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있어 조선 말기는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아무래도 국사 수업이나 근현대사 수업을 들어본 사람들이라면 ‘암울함’이 떠오를 것 같다. 고종 즉위 초반에까지 이어지는 세도정치와 더불어 여러 지역에서 일어났던 민란(民亂), 외세의 침략, 부정부패 등 갈수록 쇠약해지는 조선 왕실과 한반도의 운명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몰려오는 답답함과 스트레스로 책을 덮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사람들도 있었으리라 짐작한다. 그렇다면 조선 시대 내내 위정자(爲政者)들은 두 손 두 발 놓고 아무런 대비책을 마련하지 않았을까? 이번에는 호국보훈의 달인 6월을 맞아 필자가 소장 중인 등투구(藤兜牟) 유물 한 점을 통하여 조선 말기 군사 복식 이야기의 지극히 일부분을 다뤄보고자 한다.
중국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나관중이 쓴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를 읽어보았을 것이다. 삼국지연의는 읽어보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동양인들에게 유명한 책인데, 특히 우리 또래들에게는 어렸을 때부터 즐겨 해오던 역사 시뮬레이션 게임 중 하나로, 밤을 지새우며 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그런데 그 게임을 하거나, 혹은 삼국지 소설을 읽는 사람들은 제갈량(諸葛亮)의 남만 정벌 편을 두고 흥미롭게 보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유독 남만 정벌 편에서는 당시 소설 내용에서 잘 보이지 않던 방식의 판타지적 스토리가 전개되는데, 가령 예를 들면 남만을 정벌하던 도중 더위를 참지 못하고 독천(毒川)에 있는 물을 마시고 병사들이 죽거나 배앓이를 하자 어찌할지 고민하던 제갈공명에게 남만왕 맹획(孟獲)의 형이자 만안은자(萬安隱者)인 맹절(孟節)이 홀연히 나타나 복통을 치료하고 갈증을 해소할 수 있는 냇가를 소개 해준다던지, 당시 진법을 펼치고 정형화된 전투를 펼치던 기존 중국의 전투 방식과는 달리, 목록대왕이 이끄는 맹수부대에 놀라 전의를 상실했던 촉나라 병사들의 모습도 그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장면들이 떠오르지만, 가장 백미(白眉)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맹획이 가장 마지막에 의존한 오과국(烏瓜國)의 대왕 올돌골(兀突骨)이 이끄는 등갑병과의 전투라고 할 수 있다. 등갑군과 전투를 처음 경험한 촉나라 장수 위연(魏延)과 군사들은 적이 도강(渡江)을 해오면서 방패를 뗏목처럼 타고 건너는 기이한 모습을 보고 활을 쏴서 저지하려 하지만, 화살이 튕겨내는 모습을 보고 당황하게 된다. 그러던 도중 상륙에 성공한 등갑병이 촉나라 병사들을 두려움 없이 쓰러뜨리는데, 이에 반격하고자 아무리 창과 칼로 찔러도 뚫리지 않는 등갑옷을 보고 전의를 상실하여 철군하게 된다. 이를 무찌르고자 제갈량은 위연에게 여러 차례 패전을 요구하여 적을 유인하게 되는데, 마지막에 반사곡으로 유인한 제갈량이 화염과 지뢰로 올돌골의 3만 등갑병을 궤멸시키게 된다. 소설을 보면 당시 등갑병들이 착용한 등갑에는 등나무를 엮어 만든 갑옷에 기름을 칠하고 말려서 적의 공격을 막았다고 알려져 있는데, 기름이 불에 약한 것을 알고 있던 제갈량의 술책에 당한 것이었다. 제갈량은 올돌골의 3만 병력을 모두 화염에 불사르게 하면서 이렇게 잔혹하게 사람들을 죽였으니 하늘이 노하여 자신의 수명에도 지장이 있을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왜 필자가 왜 이렇게 독자 여러분들이 뻔히 알고 있는 삼국지의 이야기를 장황하게 했을까? 바로 우리나라에도 등나무로 된 투구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해당 유물은 육군박물관과 필자가 소장 중인 등투구 유물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육군박물관 소장 등투구 유물(출처: 육군박물관(2012), 『육군박물관 소장 군사복식』, 42쪽)
필자 소장 등투구 유물(출처: 필자 촬영 및 편집)
