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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말

공부의 가을이 온다

높아진 하늘 아래 산과 들에 바람이 풀어놓아 졌고 풀벌레 소리가 유난스럽습니다. 무더위가 가시면서 논밭의 열매들이 영글고 있습니다. 멀찍이 두었던 책들을 펼쳐 보고, 엄두를 내지 못하던 글을 쓰거나 편지 메일을 보내기도 합니다. 취미 생활에 빠져도 보고 어려워서 접어두었던 기술을 배워보려고 마음을 굳게 다집니다.

“조선 사람들은 책을 좋아하여 사신들이 중국 땅에 올 때 옛 책과 새 책, 패관소설, 그리고 그들 나라에 없는 것들을 시중에 나가 서목을 베끼고 또 책이 비싸다 하여도 아까워하지 않고 구입해 돌아가므로 오히려 그들 나라에 이서(異書)가 많다.”

16세기 중국 명나라의 문인 진계유의 이 글에서 우리 선인들은 책과 공부를 극성스럽게 좋아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이 있으며, 조선이 인쇄와 출판의 세계적 수준이었던 것은 공부를 좋아하던 우리의 전통과 맥락을 함께 합니다.

본격화되는 4차 산업혁명의 파도 속에서 두 해가 되어 가는 코로나19 팬데믹에서 우리 사회는 놀라운 수준으로 지혜롭게 변화에 적응하고 있습니다. 다이내믹하고 혼돈스런 상황에서 전문가 시스템 또는 지식 시스템이 작동하는 데에 원인이 있다고 평가됩니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고 글과 말로서 학습되지 않은 지식들이 더욱 중요해진 스스로 공부하고 협동하여 풍부하게 배우던 우리 선인들의 공부법이 빛을 발하는 대목입니다. 웹진 담談은 조선시대 선비들의 자기 주도형 공부법이 가진 중요성을 주제로 하여 이번 호를 준비했습니다.

김자운 선생님은 〔선비의 자기주도형 공부법〕에서 퇴계와 그의 제자, 서원의 공부법 등을 사례로써 펼치어 주었습니다. 조선시대 선비들에게 공부법의 최대 화두는 앎과 삶, 학습자와 마음, 몸과 마음, 과거공부와 마음공부가 어떻게 조화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에 있다고 설명합니다. 선비들에게 자기 주도적 공부란 결국 관계의 교육학으로 집약되며 진정한 자기주도 학습의 성패도 결국엔 관계의 문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문영 작가는 〔정생의 독서일기〕에서 탁족과 천렵을 하며 책과 옷을 햇빛에 쏘이는 포쇄를 하던 서당의 여름 풍경을 펼쳐 보입니다. 무더운 여름날 공부에 지친 학동들과 함께 책들을 이고지고 산에 오르며, 책을 수십만 번을 읽으며 서산(書算)으로 책 읽은 횟수를 계산하며 공부하던 판타지에 빠져 보시기 바랍니다.

이달의 일기의 권숯돌 작가님은 금난수의 성재일기(惺齋日記)를 기반으로 한 〔공부에 날개를〕의 만화 작품에 공부에 지치고 고민스러워하는 학생에게 퇴계 이황 선생님이 조선시대 선비들의 공부법으로 조언하는 내용을 담아주셨습니다. 읽고 암기하고 베끼어 쓰고 필사하여 책을 만들어 주던 방법입니다. 공부에는 왕도가 없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성찰하며 스스로의 내면적 완성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미디어로 본 역사 이야기의 홍윤정 작가님은 〔몽룡을 위한 변명〕에서 영화와 드라마에서 구현된 선인들의 공부에 대한 글을 펼칩니다. 춘향이 집에서 놀고 집에 못가게 막던 춘향이와의 관계에서 몽룡은 어떻게 1900대 1의 경쟁률을 통과하여 급제를 할 수 있었을까요. 성균관 입학을 위해 피 튀기는 경쟁과 조선시대 엘리트 공부벌레들이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 아들 현룡(율곡)을 중부학당에 들여보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임당을 다룬 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 어부 청년 창대를 직접 발로 뛰어 따라다니며 공부하던 정약전의 영화 〔자산어보〕를 통해 공부의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 펼쳐 줍니다.

