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문이 미인촌 소문을 듣고 경기에서 충청으로 향하는 갈림길에 들어선 그때였다. 미인촌의 한 처자가 산 중턱에 있는 열녀비에 돌멩이를 던지고 있었다.
‘열녀연풍박씨지비… 정절 한 일이 뭐 그리 훌륭하다고…….’
처자는 더 큰 돌덩이를 던지려다 중심을 잃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열녀비에 당돌하게 돌을 던진 여인은 채옥이었다. 막 스물세 살이 된 참이었다.
“어허… 고약하게 무슨 짓이오?”
채옥은 당황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뒤돌아섰다.
‘동헌 사람들이잖아… 하필 여기서 만날 게 뭐람…….’
“어찌 열녀비에다 험악한 짓을 했소?”
‘현감이 새로 왔다더니 이 사람인가… 일이 복잡해지기 전에 얼른 정리해야겠어.’
채옥이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실수입니다. 어찌 일부러 그리했겠습니까?”
“참하게 생겨서는 조심스럽지 못하게…….”
“아이구, 현감님이 이 처자를 몰라서 하는 말이구먼유. 얼굴만 말쑥허지 행동은 얼마나 과격하다구유.”
채옥은 현감 홍권탁 뒤에서 이기죽대는 이방 장영의 얼굴을 째려보았다.
‘뵈기 싫다 뵈기 싫다 했더니 정말 꼴 보기 싫은 짓만 골라 하는구나…….’
현감은 묘한 표정을 짓는 이방을 보고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는 처자인가?”
“아이구, 알다마다유. 저짝 미인촌에 사는디유, 지랑 아~주 인연이 깊지유.”
‘잘났다. 잘나셨어…….’
채옥은 어서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서둘러 인사를 하고는 돌아섰다. 현감은 목화밭을 향해 뛰어가는 채옥을 바라보았다.
“쯧쯧, 사내처럼 뛰어가는구만. 저 처자는 누구인가?”
“박씨 집안 막내딸이구먼유… 큰딸 허구 작은딸두 미모가 엄청났지유. 미인촌이라고 불리는 것두 저짝 집안 딸들 덕이구먼유. 근디 얼굴이 이쁘면 뭐혀유. 저리 행동이 방정맞으니께 스물을 한참이나 넘겼는디도 독수공방하고 있지유. 그나저나 길을 잘못 들어섰네유… 이짝 방향이 아니고 폭포 쪽으로 가야 하는디…….”
이방은 앞장서서 현감을 안내했다. 하인 두 명이 그 뒤를 따랐다.
현감 일행은 공정산 절에 올랐다가 내려가는 길이었다. 몇 달째 비가 내리지 않으니 백성들은 살기가 힘들었다. 영험하다는 곳을 찾아서 기우제를 열 번도 넘게 지냈지만 비는 오지 않았다.
“어서 비가 와야 할 텐데…….”
“걱정 마셔유. 현감님이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디유. 하늘도 이제는 모른 척 안 할 거구먼유.”
현감은 마흔이 넘어 겨우 벼슬자리를 얻었다. 고향을 떠나 처자식까지 데려온 마당에 가뭄 때문에 벼슬을 잃을 수 없었다.
며칠 뒤 형방청 앞에서 이방은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자꾸만 서성이고 있었다.
‘아이구, 아이구… 이눔의 주둥이 때문에 결국 사단이 나는구먼…….’
이방은 느티나무 앞에서 현감에게 했던 말 때문에 손가락 하나를 잘라야 할 처지에 놓였다.
‘비는 하늘이 내리는 것인디 워찌께… 제정신이 아니었나벼…….’
새로 온 현감에게 잘 보이려다가 해서는 안 될 말을 해버렸다. 이틀 안에 비가 올 거라며 손가락 하나를 걸고 장담했던 것이다. 기우제를 지내러 산에 올랐던 게 엿새, 오늘이 열여드레, 아직 하늘은 비를 내리지 않고 있었다.
마침 하인에게서 현감이 찾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이방은 현감이 자신에게 죄를 물을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이보게, 내가 찾는다는 얘기 못 들었는가?”
현감은 동헌에서 이방을 기다리다가 깜깜무소식이자 형방청까지 직접 나선 참이었다. 이방은 갑자기 튀어나온 현감을 보자마자 무릎을 꿇었다.
“잘못했슈. 지가 뭘 안다고 비가 온다 안 온다…….”
“됐으니까 어이 나를 따르게.”
현감은 이방을 데리고 동헌 깊숙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자네도 알다시피 기우제를 지내도 비소식이 없으니 큰일 아닌가…….”
“참말로 할 말이 없구먼유.”
“내 다른 방법을 찾았으니 서둘러 진행해주게나.”
“그라믄 지 손가락은 안 잘라도 되는 거쥬? 어떤 방법인디유?”
