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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로 본 역사이야기

흉(凶)은 그저 흉(凶)일 뿐

홍윤정


내게는, ‘좋은 어른이란 모름지기 저런 모습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 어른이 계시다. 몇 년 전 돌아가신 큰 이모부님이신데, 아버지를 일찍 여읜 내게는 아버지와도 같은 존재로, 6.25 때 고향(북쪽에 속한 강원도 철원)에서 청진기 하나만 목에 걸고 단신 월남해 평생 소아과 의사를 천직으로 알고 사셨던 분이다.

이모부님에 관한 수많은 추억 중 생각나는 한 가지는, 어릴 적 날 예뻐하시다가도 짐짓 화난 목소리로 이런 우스개를 하신 일이다.

“어휴, 난 남양 홍씨(南陽 洪氏)라면 아주 지긋지긋해. 우리 아버지가 남양 홍씨들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하셨는데.”

이모부님은 경주 김씨(慶州金氏)셨는데, 선친 대에 남양 홍씨 집안과 선산으로 얽힌 오랜 송사가 있었고, 결국 선친은 그 송사를 겪으며 병을 얻어 돌아가셨다는 것이었다. 남양 홍씨들이 떼로 찾아와 얼마나 집요하게 괴롭혔는가를 말씀하실 때마다 나는 마치 내가 죄라도 지은 것처럼 송구하기만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선산 다툼은 결국 묏자리 다툼이었을 것이고, 이는 후손들의 발복(發福)이 걸린 일이니, 그 쟁투가 얼마나 치열했을까는 보지 않아도 짐작할 만하다.

조상에 대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외경심은 신앙에 가깝다. 자식 가진 부모 입장으로 생각해보면, 자식이 내게 잘하거나 잘못하거나, 자식 잘되길 바라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건만, 왜 유독 돌아가신 조상님들은 후손이 조금이라도 심기를 거스르면 당장 화를 불러오는 속 좁은 분들이라 여기는 건지 나는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이런 두려움은 ‘묏자리’에 대한 까다로운 조건을 요구하게 만들어, 소위 ‘명당’이라는 묏자리에 조상의 뼈를 몰래 묻는 ‘투장’, ‘암장’까지 성행하여 수많은 사건 사고를 만들었다.

<별순검 - 조선과학수사대> 에도 이에 관한 에피소드가 있다.

습첩(보쌈과 비슷한 관습으로, 과부가 새벽에 성황당 근처에서 제일 처음 만난 성인 남자를 따라가는 것) 나갔던 딸이 사라졌다고, 한 남자가 순검들을 찾아왔다. 대외적으로는 딸이 죽었다고 하고 장례까지 치렀지만, 사실은 청상이 된 딸의 장래를 위해 습첩을 허락했던 것이다. 미리 딸을 데려갈 남자까지 알아두었는데, 막상 그 남자는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어디 있는 걸까.

며칠 후 과부는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것도 거짓장례를 치르고 짚 인형을 넣어두었던 바로 그 자신의 관 속에 누운 채. 수사를 시작했지만 좀처럼 범인의 윤곽을 알아낼 수 없었다. 그런데 과부의 시댁이 의심스러웠다. 알고 보니 죽은 남자의 동생이 형수를 짝사랑했던 것이 드러났다. 형수가 습첩을 나간다고 하자 눈이 뒤집혀 범행을 저질렀나 했지만, 범인은 의외의 인물로 밝혀졌다.


MBC 드라마 <별순검 시즌1> 2화<관속의 딸> 중 거짓장례를 치르고 살아 있을 거라 믿었던 딸의 주검 앞에 오열하는 아버지의 모습 ⓒMBC


그는 바로 죽은 과부의 할아버지가 묏자리를 가지고 송사를 벌인 자의 아들이었다. 범인의 아버지는 송사에서 졌고, 명당 묏자리는 죽은 과부의 집안 소유가 되었다. 이후 범인의 집안에 자꾸 흉사가 일어나자 그는 이게 모두 다 그 묏자리 때문이라 생각하고 원한을 품게 되고, 급기야 범행을 저지른 것이다. 거짓장례 묘터를 알아봐 준 것도 범인이었다. 그곳은 흉사가 끊이지 않는다는 뱀굴 근처였고, 과부를 죽여 기어이 그곳에 묻었던 것이다. 사건의 전말이 밝혀지자 죽은 과부의 아버지는 헛헛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한다.

