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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초대 국무령, 변발을 하다.대한민국 초대 국무령, 변발을 하다.




작품소개

우리가 몰랐던 역사 속의 이야기들을 ‘삿갓 김씨’와 ‘종놈 칠복’이 깨알같이 파헤치는 스펙터클 버라이어티 조선 유랑기!

캐릭터 소개

몰락한 양반가의 자제 삿갓 김씨! 넉살좋고, 뻔뻔한 성격으로 만사태평하다.
하지만, 종놈 칠복의 식성을 감당하느라 등골이 빠진다.
단순, 무식, 팔랑귀에 식탐까지 두루 갖춘 종놈 칠복! 의리를 가장 소중히 생각하지만, 여자 앞에선 처참히 무너진다.

작가의 말

웹툰 ‘요건 몰랐지’는 지난해 ‘스토리 테마파크 창작 콘텐츠 공모전’에서 수상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스토리텔링하기 참 좋은 ‘나라’, 조선을 배경으로 왕의 이야기가 아닌 평범한 일상인들의 삶과 그들이 남긴 흔적의 의미를 담긴 위해 기획했습니다. 평소 사극 매니아인 동생(이승훈 작가)과 저(장순곤 작가)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며 조선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고, 무엇을 생각했을까?’ 정말 궁금했습니다. 그 궁금증을 ‘삿갓 김씨’와 ‘종놈 칠복’이를 통해 풀어보려고 합니다.

작가소개

장순곤
장순곤
콘텐츠 개발자.
디즈니, 워너브라더스, 니켈로디언 등의 애니메이션 제작에 참여.
현재 애니메이션을 잠시 접어두고, 새로운 일에 도전 중.
이승훈
이승훈
콘텐츠 기획 및 제작자.
스폰지밥, 내 친구 아서, 코르토 말테즈, 키오카 등의 애니메이션 작품에서
배경, 콘티, 연출에 참여. 회사 생활 틈틈이 창작활동 중.
“퇴계의 시에서 청량산을 읽다”

김몽화, 유청량산서(遊淸凉山序)

청량산은 예안(禮安)의 동북 지역에 우뚝 솟아 있는데, 퇴도(退陶) 이황(李滉) 노선생께서 왕래하며 그 가운데서 쉬었다. 이로부터 산 이름이 세상에 알려져 절 안과 문밖에 유람하는 사람들의 신발이 항상 가득하였으니 어찌 (퇴계 선생의) 고산경행(高山景行)을 사모함은 사람마다 똑같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아! 고금의 사람들이 산을 유람하는 것은 숨겨진 곳을 찾아 끝까지 탐색하고 빼어난 경치를 그윽이 감상하는 것을 상쾌하게 여기기 때문이지만, 누가 등산의 묘한 맛은 눈으로 이르지 못하는 곳에 있다는 것을 알겠는가?
생각건대, 우리 노선생께서는 산수의 즐거움으로 인하여 인지(仁智)의 취미를 드러내셨다.
그전에 (청량산)을 유람할 때 지은 시에 이르기를,

妙意祇難言(묘의기난언) 기묘한 뜻을 말하기 어려우나
佳處每獨領(가처매독령) 아름다운 곳은 매양 홀로 도맡았네.

라고 하셨다.

“청량산을 유람하며 퇴계 선생의 발자취를 좇다”

김영조, 유청량산록(遊淸凉山錄)

1614년(광해군6) 가을에 풍산(豐山)의 계화(季華) 유진(柳袗, 1582∼1635년)이 오미동(五美洞) 부모님 집으로 김영조를 찾아왔다. 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 김영조가 말하기를,
“한해도 저물었네. 청량산을 유람하여 이 회포를 풀어보지 않겠는가?”
라고 하니, 유군(柳君)도 또한 오랫동안 고난에 시달린지라 그 말을 듣고는 기뻐하며 응낙하였다. 마침내 9월 12일에 가기로 약속하였다.
그날 김영조는 천성(川城) 집을 출발하면서 종 한명을 따르게 하고 말 한필에 침구와 식량을 싣고 타고 갔다. 정오에 퇴곡(退谷) 금세인(琴世仁)의 집에서 쉬고는 남계(南溪) 금축(琴軸, 1496∼1561년) 공(公)의 사당에 배알하였다.
금세인은 (琴公)의 서출이다. 금 공은 김영조의 조부[김농(金農)]에게는 외당숙이 된다. 조부가 뒤를 이을 자녀가 없자, 금 공은 부인의 남동생인 권씨[권일(權鎰)]의 딸을 길러서 김영조의 조부에게 시집보냈다. 그러면서 금 공은 권씨의 집과 전답, 하인을 조부에게 주었다. 아아, 금 공은 남쪽 고을의 훌륭한 선비이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과는 서로 친분이 두터워서 공(公)이 돌아가시자 그 묘지명을 써주셨다. 이것으로도 공의 인물됨을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의 신주(神主)가 시골의 사당에 깃들어 있어 보잘것없는 제물조차 제대로 올리지 못한다. 참으로 한탄스럽다.

