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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콘텐츠 제작의 비하인드 스토리 中 談사모(웹진 담談을 사랑하는 사람들) 좌담회




조경란 : 역사전문가.
100호의 편집위원장
(2019~2022년 편집위원 역임)


하원준 : 영화감독.
〈선인의 일기, 한편의 영화를 만나다(1호~20호) 〉, 45호, 97호 집필


조정미 : 콘텐츠 전문가.
10호, 32호, 38호, 45호, 57
75호 집필


정용연 : 만화작가.
〈화백의 담화(13호~24호) 〉
〈이달의 일기(51~76호)〉집필


강선주 : 시나리오 작가.
46호, 70호, 78호 집필
〈(1회) 영화 시나리오 공모전〉 대상


정재석 : 한국국학진흥원 콘텐츠정보팀. 웹진 담談 총괄


임근실 : 한국국학진흥원 콘텐츠정보팀. 웹진 담談 기획


박나연 : 한국국학진흥원 콘텐츠정보팀. 웹진 담談 기획






박나연

하원준 감독님과 강선주 작가님에게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두 분 모두 저희 스토리테마파크와 연관이 깊은 분들이십니다. 하원준 감독님께서는 웹진 담담의 제1호부터 참석해주셨고, 강선주 작가님께서는 대학생 공모전 멘토로 꾸준히 참석중이시며, 제1회 시나리오 공모전 대상 수상자 분이십니다. 그렇다보니, 저희에 대한 애정도 남다르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시나리오를 쓰시는 입장에서 두 분께 이런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역사 소재를 가지고 시나리오를 쓰신다면 혹시 생각해 두신 배우분이 있으신가요? 염두에 두신 배우분이 있으시면 살짝 말씀 부탁드려도 될까요?


강선주

저의 짧은 경험상 캐스팅은 시나리오를 쓰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든 일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누구든 해주시기만 하신다면 정말 감사할 것 같습니다!!

하원준

앞서 말씀드린 류작을 주인공으로 한 토호세력과의 싸움을 다루는 이야기를 하게 된다면, 류작의 역할로 어울리는 배우는 〈조진웅〉입니다.



조진웅 배우(출처: SBS,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 2011)



역사왜곡을 비껴가는 노하우


박나연

다음은 역사 소재의 시나리오를 쓸 때, 창작자로서의 고민에 대한 질문입니다. 앞서 조경란 선생님에게 드린 질문의 연장선일 수 있는데요. 시나리오를 쓸 때 창작자로서 사실과 상상이 충돌하는 부분이 있으실 것이라 생각이 됩니다. 이럴 때, 창작자로서 역사왜곡에서 벗어날 수 있는 본인만의 방법이 있을까요?

하원준

먼저, 기록된 역사를 살펴보고, 기록에서 극적인 사건이 무엇인지 정하게 됩니다. 이때, 기록이 없거나, 빈약할 때는 기록에 대립되지 않는 조건 하에 극적인 사건을 허구적으로 만들어냅니다. 저는 이를 기록과 기록 사이의 허구 스토리 창작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스토리는 마치 샌드위치를 만드는 것과 비슷합니다. 두 개의 빵은 기록이고, 그 안의 내용은 허구 창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기록을 흔들리지 않는 중심으로 위치해두면, 역사 왜곡보다는 스토리의 픽션을 강조하는 창작이 될 수 있습니다.

강선주

오! 이건 정말 어려운 질문인 것 같습니다.
사실상 창작자들에게 역사 왜곡은 어쩔 수 없는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정도의 차이일 뿐이죠. 대중들은 시대극을 통해 재미있게 재해석한 역사를 보고 싶어 합니다. 오직 진실만이 궁금했다면 영화나 드라마가 아니라 역사책이나 다큐멘터리를 찾아봤을 테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진실과 왜곡 사이의 허용 가능한 기준을 잡는 것이 어렵습니다.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 2012



지금까지 많은 시대극들이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영역의 앞뒤 상황으로 유추하고, 공백의 시간을 상상력을 발휘하여 창작하는 방식으로 왜곡을 피해갔습니다. 대표적인 작품이 〈대장금〉과 〈광해, 왕이 된 남자〉입니다. 하지만 늘 이렇게 피할 수만은 없는 법입니다. 그래서 가장 선행되어야 하는 일은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창작자는 자신이 다루는 소재에서 역사를 기반으로 한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에 대해 확실히 인지를 하고 있어야합니다. 그리고 진실과 다르게 창작된 부분에 대한 이유와 타당성이 존재해야 합니다. 재밌어서, 웃겨서라는 감정적 이유의 왜곡은 질타의 대상이 되곤 합니다. 창작일지라도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이유를 뒷받침되어야 관객들은 설득시킬 수 있지 않을까요.



