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전쟁은 전후방이 따로 없다. 북한에서 쏜 미사일이 태평양까지 간다는 현실이고 보니 너무도 맞는 말이다. 특히 요즘은 무인 드론을 살상 무기로 이용하기까지 하니, 그 어디라고 안전할까.
드론(출처: 픽사베이)
과거엔 물론 전후방의 차이야 확실했겠지만, 전쟁의 고통이 모두에 미친다는 점에선 현대와 다르지 않았다.
여성이나 노인들은 아버지와 남편, 자식을 전쟁에 내보내야 했고, 남은 식구들을 건사해야 했다. 식량과 물자의 수급이 원활하지 않아 곤경을 겪고, 전쟁에 나갔던 가족의 죽음을 목도해야 했으며, 때로는 그 자신, 수탈의 희생양이 되었다.
<한국전쟁 70주년 특별 기획: 전쟁, 여성을 기억하다>, 2020(출처: 강릉 mbc)
전쟁영웅, 앞서 싸운 많은 이들 못잖게, 뒤에서 질곡의 세월을 버텨온 수많은 평범한 사람이 있지만, 너무 평범하기 때문일까, 그들을 조명하는 기록이나 증언은 많지 않다.
6.25의 숨은 영웅 ‘지게부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들은 군번도, 계급장도 없는 민간인 노무자들로, 정식 명칭은 '한국 노무단(KSC· Korea Service Corps)'이었는데, 속칭 '지게부대'로 불렸다. 미군들은 이들이 짊어진 지게의 모양이 알파벳 A자를 닮았다 해서 'A 프레임 부대(A Frame Army)'라 부르기도 했다.
우리나라는 산악지대가 많아, 미군이나 연합군들이 싸우기엔 힘든 지형이었다. 산악전투가 벌어지면 누군가는 그곳으로 끊임없이 군수 물자를 날라야 했는데 도로나 기반 시설이 열악한 상태에 차도 충분치 않았으니 결국 탄약의 운반책임은 이들 노무자들의 몫이었다.
<역사채널e: 잊혀진 영웅 지게부대>(출처: 유튜브_EBS Culture)
지게부대원들은 45kg 정도의 보급품을 지게에 싣고 하루 16km 정도를 걸어 다녔다. 미군들은 한사람이 들기도 힘든 탄약을 지게에 몇 개씩 짊어지고 올라오는 이들의 모습에 놀랐다고 한다. 10대부터 노인까지 구성도 다양했던 이들은 제대로 된 무기도, 무장도 없이 맨몸으로 산을 오가며 고스란히 위험에 노출되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 보관된 자료에 따르면 전사 2064명, 부상 4282명, 그리고 2448명이 실종 처리됐다. 한국노무단으로 전쟁에 참여한 인원이 약 30만 명임에도 불구하고, 참전했다는 사실을 입증해 줄 공식적인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 대부분 전사자, 전쟁유공자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 안타깝다.
영화 <황산벌>, 2003
이렇게, 기록도 남지 않은 억울한 무명의 참전자들의 이야기는 종종 영화나 드라마에서 상상력으로 보여질 뿐이다.
영화 <황산벌>의 거시기나, <명량>의 수군들이 그들이다. ‘거시기’에 대해서는 전에 한 번 언급한 적이 있다. 백제 출신인 그는 계백장군에게 차출되어 황산벌전투에 참전했다가 5천 결사대 중 유일하게 생존해 고향으로 돌아오는 인물이다. 분명 이름이 따로 있을 텐데 영화에선 내내 거시기로 불리는, 참으로 하찮고 평범한 인물이다. 거시기의 운명이 참으로 거시기한 것이, 백제가 신라에 복속된 뒤 다시 징병되어 신라군으로 고구려와 싸우기 위해 전쟁에 나간다는 것이다. 거기서 그는 주변 병사들에게 살아남는 비결을 강의하는데, 그건 바로 절대로 나서지 말 것, 최대한 숙일 것, 줄을 잘 설 것. 그런 자신의 철학 덕분인지, 거시기는 고구려군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예쁜 고구려 처녀와 결혼해 귀향하는 잡초 같은 생명력을 보여준다. 많은 이들이 환호한 지점이 바로 이곳이다. 계백 같은 유명인은 죽어도, 제국은 망해도, ‘거시기’ 같은 무명인은 살아남았다는 것.
영화 <명량>, 2014
<명량> 후반부에는, 대승을 거둔 거북선의 수군들의 대화가 나온다. 혹자는 이 부분이 너무나 직설적, 노골적이어서, 영화 전체의 격을 한 단계 낮췄다는 혹평을 하기도 한다. 그 대사는 바로 “나중에 우리 후손 아그들이 우리가 이라고 개고생한 걸 알까?” “아따, 모르면 참말로 호로자슥들이지.” 하는 것인데, 물론 시나리오 작법적으로 본다면, 직설적이거나 가르치려는 의도가 농후한 대사가 좋은 건 아니다. 그러나 이순신장군만 유독 멋지고, 이름도 이순신장군만 남는 마당에, 일개 수군 입장에서 이런 말 한 번 못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들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지 못하는 건 물론, 삶의 한 장면을 재연하는 순간에도, 결코 생색을 내면 안 된다는 것처럼 들려 미안하기까지 하다.
