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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의 일기

할아버지 곁에서 쓴 류의목의 7년 기록,
『하와일록河窩日錄』

김명자

기후의 맑음과 흐림, 비와 바람의 다소에 대해서도 갖추어 기록하여 만년의 여유롭고 한가한 때에 때때로 펼쳐보며 ‘어느 해에는 풍년을 예시하는 상서로움이 있었고, 어느 해에는 흉년을 초래한 악재가 있었구나.’ 하고 말할 수 있다면 어찌 좋지 않겠는가. 거절하고 받아들이는 진퇴와 언론의 시비에 있어서는 더욱 상세히 기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어서 갖추어 기록하였으니, 혹 마음을 다스리고 몸을 바로잡는 길에 만에 하나의 도움이 있을 것이다.

위의 내용은 1806년 안동 하회의 류의목(柳懿睦, 1785~1833)이 12살(1796년)부터 18살(1802년)까지 7년에 걸쳐 쓴 『하와일록河窩日錄』을 다시 정리하면서 쓴 서문의 일부이다. 삶과 생각의 궤적을 기록하여 지나간 시간을 추억하는 동시에 자신의 삶을 바로 세우는 데 도움 받으려는 류의목의 생각이 읽혀진다.

인간은 지구에서 유한의 생명을 살다가 소멸해 간다는 점에서 다른 생명체들과 별반 다르지 않지만, 기록을 통해 사회적 생명을 이어나가는 유일한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은 문자를 습득한 이후 비로소 역사를 전달할 수 있게 되었고, 기록은 역사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증명해 보이고 정체성을 드러내는 주요한 수단이다.

특히 ‘기록의 나라’로 일컬어지는 조선시대에는 많은 종류의 기록이 전해오며, 일기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역대 왕실의 기록인 『조선왕조실록』,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던 승정원에서 취급한 문서와 사건을 기록한 『승정원일기』 등의 공적 일기뿐만 아니라 문자의 향유를 즐겼던 선비들이 남긴 일기도 상당수 전한다. 사적인 일기는 정제성이 강한 실록과 문집에 비해 삶과 내면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실제 역사를 복원하는 데 큰 의미를 지니다.


[ 하와일록 ] 원본(좌)과 2015년 한국국학진흥원에서 국역본(우)


여기서는 류의목이 10대 시절에 쓴 일기를 소개하려고 한다. 일기의 표지에는 ‘하와일록’이라고 적혀 있는데, ‘하와河窩’는 ‘하회의 집’이란 뜻이다. 집을 뜻하는 ‘와’자를 쓴 데서 이 책이 저자 본인만의 기록이 아니라 집안의 기록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일기日記’라고 하지 않고 ‘일록日錄’이라 한 것에서 그 의도가 더욱 분명하다. 19세기 전후 영남의 선비에게 개인의 정체성은 곧 집안 혹은 문중의 정체성과 일치됨을 보여준다. 그래서 『하와일록』은 류의목의 일기인 동시에 ‘하회 집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류의목이 일기를 쓴 기간, 아버지는 병석에 누워 계시다가 1799년에 돌아가셨고, 할아버지 류일춘柳一春(1724~1810)은 73세~79세로 하회 마을의 연장자였다. 류일춘은 문중의 대표 역할을 수행했고, 학문적 명망도 있었다. 류일춘의 집에는 친인척 및 안동 일대의 사족이 드나들었다. 류의목은 할아버지가 머물던 사랑방에서 읽은 책들과 공부한 내용, 관아 · 향청 · 서원에서 보내 온 통지문의 내용, 조부를 찾아온 손님들의 언사, 문중과 향촌에서 벌어진 다양한 사건 등을 기록했다. 이를 통해 영남 남인의 생활상과 공동체적 면모를 살펴볼 수 있고 일기에 등장하는 600여명의 인명이나 택호는 풍산류씨의 인적 네트워크를 말해준다.


