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레이스도 며칠 남지 않았다. 이제 곧 대한민국의 20대 대통령이 탄생한다. 원고를 쓰는 오늘은 공식선거운동의 첫날인데, 이전과 다름없이 서로 상대후보의 약점 공격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는 듯하다. 역대 최고의 비호감대선이란 말이 나올 만큼, 후보들을 둘러싼 좋지 않은 이야기들과 공격거리가 쏟아진다. 참인지 거짓인지 분간도 가지 않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국민들의 한숨은 더해간다. 안타깝게도 나 역시 이번 대선엔 긍정적 에너지보다 ‘저 후보가 되면 큰일 나겠다’는 위기감, 즉 부정적 에너지가 투표하러 가는 원동력이 될 참이다.
그래선지 이번엔 후보 혹은 후보 가족의 사과도 유독 잦았다. 본인 혹은 선대위의 입장문을 통해, 기자회견을 통해 머리를 숙였다. 석고대죄, 삼보일배, 큰 절, 사과 퍼포먼스… 뭐 이런 것들이야 선거 때마다 등장해 이제 큰 감흥은 없다. 하지만 그 조차 하지 않는다면 문제다. ‘사과’하는 태도야말로 국민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앞으로 국민을 어떻게 생각하고 일할 것인지 미리 엿볼 수 있는 척도라 나는 생각한다.
『Attitude is Everything』(제프 켈러 저, 김상미 역, 아름다운사회, 2015. 출처: 교보문고)
‘태도가 전부다(attitude is everything)’라는 말도 있거니와, 잘못은 그렇다 치고 일단 진의가 잘못 전달되었다고 우기고 보거나, 그런 적 없다고 발뺌을 한다거나, 사과가 굳이 뭐 필요하냐는 식의 태도를 보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표를 애걸해야 할 선거기간에 저 정도라면 당선 이후엔 국민 따위 가볍게 무시할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진영이 다르다거나,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국민이라도 대한민국 국민이다. 물론 상대방이 괜한 트집을 잡거나, 오해로 인해 사과를 요구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행동하는 마음의 연원을 들여다보고 어루만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야 국민 대통합이라는 과제를 이룰 수 있지 않은가.
“사죄하겠네. 이 땅의 백성들을 분노케 한 죄, 그대들의 눈물을 살피지 못한 죄, 되려 바닥으로 내몰리게 한 죄, 주상전하와 세자저하, 그리고 조정신료들을 대신하여 내가 사죄하겠네.”
2016년 드라마 〈대박〉에서 연잉군은 화 난 백성들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한다. 분노해 사람을 죽이려던 백성들은 모두 놀라 그를 돌아보고 하던 일을 멈추었다. 그들의 화는 가라앉았다. 그러나 궁으로 돌아온 연잉군은 그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다. 그의 형인 세자는 이렇게 말했다.
드라마 〈대박〉, 2016(출처: SBS)
“무릎을 꿇었다지? 주상전하를 대신해 무릎을 꿇었다? 내 너의 뜻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너의 그 치기어린 행동이 얼마나 위험한 줄 알기나 하느냐. 네가 무언데 감히 전하의 위신에 누를 끼치고 네가 무언데 감히, 감히 나를 대신해 사죄를 한다 말이냐.”
아버지 숙종 역시 마찬가지.
“여론이란 것은 이리 담아놓은 물과 같은 것이니라. 그릇이 기울어지는 쪽으로 물은 쏟아지기 마련. 너는 물이야, 그릇이야? 물을 어디에 쏟을지 이미 제 손에 달려있거늘 어찌 질질 끌려 다니는 게야 줏대 없이! 죽든 살든 줏대 있게 행동하란 말이다.”
도학정치를 이상으로 삼은 조선시대, ‘백성은 하늘’이라 말하면서도, 정작 하늘에 무릎을 꿇자 천지가 뒤집힌 듯 들고 일어난 것이다. 이런 태도는 오늘날도 마찬가지 아닐는지.
『목민심서(牧民心書)』(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우리 조선에 청백리(淸白吏)로 선정된 사람이 통틀어 1백 10명인데, 태조(太祖) 이후에 45명, 중종(中宗) 이후에 37명, 인조(仁祖) 이후에 28명이다. 경종(景宗) 이후로는 이렇게 뽑는 일도 끊어져, 나라는 더욱 가난해지고 백성은 더욱 곤궁해졌으니 어찌 탄식하지 않겠는가. 4백여 년 동안 관복을 갖추고 조정에 벼슬한 자가 몇 천, 몇 만이었는데 청백리로 선정된 자가 겨우 이 숫자에 그쳤으니, 역시 사대부의 수치가 아니겠는가!”
정약용 『목민심서(牧民心書)』
드라마 〈어사와 조이〉 1회에는 충청지방으로 간 암행어사의 사체가 바닷가로 떠 밀려오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는 세곡창고를 급습해 수령과 중앙관료의 비리를 알아내고, 세곡선을 타고 한양으로 오던 중, 수령의 수하들이 일부러 세곡선을 침몰시키는 바람에 죽음을 맞게 된 것이다. 더구나 이 수령은 여염의 처녀를 농락하여 임신시켜 죽게 만들었으니 부패3종 세트, 비리의 해트트릭을 달성한 셈이다.