올해 백상예술대상에서 <자산어보>로 영화부문 대상을 받은 이준익 감독은, 오래 전 <황산벌> 거시기의 입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날카로운 현실 비판과 인간, 나라에 대한 따뜻한 사랑을 <자산어보>의 창대를 통해 다시 한 번 말하고 있다.
“창대야, 너 공부를 왜 하냐. 상놈이 과거를 볼 수가 있냐 돈이 있어 벼슬을 살 수가 있나.”
“사람 노릇 할라구요. 나리가 사학에 빠져갖고 이짝으로 귀양 오신 것도 그거 다 성리학 공부를 잘못 배워갖고 그런 거 아니요.”
영화 <자산어보>, 2021
비록 흑산도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지만, 성리학 속에 길이 있다고 굳게 믿는 청년 창대가, 서학을 신봉했다는 이유로 귀양 온 정약전을 만나 하는 이야기다. 정약전은 물고기에 대한 지식이 해박한 창대를 통해 흑산도의 물고기에 관한 책을 내고자 하지만, 창대는 왜 정약전이 그의 동생 약용처럼 <목민심서> 같은 ‘고상한’ 책을 쓰지 않고, 비린내 나고 흔하디 흔한 물고기에 관한 책 ‘씩’이나 쓰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양반의 서자인 창대는 그 자신 ‘양반’의 핏줄이라는 자부심이 있어 유독 ‘상놈’이라는 말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발끈한다. 창대는 탐욕스러운 탐관오리에 분노하면서, 만약 자신이 입신양명한다면, <목민심서>에 나온 그대로의 관리가 되어 백성을 위해 일하리라 마음먹고 있다.
영화 <자산어보>, 2021
그의 바람대로 창대의 양반 아비는 이제야 아들의 총명함에 눈을 돌리고 그를 서자가 아닌 양자로 호적에 올려 과거시험을 볼 수 있도록 길을 터준다. 창대는 기다렸다는 듯 스승 정약전과 흑산도를 떠나 뭍으로 가, 아비가 터준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때에도 창대에겐 <목민심서>의 목민관이 되어 백성을 위해 일 하리라는 희망이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맘처럼 되지 않았다. 창대는 자신이 신봉하던 ‘성리학’이 그저 백성을 탐학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었을 뿐, 백성의 삶에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정약전과 흑산도의 품으로 돌아온다. 이미 숨을 거둔 정약전은 제자가 찾아올 것을 예견하고 있었던 듯 완성된 자산어보와 편지를 남겨놓았다.
“창대야, 나는 흑산이라는 이름이 무서웠다. 헌데 너를 만나 함께 지내며 무서움이 없어지고, 호기심 많은 인간이 유배길에 잃었던 호기심을 다시금 되찾게 되었다. 그리하여 네 덕분에 음험하고 죽은 검은색 흑산에서 그윽하고 살아있는 검은색 자산을 발견하게 되었다. 창대야, 학처럼 사는 것도 좋으나 구정물 흙탕물 다 묻어도 마다 않는 자산 같은 검은색 무명천으로 사는 것도 뜻이 있지 않겠느냐.”
영화는 거기서 끝이 났지만, 창대는 아마 흑산도에서 전처럼 물고기를 잡으며 살았을 것이다. 물고기 잡는 일이 대단한 구국이나 구휼의 방법은 아닐지라도, 창대에겐 가장 그답게 나라를 위하는 일이 아니었을까.
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 2019
2019년 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에는 유관순의 감방동기로 수원 기생 김향화가 등장한다. 실제로 수원권번의 기생 33인은 김향화를 중심으로 3.1 만세운동을 벌였고, 김향화와 기생들은 투옥되었다. 수원 기생 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기생들은 만세운동을 주도했고 갖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이름이 남겨졌든 아니든, 그들의 발자취가 모여 오늘의 대한민국이 이루어진 것이다.
영화의 결말, 유관순을 면회하고 나온 김향화와 유관순의 오라비가 헤어지는 장면에서, 오라비가 물었다.
“앞으로 뭘 하실 건지 물어봐도 될까요?”
“만주로 갈까 합니다. 저도 지지 않을 거예요.”
같은 시각, 고문과 구타로 죽은 듯 누워있던 유관순에게, 배식을 담당하던 다른 죄수가 물었다.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요.”
“그럼 누가 합니까.”
여옥사 8호실에 수감되었던 죄수의 사진(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 2019)
힘겹게 뱉어낸 말을 끝으로 유관순은 숨을 거둔다. 영화 엔딩 타이틀에는 실제 유관순과 함께 서대문형무소 여옥사 8호실에 수감되었던 죄수들(지금으로 보면 중학생 정도밖에 안 된 어린 소녀들이 대부분인)의 사진이 담담히 흘러간다.
수원의 김향화님, 개성 지역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권애라님, 임신한 몸으로 만세를 외쳤던 임명애님, 그리고 분명 이름은 있으나,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많은 거시기 님들...그들에게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요.” 묻는다면 그들은 뭐라 답할까.
“그럼 누가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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