총명하여 주위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유의목의 어린시절


일기의 저자 류의목은 겸암謙庵 류운룡柳雲龍(1539~1601)의 9대손으로 아명은 팽길彭吉이었다. 자는 이호彝好로, 일기에 진사 할아버지로 불리는 인물이 지어 주었다. 『시경』 대아편의 ‘백성들이 본심을 가지고 있으니, 아름다운 덕을 좋아하네[民之秉彝好是懿德]’에서 따왔다고 했다. 호는 수헌守軒인데, 초계문신이자 친척 아재인 류이좌가 선조의 유훈을 잘 받들어 지키는 류의목의 행실을 칭찬하여 지어준 것이다.

류의목은 어릴 때 성격이 맑고 총명하였다. 7세 때 ‘강의 맑은 바람과 산의 밝은 달이 귀와 눈에 들어옴에 구애 없이 마음껏 누리네[江上淸風, 山間明月. 耳得目寓, 取用無禁]’라고 썼는데, 당시 안동의 큰선비 류규가 이를 크게 칭찬하였다. 그는 공부도 매우 성실하게 하였다. 1802년 2월 11일에는 ‘시 외우기를 마치고 문을 열고 바라보니 달빛이 아름답고 눈빛이 깨끗하였다.’라고 했고, 그 다음날에는 ‘밤에 암송을 마치고 창문을 열고 사방을 보니, 온갖 소리가 모두 적막하고, 흰 달빛이 흐를 뿐이었다.’라고 일기에 적었다. 2월 15일, 16일, 18일에도 공부하다가 첫닭이 운 이후에 잠자리에 들었다.


할아버지께 학문에 대해 묻다
류의목, 하와일록,   1801-09-17 ~

류의목의 학업은 하회의 젊은이 가운데 제일이라는 평가가 있었고, 일족들은 그가 과거 합격하기를 매우 기대하였다. 특히 류이좌는 면대 혹은 편지로 류의목에게 가르침을 주었으며, 책과 필묵을 마련해 주며 그를 격려하였다.

『좌전』을 빌리려고 하니, 수찬 아재[류이좌]가 말씀하시기를, “과거 공부에는 백배의 공을 들여야 한다. 범연히 해서는 안 된다. … 듣자하니 내년 2월에 경과慶科[나라의 경사에 있을 때 치르던 시험]가 있다고 하니 부디 착실하게 하여 기다려라.”고 하셨다.(1802년 11월 30일)

“상인喪人은 앉아 보아라. 내 네게 할 말이 있다. 너희 집은 겸암謙庵[류운룡]과 서애西厓[류성룡] 형제로부터 분파하여 자손의 번성은 차이가 없지만, 아우 집안은 과환科宦이 저와 같이 성대한데 형 집안은 이에 미치지 못한다. 너는 마땅히 심력을 다해 힘써 저 아우 집안과 서로 비슷하기를 구하면 또한 부모를 기쁘게 하는 길이다. 그 광채가 마땅히 어떠하겠는가!”(1800년 3월 23일)

류의목의 10대도 오늘날의 10대들과 크게 다르지 않게 공부의 무게를 감당하며 보냈다. 류의목은 조부를 비롯한 주변의 관심과 격려 속에서 착실하게 공부했으나 과거에 합격하지는 못했다. 이는 류의목 개인의 좌절이기도 했지만 겸암 류운룡 후손들의 사회적 위상과 관계망을 확장할 수 있는 기회가 좌절가 좌절되는 의미였다. 류의목은 38세에 낙동강 건너 남동쪽에 위치한 현재의 광덕동 쪽으로 이주하여 ‘남애南厓’라는 집을 짓고 조용하게 지내다가 49세에 병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19세기 전후 영남 남인의 곡절이 스며 있는 우스개 이야기


앞에서 언급했듯이 일기에는 류의목의 공부와 혼인 등 개인사뿐만 아니라 영남 남인의 정치적 상황도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순조가 즉위한 이후 노론 정권은 영남 남인의 적극적인 후원자이던 번암 채제공의 ‘흔적 지우기’에 앞장섰다. 1792년(정조 16) 정조의 후원으로 도산서원 앞에서 도산별시를 치렀는데, 이는 영남 남인의 정치적 부활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영남의 선비들은 이 장소를 기념하여 시사단試士壇을 세웠으며, 그때 채제공이 비문을 써주었다. 관에서는 이것을 부수었다.