“옛말에 노처녀는 재앙을 부른다고 했지.”
“무슨 말인지 통 모르겄는디…….”
“음양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재앙의 원인이 되어 가뭄이 오고, 비난리도 나는 것일세. 하여 지난번 본 박씨네 막내딸 있지 않은가. 내 직접 나서서 그 처자를 시집보낼까 하네. 음양의 조화를 꾀하면 하늘이 감동할 것이고, 그럼 비도 내리지 않겠는가.”
“흉악스런 소문 때문에 혼처를 찾는 일이 쉽지 않을 텐디유……. 아니어유. 비가 온다믄야 뭘 못하겄슈. 지푸라기라도 잡는 마음으로다 지가 열심히 해 보겄구먼유.”
“지금 당장 신랑감을 찾아보도록 하게. 연풍뿐만 아니라 근처 문경, 상주 고을에도 사람을 보내서 알아보게나.”
“예, 그리하겠어유.”
다음 날 아침, 이 사실을 꿈에도 알 리 없는 채옥은 한가하게 고갯길을 넘고 있었다. 그곳에서 주막을 운영하는 어을할매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할매, 안에 있어?”
“우리 옥이 왔는가?”
채옥이 방문을 열자 어을할매는 산통에서 대나무 하나를 꺼내고 있었다.
“뭐 해?”
“아이구야… 금슬이 좋겄어. 떡두꺼비 겉은 아들을 여섯이나 낳겄구먼.”
“또 궁합 봐 주는 거야?”
“가뭄 때문에 막걸리 만들기가 힘드니께 어떡하겄어. 이거라도 해야 먹고살제.”
“할매가 사주며, 궁합이며, 과거 보러 가는 선비들 합격점까지 이 근방에서 제일이니까.”
“역시 옥이밖에 없구먼. 옴마, 이마에 상처는 또 언제 난겨. 조심 좀 하라니께… 고운 얼굴에 흉 생기면 어쩔려그려.”
채옥은 상처를 만지며 멋쩍게 웃었다.
“참 옥아, 니 나 몰래 시집가는겨?”
“그게 무슨 소리야. 내 사정 잘 알면서…….”
“그려. 내가 니한테는 엄니고 할민데 너 혼인하는 걸 워찌께 모르겄어. 근디 이상한 말을 들었다니께.”
“뭐?”
“엊저녁에 연풍현 사람들이 왔었는디말여. 아, 그짝 사람들이 여기 단골이잖여. 너 신랑감 찾는다고 현감이 상주며 문경까지 사람을 보냈다잖여.”
“아닐 거야. 내 혼인을 내가 모르고 있는 게 말이 돼?”
“말이… 안 되지. 암만, 말이 안 되고말고. 벌써부터 정신이 오락가락하나벼. 아이구, 마음은 아직 이팔청춘인디…….”
채옥은 열녀비 앞에서 현감 일행을 만났던 일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이방의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할매, 나 간다.”
“벌써? 말린 나물 맛나게 무쳤는디 밥이나 묵고 가여.”
“가 볼 데가 생겼어.”
어을할매는 급하게 뛰어가는 채옥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에효, 불쌍한 것…….”
채옥은 산길을 서둘러 내려가느라 숨이 찼다.
‘설마… 그럴 리가 없어.’
마음과는 다르게 밉살스럽게 웃던 이방의 모습이 자꾸 생각났다.
‘생각할수록 정말 악연이야…….’
채옥은 오늘따라 언니들이 보고 싶었다. 가난한 선비 집안에 시집온 채옥의 어머니는 채옥을 낳자마자 죽었다. 아버지는 첫째 채선과 둘째 채영 그리고 막내 채옥까지 홀로 키웠다. 채옥은 엄마 대신 살뜰하게 챙겨주는 언니들이 있어서 외롭지 않았다.
채옥의 아버지는 혹여 어머니 없이 자란 티가 날까 싶어서 딸들의 몸가짐에 신경을 많이 썼다. 아버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채옥은 언니들과 달랐다. 행실도를 읽을 때면 너무 따분했다. 책에 있는 여인들 이야기에 감동을 받기는커녕 바보 같다 여겼다.
큰언니와 작은언니의 혼례를 지켜보면서 채옥은 이제 혼인이라는 글자만 보아도 억하심정이 생겨버렸다. 그러나 채옥도 봄바람에 흔들리는 여인이었다.
‘연모한다는 건 어떤 감정일까’
가끔씩 마음이 간질간질거리고 풀어질 때면 언니들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지난해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채옥은 이제 평생을 홀로 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근데 왜 이리 불안하지…….’
채옥은 자꾸 조바심이 났다. 서둘러 동헌이 있는 아랫마을로 향했다. 우연인지, 우연을 가장한 운명인지, 열녀비 앞에서 더 큰 시련을 만나리란 걸 알지 못한 채 채옥은 발길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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