육군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등투구 유물은 육군박물관장을 역임하셨던 故이강칠선생님이 기증하신 것이며, 필자가 소장 중인 등투구 유물은 올해 초 필자가 해외에 있던 등투구 유물을 경매를 통해 사비로 환수해온 것이다. 유물의 상태는 육군박물관의 것이 훨씬 좋은 편에 속하며, 육군박물관의 부관장을 역임하셨던 김성혜 부관장님을 통해 모정(帽頂)이나 제작기법, 태극무늬가 있는 점 등을 통해 모두 동일한 형태임을 확인받아 등투구 유물이 맞다는 것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이러한 유물이 있음을 널리 알리기 위한 마음으로 지난 3월 28일 KBS 프로그램 <TV 쇼 진품명품>에 출연하여 해당 유물을 소개하기도 하였는데, 그렇다면 이 유물이 어째서 등투구인지, 또 어떤 용도로 활용되었는지를 지금부터 여러분들에게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일단 앞서 언급한 삼국지연의의 이야기와 같이 등투구는 중국 남부 지방에서 활용된 양식의 투구이다. 그 까닭은 중국의 남부지방, 특히 사천성 지역이나 베트남, 대만의 기후와도 연관이 있다. 해당 지역들은 매우 덥고 습하며, 비가 많이 오고 수풀이 우거진 지역이 많은 곳이다. 따라서 튼튼하고 무거운 철갑을 입은 군인들이 이 지역에서 전쟁을 하는 것은 매우 불리하다고 볼 수 있다. 이유인즉슨 무거운 철갑은 착용자를 금방 피로하게 하고, 또한 덥고 습한 기후는 갑옷의 소재인 철이 부식되기 쉬운 환경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현지인들은 무거운 철갑보다 현지에서 생산하기 쉽고 가벼우며 시원하며 방어력이 있는 대체품을 찾고자 애썼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등나무, 즉 라탄(Rattan)이었다. 네이버 국어사전에 등나무를 검색해보면 ‘줄기는 윤이 나고 질기며 잘 휘므로 의자나 가구 따위를 만드는데 쓴다.’라고 하고 있다. 하지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같은 등(藤)이라는 한자 표기를 하고 있어도 꽃이 피는 등나무와 우리가 지금 언급하는 라탄이라는 등나무로 품종이 나뉘어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흔히 학교의 쉼터에서 보던 등나무는 라탄이 아니라 꽃이 피는 등나무이며, 가구나 갑옷, 방패를 만드는데 사용되는 등나무는 라탄을 말한다. 그런데 한자의 경우 둘 다 등나무 등(藤)을 쓰고 있으므로 발생하는 오해 중 하나인데, 꽃이 피는 등나무의 경우 현재 중국에서는 차별화를 위해 다화자등(多花紫藤)로 표기하고 있다고 하니 이 부분은 글을 읽기에 앞서 참고하면 좋을 듯하다. 그렇다면 이 등투구의 본격적인 등장은 어디서부터일까? 중국 남부지방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사용하였겠으나, 문헌 기록에서의 등장은 중국 문헌인 『무비지(武備志)』에서 해당 모습이 드러난다.
등두모 도식화(출처: 『무비지』)
등패 복원품(출처: 필자 촬영)
『무비지』에서 묘사된 등투구는 현존하는 유물과 비슷하게 원뿔형의 양식으로 삿갓이 떠오른다. 그러나 현존하는 등투구와는 약간 다른 모습으로 설명되어있는데, 설명에 따르면 등투구는 등패처럼 등나무를 얽어서 가공한 후 이를 짧게 자르고 원뿔 모양으로 엮어서 안쪽에 천으로 만든 모자를 부착했다고 하며, 바깥쪽에는 목면을 두 겹, 안쪽에는 목면 한 겹을 대고 모자 뒤쪽은 터서 착용자의 머리둘레에 상관없이 쓸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척계광이 쓴 『기효신서(紀效新書)』에서도 등투구에 대한 내용이 언급되어있다고 알려져 있으며, 『무비지』와 『기효신서』의 내용을 종합하여 정리한 우리나라의 문헌 기록인 『무비요람(武備要覽)』에서도 등투구가 언급되어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등투구는 언제부터 활용되었을까? 그 이전부터도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나 현재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조선 말기인 고종시기로 보고 있다. 앞서 언급한 조선 말기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서 여러 열강의 침입이 노골화되자 조선은 방비책을 강구하기 위하여 군복에도 개혁을 가했다. 그 중 군복 개혁의 대표적인 사례가 면제배갑(綿製背甲)이라고 할 수 있다. 흥선대원군은 적의 탄환을 막을 수 있는 획기적인 방어구를 개발하고자 김기두(金箕斗)와 안윤(安潤)에게 명하여 총탄을 막을 수 있는 갑옷을 개발하도록 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실험한 결과 무명 12겹을 겹치면 조총 탄환을 막을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이 실험 결과에 따라 조선 조정에서는 무명 13겹으로 겹친 면갑을 제작하여 병사들에게 보급하였다(김병륜 기자, 한국의 군사문화재 순례 32-면갑, 국방일보, 2004.03.23.)고 한다.