당초에 예안 수령이 아전을 보내어 시사단의 비각 및 비석을 헐고 파괴하게 했는데, 아전이 들어가 아룀에 수령이 ‘어떻게 했느냐?’라고 물으니, 아전이 ‘도끼로 그 비석을 절단하고 그 기둥을 베어 이미 길가에 넘어뜨렸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수령은 아전이 허투루 명을 받들었다고 하며 매질해서 다시 내보냈습니다. 아전이 그 비석을 부수고 조각조각 내었으며, 또 비각으로 세웠던 기와와 돌을 곳곳마다 도끼로 남김없이 가루로 만들고는 크게 웃고 갔습니다.(1802년 1월 16일)

19세기 초반 노론 세력은 영남 남인을 정계에서 고립시켰을 뿐만 아니라 향촌에서도 그 위상을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물론 신흥 사족과 서족은 이 기회를 틈타 자신들의 지위를 격상시키고자 하였다.

막내 아재[류영조]가 지곡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오늘 매우 큰 욕을 당했습니다. 지난번에 안가安哥의 서자가 나를 ‘류 석사柳碩士’라고 부르고, 나 또한 그 사람을 ‘안 서방安書房’이라고 불렀는데, 이 일에 대해 안 서방이 미운 마음을 품은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내가 온다는 말을 듣고, 그 부류 11명이 내 앞에서 ‘류 서방 왔는가. 너는 나를 안 서방으로 부르니, 내 어찌 너를 ‘류 서방’이라 부르지 않겠는가.’라고 큰소리로 외치며, 욕설과 패담 등 못하는 말이 없었습니다. 촌노 한 놈을 잡아 나를 대신해 매질했습니다. 그 사나운 습속을 보니 실로 서로 다투기 어려워 결국 묵묵히 참고 돌아왔습니다.” 라고 했다.

19세기 초반 영남 남인의 삶은 중앙 정치와 밀접한 연관이 있었고, 여러 문제로 문중과 향촌사회는 갈등과 대립이 연속되었다. 영남 선비들의 삶은 자연스럽게 위축되고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오히려 우스개 이야기에 더욱 관심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류의목은 전해들은 여러 가지 우스운 이야기를 비교적 꼼꼼하게 기록했는데, 한 가지를 들자면 다음의 이야기이다.

예안에서 알린 부고가 잘못 전달되어 엉뚱한 집에서 공연히 곡을 하게 되는 ‘포복절도’할 만한 이야기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하회에는 그 이전에 금계댁이라 불렸으나 당시 원암댁이라 불리는 집도 있고 당시에 금계댁이라 불리는 집도 있었다. 1801년 12월 10일, 예안의 하인이 과거의 금계댁으로 갈 부고를 당시 금계댁이라 불리는 집으로 전달하였는데 하필 그 집에서도 예안으로 시집간 사람이 있어 부고장을 상세히 확인하지도 않고 곡부터 하다가 곧 잘못된 것을 알고서는 흐르는 눈물도 닦지 못한 채 웃음보를 터트렸다고 했다. 영남의 선비들은 우스개 이야기를 나누면서 한바탕 크게 웃는 것으로 암울하고 위축된 삶의 한 순간을 위로 받았을 것이다.

