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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애원, 사람을 사랑하는 데에
마음을 둔다

한국사회에서 전통적인 공동체가 무너지고 새로운 공동체가 형성된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고향이라는 개념이 약해지고, 과거의 집성촌과 동족마을을 바탕으로 하는 농촌의 공동체 사회 역시 해체되었다. 기존의 지역 · 혈연 · 학연 등을 매개로 하는 공동체는 점차 약해지고, 사회 활동이나 취미와 같은 새로운 관계망을 중심으로 다양한 형태의 공동체가 형성되고 있다.

특히 공동체의 가장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가족이 가장 큰 변화를 맞이하였다. 가족의 개념은 점차 축소되었으며, 가족을 하나의 생활 단위라는 의미에서 보면 요즈음 흔히 볼 수 있는 1인 가구 역시 가족이라고 할 수 있다. 점차 축소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의 가족 개념과는 달리 과거의 가족 개념은 매우 넓었다. 농업이 중심이 되는 전통사회에서 한 지역의 구성원은 대대로 그 지역에서 살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오랜 기간 동안 다양한 관계를 맺게 되고,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가족과도 같은 유대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가족이라는 개념이 확장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념으로 인해 전통시대의 지역공동체는 마을의 일을 함께 고민하고 해결하였다. 향약, 동계 등 많은 지역공동체들이 존재하였고 오랜 기간 유지되었다. 이런 지역공동체 모임 가운데 조금은 특별한 성격을 지닌 모임이 있었으니 바로 조선시대 경상도 상주(尙州) 지역의 지역공동체인 낙사계(洛社契)와 낙사계에서 운영한 존애원(存愛院)이다.


조금은 특별한 성격의 지역공동체,
낙사계(洛社契)와 존애원(存愛院)



존애원 전경(출처: 한국국학진흥원_스토리테마파크)


존애원은 조선 최초의 사설 의료기관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1885년(고종 22)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濟衆院)이 건립되기까지 건립 목적과 운영에 대해 자세히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사립 의료기관이기도 하다. 고려와 조선에는 혜민국, 혜민서라는 서민을 대상으로 하는 국가 의료기관이 존재하였고, 의술 · 의약이라는 행위가 매우 전문적이며 재료의 구입과 가공에도 제한이 가해지기 때문에 사설 의료기관을 설립하고 운영하기에는 많은 제약이 따랐다. 그렇다면 당시 상주의 사족들인 낙사계원들이 존애원을 설립한 이유는 무엇일까?


조선 중앙군과 왜병의 선봉주력부대가 최초로 싸운 상주 북천 전적지(출처: 상주시청)


존애원은 1599년(선조 32) 정경세(鄭經世)가 주도하여 창건하였다. 이때는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로 조선 사회가 전쟁의 피해에서 헤어나지 못한 시기였다. 특히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하여 한양으로 진군한 경로상에 있던 도시들은 큰 타격을 받았으며, 상주는 그 대표적인 도시라 할 수 있다. 전쟁이 끝난 후 조선에서는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관과 민이 함께 노력하였다. 국가에서는 체제의 회복을 위해 노력하였고, 지역의 사족들은 사회 질서의 복구를 위해 노력하였다. 상주에서는 사족들의 모임인 낙사계를 중심으로 복구 활동이 진행되었다.


존애원(출처: 한국국학진흥원_스토리테마파크)

존애원 3D(출처: 한국국학진흥원_스토리테마파크)

임진왜란 이전부터 상주의 사족들은 다양한 지역공동체[계]를 결성하였다. 몇몇 가문을 중심으로 비슷한 연배가 모인 계가 여럿 존재하였다. 하지만 전쟁 통에 많은 인원이 죽으면서 각각의 계를 유지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임진왜란 직후 여러 계를 합쳐서 하나의 지역공동체를 결성하였고 이를 낙사계라고 하였다. 공동체의 규모와 개념이 확대된 낙사계의 구성원들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상주 지역의 상황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임진왜란 직후 약이 부족한 상황에서 비명에 죽는 일이 허다한 백성들을 위해 의국인 존애원을 설립하였다.

존애원에 대한 기록은 정경세의 절친인 이준(李埈)이 쓴 「존애원기」에 자세히 나타난다. ‘존애원’이라는 이름은 송나라 정호(程顥)의 ‘남을 사랑하는 데 마음을 둔다[存心愛物]’라는 말에서 따왔다. 정경세는 낙사계원들과 힘을 모아 재원과 일손을 마련하였다.


