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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말

우리는 이겨 낼 수 있습니다

편집자의 말을 쓰기 위해 컴퓨터 앞에 앉아 있지만, 한 글자도 쓰지 못한 채 방문 밖에서 들리는 뉴스 소리에 자꾸만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웹진을 기획할 때만 해도 이렇게 무거운 마음으로 원고를 정리하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때만 해도 사태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던지, 벌어진 일보다 여기서 비롯된 공포가 문제 아닐까? 공포에서 차별과 혐오가 배태되는 것은 아닐까? 자국의 상황을 통제하고 은폐하여 전하는 중국의 언론, 이를 언론 산업의 상품처럼 전하는 우리와 서방 언론이, 결국 공포와 혐오를 조장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이런저런 생각을 해 보기도 했습니다.

언론을 통해 전해지는 중국의 소식에 마음이 무척 아팠지만, 낯선 지명과 숫자로 표현되는 상황은 막연하기만 했습니다. 낯선 지명에 익숙한 지명이 더해지고, 숫자가 구체적인 누군가가 되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막연했던 공포는 실체화된 대상을 만나면서 더 확실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렇게 지난 한 달을 보내고 보니, 모임, 회의, 외식, 쇼핑, 관람 등등의 일상이 걱정됩니다. 내가 다녔던 장소, 가족들이 연관된 장소들이 언론에서 언급되고 보니, 그곳에서 ‘누군가’와 마주쳤던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생깁니다. 각종 정보와 언론이 만들어 낸 공포를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두려움을 누르기 어렵습니다. 공포를 겉으로 드러내는 순간 혐오가 될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저만 그런 경험을 하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박규택 감독님은 지난 한 달 동안의 경험을 <마스크와 손 소독 그리고 마작>이란 글에 담아 주셨습니다. 코로나19 확산에 따라 일상생활과 익숙한 공간들이 공포에 노출되어 가는 과정을, 2020년 1월 18일부터 2월 20일까지 날짜순으로 그날 보도되었던 코로나19 관련 보도 내용과 감독님의 일상을 교차 서술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감독님의 일상에 ‘마작’이란 새로운 놀이가 들어오던 날, 코로나19라는 감염병도 함께 다가왔습니다. 동경의 놀이였던 동시에 감염병을 일으킨 문화적 요인으로 말입니다. 코로나19가 진행되면서 ‘손 소독과 마스크’란 개인위생 생활도 일상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언제 어디서 감염되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라는 무기력’, ‘이 상황 때문에 무섭다는 당당함’이란 감정들이 차례로 찾아옵니다. 감염되었다면 이제 언제 어디서 감염시킬 수도 있습니다. 가족과 이웃에게 폐를 끼치게 되고, 개인신상정보가 모두에게 알려지며, 다른 누군가의 당당한 무서움에서 비롯된 비난을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또 다른 공포가 찾아옵니다. 그런데 감독님은 서로 결이 다른 두 공포의 틈새에 끼어든 새로운 놀이와 생활에서 이 공포들을 이겨낼 힘-희망과 노력-도 찾아내신 것 같습니다.

정용연 화백님은 <이달의 일기>에 돌림병이 돌 때 마을에서 내쳐진 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던 안타까운 사연을 담아 주셨습니다. ‘격리’ 외에는 방법이 없었을 때, 공동체에서 추방된 이들이 겪은 공포와 소외감은, 지금의 우리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컸던 것 같습니다. 김택룡(金澤龍) 선생님은 《조성당일기(操省堂日記)》에 이 사연과 함께 목숨을 끊은 정희생의 어머니 장례를 일가 사람들이 함께 모신 일까지 기록해 두셨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이겨내기 어려웠지만, 그래도 계속 살아갈 수 있는 힘은 서로를 돕는 데 있었습니다.

