만한 공간이 없었다. 스팽글러의 발명품에서는 돈냄새가 났지만 그에게는 제품을 대량으로 생산할 돈이 없었다. 결국 그는 가죽 제품 제조업자였던 윌리엄 후버에게 특허권을 팔아버렸다. 후버는 자신의 이름을 딴 후버 컴퍼니를 세웠고, 그의 이름은 일반명사(와 동사)가 된다.


hoover [ˈhuːvə(r)]
[명사] 진공청소기
[동사] 진공청소기로 청소하다


한편 헤드폰은 1910년 유타주 수력발전소에서 전기기사로 일하던 나다니엘 볼드윈의 부엌 테이블에서 탄생했다. 볼드윈 여사가 남편의 발명품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모르겠다. 최초의 헤드폰은 음악과는 무관한 음성전기신호를 듣는 용도였는데, 볼드윈은 완성된 헤드폰 샘플을 미 해군에 보냈다. 이게 뭐야? 소포를 뜯어본 해군 관계자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모양이 너무 우스꽝스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능은 우습지 않았다. 해군은 즉시 열 개의 헤드폰을 주문했고,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백 개를 추가 주문했다.

흔히 사용하는 형태의 이어폰은 원래 청각장애인을 위한 보청기로 개발되었는데, 1954년 최초의 휴대용 트랜지스터 라디오의 등장과 함께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홀로 응접실 소파에 앉아 눈을 감고 음악을 음미하도록 만들어진 헤드폰과 달리 Regency TR-1과 이어폰만 있다면 어디서든 음악을 감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진정한 이어폰의 시대는 소니가 워크맨을 출시한 1979년부터라고 보아야 한다. 이제 사람들은 워크맨에 연결된 이어폰을 통해 어디서든, 이 부분이 중요한데, 자기가 원하는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길에서. 식당에서. 도서관에서. 사람들은 레너드 코엔을 들었고 블론디를 들었으며 잭슨 파이브를 들었다. 사람들이 음악을 소비하는 방식, 나아가 삶 자체를 바꿔놓은 하나의 혁명이었다.

같은 해, 실내에서도 혁명의 작은 불꽃이 싹을 틔웠다. 블랙앤데커에서 무선 진공청소기를 선보인 것이다. 바로 그 전해에는 제임스 다이슨이 원심분리식 집진 장치를 이용한 청소기 개발에 착수했다. 다이슨은 15년 동안 5127개의 프로토타입을 만들며 시행착오를 거듭한 끝에 1993년 세계 최초로 먼지 봉투가 없는 듀얼 싸이클론 타입의 진공청소기를 완성한다. 후버가 그랬던 것처럼 다이슨은 스스로의 이름을 따 다이슨사을 설립하고 본격적인 무선 청소기의 시대를 준비한다. 아내와 나는 다이슨과 LG 코드제로 A9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후자를 구입했는데, 단순히 모양이 더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사면서도 반신반의했다. 당연히 유선보다는 무선이 편하겠지. 하지만 청소는 본래 귀찮은 일이다. 편해봤자 얼마나 편하겠느냐는 생각이었다. 내 생각이 틀렸다. 나와 아내는 청소를 하겠다고 굳이 마음먹지 않아도 청소를 하게 되었고, 청소는 더이상 귀찮지 않고, 사막의 회전초처럼 집안을 굴러다니던 먼지 덩어리는 자취를 감추었다.

무선 이어폰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헤드폰에 라디오 수신기가 결합된 형태의 제품이 1960년대에 이미 존재했고, 2004년에는 블루투스를 이용한 최초의 헤드폰이 출시됐지만, (귀에 걸도록 되어 있는 흉측한 고리 없이) 오른쪽과 왼쪽이 서로 분리된 진정한 의미의 무선 이어폰은 2015년이 되어서야 등장한다. 온쿄사의 W800BT가 그것이다. 그로부터 1년 후, 애플의 팀 쿡은 키노트에서 에어팟을 발표하지만 사람들은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이번에도 우스꽝스러운 모양이 문제였다.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서점에서 에어팟을 끼고 있는 사람을 볼 때면 사람들은 고개를 돌려야 했다. 물론 웃음을 참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일단 익숙해지자 에어팟(을 비롯한 무선 이어폰)은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고, 이제 아무도 무선 이어폰을 착용한 사람을 놀리지 않는다. 마치 한 번도 그랬던 적이 없다는 듯 너나나나 할 것 없이 무선 이어폰을 끼고 다닌다. 나도 그렇다. 솔직히 말하면 그전까지 주렁주렁 줄이 달린 이어폰을 어떻게 사용했는지도 모르겠다.