선인의 일기와 영화가 만나는 흥미로운 소재


박나연

하원준 감독님께선 1화~20화까지 [선인의 일기, 한편의 영화를 만나다]를 연재해주셨는데요. 1화 서찬규가 매산 홍직필 선생을 찾아뵙고 사제지간의 관계를 맺는 내용을 영화 〈굿윌헌팅〉과 연관하여 설명해주신 것을 시작으로 조선의 목수와 피노키오 제페토 할아버지의 만남까지 총 20편의 선인의 일기와 현대 영화를 소개해주셨습니다. 개인적으로는 12화 조선의 여인에서 고단한 조선의 여성을 위로하는 의미로 소개해주신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이 제일 기억에 남습니다.

과거 일기와 현대 영화의 접목이 매우 흥미로운데요. 연재하신 내용 외에 선인의 일기와 영화가 만나는 흥미로운 소재를 하나 더 소개해주세요.

하원준

하나의 소재를 선택한다면, 경상감사 조재호의 영영장계등록에 기록된 1751년 안음현 살인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건의 내용과 사건 해결의 과정이 흥미로웠고, 이 사건은 인기 드라마였던 〈비밀의 숲〉에서 검사 황시목의 치밀하고, 촘촘한 수사를 떠올리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처럼 진실의 입체성, 시점과 시각의 차이에 의한 사건 본질의 해석을 생각하게 해주었습니다.



드라마 〈비밀의 숲〉, 2017(출처: tvN)



〈수운서생〉(제1회 영화 시나리오 공모전 대상작)의 제작과정


박나연

강선주 작가님께선 제1회 영화 시나리오 공모전의 대상(수운서생)을 수상하셨는데, 이후 제작과정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제1회 전통 기록문화 활용 영화 시니라오 공모전〉 대상 수상



강선주

〈수운서생〉은 현재 쇼박스에서 판권을 구입한 상태입니다. 〈수운서생〉은 애정이 많이 담긴 작품이라 저도 빨리 진행이 되면 좋겠지만, 현재 제가 다른 작품을 진행하고 있는 상황이라 조금 늦어지고 있는 상태입니다. 영화 시나리오로 작성된 〈수운서생〉은 아마도 드라마로 매체를 변경될 가능성이 크며, 내년에는 대본화 작업에 들어가지 않을까 예상하고 있습니다.



78호 〈고백〉의 실제 모델


박나연

강작가님께서는 78호의 원고에서 한 사건을 등장인물(국왕, 중전, 좌의정, 후궁, 에필로그 새 국왕까지)의 시선에 따라서 이야기를 써주셨는데요. 이 원고의 등장하는 인물들의 실제 모델은 누구인가요?



웹진 담談 78호 〈숨겨진 빌런〉(출처: 한국국학진흥원_스토리테마파크)



강선주

저는 ‘숨겨진 빌런’이라는 주제로 〈고백〉이라는 이야기를 창작하였는데요, 그 이야기의 실제 모델은 매우 많습니다. 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기도 하고,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캐릭터이기도 하고, 역사 책 속 누군가이기도 합니다.

시대극의 매력은 과거를 통해 현재를 풍자할 수 있다는 것, 같은 사실일지라도 누구의 시선으로 상황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극명하게 다른 해석을 할 수 있다는 점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백〉은 진짜 진실보다 각자의 가치관 안에서 내리는 결론이 더 큰 진실이 된다는 메시지를 담고 싶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주변에는 많은 루머들이 떠돌고 있습니다. 우린 진짜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아마 그런 걸 거야.’라는 식의 개인적 진실을 가지게 되겠죠. 다만 슬픈 것은 그런 개인적 진실들이 시간이 지나면 필요에 의해 정치적으로 이용된다는 사실입니다. 그 사람들이 바로 ‘빌런’이겠죠. 빌런들은 ‘진짜 진실’보다 필요에 의해 ‘각색된 진실’로 사람들을 현혹합니다. 그것이 현재 우리의 상황이지 않을까요? 저는 이러한 상황을 과거의 왕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이용해 풍자하고 싶었습니다.



역사 만화의 작업 방식과 고증


박나연

정용연 작가님께 만화(웹툰)의 제작 방법에 대한 소개를 부탁드리고 싶은데, 독자들을 위해 작업하실 때 어떻게 하시는지, 진행 방식에 대한 간략한 설명 부탁드릴게요.