“내 선친은 조상님들 그 묘터에 모시고자 송사 불사하며 갖은 애 다 쓰셨다 했소. 그 좋은 모터에 누운 조상님들, 참으로 잘도 굽어살피셔서 꽃 같은 내 딸 저리 데려가셨는가 싶소. 참 좋은 묘터다, 참 좋은 묘터.”

그리고 딸을 위해 다시 제대로 장례를 치르는데, 집안 형님이 달려와 “어디 이 흉한 시체를 묻겠다는 것이냐. 아버님께서 이 터 지키시려고 얼마나 고생을 하셨는데.” 소리 높이며 그를 말린다.

“터고 뭐고 다 필요 없소. 난 내 자식 편히 가게 해주겠다는 마음밖에는 없소.” 형님을 밀치며, 기어이 관을 내리는 그의 마지막 말은, 좋은 묏자리가 줄지도 모르는 막연한 복을 위해 눈앞의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린 자의 절절한 아픔이 느껴진다.

2012년 SBS에서 방송된 드라마 <대풍수>는 고려 말 공민왕이 ‘자미원국’을 찾으려 하는 것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자미원국’은 황제의 자리라 하여 전 세계를 지배하고 다스리는 황제가 머무는 자리를 말한다. 공민왕은 원나라의 지배를 받는 고려 왕실의 처지에서 벗어나고자, 자미원국에 집착한다. 하지만 이 싸움이 쉬울 리 없고, 차지하려는 자들이 점점 늘어, 피 튀기는 전쟁이 된다.

‘풍수지리, 사주 명리, 관상이라는 동양사상을 집대성한 생활밀착형 드라마’라는 기획 의도에서 밝혔듯 이 드라마 속에는 운명을 위해 하늘과 땅을 읽는 인간 군상의 모습이 드러나 있다. 지상, 신돈, 무학대사 같은 종교인과 그들을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용하려는 인물들 말이다. 그리고 그들 중 단연코 흥미로운 인물이 ‘반야’다. 반야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여성인데, 그 족적을 살펴보면 입이 딱 벌어진다.

SBS 드라마 <대풍수>에서 자미원국(紫微垣局)을 찾은 지상(지성 분)과 자미원국 모습. ⓒSBS


반야는 천한 자신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임금님의 무덤 터인 ‘어금혈’에 어머니의 뼈를 암장했다. 공민왕의 여자가 되기 위해 ‘왕자를 낳을 사주’로 조작한 가짜 사주를 궁으로 집어넣었고, 결국 공민왕의 아이를 낳고, 그 아이는 고려의 왕이 된다. 이성계에 의해 실각하면서 그녀의 말로는 험난했지만, 운명과 싸우겠다는 반야의 의지만큼은 이성계를 능가한다. 운명에 저항하기 위해 운명을 조작한 여인, 그녀는 대체 운명을 믿은 걸까, 우습게 여긴 걸까.

비록 자미원국의 신탁에 의해 이성계가 왕이 되었다고는 하나(이 부분 때문에 쿠데타를 합리화한 드라마라는 비판도 받았다), 그 저변에는 권력의 부패, 고려 민중의 분노와 주변 강대국들의 압박 등 결국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었고, 무엇보다 왕이 되고자 했던 이성계의 ‘의지’가 아니었다면, 자미원국이 아니라, 자미원국 할아버지가 등을 떠밀어도 새로운 왕조는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 드라마의 첫 장면에서 개경으로 진격하려는 이성계와 그를 돕는 대풍수 지산이 개경을 내려다보며 나누는 대화 속에 드러난다. 실패하면 반역이 되겠지 싶어 주저하는 이성계에게, 대풍수는 ‘성공하면 혁명’이라 격려하면서 이런 말을 덧붙인다.

“장군께 천명은 없습니다……. 그러나 장군은 천명을 바꿀 수 있는 인간입니다.”