드라마 〈어사와 조이〉, 2021(출처: tvN)
구체적인 상황은 좀 다르지만 실제로 백성들이 바친 피 같은 세금(곡식)을 실은 배가 난파되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다수가 관리나 조졸(배에 탄 모든 사공과 격군들)들의 농간에 의해서였다. 세금으로 거둔 곡식으로 제 배를 불리고, 모래를 섞거나 빈 포대를 싣고 오다 일부러 침몰시킨 것이다.
1751년 7월 27일, 영산현(靈山縣), 현풍현(玄風縣), 창녕현(昌寧縣)에서 내야 할 세곡미를 실은 배가 5월 4일 밤에 부평부(富平府) 호도(虎島) 앞 한강에 이르러 난파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건지지 못한 쌀과 콩의 수량이 580섬이나 되었다. 격군(格軍) 한 사람이 물에 빠져 죽었다. 하지만 시신을 끝내 찾아내지 못하니 행적이 이상하고 의심스러운 일이다. 지난해 6월에 실어 보낸 배가 금년 여름에야 비로소 근기(近畿) 지방에 이르러 이런 사고[臭載]가 났으니 더더욱 의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다. 더욱이 감관(監官)과 색리(色吏)들은 쌀과 콩 중 색이 나쁜 것은 ‘모두 묵은 것을 바친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 지방 수령들은 모두 일제히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막중한 세금을 바치는 일에 어찌 관리들이 감봉(監封)을 잘못했겠느냐는 것이다. 이에 경상감사 조재호는 감관과 색리의 거짓말을 엄중히 다스려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조재호 『영영일기(嶺營日記)』
비리의 종류와 방법은 많고도 많고, 사극 드라마와 영화에는 으레껏 부패한 탐관오리들이 등장한다. 더 나열하는 것도 부질없을 정도로.
이쯤에서 내가 바람직한 공직자의 모델이라 생각하는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호남의 일에 대해서는 신이 이미 서필원(徐必遠)을 추천하여 맡겼는데, 이는 신이 만일 갑자기 죽게 되면 하루아침에 돕는 자가 없어 일이 중도에서 폐지되고 말까 염려되어서입니다. 그가 사은하고 떠날 때 전하께서는 힘쓰도록 격려하여 보내시어 신이 뜻한 대로 마치도록 하소서. 신이 아뢰고 싶은 것은 이뿐만이 아닙니다만, 병이 위급하고 정신이 어지러워 대략 만분의 일만 들어 말씀드렸습니다. 황송함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효종실록』20권, 효종 9년 9월 5일
잠곡(潛谷) 김육(金堉, 1580~1658)이 효종에게 올린 마지막 상소다. 여기서 그가 중도에서 폐지되고 말까 염려된다고 한 일이란 ‘대동법(大同法)’이다. 영화 〈광해〉에서는 광해군 혼자 오롯이 대동법을 주장했다 오해하기 쉽게 묘사되었지만, 사실 김육이야말로 대동법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육은 어려서 왜란을 겪고 어려운 세월을 보냈다. 부모까지 잃고 더욱 살기가 어려워진 그는 친척집을 떠돌며 살기도 했다. 과거에 합격한 후 성균관 유생이 되었지만 광해군의 폭정에 실망해 귀향, 농사짓고 산에서 숯을 구워 내다 파는 등, 일반 백성들보다도 빈한한 살림살이를 이어나갔다. 인조반정 이후 조정의 부름을 받고 나아간 그는, 자신이 몸소 체험해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백성들을 위해 ‘대동법’을 주장했다. 수십 년간 그의 주장은 변치 않았고 죽기 열흘 전까지 위와 같은 상소를 왕에게 올렸던 것이다.
대동법 시행기념비(출처: 문화재청)
상평통보(출처: 국립중앙박물관)
그는 또한 사신으로 명나라에 오가면서 화폐경제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꼈다. 이 일을 추진함에 있어 “직접 돈을 만지고 유통하는 것은 저잣거리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백성들이지 사대부가 아니다.”라며 관리들이 아닌 저잣거리 백성들과 의견을 나누었다. 그의 이런 노력은 이후 상평통보 발행으로 이어졌다.
사람은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가장 잘 알기 마련이다. 김육이 백성의 어려움을 직접 겪지 않았더라면, 아무리 올곧은 인품을 가지고 있다 해도 위와 같은 삶을 살았을 리 없다.
우리의 지도자도 이런 사람이길 바란다. 아무리 곱고 착한 품성을 지녔다 해도, 엘리트 코스만을 밟으며 갑(甲)으로 산 사람이라면 자신의 경험을 초월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이들에게 가장 큰 고통은 종부세 정도가 될지도 모른다. 이런 경험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은 듣고자 하는 태도다. 겸손이다.
이 사회의 곳곳에서 눈물 흘리는 이들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대변할 수 있는, 겸손한 태도를 가진 지도자가 우리 대한민국의 미래에 많아졌으면 좋겠다.
시기 |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 장소 | 출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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