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은 꿋꿋하고 한결같은 마음을 실천하던 이시선의 송월재(松月齋)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송월재는 ‘늘 푸른 소나무와 일정하게 밝은 달을 나의 행실로 삼아 살아가는 동안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겠다’는 선비의 양심을 강조하는 의미입니다. 이시선은 학문을 스스로 탐색하며 직접 눈으로 보고 세상을 이해하며 연구한 인물입니다. 곤궁하고 가난한 사람들 또한 구제하는데 아낌이 없었으며 노비들에게도 너그러우며 작은 벌레들도 상하지 못하게 하던 그는 병자호란 때는 의병 참모로서 활약하였지만, 일생 벼슬을 탐하지 않고 만년에 송월재라는 3칸짜리 작은 서재를 짓고는 책상 하나만을 들여놓은 채 독서에 전념했습니다. 학문을 스스로 탐색하며 연구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되는 부분입니다.

이번 호의 〔스토리이슈〕에는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의 박영서 작가의 인터뷰를 담았습니다. 박영서 작가님은 “시시콜콜한 오늘의 삶은 일기가 되고, 그 일기로 쌓아 올린 삶은 역사가 된다!”라며 조선시대 선인들이 날마다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을 기록한 일기를 현재의 우리에게 소개해 줍니다. 어떻게 스토리테마파크를 알고 창작에 활용하게 되었는지, 선인들의 일기에서 집필 에피소드 선별에 주안점을 둔 것은 무엇인지, 문학적 글쓰기는 어떻게 공부하였는지 등에 대한 무척 재미있는 인터뷰를 독자 여러분들에 드리게 되었습니다.

교실 밖에서 공부하고 교실에서 토론하고 질문하며 과제를 수행하는 플립 러닝(Flipped Learning)이 새로운 교육 패러다임으로 팬데믹의 어려움에서 큰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기술과 사회의 혁명적 변화에 적합하다는 이 ‘거꾸로 공부법’이 조선시대 우리 선비들의 공부법이었으며 과거공부와 마음공부의 조화로운 방법을 찾으려 했던 노력과 같다는 점에 놀라움과 감탄스러움을 느낍니다. 가을만큼이나 풍성한 글들이 웹진 담談의 독자 여러분들의 공부에도 큰 보탬이 되어, 공부의 가을이 되기를 바라며 송월재 이시선의 시를 선물로 보냅니다.



청산은 예닐곱 길靑山六七丈
초가 두세 칸白屋二三間
그 가운데 한 선비 있어中有一迂士
평생토록 글 짓고 또 지우네平生述與刪




편집자 소개

글 : 공병훈
공병훈
협성대 미디어영상광고학과 교수. 서강대 신문방송학과에서 앱(App) 가치 네트워크의 지식 생태계 모델 연구에 대한 박사논문을 썼다. 주요 연구 분야는 미디어 비즈니스, PR, 지식 생태계이며 저서로는 『4차산업혁명 상식사전』 등이 있다.
“꿈으로 공부를 완성하다”

