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대선을 앞두고 지인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남북관계가 어떻고, 여성과 노인, 약자들을 위한 정책이 어떻고, 경제민주화가 어떻고, 실컷 얘기하다가도 결국 ‘어떤 후보가 당선돼야 나의 재산권이 잘 지켜질 것인가’, 다시 말해 ‘누가 돼야 내가 돈을 벌까’가 결정적 판단 근거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출처: 픽사베이)
어렸을 적, 10더하기 20은 잘 해도, 질문이 10원 더하기 20원으로 변하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져 어머니 속 깨나 태울 정도로 경제관념이 없던 나, 그저 안 쓰고 안 먹기만 하면 잘 살아질 줄 알았던 내가 십여 년 전, 남편의 사업이라는 암초에 걸려 집을 날린 이후로는, ‘돈’의 힘에 대해 절감하게 되었다. 젊을 땐 친구들을 만나 꿈과 사랑, 희망을 이야기하던 내가 이젠 주식과 부동산, 노후준비를 입에 올리고 있다. 빚에 허우적대면서 애들 키우고, 생활하느라 다시 집을 마련한다는 게 요원해 보이는 지금으로서는, 내 집 마련을 조금이라도 용이하게 해주는 정책을 들고 나오는 후보를 찾게 된다. 집이며 다른 부동산들을 가진 나의 지인은 종부세 깎아주고, 재개발을 용이하게 해주는 후보를 지지하겠다고 한다. 아마도 지인이 지지하는 후보와 내가 지지하는 후보는 다른 사람이 되겠지.
결국 부동산 정책이 선거의 향방을 결정짓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동산에 대한 욕망이야 만국 공통이겠지만, 땅덩이가 좁은 우리나라의 부동산 사랑은 유독 더한 것 같다. 소설 『토지』가 대한민국의 국민 대하소설인 것도 그런 이유일지 모른다.
수많은 사극 콘텐츠에서 보여지듯, ‘대동법’을 시행하려는 왕과 “아니되옵니다.”로 저항하는 사대부들의 줄다리기가 왜 그리 오래도록 지속되었는지, 전국에 대동법이 시행되기까지 왜 그리 오랜 세월이 걸렸는지 충분히 알 만 하다.
대동법을 시행하려는 국왕과 반대하는 신하들(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 2012)
다음은 다산 정약용이 유배지 강진에서 아들에 보낸 편지의 일부다.
혹여 벼슬에서 물러나더라도 한양 근처에서 살며 안목을 떨어뜨리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사대부 집안의 법도이다. 내가 지금은 죄인이 되어 너희를 시골에 숨어 살게 했지만, 앞으로 반드시 한양의 십 리 안에서 지내게 하겠다. 분노와 고통을 참지 못하고 먼 시골로 가버린다면 어리석고 천한 백성으로 일생을 끝마칠 뿐이다.
모든 토지를 국유화하고 이를 ‘우물 정(井)’ 자로 나누어 균등하게 분배하자는 정전제를 주장한 개혁가, ‘경제민주화’의 선봉, 우리가 알고 있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그의 ‘in 서울’에 대한 집착을 보면, 그 역시 아들의 장래를 걱정하는 보통 아버지였음을 알 수 있다.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정약용 저, 박석무 편역, 창비출판사, 출처: 알라딘)
정약용보다 더 한 이미지 대 반전의 주인공은 퇴계 이황이다. 오만원권도 아닌 천원권 지폐에, 학자다운 욕심 없는 선연한 눈빛으로 인쇄된 이황이 사실 꽤 많은 토지를 적극적으로 증식했고, 노비의 수를 늘리기 위해 양인과의 혼인을 권장한 재테크의 달인이었음을 알게 된다면 어떠할까. 게다가 이황이나 정약용의 이런 모습들을 드라마나 영화에서 묘사한다면 과연 어떤 반응을 얻을지……
적극적인 재산증식을 꾀하는 사대부를 미디어에서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 보자.
드라마 〔신입사관 구해령〕에 등장하는 이조정랑 송씨. 이조정랑은 인사권을 좌우하는 중요한 위치 덕분에 치부가 매우 용이한 관직이다. 그런데 송씨는 이에 만족하지 않는다. 나라에 역병이 들자 많은 사대부들이 곡식 등을 매점매석하는데, 송씨는 특별히 역병을 치료하는 약재인 삼두음을 사서 창고에 모은다. 송씨의 딸 사희는 그런 아버지를 보고 크게 실망한다.
“대체 무슨 욕심이 그리 많으십니까. 돈이라면 백년도 더 쓰고 남을텐데 이렇게 졸렬하게 돈을 모으려 합니까.”
“의돈이 창고 속에 감춰둔 재물은 지금 흔적도 없지만 범중엄이 친구에게 보리를 나눠준 이야기는 아직도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때가 되면 관아에 삼두음 재료를 나눠주십시오. 한때의 사욕이 아니라 길이 남을 덕망을 택하십시오.”