이쯤에서 질문을 던져야겠다. 신문물은 언제 신문물이 되는 걸까? 새로운 아이디어가 세상에 나와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결과적으로 그들의 사고와 행동, 습관과 일상을 바꾸게 되기까지는 얼마간의 시간과 노력, 그리고 행운이 필요하다. 그러는 와중에 어떤 것들은 엉뚱하다고 놀림을 받기도 하고 아무런 반향도 일으키지 못한 채 조용히 사라지기도 한다. 그런 질문과 답을 찾는 과정은 때때로 하나의 작품이 되기도 한다. 베르너 헤어조크가 <사이버 세상에 대한 몽상>을 통해 인터넷이 어떤 과정을 거쳐 비로소 신문물이 되었는지 탐구하는 것처럼. 반대로 신문물은 언제 신문물이 아니게 되는지를 물을 수도 있다. 자동차나 진공청소기나 이어폰은 모두 한때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고 두려움에 떨거나 (비)웃게 만드는 신문물이었다. 어느 순간 그것들은 익숙해지고, 일상의 ‘자연스러운’ 일부가 되며, 그때 우리의 삶은 영원히 바뀐다. 정작 우리는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이때 약간의 시차는 있을 수 있다. 누군가에게 신문물인 것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아무 의미 없을 수도 있다. 한편 더는 신문물이 아니게 된 것들이 다시금 우리를 놀라게 하는 때도 있는데, 앞서 말한 유선 청소기(이어폰)와 무선 청소기(이어폰)이 그런 경우다. 선이 사라졌다고 해서 흡인력이 좋아진다거나 음질이 좋아지는 건 아니다. 선의 유무는 본연의 기능을 생각할 때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그것이 전부다! 같은 음악을 듣더라도 유선 이어폰을 통해 듣는 사람과 무선 이어폰을 통해 듣는 사람의 경험은 같지 않다. 다른 경험이 다른 사람을 만든다면 다른 사용자 경험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니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한때 신문물이었다가 신문물이 아니게 된 것은 언제 다시 신문물이 되는가?


기억을 암기라는 노동 없이 기록할 수 있는 신문물 : 일기를 쓴 낱장의 종이를 모아 책으로 엮는 모습
(출처 : 스토리테마파크)


나는 지금 책을 생각하고 있다. 인쇄된 종이를 묶어 낸 책이라는 물건. 한때 책은 드물고 귀한 것이었고 대륙을 넘나들며 신문물을 전파하는 핵심적인 수단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옛말이다. 인터넷의 등장과 함께 책은 구닥다리 신세가 되었고, 합정과 파주 출판단지를 지날 때면 출판인들의 커다란 한숨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트위터와 유튜브가 있는데 책이 다 무슨 소용이냐!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서평가. 밥을 벌기 위해 책을 읽지만, 그렇게 번 돈으로 밥보다 책을 더 많이 사는 사람이다. 내가 궁금한 건 이거다. 과연 책은 소멸할 운명인가? 아니라면, 책은 21세기의 인류에게 다시 한 번 ‘신문물’이 될 수 있을까?

움베르토 에코는 장클로드 카리에르와 나눈 대담에서 책의 운명이 둘 중 하나라고 말한다. 책이 독서의 주요 매체로 남게 되든지, 아니면 책과 비슷한 무언가가 존재하게 될 거라고. 다시 말해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부터 책이 항상 지녀온 특성을 지닌 무언가가 존재하게 된다는 말인데, 에코는 그럴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책은 이미 자신의 효율성을 증명했고, 같은 용도의 물건으로서 책보다 나은 것을 만들어 내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에코는 말한다. 지난 5백 년 동안 책이라는 물건의 형태에는 이런저런 변화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 기능과 구성 체계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책은 수저나 망치나 바퀴, 또는 가위 같은 것입니다. 일단 한번 발명되고 나면 더 나은 것을 발명할 수 없는 그런 물건들 말이예요. 수저보다 더 나은 수저는 발명할 수 없습니다. 에코는 이렇게 덧붙이고 싶어하는 것 같다.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라고.