장흥효, 경당일기,
1616-05-09 ~ 1616-05-14
1616년 5월 9일, 장흥효의 성리학 공부는 꿈속에서 완성되었다. 아무리 논어와 맹자를 들여다보아도, 이황과 김성일, 정구와 같은 선현들의 글을 들여다보아도 이해되지 못하는 부분이 있는 것은 너무 당연했다. 그는 공부하는 내내 그 문제를 궁극적으로 파헤쳐 보았지만 알 수 없는 것들이 분명히 존재했다.
문제는 선현들에게 직접 질문을 할 수 없다는 데 있었다. 이미 그들은 고인이 된지 오래되었으므로 남아 있는 선현들의 글 속에서 스스로 찾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장흥효에게는 자신만의 독특한 공부 방법이 있었다. 바로 꿈이었다.
하루는 꿈에 학봉 김성일 선생께서 나오셔서 집에서 도(道)를 강론하셨다. 이틀 뒤에는 꿈속에 한강 정구 선생님을 모시고 산에 들어가 약초를 캤다. 다음날에는 꿈속에 북송시대 유명한 유학자였던 소순이 나타나 집 근처의 상이 나서 하관하는데 호상(護喪)을 하고 있었다.
그는 연일 세 번이나 꿈속에 나타난 선현들을 보고 자신의 공부가 미진한 것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한강 정구 선생께서 몸소 약초를 캐서 자신에게 보여준 것은 장흥효 자신의 마음속 병을 고치고자 하는 선생의 깊은 마음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였다. 그래서 장흥효는 삼가 충(忠)과 서(恕) 두 글자로 마음을 치료하는 약방(藥方)으로 삼고 이 마음을 죽을 때까지 계속하면서 성현께서 타일러 주신 말씀으로 자신을 위로하였다.

“오늘 공부한 내용이 꿈에 나오다”

장흥효, 경당일기, 1617-02-20 ~

1617년 2월 20일, 장흥효는 마을 친구들과 더불어 『논어』의 이인 편을 읽고 있었다. 여기서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삼아. 나의 도는 하나의 이치로 만 가지 일을 꿰뚫고 있다”라고 하니 증자가 말하기를, “예”라고 하였다. 처음에는 하나의 도로 만 가지 일을 볼 수 있다는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는 친구들과의 『논어』 강론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잠을 청하는데 꿈에 류성룡 선생이 나타나셨다. 선생께서 당에 앉아 있는데 그는 띠와 주머니를 드리며 예를 갖추자 선생께서 앉으라고 청하셨다. 선생께서는 장흥효가 낮에 공부했던 일을 말씀하셨다. “공자께서 천하의 일을 어찌 감당하셨던가.” 장흥효가 이해하지 못했던 바로 그 내용이었다. 그러자 장흥효가 궁금했던지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하지만 선생은 대답하지 않으시고 장흥효가 생각한 바를 말하도록 했다. 그는 “하늘은 하나일 뿐인데 무슨 번거로움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선생께서는 바로 답하지 않으시고 “예전에 이(理)와 기(氣)로 나누어 말한 사람이 있었다.”고 하셨다.
장흥효는 그제야 공자가 말한 말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즉 기로 말하자면 만 가지 변화가 한결같지 않을 수 있지만 이로 말하자면 굳이 그러한 번거로움 자체가 불필요해지기 때문이다. 그는 꿈속 선생의 말씀을 통해 공자의 말의 의미를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중용혹문을 외우고 다시 중용을 외우다”

남붕, 해주일록,
1922-05-15(윤) ~ 1922-05-19

남붕은 아침마다 어머님께 문안을 드리고 사당을 배알하는 일로 하루를 시작한다. 1922년 윤5월 15일, 이날도 잠자리에서 일어나 세수를 마친 남붕은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어머님께 문안을 올리고 사당에 배알을 했다. 그리고 집을 나섰다. 오늘은 마을 안에 있는 선조의 사당에도 찾아다니며 두루 배알하였다.
집에 돌아 온 남붕은 책부터 펼쳤다. 아침에 어머님께 문안인사를 올리고 사당을 배알한 후에 책을 보면 마음이 차분해 지고 머리가 맑아 글이 더욱 잘 외워지기 때문에 이미 오래된 습관이 되었고, 게다가 아침밥을 먹기 전에 아이들이 공부를 하러 오기 때문에 이 시간은 그야말로 금쪽같은 시간이었다. 요즘 남붕은 『중용혹문中庸或問』을 외우고 있다. 이젠 꽤 많이 외웠기 때문에 며칠 내에 책을 뗄 작정으로 집중하여 외웠다.
아이들을 가르친 후 하루 일과를 마친 후엔 『심경心經』을 읽었는데 내용이 친절함을 자못 깨달았다. 밤에는 온 집안사람들을 가르치고 훈계하였다.
사흘 뒤에 드디어 『중용혹문』 외우기를 마친 남붕은 며칠 전 읽었던 『심경』이 떠올랐다. 과연 이렇게 부지런히 읽고 음미하며 체득한 학문을 한결같이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을지... 이날 밤엔 『중용』을 외우기 시작했다.
5월 19일(윤) 아침 일찍 어머님께 문안드리고 사당에 배알을 한 남붕은 전날부터 외우기 시작한『중용』을 다시 펼쳤다. 아침을 먹기 전에 아이에게 공부를 가르쳐 주고 하루 종일 집안일과 마을 일을 돌본 후에 저녁에 집에 돌아왔다. 밤에 다시『중용』을 외웠다.

