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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말

민주주의 시대와 공직의 덕목

민주주의에서는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통해 정부를 선택하고 교체하는 민중, 국민이 주권을 행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국민은 지배하면서 지배받는 존재입니다. 대통령 선거에 온 국민의 눈과 귀가 쏠려 있는 이유는 대의 민주주의, 또는 간접 민주주의라는 한계에서도 선거는 가장 온전하게 국민이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는 따듯하지 않으며 끝없이 갈등하고 감시하고 충돌하며 비판하고 토론하는 과정입니다. 다양하며 혼란스러운 그 과정을 통해 형성되는 사회 공동의 의견과 이해 기반이 반영되는 체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부분이 공직자의 덕목입니다. 공동의 의견과 이해 기반을 파괴하는 공직자는 민주주의의 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가족 관계, 친구 관계, 연인 관계처럼 공직자와 민중은 서로 상호작용하며 소통하는 관계입니다. 웹진 담談의 이번 호 주제는 “공직의 덕목”입니다.

이정철 선생님의 〈받침돌 같은 바른 권력을 꿈꾸며〉는 고려 시대 무신정권기에 설립되었던 정방(政房)이라는 기구가 인사권을 사유화하여 고려의 멸망에 이르게 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조선의 건국이 인사 행정의 공공성 회복이라는 과제를 수행하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합니다. 조선의 체제는 백성들을 억압과 지배의 대상만으로 보지 않고 나라의 근본이며 설득의 대상으로 보는 인식을 지니고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하원준 감독님은 <토호 세력에 맞선 조선 공무원 류작(柳綽)>을 통해 지역 발전을 방해하는 토호 세력과 맞섰던 류작(柳綽)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 주셨습니다. 류작은 1686년(숙종 12)에 태어난 문신으로서 조재호의 『영영일기(嶺營日記)』에도 등장합니다. 토호들에 의해 온갖 폐단이 집중되던 경상도 영해(寧海)에서 공평하고 정확한 징수를 실시하고, 봉산(封山) 벌채(伐採)를 금지시키고, 군인들의 신상 명세 기록을 엄밀하게 관리하여 군사들의 기강을 세워 절망의 땅을 변화시킨 인물입니다.

이문영 작가님의 〈정생의 어사일기〉는 정월 설날에 쉴 수 없던 머슴들이 쉬는 머슴 설날에 놀고 싶어 하는 학동과 주고받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과거를 보러간다고 백부께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 상감마마의 기운을 가까이 하라고 주셨던 물건인 중화척을 이용해 어사 행세를 했던 일화를 언제나처럼 재미진 풍속화 같은 소설 작품으로 보여 주십니다.

서은경 작가님은 별군직(別軍職) 구순(具純)과 병마절도사 조학신(曺學臣)이 곤장을 맞았다는 소식이 적혀 있는 조보(朝報)를 읽은 노상추의 일기(盧尙樞日記) 내용을 웹툰 작품 〈순백의 눈송이여〉로 그려 주셨습니다. 남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무고죄를 범한 구순과 자신의 휘하 군관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병마절도사까지 엄하게 다스렸던 일화를 담고 있습니다.

홍윤정 작가님의 〈Attitude is Everything〉는 후보와 후보 가족의 사과가 유독 잦은 20대 대통령 선거를 맞이하여 지도자에 대한 “미디어로 본 역사이야기”를 펼쳐주셨습니다. 드라마 <대박>은 도학 정치를 이상으로 삼은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백성은 하늘이라 말하면서도, 정작 연잉군이 백성에 무릎을 꿇자 숙종과 세자가 천지가 뒤집힌 듯 들고 일어난 일을 담고 있습니다. 끊이지 않는 악습, 탐관오리의 만행을 담은 드라마 <어사와 조이>에 대해서도 다루셨습니다. 작가님의 글에서 우리 사회의 곳곳에서 눈물 흘리는 이들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대변할 수 있는, 겸손한 태도를 가진 공직자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은 공직자의 출처진퇴(出處進退)를 보여 준 류승현(柳升鉉)의 용와(慵窩)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류승현은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 영남 지역까지 반란군의 세력이 뻗쳐 오자 안동부에서 제일 먼저 의병을 일으킨 바 있으며, 피폐해진 고을과 병들고 지쳐있는 백성들을 구제하고 부패한 관리를 처벌하고, 공정을 바로 세운 인물입니다. 그의 호(號)와 편액인 용와(慵窩)를 통해 그의 삶의 자세를 알 수 있습니다.