에코의 말이 맞다. 책은 이미 충분히 휴대하기 좋고, 무선이며, 심지어 충전할 필요도 없다. 만들어진 지 채 몇 년도 안 되는 플로피디크스나 비디오테이프를 (낡은 컴퓨터나 비디오플레이어를 다락방에 모셔두지 않는 한) 읽거나 볼 수 없는 것과는 달리, 우리는 500년 전 구텐베르크가 서양 최초의 금속활자로 인쇄한 책을 여전히 읽을 수 있다. 통신시설이 파괴되면 인터넷은 마비되겠지만 도서관 책장에는 여전히 수많은 책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내가 지금 너무 서평가처럼 말하고 있나? 아니면 단순히 꼰대처럼 말하고 있거나. 오해하면 안 된다. 내가 신문물에 조금 어두울진 몰라도 그렇다고 러다이트는 아니다. 중요한 건 여전히 우리에게 책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엄청난 데이터가 하루에도 셀 수 없이 쏟아지고 또 사라지는 세상에서 지식을 생산하고 기억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여과 작업이 필수적이다. 책이야말로 인류가 여과작업을 위해 사용했던 최적의 매체, 에코의 말처럼 한번 발명되고 나면 더 나은 것을 발명할 수 없는 그런 물건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책은 소멸할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에게 책은 너무 익숙한 물건, 그래서 지겨운 물건, 더는 갱신될 여지나 이유가 없는 물건처럼 느껴진다. 책 자체가 사람들을 다시금 놀라게 하고 새로운 경험으로 이끌어주는 신문물이 되지 못한다면, 책은 보다 덜 효율적이고 인류의 지식과 기억에 장기적으로 별 도움이 되지 않지만 더 매혹적인 신문물들에 자리를 내주고 말 것이다.

한때 전자책이 모든 것을 바꿀 거라는 기대(혹은 우려)가 만연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MP3가 CD를 대체한 것과 달리, 전자책은 종이책을 밀어내지 못했다. 물론 이 자리는 전자책이 지지부진한 이유를 따지는 자리는 아니다. 그래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아직 전자책의 가능성은 충분히 탐구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전자책은 단순히 종이책의 활자를 디지털로 옮겨 놓은 것일 뿐이다. 마치 CD 안의 음악을 MP3 플레이어로 옮겨 놓는 것처럼. 하지만 MP3의 핵심은 CDP 대신 MP3P로 들을 수 있다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있고, 사용자가 직접 편집할 수 있으며, 스트리밍 등을 통해 어디서나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건 모든 디지털 컨텐츠의 기본이다. 하지만 전자책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이러한 가능성이 극히 제한되어 있다.

오해하면 안 된다. 나는 지금 전자책이 책의 미래라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전자책이 종이책을 대체할 수 있다거나 대체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카피레프트와 무한한 공유를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에게 익숙한 책이라는 형식을 다시 생각하기 위해서는, 책이 (책의 내용이 아니라 책이라는 형식과 구조 자체가) 우리를 다시금 놀라게 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탐구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어쩌면 우리는 책을 읽는 새로운 방법 자체를 개발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단순히 내가 조급한 것일 수도 있다. 이게 다 운전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전자책의 역사는 너무나 짧고, 우리는 지금 과도기에 있다. 지금도 누군가는 새로운 책의 가능성을 열심히 탐구하고 있을 것이다.

가장 좋은 책은 아직 읽지 않은 책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읽지도 않을 책을 계속해서 산다. 그러니 나는 기다릴 뿐이다. 새롭게 내 앞에 도래할 또 한 권의 책을.




집필자 소개

금정연
금정연
서평보다 서평 아닌 글을 더 많이 쓰는 서평가
“서당교육을 폐하고 신식교육을 하자는 목소리가 높다”

박한광 외, 저상일월, 1906-06

1906년 6월, 근래 상주에는 면마다 촌마다 학교가 들어섰다고 한다. 상주군수 길영수란 사람이 학교 설립을 담당하는 관리를 현지에 며칠씩이나 유숙시키면서 학교시설을 독촉하였는데, 사람들이 응하지 않아 성사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승지 벼슬을 지낸 정하묵이란 이는 스스로 중학교를 설립한다 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상주의 유약소에다가 소위 보조금이란 것을 냈다고 하는데, 그 금액이 수만금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상주의 유약소에서는 이를 거부하자는 통문을 돌리어 마침내 정하묵의 기도가 중단되었다고 한다. 이 정하묵이란 자는 ‘나는 지금까지 공맹의 학문에 속아왔는데, 이제야 크게 깨달았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도 왕년에는 유학자로 자처했던 인물이었다.
사실 올해 들어 향교나 서당의 교육이 위태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지난 3월 각 읍마다 교육회를 설치한다는 칙령이 내렸는데, 앞으로는 모든 서원이나 서당의 교육은 교육회의 지휘감독을 받는다는 것이 내용이었다. 대구시내에서는 구식 서당 선생을 내쫒았는데, 이후부터는 학당에서 글을 읽는 자가 없다고 한다. 또 안동향회에서는 이 새로운 교육령을 따르지 않을 것을 결의하기도 하였다 한다.