나막신 농담으로 한바탕 웃다
류의목, 하와일록,   1801-01-13 ~

호랑이만큼 우리 속담에 많이 등장하는 동물도 드물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나타나고, 호랑이가 잡아간다고 하면 울던 아이의 울음도 뚝 그친다.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까지 언급하면 그야말로 이야기가 끝이 없다. 모모 집안의 며느리가 호랑이에게 물렸다는 소문이 돌았다. 며칠 동안 여러 지역에서 포수 800여명을 징발하여 태백산, 소백산, 문수산, 봉황산 등을 수색했지만 시체를 찾지 못하자 남겨진 옷가지로 장사를 치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모모 집안의 며느리는 외간 남자와 도망을 간 것이었다. 며느리가 바람난 사실을 호랑이한테 잡혀갔다는 이야기로 버무린 것이다. 하회 마을 사람들이 길을 가다가 호랑이를 만나 크게 소리를 질러 온 마을의 농부 100여명이 함께 소리를 내니 호랑이가 산골짜기로 들어간 이야기도 있다.

이상의 몇 가지 사실의 언급으로『하와일록』에 대한 진면목을 드러낼 수는 없다. 분명한 것은 『하와일록』에는 19세기 전후 영남 사족으로서의 개인과 문중과 향촌 사회의 무겁고도 비참한 현실이 잘 드러나 있는 동시에 자잘한 우스개 이야기가 곳곳에 장착되어 있다. 『하와일록』에서 무거움을 가벼움으로 환치하는 블랙코미디의 매력을 엿볼 수 있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작가소개

김명자
김명자
경북대학교 대학원 사학과를 졸업했다. 현재 한국국학진흥원 한국학자료센터에서 일기와 간찰 등의 번역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옛 기록에 담긴 선인의 삶과 당대인들의 고민과 지혜를 읽고, 국역하는 일에 큰 의미와 보람을 느낀다.
“유생들이 모인 서원 근처, 어둠이 내린 가운데 호랑이 울음소리가 진동하다”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김령, 계암일록, 1611-04-26 ~
1611년 4월 26일, 칠흑같이 어두운데 호랑이 울음소리가 진동했다. 도산서원, 여강서원, 이산서원 향교의 유사들이 여강사원에 모여서 5월 11일에 열릴 소회를 논의하고 있었다.

“쌍나팔을 불어 호랑이를 쫓으며, 천길 낭떠러지 위의 삐걱대는 다리를 건너며 산으로 간다”

김도수, 남유기, 1727-09-16 ~
1727년 9월 16일 기사일에, 김도수 일행은 남여를 타고 불일암(佛日庵)에 올랐다. 승려가, “산중에는 호랑이가 많습니다.” 라고 하고는 쌍각(雙角)을 불어 앞에서 인도하였다. 길이 험하여 돌비탈을 우러러 몇 리를 올라가니 조금 평평한 곳이 나왔다. 거친 밭 몇 묘가 있다. 또 몇 리를 가니 승려가, “길이 끊어져 가마가 갈 수 없습니다.” 라고 고하여, 지팡이를 짚고 나아가니 앞에 절벽의 허리에 걸려 있는 허술한 잔교가 나왔다. 그 아래로는 천길 낭떠러지인데, 밟자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우러러 불일암을 바라보니 아득하여 구름 끝에 풍경을 매달아 놓은 듯하였다. 암자에 도착해보니, 방 가운데서 차가운 바람이 분다. 마치 귀신이 휘파람을 부는 것 같았다. 암자에서 10여 보 거리에 있는 대(臺)에는 ‘완폭대(翫瀑臺)’라고 새겨져 있다. 앞에는 향로봉(香爐峰)이 있는데 우뚝 솟은 바위가 파랗다. 길다란 폭포가 오른쪽 산등성이에서 곧바로 떨어지는데, 눈발이 흩날리듯 우박이 떨어지는 듯하며 우레가 울리고 번개가 치는 것 같다. 깊숙하고 어두워 만 길 깊이로 음침한 곳은 청학동(靑鶴洞)이라고 한다. 승려가, “고운이 항상 이 골짜기에 머물러 청학을 타고 왕래하였기에, 바위틈에 옛날에 한 쌍의 청학이 있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암자에 앉아서 잠시 쉬었다. 준필이 동쪽 담으로부터 와서 똘배 다섯 개를 올렸는데, 맛이 시어 먹을 수가 없었다. 작은 병을 찾아서 거듭 몇 잔의 술을 마시고 다시 나와 바위 위에 앉으니 골짜기의 바람이 솟구쳐 일어 바위의 나무들이 모두 흔들린다. 구름 기운이 넘쳐 일렁거려 마치 거센 파도가 서로 부딪히는 것 같다. 돌아와 비탈길을 따라 내려오다가 한 무더기의 호랑이 똥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것을 보았다. 종자가 놀라 눈이 휘둥그래져서 다시 쌍각을 부니 골짜기에 소리가 진동하였다.