이성계를 왕으로 점지한다는 하늘의 계시는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 강한 것이 인간의 의지라는 것. 하늘도, 운명도 인간의 정성과 의지 앞에선 그 길을 내어준다.

추석 즈음에 개봉하는 영화 <명당>이야말로 본격적으로 ‘명당’을 놓고 싸우는 이야기라 하나, <관상>이 그랬듯 정작 중요한 것은 ‘관상’이나 ‘명당’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해석하고 이용하는 사람들의 의지라는 게 주제가 아닐까 예측해본다.

좋은 묏자리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시신이 완벽하게 부패하여 백골만 남을 수 있는 양지바르고 바람 잘 통하는 곳이다. 죽은 자들은 죽은 자들의 공간으로 떠나야 한다. 덜 떠나거나 못 떠나면 문제가 된다. 그러나 물리적인 떠남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이 잘 떠날 수 있느냐다. 죽은 자들의 떠나지 못한 마음은, 남은 자들에겐 공포와 죄책감이 되어 머문다. 이 공포가 집약된 장소는 곧잘 영화의 소재가 되는데, 2004년작 <알포인트>야말로 내겐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공포영화의 수작이다.

알포인트는 ‘로미오 포인트’의 약어로, 은밀하게 진행되는 실종자 구조작전 지역을 말한다. 1949년 1차 베트남전 당시 호찌민의 게릴라군과 교전 중이던 프랑스군 소대 12명 전원이 여기서 실종됐으나, 끝내 실종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고, 1970년대 2차 베트남전 시기까지 프랑스군과 미군 총 650여 명이 실종된 것으로 보고되었다. 영화는 1972년 한국 맹호부대 소속 소대원 9명이 실종됐던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실화를 기록한 영국의 종군기자는 귀국 후 죽기 직전까지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고 하는데, 실제로 캄보디아와 베트남에서 촬영된 영화는, 촬영 장소에 얽힌 괴담까지 더해져 그 분위기가 더욱 으스스하다. 이 영화의 진정한 공포는 하얀 아오자이를 입은 귀신이나, 이미 죽은 병사가 이제껏 함께 동행하고 있었음을 깨닫는 여고괴담류의 공포보다, 살아있는 병사들을 서서히 무너뜨리는, 연기처럼 스멀스멀 퍼져가는 내면의 공포다. 집에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희미해지자, 그 자리를 차지하는 절망감. 우리는 끝내 여기서 죽고 말 거라는 비관적인 확신이 존재를 삼켜 서로가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게 만든다. 그들의 절망은, 이미 그곳에서 죽어간 많은 이들의 절규가 차곡차곡 쌓인 결과일지도 모른다.

‘왜 우리는 이 전쟁을 해야 했는가.’ ‘왜 우리는 죄 없는 소녀와 아이들과 노인들을 죽여야 했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할 수 없다는 것이 공포의 시작일지 모른다.

영화 <알포인트> 포스터 ⓒ씨앤필름


길흉화복(吉凶禍福)은 인생에 있어 피할 수 없는 코스요리다.

별순검에서 과부를 죽인 범인의 인생에 일어난 나쁜 일들은, 묏자리가 그 원인이 아니다. 살다 보면 겪게 되는 과정의 하나일 뿐. 하지만 그 흉을 막아 보려, 보복하려, 다른 곳으로 돌려보려 하자 정말 돌이킬 수 없는 흉이 그의 인생을 잠식해버렸다.

흉(凶)은 흉으로 그저 받아들이자. 언젠가는 끝나겠지. 아무 흉도 겪지 않은 인간의 얼굴이란 얼마나 따분할까 말이다. 복(福)을 받기 위해 명당 찾아 이리 뛰고 저리 뛰기보다 차라리 오늘 내 옆의 가족과 동료에게 따뜻한 밥 한 끼라도 대접해, 선한 인(因)의 씨를 심어보는 것이 어떨까.