“서울에 여학당이 나타났다고 한다”

박한광 외, 저상일월, 1898-08

1898년 8월, 박주대는 또 한 번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서울에 비로소 여학당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독립협회가 연설회를 개최해 일반인들도 정치에 관해 연설을 할 수 있다는 소식도 놀라웠는데, 이제 여자들도 학문을 배우기 위해 학당에 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참으로 세상이 놀랍게 변해가고 있었다.
여학당의 당수는 완화군의 어머니인 이상궁이라고 한다. 그녀들은 임금에게 상소를 올리고 대궐 문 밖에서 만세를 불렀다. 이에 임금께서 이들의 상소를 들어주겠다 비답을 내리셨다 하는데 당원이 무려 수백 명이나 된다고 한다. 천하에 이와 같이 기괴하고 또 기괴한 일이 만고에 있었겠는가!
그 뒤에 여학당의 수가 천 명으로 늘어났다고 하며, 그 형세가 매우 융성해졌다고 한다. 한편 그들이 올렸다는 상소를 뒤에 구하여 읽어보니, 첫째 여성에게도 관직의 길을 열어 줄 것, 둘째 여자들이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쓰개치마를 없애 줄 것, 셋째 내외를 나누는 법을 없애줄 것, 넷째 남편이 고질병으로 신음할 때 부인이 남편을 버리고 가도록 허락해 줄 것 등이라고 한다.
아! 이 상소문을 읽어보니 세상의 말세가 다가왔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앞의 세 항목이야 천 번 만 번 양보하여 그럴 수 있다고 치지만, 마지막 고질병인 남편을 두고 갈 수 있게 해달라는 것에서는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세상에 남편 된 자로서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예천에도 개화의 바람이 불어오다”

나들이, 《단원 풍속도첩》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박한광 외, 저상일월, 1897-02

1897년 2월, 박주대는 오랜만에 평화로운 일상을 맞이하고 있었다. 작년 병신년 의병이 봉기하고 이를 토벌하기 위해 관군과 일본군이 횡행하였으나, 이제 의병들은 해산하고 이들을 잡기 위한 군대들도 모두 물러갔다. 그리고 조정에서는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하였던 주상께서 드디어 궁궐로 환어하셨다고 한다. 근 몇 년간 조정도 마을도 모두 시끄러웠던 때에는 요즘과 같은 평화로운 일상이 다시 찾아오리라 생각지 못하였다. 이제 불운이 물러가고 태평한 운수가 오기를 기원해 보는 박주대였다.
그런데 근래 들어 예천 고을에도 개화의 바람이 불어오는 듯하였다. 안동이나 예안 일대에는 소매통이 넓은 옛 두루마기를 입는 사람이 많았다. 박주대 역시 옛 두루마기를 만들어 나들이옷으로 삼았다. 그런데 나라에서 소매통이 넓은 옷을 입지 말라고 금지하였을 때에는 모두가 이 조치를 원망하였는데, 막상 의복은 입기 편한 대로 하라는 훈령이 떨어진 뒤로는 거의가 좁은 소매에 새털로 짠 옷을 입고 다니는 자들이 많아졌다. 그리하여 박주대가 입은 넓은 소매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어졌다. 심지어 양반 집안이라 하는 사람들 중에도 그런 옷을 입고 다니는 자들이 심심치 않으니 괴이한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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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일행, 이를 닦는 솔을 선물받다”

배삼익, 조천록, 1584-07-29 ~

배삼익 일행이 늦게 망룡교(莽龍橋)를 출발하여 장가점(章家店)ㆍ신점(新店)ㆍ칠가령(七家嶺)을 지나 칠가(七家)에 있는 유이(劉二)의 집에 유숙하였다. 유이가 이를 닦는 솔을 선물로 주었다.
다음날 오후에 대란하(大鸞河) 가에서 휴식을 하고 배로 양하(兩河)를 지나 저녁에 영평부(永平府) 남쪽 주희등(周希登)의 집에서 유숙하였다. 양하 주변의 전답과 집들이 남김없이 침수되어 있었고 성안도 마찬가지였으며 사망한 여인과 어린아이들도 많았다.
어떤 이는 담장과 벽을 수리하느라 목재를 수습해 가기도 하고 혹은 산에 올라 나무에 둥지를 틀고 거처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직접 본 것들이 너무도 참혹하니, 예로부터 이와 같이 심한 물난리는 없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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