웹진 담談 19호 〈휴가〉_친정 나들이(출처: 한국국학진흥원_스토리테마파크)



정용연

저는 시대에 뒤떨어져서인지 아직까지 출판만화를 그리고 있습니다.

웹툰을 창작의 방식으로 삼고 있진 않아요. 다만 필요에 따라 웹툰을 그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출판만화에 있는 컷들을 편집하여 스크롤로 만들지요. 앞서 이야기한 “친정 나들이”가 그렇습니다.

박나연

네이버나 다음 웹툰, 카카오페이지 등에서 다양한 역사소재 웹툰이 많은데요. 네이버 웹툰에는 무협/사극이란 장르로 6편의 웹툰이 연재되고 있고, 카카오웹툰에도 매화꽃그늘, 바리공주, 서천화원 등의 역사 소재 웹툰이 연재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역사 소재 웹툰은 판타지적 요소가 가미되며 대중이 흥미로워하는 소재라 꾸준히 많은 작품이 연재되는 것 같습니다. 웹툰이란 분야에서 ‘역사’ 소재가 유행하는 혹은 각광받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정용연

역사가 유행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웹툰이 아닌 만화, 소설, 영화, 드라마 등에서도 역사를 소재로 한 작품들이 많이 발표되고 있지요. 왜냐면 역사는 콘텐츠의 보고니까요. 월탄 박종화가 역사소설가로 기억되듯 저 역시 역사만화가로 자리매김 하고자 합니다.

박나연

현재 진행하고 있는 전쟁 관련 역사 만화를 작업하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전쟁에 대한 소재로 그리신다면 갑옷 등의 복식, 무기류, 전투방법 등 시대적 고증이 많이 필요로 할 것 같다고 생각이 됩니다. 이와 같은 역사적 고증은 주로 어떤 방식으로 해결하시는지 궁급합니다.



『화력조선』(출처: 국립진주박물관)



정용연

얼마 전 진주박물관에서 출간한 『화력조선』 같은 도감을 사보기도 하고 전쟁 박물관에 가기도 합니다. 전쟁 관련 유튜브 방송을 보기도 하지요. 역사 만화를 그리는 동료 작가들이 고증오류를 짚어주기도 하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어차피 당시대를 살아보지 않은 이상 완벽한 고증은 할 수 없지요,

박나연

주로 참고하는 자료가 있으실까요?

정용연

고전번역원에 들어가 자료를 찾아보곤 합니다. 2019년 출간한 “목호의난”을 그릴 땐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다운받아 모니터에 띄워놓고 작업 했습니다. 조선시대를 무대로 한 작업을 할 땐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찾아보곤 하지요. 책을 살까 싶었지만 굳이 살 필요가 없더라고요.




* 다음호에 계속




“동생과 함께 옛 터에 집을 짓다”

노상추, 노상추일기,
1774-01-10 ~ 1774-03-03

노상추와 동생 노억(盧檍)은 새해부터 새집을 짓느라 분주했다. 두 형제가 집을 한꺼번에 지으니 신경 쓸 일도 많고 돈이 한꺼번에 나가게 되어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옛집의 자재를 재활용하는 데에는 한 번에 두 채를 새로 짓는 것이 더 합리적이었다. 노억은 집터를 월판(越阪)에 잡았다고 알려왔고, 노상추는 남자종 일만(日萬)을 점쟁이에게 보내 공사를 시작할 길일을 잡아 오게 시켰다. 점쟁이는 1월 15일이 터를 닦는 데 길하고, 18일이 대들보를 올릴만한 날이라고 점지하였다.

그래서 터를 닦기 전에 먼저 자재부터 준비하기로 했다. 1월 13일에 노상추는 남자종들에게 종기(宗基)에 있는 옛집과 도개(桃開)에 있는 옛집을 헐게 했다. 종기 집에서 나온 목재로는 노상추의 집 곁채를 지을 것이고, 도개에서 나온 자재로는 노억의 집을 지을 예정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에는 공사를 전체적으로 책임질 사람을 정하였는데, 송만(宋萬)이 노상추의 집을, 일돌(日乭)이 노억의 집을 짓게 되었다.

마침내 공사가 시작된 1월 15일, 노억은 남동쪽을 향한 방향으로 집터를 정하고, 터를 닦기 시작했다. 이전에 이곳에 세워져 있던 집은 주춧돌의 방향으로 짐작건대 정남향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다음날에는 노상추도 자기 집의 터를 닦았다. 노상추가 새집을 짓기 시작한 터는 긴 사연이 있는 곳이었다.