“아들이 공부할 책을 직접 쓰다”

금난수, 성재일기,
1585-06-04 ~ 1585-08-12

금난수는 막내아들 금각을 유별나게 아꼈다. 금각은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이미 7살에 『논어』를 읽었다. 그 뒤로도 형들을 따라다니며 공부를 열심히 하는 기특한 아이였다. 금난수는 아이가 어릴 때부터 하루에 책 10장씩을 암기하도록 하였는데, 일견 가혹한 처사인 것 같지만 금각은 책을 곧잘 외우곤 하였다. 금난수는 그런 막내아들을 무척 귀여워하여 임지에도 데려가 여러 어른들에게 인사시켰고, 금각의 총명함을 특별하게 여긴 주위 어른들은 금각이 읽을 책을 직접 구해다 주기도 하였다.
이번에도 금난수는 임지에 금각을 데리고 갔다. 이번에는 『강목(綱目)』, 즉 주희가 지은 『통감강목(通鑑綱目)』을 아들이 읽도록 할 참이었다. 열다섯 살이 되었으니 이제는 좀 어려운 책을 읽을 필요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들은 공부를 하는데 자신이 노는 것도 교육에 좋지 않겠다고 여겼는지 금난수는 『강목』을 날마다 7장에서 10장씩 베껴 쓰기로 하였다. 금각은 아버지의 결심을 듣고 자신은 매일 『강목』을 15장에서 17장씩 외우겠다고 하였다. 두 부자의 굳은 약조는 일단 순조롭게 지켜지는 것처럼 보였다.
금난수는 약속한 날로부터 보름쯤 지난 6월 12일까지 『강목』 1권을 베껴 썼다. 또 12일이 지난 24일에는 2권을 베껴 써서 아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6월 말에서 7월 초까지는 손님도 많고 제사도 있어서 다음 책을 베껴 쓸 때까지는 조금 더 기일이 소요되었다. 금난수가 『강목』 필사를 끝낸 것은 8월 12일이었다. 공무로 바빴기 때문에 아들의 공부를 매일 봐 주지는 못하였지만 아버지가 바쁜 와중에도 매일 조금씩 필사해 나간 『강목』을 읽으며 금각은 아버지의 사랑을 물씬 느꼈을 것이다.

“책을 널어 말리다”

김광계, 매원일기,
1607-05-25 ~ 1607-05-27

1607년 5월 25일, 요 며칠 날씨가 계속 맑았다. 김광계는 오전에 기제사를 지낸 후에 방으로 들어가 방안 곳곳에 있던 서책을 모두 마루로 가지고 나왔다. 그동안 벼르고 있던 책 말리기를 하려는 것이다. 꺼내 온 책을 마루며 마당이며 곳곳에 펴서 널어놓기 시작하는데 덕유(김광업) 형이 와서 찾아 왔다. 덕유는 김광계가 펼쳐 놓은 책을 간간히 넘겨가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돌아갔다.
이틀 뒤에는 집에 있는 옛날 책을 모두 점검하였다. 한동안 펼쳐보지 않은 책들이라 얼룩이 지거나 벌레를 먹은 곳이 없는지 꼼꼼히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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