어느 시대, 어느 곳이든, 공동체들은 그 구성원을 감염병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시스템을 만들고 자원을 투입하는 등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시스템이 붕괴되고 자원이 고갈되는 순간이 왔을 때, 결국 이겨낼 수 있다는 희망과 노력이 재난을 극복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조선시대 기록물에서 발견할 수 있는 당시의 재난 상황은 비참하기 그지없습니다. 당시로써는 최선이었고 합리적이었을 시스템이나 자원은, 지금 사람들의 눈에는 많이 부족해 보이니, 당시 사람들이 받았을 고통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이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때 그 사람들은 재난을 이겨냈습니다.

강선일 선생님은 <사재기와 소문, 그리고 혐오:진짜 공포는 무엇인가-전염병에 대처하는 조선의 자세에 비추어>에서 기록물 속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 감염병 재난과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의 사연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제(厲祭)의 제문(祭文) 속에 간절한 호소를 담은 지방관 이민구(李敏求). 한 사람의 백성을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자신의 영탈을 포기한 채 녹봉을 희사하고 이웃 고을에까지 곡식을 빌려 진휼에 힘쓴 운봉현감. 이들뿐만 아니라 돌림병이 돌 때마다 병막(病瘼)에 자원해 나가 환자를 돌보았던, 수많은 의원(醫員), 의녀(醫女), 의무(醫巫)들. 보다 효과적인 의서(醫書)와 의약(醫藥)을 만들기 위해 국가의 자원을 동원했던 위정자(爲政者)들까지. 돌림병에 ‘격리’가 최선일 수밖에 없었던 사회에서 이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당시 사람들은 병이 주는 공포에 더해 사회로부터 추방되었다는 공포까지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이들의 노력은 그 사회가 그 병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한 “사회적 백신”이었고, 그 백신은 오늘날의 감염병 앞에 서 있는 우리 사회에서도 유효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기에 병에 대한 공포는 본원적입니다. 그러나 병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거나 불확실할 때 병에 대한 거짓 정보는 이 본원의 공포를 증폭시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공포는, 차별, 배제, 혐오, 수탈, 횡령, 매점매석 등 각종 사회적인 문제를 야기하고, 여기서 또 다른 공포들을 만들어 냅니다. 홍윤정 작가님은 <인포데믹 시대의 공포>에서 지난해 방영되었던 드라마 “신입사관 구해령”의 돌림병 에피소드가 거짓 정보들이 증폭시킨 공포를 보여주고 있다고 합니다. 이 에피소드를 통해, 돌림병이란 재난을 두고 경제적, 정치적 손익 계산을 하기에 앞서, “바른 정보는 공유하고 예방하는 것, 박수 치고 싶은 마음이 있더라고 잠시 누르고 걱정해주는 것”이 바이러스의 유행과 공포의 팽배를 막기 위해서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에서는 금난수(琴蘭秀) 선생의 정자 ‘고산정(孤山停)’을 소개합니다. 정자의 이름은 정자에서 마주 보이는 산 이름 ‘고산(孤山)’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고산정은 선생께서 벼슬길에서 돌아와 학문과 수양을 하셨던 곳인 만큼 산과 물이 깊은 곳에 외따로이 있습니다. 그래서 돌림병이 돌았을 때는 병을 피하는 피접(避接)의 장소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번 달 <스토리 이슈>는 영화 “콜”의 시나리오를 집필하신 강선주 작가님과의 인터뷰입니다. “콜”이란 영화는 “알아서는 안 될 일을 알게 되고, 벌어져서는 안 될 일들이 벌어지게 되는 상황에서, 이 상황에 놓인 각각의 인물들이 자신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합니다. 영화에 대한 소개 외에도, 시나리오를 쓰게 된 계기와 시나리오 작업 과정에 대해 작가님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습니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감염병에서 비롯된 과도한 불안과 공포를 해소할 심리 방역에 대해 소개한 기사 내용(동아일보, 2월 25일자)을 발췌해 덧붙입니다. 심리 방역의 핵심은 “우리 사회가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집단효능감 △보건당국과 지역사회, 이웃에 대한 신뢰 △합리적 위험인식 △정부, 언론, 국민의 효과적인 소통 △감염병에 대한 올바른 이해”라고 합니다.