“청량산 등반가, 17년 동안 13회 오르다”

금란수, 보현암벽상서전후입산기

청량산(淸凉山)은 산림 가운데 가장 빼어난 곳이다. 나귀를 타고 지팡이를 짚고 찾아다니며 구경하는 경우나 질박한 옷을 입은 채 오래도록 머무는 경우에 있어서도 다른 산과는 매우 다르다.
금난수는 정미년(1547년, 명종 2년) 봄에 이 산을 두루 거치며 들어가 본 뒤에야 비로소 산의 진면목을 알게 되었다.
기유년(1549년, 명종 4년) 겨울에 이비원(李庇遠), 이임중(李任仲)과 함께 산에 들어가 상선암(上仙庵)에 머물렀다. 구경서(具景瑞), 윤이직(尹而直), 권자반(權子胖), 김대보(金大寶)가 이미 이 암자에 우거하고 있어서 날마다 구경서 등 여러 사람과 서로 모여서 독서한 것을 강론하였다.
경술년(1550년, 명종 5년) 봄에 또 이 암자에 묵었다.
신해년(1551년, 명종 6년) 음력 7월에 또 연대사(蓮臺寺)에 묵었는데, 퇴계(退溪) 선생께서 송행시(送行詩)를 지어 주셨다.
임자년(1552년, 명종 7년) 여름 6월에 산에 들어가 홀로 안중암(安中庵)에서 한 달을 머물고는 만월암(滿月庵)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다시 한 달 쯤 지나 안중암으로 돌아왔다.

“피리꾼에게 피리를 불게 하고 노래꾼에게 노래를 부르게 하다”

김득연, 유청량산록,
1579-09-01 ~ 1579-09-02

1911년 4월 23일, 중국 유하현 삼원포 이도구에 있는 김대락의 집에 이동녕과 장유순이 모였다. 그것은 원로 유학자 김대락에게 인사를 온 것이기도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자신들의 계획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우선 그들은 김대락에게 단발의 필요성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학교를 건립해야 하는 일들을 설명하였다. 5월 6일 이동녕은 머리를 깎고 청나라 사람의 복장으로 다시 김대락을 찾아왔다. 이는 이미 자신들의 계획을 실행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이렇게 복색을 바꾸는 조선인들은 점차 많아졌다.
5월 10일은 김대락의 조카 김정식이 학교의 밭에 콩을 심는 일 때문에 오후에 윤일(尹一)과 함께 추가가(鄒家街)로 갔다. 이렇게 학교에 가서 농사를 짓는 까닭은 학교가 농막 하나를 사서 두고 사방에서 배우러 오는 사람들을 대접하기 위해서였다. 김대락은 이것이야 말로 횡거(橫渠) 선생이 “토지를 구획하여 곡식을 모으고, 학문을 일으켜 예를 이루려 하는 뜻”이라고 생각하였고, 이에 젊은 사람들이 하는 일을 매우 가상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꼭 김대락에게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전통의 유학자로서 못마땅한 점도 있었다. 아들 형식이 학교에서 머리를 땋고 청나라 사람의 복장으로 왔다. 김대락은 “이런 모양을 하고 무슨 낯으로 고향에 돌아갈꼬?”라고 되새기며 한탄스럽기 그지없었다.
5월 14일, 학교가 개소한다고 해서 손자와 함께 추가가로 향했다. 참석한 사람들의 옷은 이미 조선의 의복이 아니라 검게 물들인 의복이었다. 그러나 일편단심으로 나라의 우환을 헤쳐 갈 사람들이라 이렇게 된 모습을 탓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늙어 아무 일도 할 수 없음만을 탓하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김대락은 이회영 형제의 집에 들렀다. 김대락과 이회영 형제들은 초수(楚囚)처럼 마주보면 눈물을 흘렸다. 한참을 그런 후에야 김대락은 집으로 돌아왔다.

“열두 봉우리 이름, 주세붕 선생이 짓다”

김득연, 유청량산록, 1579-09-01 ~

1579년 9월 1일, 청량산 유람을 떠난 김득연 일행이 드디어 동문(洞門)에 들어갔다. 옛 성이 있는데, 들쭉날쭉 나 있는 나무들 속에 깊숙이 숨어 있기에, 승려에게 물으니 말하기를, “옛날 공민왕이 적을 피하던 곳입니다.” 라고 하였다. 아, 터무니없는 전설을 다 믿을 수는 없지만, 그 전쟁이 요란하던 날 어지러운 병사들에게 쫓기던 임금이 한 모퉁이에서 아침저녁을 구차하게 살아 있던 것을 생각해보니, 한 거친 성가퀴가 만고에 근심을 머금었으나, 지난 일이 황당무계하여 논할 수 없다. 낙수대(落水臺)를 지나니, 냇물이 돌에 흐르는 소리가 옥 소리처럼 영롱하여 사랑할 만하였다. 골짜기가 고요하고 숲이 우거져있으며 여기저기 흩어진 돌들이 쌓이고 모여 있었다. 한 승려가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곳이 삼각묘(三角墓)입니다. 옛날 한 승려가 연대사(蓮臺寺)를 창건하려고 뿔 셋 달린 소로 변하여 재물을 나르고 일을 하였는데, 온 힘을 다하다가 하루 만에 죽어 구덩이를 파 매장한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김득연이 말하기를, “신령함을 받고서 인간이 되었으니, 반드시 소로 변할 까닭이 없습니다. 그대는 눈으로 그 사실을 보았는가?” 라고 하니, 승려가 대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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