“호랑이 때문에 문경새재가 막히다”

권상일, 청대일기,
1754-12-02 ~ 1754-12-21
1754년 12월 2일, 겨울에 들어서자 호랑이 피해가 속출했다. 들으니 문경새재에 호랑이 출몰이 잦아져 다니는 사람들이 많이 물려 죽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소문이 돌면서 문경새재를 넘어가는 사람들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이에 상주 영장(營將)과 충주 영장이 호랑이를 잡기 위해 많은 포수를 데리고 서로 만나 의논을 했다고 한다.
문경새재를 지나온 채감(蔡瑊) 군이 와서 말하기를, 문경새재에서 호랑이에 물려 죽은 사람이 무려 40여 인이나 되고 경상도 내에서는 호랑이 때문에 죽은 사람이 무려 100여 인에 이른다고 한다. 호랑이로 인한 피해 때문에 대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한편 충주 영장이 호랑이를 잡았는데 작은 호랑이 세 마리였고, 상주 영장은 한 마리도 못 잡았다고 한다. 경상감영에서는 문책을 피하려 군관까지 파견했는데, 만약 끝내 잡지 못한다면 장계를 올려 파면할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사실 못 잡을 만도 했다. 포수들이 모두 노숙하는데, 어느덧 15일째에 이르러 몰골들이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번은 큰 호랑이와 마주쳤는데, 포수가 겁을 먹고 감히 총을 쏘지 못했다고 한다. 큰 호랑이는 마치 수레를 끄는 큰 소만했다고 한다.
나중에 듣기로는 상주 영장 또한 큰 호랑이 한 마리를 잡아 감영에 보냈다고 한다. 이로써 경상감영에서도 문책은 피하게 되었다.

“비나이다, 무탈하길 비나이다 - 백두산의 산신령과 수신에게 제사를 지내다”

이의철, 백두산기, 1751-05-24
1751년 5월 24일 이의철은 백두산에 오르기 위해 갑산부를 출발했다. 선발대 1백여명은 이미 4, 5일전에 출발한 상태이고 토병, 포수 등 일행만 40여명, 말 16필이 동원되었다. 말과 가마를 번갈아 타면서 올라갔는데, 곳곳에 거대한 고목이 쓰러져 있고 무릎까지 빠지는 진창으로 인해 고생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갑산지역 사람들은 백두산에 들어가서 사냥을 할 때 반드시 산신령에게 제사를 지낸다. 이들은 노루, 사슴, 담비 등을 사냥한다. 물가에 사는 사람들은 수신(水神)에게 제사를 지낸다. 이의철 일행이 백두산에 오를때에도 제사를 지냈다. 이들은 허항령에서 장교와 하인들이 목욕재계를 하고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연지봉 아래에서 또다시 제사를 지냈다. 연지봉 숙소에서부터는 누구도 시끄럽게 떠들거나 농담을 하며 웃지도 않았다.
백두산에 올라 유람할 때에 운무가 갑자기 씻은 듯이 사라지자 모두 부사의 행차에 산신령이 돕고 있다고 말하였다. 맑고 쾌청한 날씨에 천지와 연지봉까지 모두 유람을 마치고 무사히 귀환하였다. 갑산 관사로 돌아오니 마을에서는 그동안 비바람이 불고 날씨가 계속 흐려서 매우 걱정하고 있었다고 했다. 이전에 백두산에 들어간 사람들 가운데 이번 행차처럼 조용하고 편안하게 인마가 병들고 죽거나 하는 사고없이 다녀온 경우가 없었다고 하였다. 이의철은 그 말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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