집필자 소개

조경란
조경란
재밌는 이야기를 좀 더 많이 알고 싶어서, 서강대에서 역사 공부를 하였습니다. 박사과정(한국사전공)을 마치고 나서는 사단법인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계속 역사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스승님께 배운 수많은 이야기를 혼자만 알고 있는 게 안타까워 알고 있는 것을 나눌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드라마 “주몽” 작가와 같이 공부할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시작해서, 드라마 제작진의 역사 자문에 응한 드라마가 “정도전”, “징비록”, “장영실”, “역적”, “녹두꽃” 등 약 15편 정도 됩니다.
“전염병으로 괴로워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어머니와 넋을 잃은 아들”

김택룡, 조성당일기,
1616-07-17 ~ 1616-07-21

1616년 7월 17일, 저녁때였다. 정희생(鄭喜生)이 발광하여 김택룡의 집으로 뛰어들어 난동을 부렸다. 온 집안이 놀라고 당황해 어쩔 줄을 몰랐다. 택룡은 정희생을 겨우 달래서 돌려보냈다. 택룡이 듣자하니, 그의 집안에 전염병이 크게 발생하여 마을 사람들이 모두 피하고 상대를 해주지 않아 이런 뜻밖의 일을 저지른 것이라고 했다. 택룡은 너무 놀라 어찌 할지 고민했다. 상황이 진정되자 아들 각 등은 모두 사랑에서 머무르고 나머지는 모두 안으로 들어왔다. 다음 날 7월 18일, 정희생이 또 택룡의 집 앞에 나타났다. 그러나 바깥에만 있다가 들어오지 않고 바로 돌아갔다. 밤에 정희생의 어머니가 밤나무에서 목을 매 죽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택룡은 너무 참혹스럽다고 생각했다.
7월 19일, 택룡은 아침에 정희생의 어머니가 죽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놀라고 슬퍼했다. 그래서 심씨 일가의 여러 사람들을 역정(櫟亭)으로 불러 모이도록 한 후, 정희생의 모친상을 어떻게 치를 것인지 의논했다. 모두들 말하길, “정희생이 지난번처럼 크게 광란하면 범접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모두 힘을 합해 그의 손을 등 뒤로 단단히 묶어 두고 나서야 일을 치를 수 있을 듯한데요.”라고 했다. 택룡의 아재 심인이 택룡을 찾아와 정희생의 어머니를 어떻게 염습(殮襲)할 지에 대해 의논하고 갔다. 다음 날 20일에 심운해 등이 정희생을 묶어 결박했다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하루가 지났다. 누가 와서 택룡에게 전하길, 정희생은 묶어 두었더니 더 이상 소란을 피우지 않아 그 사이에 정희생의 어머니를 입관하고 염했다고 하였다.

“문안 인사마저 두렵게 만드는 전염병”

김택룡, 조성당일기,
1617-04-27 ~ 1617-05-03

1617년 4월 27일, 김택룡은 구찬숙 일가가 전염병을 피하여 와운서재에 와서 묵은 지 이미 수삼일이 되었다고 들었다. 그래서 사람을 시켜 문안을 보내려 했는데, 다시 생각하기를 ‘병가(病家)에서 나온 사람들이라 접촉하기가 어려우니 그만두어야겠다. 이 병은 부포에서 크게 번진다고 하는데... 몹시 두렵구나!’
라고 하였다.
6일 뒤 5월 3일, 김택룡의 아들들인 김숙과 김각 형제가 와운서재에 가서 구찬숙의 아내를 만났다. 병을 피해 와서 임시로 거처하기 때문에 이제야 비로소 가서 만난 것이었다.