작가 소개

홍윤정
홍윤정
1999년에 KBS 시트콤 작가로 데뷔, 드라마와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 중이다.
대표작은 영화 <수상한 그녀>, <반창꼬>, <블랙가스펠>, <최강로맨스> 등이며, <수상한 그녀>로 춘사영화상 각본상을 수상했다.
“명당을 지켜라! - 묏자리 쟁탈전으로 인한 산송 사건”

김택룡, 조성당일기,
1616-07-24 ~ 1616-09-20

1616년 7월 24일, 김택룡의 생질 정득(鄭得)이 조상 묘가 있는 산의 산송(山訟) 때문에 영천으로 갔다.
8월 9일, 김택룡은 누님에게 가서 인사했다. 생질 정득이 산송 때문에 영주에 간 뒤로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 10일, 김택룡은 여러 곳에 편지를 쓰면서 생질 정득에게도 편지를 써서 빨리 돌아오라고 통지했다. 이날 경복(景福)이 영주 이산(伊山)에서 말을 끌고 돌아왔는데, 경복의 족아(族兒)인 이름이 충남(忠男)이라는 놈이 김택룡을 찾아와 말하기를, 생질 정득이 산송(山訟)과 그 조상 묘에 참배하고 소제하는 일 때문에 머무르고 있어서 와서 알린다고 하였다. 정득이 김택룡에게 보내는 편지도 전해 주었다. 이틀 뒤 8월 12일, 정충남이 돌아가기에, 김택룡은 그 편에 생질 정득에게 할 말을 전하였다. 그러나 편지는 따로 쓰지 않았다.
8월 23일, 이손(李孫)이 영주에서 돌아와 김택룡에게 인사하러 와서 생질 정득이 보낸 편지를 전해주었다. 편지에는 산송 사건 때문에 들어오기가 쉽지 않다고 하였으며, 애남이를 이산(伊山)에서 만났는데 오늘 김택룡이 있는 곳에 도착할 것이라는 말이 있었다.
9월 7일, 김택룡이 장세훈(張世勳)을 만나 생질 정득의 산송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박씨 집에서 근래 산소를 조성하는 일을 시작하였으므로, 일꾼을 동원하는 패자(牌子)를 마을 이장이 가지고 갔다. 다음 날 8일, 김시성이 김택룡을 찾아 와서 만났는데, 그가 박가(朴家)의 산송사건에 대해 말하였다. 그러면서 전하길 김택룡이 정문(呈文)을 작성하여 생질 정득에게 주었기 때문에, 박가네에서 김택룡을 원망한다고 하였다. 김택룡은 그에 대해 풀어서 이야기해 주고, 또 술을 대접하고 보냈다.
9월 20일, 산송 사건에 대해서는 영주에서 무덤을 파서 묘지석(墓地石)을 얻는 여부에 따라 진위를 증명하여 보고하라는 지시가 있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판결문이 다음과 같이 내려져서 일단 산송 사건은 종결되었다.

“박가와 정가의 묏자리 쟁탈전 - 마침내 타협점을 찾다”

김택룡, 조성당일기, 1616-09-25

1616년 9월 25일, 김택룡의 생질 정득이 영주 이산(伊山)에서 돌아와 소지동(蘇池洞) 할아버지 산소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김택룡에게 말하길, 오늘 박가가 감사의 판결을 따르지 않고 송사가 걸렸던 산에서 묘소를 만들기 시작했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정씨 친족들이 모두 모여 금지시키고 중지시킬 계획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김택룡이 이미 박가가 산송 다툼이 일어난 바로 그 곳에 묘를 쓰지 않고 다른 곳으로 다시 묘자리를 잡았으니, 두 집안 모두 장례를 허용하기 위해 서로 모이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정수 등 여러 공들이 김택룡의 집 앞을 지나면서도 그를 만나러 들어오지 않았다. 김택룡이 정소(呈訴)에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혐의를 피하고자 해서였다. 생질 정득만 김택룡을 찾아 왔다.