아버지는 “매사 훈계질에 징그럽다”고 할 뿐 딸의 호소를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결국 사희는 아버지 몰래, 삼두음 재료를 아버지 이름으로 혜민서에 보내버리고 결과적으로 그 덕분에 송씨는 무거운 처벌을 면할 수 있었다. 이렇듯, 영화나 드라마에서, 재물을 탐하고 치부하는 사대부들은 하나같이 부정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나라의 재정이 부실해, 녹봉을 충분히 받지 못하는 상황에, 사대부 또한 생활인으로서 가족과 친척, 노비 등 식솔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고민했을 거라는 건 충분히 이해되는 상황이다.
유청은 아뢰기를,
“내수사 장리(長利) 혁파의 일은 원종의 말이 매우 타당하고 경주(景舟)의 말은 부당하니, 속히 혁파하소서. 조종조에서 설치한 것이 아니라 세조 때에 처음 설치한 것이니, 영원히 혁파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수사의 장리는 성종 때 혁파하셨는데, 대비전(大妃殿)께서 다시 설치하신 것이니, 지금 갑자기 혁파할 수 없다. 사인(舍人) 등이 과오가 있다면 정승이 감독하고 규명하는 것이 마땅하겠다.”
『중종실록』4권, 중종 2년 11월 15일
이처럼 궐에서조차 고리대로, 그것도 대왕대비의 주도 하에 돈을 벌었으니, 일반 사대부들의 고리대금업은 그저 누구나 다 하는 부업이었을지 모른다.
사대부들에게 있어 토지 외의 중요한 재산은 바로 노비였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는 말 한 마리와 노비 다섯을 교환했다는 기록도 있지만, 초중기 까지만 해도, 성인 노비 한명을 사려면 소 한 마리에 곡식을 더 얹어 줘야 했다. 이렇게 투자한 노비가 도망치는 일이 빈번해 주인들은 골머리를 앓았다. 이 때문에 추노꾼이 등장하게 되었다.
‘도망친 노비가 붙잡혀 왔을 때에는 혹사에 못 견디어 도망했을 경우, 고려 후기에는 1049년(문종 3)에 제정된 법에 따라 3회 도망했을 때 자자형(刺字刑)을 가해 주인에게 돌려주도록 했고, 경국대전에서는, 도망노비를 검거하지 못한 관리와 이를 알고도 소관인(所管人)에게 알리지 않은 자와 이웃은 제서위율(制書違律 : 법을 어기는 일)로 논죄하며, 만약 도망해 중(승려)이 된 자는 장 100을 때린 뒤 주변 작은 읍의 노비로 삼고, 스승 되는 중은 제서위율로 논죄한 뒤 환속시켜 충역했다. 또 도망한 노비를 고하면 4명 중에 1명을 상으로 주기도 했다.’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도망치는 노비〕
드라마 〔추노〕에서 도망쳤던 노비들의 뺨에 먹물로 ‘노(奴)’자를 새겨 넣던 장면은 아직도 충격으로 남아있다. 영조에 이르러서야 이 자자형(刺字刑)이 완전히 사라졌다 하니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 잔인한 형벌을 받았을지…… 노비 없인 외출도 못하고 밥을 굶을 정도로 노비의 노동력에 의존적인 사회였기에 비일비재했던 비극이다.
드라마 〔추노〕, 2010(출처: KBS2)
드라마 〔추노〕, 2010(출처: KBS2)
물론 일전에 언급했던 풍석 서유구처럼, 자신의 손으로 밭 갈고, 물고기 잡고, 부엌에 들어가 잡은 물고기와 제 손으로 길러낸 야채로 직접 요리한 선비도 있다. 그는 관념적 학문을 ‘토갱지병(土羹紙餠, 흙으로 끓인 국·종이로 만든 떡)’, 선비들을 ‘헛되이 곡식만 축내면서 세상에 도움이 안 되는 자’라 비판하면서 고구마 재배법을 기록한 ‘종저보’ 등의 실용서와 가뭄을 극복할 수 있는 수차를 제작해 보급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농업, 목축업, 어업, 상업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백과사전적 지식들을 총망라해 기록한 ‘임원경제지’ 저술이야말로 풍석의 대표적 업적일 것이다. 그 중 재산증식법을 설파하는 ‘예규지’ 서문에서 그는 ‘대의명분과 실리 사이에서 중용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임원경제지』「예규지」(출처: 고려대학교 해외한국학자료센터)
하지만 풍석의 고언을 ‘조선의 대학자도 재산증식에 힘썼으니 우리도 당당하게 재테크하자’는 플래카드로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제 ‘실리’가 전부인 세상, 너무나 쉽게 ‘돈이 다’라고 말 하는 세상이 아닌가. 이미 우리는 지나치게 재테크 신(神)을 숭배 중이다.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다’는 말이 수치도 체면도 가리는 면죄부 된 지 오래다.
아무래도 대선후보들의 정책을 다시 꼼꼼히 살펴야겠다. ‘경제대통령’, ‘당신을 잘 살게 해줄 오직 한 사람’ 기대하고 찍었는데 알고 보니 그가 내 얼굴에 자자형을 가하거나, 내가 죽어가는 순간에 귀한 약재를 자신의 창고에 들일 괴물일지 어찌 알겠는가. 이미 수없이 당한 주제에, 또 다시 당할 순 없다.
시기 |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 장소 | 출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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