“전염병을 피해 도망 다니다”

장흥효, 경당일기, 1618-02-25 ~

1618년 2월 25일, 평소 잘 찾아오지 않던 이즙이 장흥효를 찾아왔다. 그는 다른 일이 있어 그를 찾아온 것이 아니라 지나는 길에 들르게 된 것이다. 그래서 장흥효를 그가 왜 이곳에 왔는지 궁금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온 것은 다음 아닌 전염병 때문이었다.
장흥효가 살던 당시에는 전염병이 너무 흔했다. 그가 살던 일생 동안에도 그가 사는 마을에 수차례 전염병이 마을을 휩쓸기도 했다. 어쩌면 당시의 삶 자체가 전염병과 더불어 살았다는 것이 더 정확한 설명일 지도 몰랐다.
이즙이 살고 있던 마을에 전염병이 돌았다. 당시 전염병이 마을에 돌기 시작하면 별다른 대체 방법은 없었다. 도망 다니는 것이었다. 백신이 존재하지 않았던 조선후기에는 전염병의 존재조차 알 수 없었다. 지금의 기준으로 너무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병도 당시에는 너무 무서운 질병이 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병이 발생했다는 말을 들으면 무조건 피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이즙도 마을에 병이 돌기 시작했다는 말을 듣고 집을 나와서 다른 마을로 피신하는 도중에 장흥효의 집에 들르게 되었다. 그는 장흥효에게 하직인사를 드렸다. 도망 다니다 보면 언제 다시 찾아뵐지 몰랐기 때문이다. 짧게는 한 달이면 돌아올 수도 있지만 길어지면 수개월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홍역이 사람을 가리지 않다”

권상일, 청대일기,
1720-03-03 ~ 1720-03-07

1720년 3월에 홍역(紅疫)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한번 발생한 홍역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보통 소아에서 발생하여 20세까지 생존자의 거의 90%가 이 병에 걸리는데 일생 동안 걸리지 않는 자는 거의 없을 정도였다. 왜냐하면 홍역은 한번 발생하면 전염성이 아주 강한 질병이었다. 그러다 보니 성역이 없었다.
세자에게서 발열 증세가 나타났다. 발열 증상이 다소 오락가락 하기도 했다. 홍역이었다. 홍역은 처음에 열이 나기 시작하여 물집이 잡히기 시작하는데 세자의 경우에는 얼굴과 등 가슴에 물집이 났고 후에는 팔과 다리에도 나타났는데 열이 떨어진 뒤에는 물집이 거의 다 사라졌다고 한다.
몇일 뒤 세자의 홍역은 거의 다 사라지고 점차 회복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고향에서 전해졌다. 우리 집은 편안했고 권상일의 아들인 만도 홍역을 순조롭게 잘 치렀는데 사촌인 천응이 7일 동안 크게 앓고도 아직 반점이 나타나지 않아 매우 걱정스럽다는 소식이었다. 세자든 일반 백성이든 모두 홍역을 잘 치루었지만 유독 사촌인 천응만 그러지 못했으니 속상할 만했다.

“흉년과 전염병으로 인해 군사훈련을 연기할 것을 요청하다”

조재호, 영영일기, 1752-02-10 ~

1752년 2월 10일, 통제사와 좌우병사(左右兵便)가 올봄 수군과 육군의 훈련은 전례대로 거행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조재호 경상감사는 계속되는 흉년과 전염병으로 군사훈련을 연기할 것을 청하는 장계를 올린다.
지난해에 보리 흉년이 매우 심했고 가을보리 역시 한발로 말라죽어서 전혀 싹트지 못한 까닭에 곤궁한 백성이 바라는 것은 봄보리를 때맞춰 다시 파종하는 것이니 그 시기를 놓치게 할 수 없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다. 또한 전염병이 근래에 또 더욱 퍼져서 사망하는 참혹함과 전염병에 대한 근심이 고을마다 심각한데 이런 때에 수만 명의 군사가 섞여서 훈련하게 되면 전염병이 더 창궐하게 될까봐 걱정되는 것이 두 번째 이유다. 앓다가 겨우 소생된 부류들이 열흘 넘도록 바깥에서 잠을 자며 뒤섞여 처하다 전염되면 큰일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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