면제배갑 복원품(앞/뒤)(출처: 경운박물관(2020), 『조선의 군사복식 구국의 얼을 담다』, 45쪽.)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흥선대원군 조복본 초상화(출처: 필자 촬영)
현재 남아 있는 면제배갑 유물은 총 3점으로 추정되는데 1점은 육군박물관에 있으며, 다른 1점은 미국 해군사관학교박물관과 일본 야스쿠니 신사에도 소장 중인 것으로 확인된다. 특히 국내에 남아 있는 면제배갑은 무명 30겹을 겹쳐서 만든 것으로, ‘13겹의 무명을 겹쳤다.’는 기존 면제배갑의 기록과는 달리 무척 두꺼운 편에 속한다. 면제배갑은 그 이전에 사용되었던 피갑(皮甲)이나 철갑(鐵甲)에 비해 가슴과 어깨, 배, 등 정도를 가려주는 배자(褙子)와 유사한 형상이었으며, 피갑이나 철갑에 비해 제작 단가가 훨씬 저렴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당시 조정에서는 이 갑옷이 방탄복의 효능을 해줄 것을 내심 기대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때까지 필자가 등투구를 말하면서 면제배갑을 언급했을까? 흥미롭게도 조선 시대 군사 복식 전문가인 숭의여대 박가영 교수님의 연구에 따르면 조선 말기 군사들이 여름철에 면제배갑을 입고 군사 훈련에 임할 때 이 등투구를 쓰고 훈련에 임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면포가 총알을 막을 수 있다는 말이 있어 흥선대원군이 이를 시험해 보았다. 면포 몇 겹에 솜을 둔 후 화살을 쏘아보니 모두 꿰뚫어버렸고, 12겹을 겹쳤을 때에야 꿰뚫지 못했다. 마침내 포군(砲軍)으로 하여금 면포 13겹에 솜을 두어 만든 배갑(背甲)과 등나무로 만든 투구[藤兜]를 착용하고 훈련하도록 하니, 한여름에는 군사들이 더위를 견디지 못하여 모두 코피를 쏟았다
(박제형, 『근세조선정감(近世朝鮮政鑑)』)
무더운 여름에 여러 겹의 받침옷을 입고 그 위에 무명 13장이 겹쳐진 면제배갑을 상반신에 걸쳐 입었다는데, 군사들이 얼마나 덥고 훈련이 괴로웠으면 모두 코피를 쏟았다고 했을까? 필자 역시 군대를 다녀왔지만, 무더운 여름에 행해졌던 유격 훈련이나 100km 행군, 또 신병 교육대에서 했었던 훈련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지금의 하계 전투복을 입고 훈련을 했을 때도 지쳐서 탈진하는 동기들이 속출했었는데 조선 시대엔 오죽했을까?
면제배갑에 등투구를 착용한 조선 말기 조총수의 훈련 당시 모습을 그린 상상도(고증: 필자, 그림: 윤형찬)
위 그림은 앞선 기록을 토대로 조선 말기 조총수의 군사 훈련 당시 모습을 상상도로 그려본 것이다. 복식 고증은 필자가 하였으며, 그림은 윤형찬님께서 수고해주셨다. 복식 구성으로는 저고리, 바지, 행전과 버선과 같은 기본 의복을 갖춘 후, 흑색의 더그레를 걸쳤으며 그 위에 면제배갑과 요대를 갖춰 입혔다. 등투구의 경우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유물을 기초로 하여 복원해보았는데 아쉽게도 등투구의 착용 방법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정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그 까닭으로는 현존하는 국내 유물 2점 모두 갓끈(纓)이 망실 된 모습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필자 역시 등투구 유물을 뒤집었을 때 여러 개의 구멍이 존재하는 까닭에 어디에 갓끈이 달려있고, 앞과 뒤는 어디로 구분하며, 또 어떻게 썼을지가 무척 의문스러웠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삿갓처럼 모자 안쪽에 머리둘레에 맞춰 달아놓은 둥근 받침인 미사리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하였다.
등투구와 유사한 중국의 모자 유물(출처 : http://www.militarysunhelmets.com)
그러던 중 우연히 등투구와 유사한 능문(綾紋)과 같은 방식으로 안을 엮은 중국의 모자 유물 사진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해당 유물의 경우 턱끈이 달려있는 상태로 확인되었다. 이를 토대로 자세히 연구해본다면 조선의 등투구 역시 갓끈을 어떻게 결속하였고, 군졸들이 상투 머리 상태에서 어떻게 착용할 수 있었을지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더 명확하고 자세한 고증 자료가 발견되면 공개하려 한다. 따라서 이번 상상도에서는 등투구와 유사한 중국의 모자 유물에 있는 갓끈의 형태를 차용하였으며, 저고리의 경우 광성보 전투 후 미군이 촬영한 사진을 토대로 하여 저고리 소매는 무더운 여름이라는 설정에 맞춰 걷어붙인 모습으로 연출하였다. 그리고 죽관요대를 포함한 조총의 부속구는 왼쪽에 자리한 환도의 패용에 거슬리지 않도록 착용자의 오른쪽에 옆구리에 자리하도록 배치하였으며, 조총의 경우 흔히 ‘신축개비강화고장(辛丑改備江華庫藏)’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 조총 유물이 그 시대와 근접하다고 판단하여 적용하도록 하였고, 끝으로 환도의 경우 경인미술관 소장 군용 환도 유물을 참조하여 적용해보았다. 비록 전투에 참전한 모습은 아니어도 전투를 대비하기 위한 훈련 상황에서는 위와 같은 차림을 하였을 것이다.