환자를 치료하는 의원(출처: 한국국학진흥원_스토리테마파크)


약장(藥欌)(출처: 국립민속박물관)


목제 약연(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약재는 일손을 동원하여 채집하거나 중국에서 사들였고, 곳간을 지어 보관하였다. 약값을 제대로 받아 원금을 보존하고 이윤을 늘려 재정을 안정시켰다. 방문하는 병자가 늘어나자 집을 지어 숙소로 삼아 점차 존애원은 의국의 모습을 갖추었다. 이런 인프라를 갖추었어도 운영할 인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정경세는 당시 유학자이면서 의술에 뛰어난 성람(成覽)에게 병의 진료와 투약을 부탁하였다. 성람은 임진왜란 직후에 상주로 이주한 인물로 낙사계 회원은 아니었으나 이들의 뜻을 옳게 여겨 힘을 보탰다. 이후 그 효과가 민간에 널리 퍼졌다는 것으로 보아 존애원의 설립은 지역 사회의 구제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의국 · 강학 · 경로연 · 백일장 · 만남의 장소



백일장(출처: 한국국학진흥원_스토리테마파크)


존애원은 의국의 역할뿐만 아니라 강학 · 경로연 · 백일장 · 만남의 장소 등 지역공동체의 다양한 활동에서 활용되었다. 아니 당시 사족들의 모임은 오히려 이러한 활동이 중심이 되었다. 존애원을 건립한 낙사계의 의료 활동이 특이한 경우라 할 수 있다.


이준기의 홍콩 팬들과 대만 팬클럽의 기부 인증사진(출처: 뉴데일리 2021.4.19)


공동체 본래의 목적을 넘어서서 주변 사회의 모습에 관심을 가지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공동체의 성격을 확장하였다고 할 수 있다. 마치 요즈음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의 팬들이 팬 활동을 넘어서서 기부와 사회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모습과 닮았다.


어찌 동포를 구제할 것을 생각하지 않겠는가!



「존애원기」 (출처: 한국국학진흥원_스토리테마파크)


이준은 당시 존애원에 참여한 사람들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남겨 놓았다.

‘불교의 유마힐(維摩詰, 석가의 재가제자)이 관직에 있지 않았으나 오히려 다른 사람의 병을 자신의 병처럼 여길 수 있었는데, 하물며 우리 유학자들은 어떠하겠으며 하물며 다른 사람과 나를 하나로 생각하는 것에 있어서랴. 지금 우리 동년배 여러 사람은 모두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품고 있다.’


다른 사람을 자신과 같이 생각하여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고 있다. 이에 대해 정경세의 사위인 송준길(宋浚吉)이 쓴 행장에서는 밑줄 친 내용이 조금 더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사람들에게 은택을 베풀려는 뜻을 가진 우리들이 어찌 동포(同胞)를 구제할 것을 생각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다른 사람들보다 좀더 가까운 존재로 ‘동포’라는 개념을 쓰고 있다. 송준길이 쓴 ‘동포’라는 표현은 당시 지역공동체에 대한 인식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혈연적 의미가 깊게 내포된 이 표현은 지역공동체 구성원들을 확장된 가족의 개념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낙사계 회원들은 임진왜란이란 가혹한 전쟁의 피해를 받은 상주 지역의 백성들을 동포로 인식하였던 것이다.

한동안 존애원은 상주 사회의 구심점으로 존재하였다. 그러나 점차 조선 사회가 변하면서 지역공동체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조선은 점차 임진왜란의 피해에서 벗어났으며 국가 체제가 복구되는 만큼 존애원의 의료 활동도 점차 축소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준의 조카인 이신규(李身圭)가 존애원의 유생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재원이 탕진되고 각종 기구가 훼손되어 의국으로서의 운영은 이미 어려워졌음이 드러난다. 동시에 상주 사회의 구심점 역할도 서원(書院)과 같은 새로운 지역공동체에게로 넘어가게 되었다. 결국 1782년(정조 6)에 무고로 인해 약방이 철거되고 관련된 각종 기록들이 사라지며 존애원은 의국으로서의 기능은 사라지고 일부 교육의 기능만 유지된 것으로 추정된다.