노상추의 조부인 노계정(盧啓禎)이 자신의 부모가 돌아가신 뒤 옛집을 헐값에 팔고, 이곳에 있던 초가삼간을 사서 5~6년간 살다가 1725년에 과거시험에 합격하였다. 노계정은 이후 위원(渭原) 군수를 하면서 1737년에 이 자리에 큰 집을 지었고, 그로부터 약 20여 년 후인 1759년에 제사를 지낼 때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큰 집을 헐었다. 그래서 이 터가 공터로 남아 있게 되었으며, 이번에 노상추가 이곳에 다시 거처를 지으려 계획한 것이다.

점지를 받아 놓은 날인 1월 18일에는 차질 없이 노억의 집 대들보가 올라갔다. 노상추도 이틀 후에 기둥을 세우고 들보를 올렸다. 이제 뼈대 공사는 끝났으니 흙을 바르고 기와를 올릴 차례였다. 노상추는 기동(耆洞)의 토공(土工) 정발(鄭發)을 불러와 노상추와 노억의 집 벽과 천장에 흙을 바르게 했다. 흙을 바르고 기와를 이는 작업은 비가 오는 날을 피해서 하다 보니 거의 한 달이 넘게 걸렸다. 집안의 여러 문과 기물을 만드는 목수를 불러온 것은 3월이 되어서였다. 아직도 집이 완성되려면 여러 날을 기다려야 했다.

“기울어 넘어질 것 같은 행랑채를 수리하다”

남붕, 해주일록,
1926-04-23 ~ 1926-04-27

1926년 4월 23일. 남붕은 며칠 전 방구들을 새로 놓는 공사를 하였는데, 이참에 미루었던 집수리를 더 하기로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쓰러질 듯 기울어 있는 행랑채를 수리하기로 했는데, 일이 시작되기 전에 일해 줄 사람과 몇 가지 정해야 할 일이 있어 종일 기다렸다.

다행히 저녁이 다 되어 정 목수가 찾아왔다. 남붕은 정 목수와 공사를 해야 할 행랑채를 살피며 어느 정도 공사를 해야 할지와 치러야 할 비용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합의를 본 후 내일부터 일을 시작하기로 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정목수는 일꾼들을 데리고 남붕의 집으로 와서 집을 고치기 시작했다. 남붕은 그들이 하는 일을 살펴보며 필요할 때마다 일손을 보탰다. 행랑채 공사는 작은 일이 아니었다. 앞 행랑채 4칸이 기울어 넘어져 가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바로 세우려면 기둥부터 새로 세워야 했기 때문이다. 정 목수는 일꾼들과 함께 다 썩은 긴 기둥 10개를 모두 잘라내고 주춧돌 위에 큰 돌을 얹어놓아 튼튼하게 하였다.

1926년 4월 27일 아침을 먹은 후에 정 목수가 돌아가면서 그날 일한 값을 달라고 했다. 남붕은 지난번에 2원을 주었고 이날도 2원을 지급했는데, 정 목수는 8원을 달라고 청하였다. 남붕은 아직 일을 다 마치지 않았으므로 일이 끝나면 나머지 돈을 주겠다고 했다. 정 목수가 일을 잘하고 있긴 했지만, 이런 공사라는 게 일이 다 끝나기 전에 돈을 미리 주는 법은 없었기 때문이다.

“짐승의 털을 넣은 방석을 만들게 하다”

방석(출처: 국립민속박물관) 남붕, 해주일록, 1926-06-21

1926년 6월 21일, 남붕은 언제나 그렇듯이 새벽에 일어나 치성을 드리고 책을 읽고 어머님께 문안을 드리고 사당에 배알을 했다.

날이 어찌나 더운지 밤잠도 설쳤고, 아침부터 땀이 흘렀다. 입맛도 떨어져 겨우 아침을 몇 술 뜬 후 남붕은 아이들을 불렀다. 방에서 사용할 커다란 방석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자루 모양으로 만든 안감 안에는 틈틈이 준비해 다락에 두었던 짐승의 털을 꺼내 잘 펴 넣었고, 겉감은 푸른 베를 준비해 앉거나 눕기에 적당한 크기로 만들게 했다. 잠자리라도 편하면 잠을 설치는 일이 덜할듯해서 시킨 것인데, 아이들도 땀을 뚝뚝 흘리며 바느질을 했다.

남붕은 아이들을 보며 아내 생각이 났다. 아내가 살아 있었다면 미리 살피고 마련해 주었을텐데 이토록 아내의 빈자리가 크다는 것을 갈수록 더 크게 느끼게 되었다.