“사람을 불러 함께 아들의 묏자리를 돌아보다”

김택룡, 조성당일기,
1617-03-01 ~ 1617-03-03

1617년 3월 1일, 김택룡의 노비 강아지가 산을 보고 묏자리를 잡는 일 때문에 이자정을 초대하러 말을 끌고 회곡(檜谷)으로 갔다. 김택룡은 편지는 쓰지 않고 말로만 강아지에게 해 주면서 이자정에게 전달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저녁에 이자정을 기다렸는데 오지 않았다. 지난 번 이날 쯤 오겠다는 약속이 이미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택룡은 강아지와 말이 바로 들어가 이자정에게 도착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다음 날 3월 2일, 이자정이 김택룡의 집으로 왔다. 와서 말하길, “사람과 말을 보내주지 않으셔서 오늘에서야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김택룡은 이자정과 말을 끌고 간 강아지가 길이 어긋났나보다고 생각했다. 김택룡과 이자정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밤이 되자 사랑채에서 잤다. 김택룡의 셋째 아들 김각도 함께 잤다.
3월 3일, 아침 식사 후에 김택룡은 이자정과 김숙·김각 두 아들, 권전룡과 함께 가동(檟洞)으로 갔다. 그리고 사현(砂峴)을 지나 산의 형세가 융결(融結 : 산의 기운이 뭉쳐 모여 있음)함을 보았다.

“묘자리 송사 때문에 길을 나서다가 물에 빠져 죽은 시아버지의 원한, 며느리가 풀어드리다”

미상, 임천서당중건일기,
1806-05-03 ~ 1806-05-04

1806년 5월 3일, 임천서당 회원인 나천(羅川)의 조원열(趙元烈)이 산송을 하러 가던 길에 그만 물에 빠져 죽었다. 애통하고 참담한 이 소식이 임천서당 중건 현장에까지 전달되었다.
그 다음날인 5월 4일에 임천서당 회원 일부가 약속한 대로 중건 현장에 모여 전병과 떡, 그리고 술을 나누며 담소를 나누던 때였다. 갑자기 한 상놈이 두건이 벗겨진 채로 급히 와 절을 하며 하회 서방님을 찾았다. 하회 서방님은 김명운(金明運)을 일컫는 말이었다. 김명운은 참석하지 않았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급한 행색을 보고 궁금하게 여겨 그 까닭을 물어보았다. 이에 그 하인은 사연을 이야기하였다.
“소인은 나천에 사시는 조 생원 댁 종입니다. 소인의 상전께서 어제 산송을 하러 가던 길에 물에 빠져 돌아가셨습니다. 시신을 찾아 수습한 후, 청상으로 계시던 부인께서 원통해하시며 친히 소송 상대편 놈의 최근 무덤과 예전에 투장한 무덤 3기를 파내고 곧바로 관가에 가서 직접 고발하였습니다.”
청상은 곧 김명운의 사촌 여동생이였고, 익사한 조원열의 며느리를 말한다. 이 사연을 듣고 모두들 놀라 슬퍼하였고, 그 며느리의 효성과 정열(貞烈)을 칭찬하였다.

“투장한 무덤을 파서 옮기게 하다”

권상일, 청대일기,
1739-08-05 ~ 1739-08-19

1739년 8월 5일, 권상일이 관직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온 후 신경 써야 할 일은 한둘이 아니었다. 지역 서원의 인사 문제에도 일일이 관여하고 있었으며, 지역 인사의 부고 소식이 전해지면 가문을 찾아가 일일이 뵙는 것도 노령의 권상일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어떠한 문제보다도 자기 집안의 대소사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대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권상일은 아침밥을 먹은 뒤에 바로 소지(所志)를 올렸다. 이어서 권상일 문중의 모든 사람들이 관청에 들어가 아뢰고, 또한 배자(牌旨)를 내어 소송의 상대편이었던 황야(黃埜)라는 자를 잡아오자마자 일제히 나아가 심문하여 보름날 전에 무덤을 파서 옮기겠다는 진술을 받아내었다. 그리고 황야는 곧 관청에 하옥되었다.
일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자 문중 사람들의 분이 조금은 풀리는 듯했다. 이미 여러 해 전에 황야라는 자가 문중의 묘소에 몰래 투장(偸葬)을 한 일이 있었는데, 그는 관청에서 투장한 묘를 당장 이장하라는 명령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이장하지 않고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문중에서 직접 황야를 잡아 확답을 받고 나서야 일이 풀릴 기미가 보인 것이다. 황야가 감옥에서 풀려난 것은 그의 종이 무덤을 파간 다음에 땅을 고르고 원 상태로 되돌린 뒤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황야가 또 다시 버티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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