낙사계에 참여하고 싶었던 정조



정조의 초상(출처: 한국국학진흥원_스토리테마파크)


이준은 「존애원기」에서 ‘이후에 이를 계승한 사람이 이를 지켜 무너지지 않게 하여 의국을 연 뜻에 이를지는 알지 못하겠다’라고 걱정하면서도 곧바로 ‘맹자는 “측은히 여기는 마음[惻隱之心]은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다.”고 말하였는데, 측은한 마음이 사라진 이후에야 이 의국이 없어질 것이다’라고 하여 존애원이 계속 유지될 것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사회는 계속 변하고 공동체 역시 사회의 변화에 따라 변화를 맞이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낙사계 회원들이 존애원을 설립하면서 느꼈던 ‘동포’라는 감정, 공동체 의식의 확대는 이후 다른 형태로 나타난 지역공동체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1797년(정조 21)에 신하에게 존애원에 대해 들은 정조는 낙사계에 자신도 참여하고 싶다고 칭찬하며 존애원의 설립한 뜻을 높게 평가하였다.


주변 사회에 대한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공동체의 증가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혼자서는 살 수 없기에 공동체를 이루고, 공동체는 그 사회의 다양한 요소들이 반영되어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사회의 변화에 따라 사람들의 모이는 방식이나 공동체의 목적 등은 변하기 마련이다. 이미 형성된 공동체가 변화 · 소멸하기도 하며 새로운 형태와 구성원을 가진 공동체가 나타나기도 한다. 우리는 이러한 변화를 아쉬워하거나 기존의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할 수도 있으며, 새로운 공동체의 형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도 있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매우 다양하고 복잡하게 형성되는 현대사회에서의 공동체는 다양한 성격과 형식을 가질 수밖에 없다. 동시에 사회의 변화가 빠른 만큼 공동체의 변화도 빠르게 나타난다. 한국사회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사회의 변화에 따라가지 못한 기존의 공동체 모임에 치이게 되었고, 그 결과 새로운 공동체 모임을 통해 힐링을 추구하고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공동체 구성원들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공동체는 오래 유지되기 어렵다. 존애원과 같이 주변 사회에 대한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모습은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고 생각된다. 앞서 언급한 팬 그룹의 사회적 활동이나 운동을 하면서 쓰레기를 줍는 모임, 요리와 같은 취미 활동을 하며 사회 봉사를 하거나 재능 기부를 하는 모습은 ‘남을 사랑하는 데 마음을 둔다[存心愛物]’는 존애원의 사상과 맞물린다. 이준의 말과는 달리 존애원이 사라졌다고 하여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사회가 변함에 따라 다른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라 생각된다.

변화가 빠른 현대사회에서 코로나19라는 전염병으로 인해 각종 모임이 규제가 되고 있다. 기존의 다양한 공동체가 위기를 맞고 있다. 하지만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를 꾀하는 중이기도 하다. 이제는 온라인 모임, 비대면 모임이 새로운 공동체로 활동하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사회에서 공동체의 역할은 무엇인가라는 고민을 존애원을 통해서 해 보게 된다.




집필자 : 송석현

“존애원, 그 탄생의 시초”

이준, 존애원기, 미상

1598년, 임진왜란은 겨우 끝났다. 그러나 전란이 수습되기도 전에 정치는 또다시 붕당의 세력 싸움으로 정국이 흘러가고 있었다. 정경세(鄭經世), 그는 관직에 몸을 담고 있었지만 그 역시 붕당의 세력 싸움에 밀려, 아니 정인홍(鄭仁弘)에 밀려 조정에서 쫓겨났다. 무엇보다 서애 류성룡도 탄핵을 받고 있었고, 그 역시 사직소를 올리고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류성룡과 정경세는 사제지간이었다. 정경세는 스승의 탄핵을 막지도 못하고, 자기 역시 스승과 함께 탄핵을 받았다. 스승 류성룡은 조정에 나갈 생각 없이 고향인 안동 풍산에 낙향하였다. 그래서 정경세 역시 사직상소를 올리고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1598년 겨울, 정경세는 다시 청송부사(靑松府使)에 임명되었다는 교지가 내려졌지만 벼슬자리에 나가지 않았다. 이후 또다시 벼슬이 내려졌지만 그저 고향 상주에 머물며 마음을 가다듬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정치를 떠나 있어도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은 변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조정에서 이미 녹을 먹었던 것에 크나큰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비록 유학자였지만 보살과 같은 자비심을 지녔고, 세상을 경영하여 백성들을 구할 포부를 지니고 있었다.