잠시 지켜보던 남붕은 아무래도 오늘 안에 만들기는 어려울 듯하여 천천히 만들라 이르고 논과 밭을 살펴보기 위해 집을 나섰다.

“종이를 보관할 지통을 만들다”

권별, 죽소부군일기,
1626-08-26 ~ 1626-08-30

1626년 8월 26일, 을축. 맑음. 권별은 용문에 가서 지통(紙桶)을 만들 판자 11립(立)을 떠왔다. 능내 형님이 도촌에 왔기에 가서 그를 만나보았다.

1626년 8월 30일, 기사. 맑음. 초간에 갔다. 새로 지통을 만들었다. 박 좌수 형님이 오셨다. 이술·이망도 왔다.

“불난 집에서 지붕 없이 지내다”

노상추, 노상추일기,
1772-05-14 ~ 1772-06-03

사랑에 앉아 식사를 기다리고 있던 노상추는 벌떡 일어났다. 타는 냄새가 진동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부엌에서 음식을 잘못해서 태우는가 싶었는데, 그 정도 냄새가 아니었다. 창문을 여니 사람들이 불을 끄러 다니느라 분주했다. 노상추는 일단 중요한 문서들과 아이들을 챙겨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다행히 곧 불길이 잡혔고, 노상추와 가족들이 기거하는 건물에는 불이 옮겨붙지 않았다. 하지만 부엌과 연결된 행랑 10여 칸이 다 타버렸다. 이엉을 이어놓은 지붕은 모조리 다 무너져 내렸고, 행랑채 뼈대만 앙상하게 남았다.

노비들이 기거하는 행랑채에 지붕이 없으니 사람이 살 만한 모습이 아니었다. 빨리 새로 지붕을 얹어야 하는데 5월이라 지붕을 덮을 짚이 있을 시기가 아니었다. 마구간 지붕도 모두 타버렸기 때문에 말들은 비가 내려도 비를 피할 수가 없었다. 노상추는 궁리 끝에 차라리 이번에 화재에 강한 기와와 벽돌로 집을 짓기로 했다. 노상추의 옛집 한편에는 오래된 기와가 쌓여 있었는데, 이 기와는 20년 전에 불이 났을 때 역촌(驛村)에서 사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이후로 집안에 초상이 계속 났고, 기와를 얹을 엄두를 못 내서 그저 쌓아두기만 했었다.

일단은 지붕을 무엇으로든 덮어 비바람을 막기는 해야 했다. 노비들의 원성이 자자했기 때문이었다. 노상추는 관아에다가 불에 탄 건물이 수십 칸이라는 내용의 문서를 제출하여 곡식을 담는 데 쓰는 빈 섬 300닢(立)을 내려달라고 청하였다. 일단 이것도 짚은 짚이고, 다행히 여름이니만큼 바람만이라도 임시로 막아두자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관아에서는 고작 15닢을 내려줄 뿐이어서 노상추는 해도 해도 너무한 수령의 처사에 분통을 터뜨렸다. 얼마 전 새집을 짓는 사람은 화재를 당하지도 않았는데 관아에서 빈 섬 300닢을 얻어갔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기에 더욱 화가 났다.

노상추가 화를 내 봤자 관아에서 빈 섬을 더 내려줄 것도 아니었다. 일단 노상추는 집으로 돌아가 집을 짓는 데 쓸 못 등을 만들 야장(冶匠)과 기와를 만들 목수 신덕기(申德器)를 불러왔다. 엿새 만에 기와를 모두 만든 신덕기에게 노상추는 100동(銅)을 주었다. 기와를 이을 개장(盖匠) 소통(小通)은 벽돌이 운반되기 전에 도착하여 일을 바로 시작할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역촌에 있는 기와와 벽돌을 옮겨오게 하고 싶었으나, 당장 급한 일은 지붕보다는 모내기였다.

닷새 후에 드디어 모내기까지 일단락되자 노상추는 동군(洞軍)들에게 역촌의 기와를 옮겨오게 하고, 일단 돌아갔던 개장 소통을 불렀다. 소통은 다음 날 노상추의 집으로 와서 바로 기와 얹는 일을 시작했다. 기와를 얹는 일도 하루 이틀 만에 되는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날씨도 도와줘야 했다. 날이 맑으면 작업이 수월하지만, 비라도 내리면 전혀 작업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노상추의 노비들은 불이 난 이래로 거의 한 달 가까이 지붕 없는 집에서 매일 지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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