이외에도 박가영 교수님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1870년 운현궁에서 별도로 갖춘 군기 중에서 등투구 22부(部)도 포함되어있다는 내용도 있는걸로 봐서는 등투구의 도입은 확실히 대원군이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 이후 외세의 침략을 대비하고자 애쓴 흔적이라는 점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현재로서는 등투구가 전투에 활용되었다고 분명하게 밝힐 수는 없겠으나, 연구 결과로 봤을 때 군사들의 훈련 시 착용하였던 쓰개로는 분명하다. 어쨌든 면제배갑의 일습으로 알려져 있는 면 투구 대신 썼던 등나무 투구는 더위에 지친 군사들에게 그나마 조금이라도 가볍고 시원함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매개체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새로 만든 면제배갑으로 무장한 조선군은 외세의 침략을 거뜬히 막아낼 수 있었을까? 아쉽게도 이후에 이어진 신미양요(辛未洋擾)로 인해 그 개혁의 결과물은 허무하게도 민낯을 드러내고 말았다. 우리가 쓰고 있던 화살이나 조총의 탄환은 13겹 정도가 어떻게든 막아낼 수 있었던 듯하나, 신식 소총으로 무장한 당시 미군의 총탄은 파괴력이 더욱 뛰어난 탓에 착용하고 있던 면제배갑은 무용지물이었다고 한다. 뿐만아니라 무더운 여름에 치러진 전투다보니 앞서 언급한 문헌 기록처럼 조선군은 제대로 싸워보기도 전에 더워서 탈진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군은 불리한 전황에도 불구하고 끝내 적에게 투항하지 않고 중군 어재연(魚在淵, 1823~1871)을 비롯한 장수서부터 군졸들 대부분이 적과 싸우다가 전사하고 말았다. 어찌보면 이는 당시 조선 조정이 서구 열강에서 사용하던 신식 무기에 대해 나름 현실적인 상황과 자신이 갖고 있는 조건을 이용해 대비하고자 하였으나 아쉽게 끝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신미양요 당시 전사한 조선군의 모습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신미양요)
초지진을 점령한 미 해병대의 모습
(출처: https://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0608100016)
그렇다면 만약에라도 『삼국지연의』의 올돌골과 그 부하들의 갖춤처럼 전투 중에 등투구가 활용되었던 적은 없었을까? 아쉽게도 당시 미군이 촬영한 광성보 전투 직후 사진을 보면 면제배갑을 입고 있는 조선군의 시체에 쓰고 있는 쓰개는 면 투구나 전립으로 보이며, 등투구로 추정되는 물품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해당 물품은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전투보다는 훈련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차후 어떠한 자료가 발굴되느냐에 따라서 이 등투구가 언제든지 실전에서 활용되었던 것으로 뒤바뀔 수도 있다.
하지만 비록 그런 자료가 나중에라도 발굴된다고 한들, 이미 지난 역사가 다시 조선군의 승리로 역전되는 일이 발생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우리 조상들과 위정자들이 통상 수교 거부를 표방했던 당시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로써 조선 말기에 있었던 등투구 유물와 관련된 복식에 대해서 간략하게 알아보았다. 해당 유물은 대중들에게도 익숙치 않으리라 생각한다. 필자 역시 우연히 지나가면서 봤던 박물관 전시 도록에 있던 도판과 수년 전 육군박물관 견학 당시 실제로 목도한 것이 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잊혀져 있던 이 유물은 약 150여 년 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우리에게 들려주지 못한 역사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이번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자랑스럽고 위대했던 우리 무기와 복식을 소개한다면 그 또한 매우 뜻깊다고 하겠으나, 암울했던 시기나 패전의 역사로부터 배우는 교훈을 통해 미래에는 더욱더 발전하기 위해서라도 이와 같은 피로 얼룩진 역사를 잊지 말길 바랄 뿐이다. 끝으로 이번 원고를 쓰기 위해 그림 작업을 도와주신 트위터리안 초혼님(윤형찬)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글을 마친다.
시기 |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 장소 | 출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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