“존애원을 설립하다”

이준, 존애원기, 미상

정경세(鄭經世)와 성람(成覽)은 의국(醫局, 의료원)을 세워 각기 약재의 수급과 진료를 맡았다. 우선 정경세는 약재의 수급을 맡았다. 다행히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도와주는 사람들은 이른바 낙사계(洛社契)의 사람들이었다. 낙사계란 명망 있는 선비들의 모임이다. 정경세는 낙사계를 위한 글을 쓰기도 하였다. 낙사계에 모인 사람은 거의 서른 명이나 되었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정경세가 의국을 세워 백성들을 구제하겠다는 뜻에 모두 동의하였다. 그들은 각기 쌀과 포를 내었다. 이것이 의국을 운영하는 기본 자금이 되었다.
정경세는 이를 이용하여 우선 노는 일손부터 모았다. 정경세는 그들로 하여금 우리나라에서 나는 약재들을 채집하게 하였다. 정경세는 또한 중국 약재를 구할 방안을 마련하였다. 중국 약재는 무역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었다. 정경세는 쌀과 포로 중국과 무역을 하여 이를 마련코자 하였다. 일은 순조로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나라 약재는 물론 중국의 약재까지 마련되었다.
약재가 그럭저럭 마련되자 이를 보관하고 출납할 장소가 필요하였다. 정경세는 낙사계로부터 모은 종자돈으로 약재 보관 창고를 지었다. 그리고 성람은 병자들을 진료하기 시작했다. 의국에 대한 소문이 퍼지고 퍼져 진료 받으려는 병자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찾아오는 병자들이 북적였지만 그들을 수용할 공간이 없었다. 정경세는 그들을 위해 다시 집을 짓기 시작했다. 집이 완성되자 이곳은 병사(病舍, 병자들이 머물며 치료를 받는 병동)로 바뀌었다. 이곳에서 성람은 꾸준히 병자들을 진료하였다.

“노비들의 계모임과 싸움, 하늘 두려운 줄 모르고 사건을 조작하다”

김령, 계암일록,
1607-05-22 ~ 1607-06-02

1712년 4월 5일, 박권(朴權)은 아침 일찍 출발하여 함관령을 넘었다. 그런데 고갯길이 높고 가파른 것이 철령보다 훨씬 더했다. 도중에 교체되어 이동하는 길주부사 박내경(朴來卿)을 만나 매우 기뻤다. 함원참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은 홍원현에서 유숙하였다. 이 날은 70리를 갔다. 객사의 벽에 지천(芝川) 황정욱(黃廷彧)과 택당(澤堂) 이식(李植) 등 여러 사람의 천도(穿島)를 읊은 시가 걸려 있었다. 사람들에게 물으니 천도는 홍원에서 동쪽으로 5리쯤 가면 있다고 하여 즉시 가마를 타고 갔다.
이른바 천도는 포구 가에 긴 둑이 있어 가로로 길게 뻗어 있었다. 그런데 둑 가운데 굴이 하나 있었으며, 그 굴은 사방이 다 암석이었다. 한편으로 맷돌에 구멍이 패인 듯하여 대문과 같았으며, 높이는 30자, 폭은 40자 정도였다. 바닷물이 밀려오고 밀려나가는 것이 참으로 특이한 구경거리였다. 조금 남쪽으로 대가 하나 있는데 평평하고 넓어서 수백 명이 앉을 수 있다. 앞으로는 큰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고, 좌우로는 12개의 섬들이 고리처럼 둘러있다. 그 중에 가장 기이하게 생긴 섬이 주도(珠島)라고 하였다. 시를 읊으며 오래 즐기고 돌아와서 지천 황정욱의 시에 차운하여 시를 지었다.
어떤 기생이 시 두루마리[詩輔] 4권을 올리면서 자기는 옛 기생 조씨의 손녀라고 하였다. 대개 참의 윤선도(尹善道)가 광해군 때 상소로 인해 북쪽에 유배되었는데, 기생 조씨가 술을 갖고 와서 위로하여, 이때 말하고 침묵하는 사이에 시대를 비난하는 뜻이 있으니, 윤선도가 5언시 1절을 지어 주었으며,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 북청에 유배되었을 때에 또한 7언시 한 수를 지어 주었다고 한다. 그 후 여러 사람이 그 시에 화답하였다. 박권도 재주 없음을 잊고 그 시 두루마리 끝에 차운하여 시를 지었다.

“달빛이 밝은 어느 여름날, 모두 모여 마을 공금으로 빚은 일곱병의 술을 마시다”

김령, 계암일록, 1605-07-14

1605년 7월 14일, 김령의 동네에서는 오늘 양정당(養正堂)에서 모임을 가졌다. 얼마 전에 마을 공금으로 술을 빚었기 때문이다.
술이 일곱 병, 참석한 사람은 열네 명이었다. 권인보(權仁甫)도 와서 참여했다.
낮엔 흐리고 비가 내렸지만 저녁에는 날이 개고 달빛이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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