3월 5일인 경칩(驚蟄)은 북쪽에서 내려왔던 대륙성 고기압이 약해지고 따듯함이 날마다 늘어 봄이 열리고 세상의 만물이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날입니다. 선인들은 이 무렵에 첫 번째 천둥이 치고, 그 소리를 들은 벌레들이 땅에서 나온다고 생각하여 놀랠 ‘경(驚)’자와 벌레 ‘칩(蟄)’자를 사용하였고, 이 시기를 식물의 싹을 보호하고 어린 동물을 기르며 고아들을 보살펴 기른다고 했습니다. 대통령 선거와 새로운 공직자들의 선출이 우리 사회와 모든 구성원들의 의견과 마음을 모아 소통하며 낮고 그늘진 곳의 존재들까지도 행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평생 조선 백성과 농민을 생각하고 공부하던 다산 정약용의 시(詩) 「탐진 촌요(耽津村謠)」의 제5수를 전합니다.


水田風起麥波長무논에 바람 일어 보리이삭 물결친다
麥上場時稻揷秧보리타작 하고 나면 모내기 제 철이라
菘菜雪无新葉綠눈 내리는 하늘 아래 배추 새잎 파아랗고
鷄雛蜡月嫩毛黃섣달에 깐 병아리는 노란 털이 어여쁘네




편집자 소개

글 : 공병훈
공병훈
협성대 미디어영상광고학과 교수. 서강대 신문방송학과에서 앱(App) 가치 네트워크의 지식 생태계 모델 연구에 대한 박사논문을 썼다. 주요 연구 분야는 미디어 비즈니스, PR, 지식 생태계이며 저서로는 『4차산업혁명 상식사전』등이 있다.
“권문해, 굶주린 백성을 위해 동분서주”

권문해, 초간일기,
1590-01-01 ~ 1590-02-02

1590년 1월 6일, 굶주린 백성들이 늘어갔다. 권문해는 굶주린 마을 사람들을 도울 방도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 했다. 그리고 결국 직접 백성들을 찾아다니며 곡식을 나누어 구휼하기 시작했다. 대구 달성지역의 하빈(河濱)의 동면, 북면, 서면의 각 마을로 향하여 분진(分賑)하였다. 아침부터 시작된 구휼은 밤이 깊어가도록 이어졌다. 권문해는 밤이 깊어지자 관아로 돌아오지 못하고 윤효언(尹孝彦)의 집을 찾았다. 다음날도 분진은 계속되었다. 하빈현의 동면과 북면 서면에 이어 남면의 구휼이 시작되었다. 남면의 사람들도 굶주린 이들이 마을의 정자 앞에서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오전부터 시작한 분진은 오후 1시 되어서 끝이 났다. 이어 신서촌(身西村) 성당리(聖堂里)로 향하였다. 1월 6일부터 시작된 구휼은 사흘간 계속되었다. 1월 9일, 마지막으로 임암현(立岩縣), 내역리(內驛里), 검정리(檢丁里), 해안현(解顔縣)의 동촌리, 상향리, 서부리의 마을까지 모두 분진을 하였다. 사흘간 계속되는 분진이지만 여전히 굶주린 백성들이 이어졌다. 권문해는 한 달이 지난 2월 2일에도 읍내의 마을을 순회하며 백성들에게 쌀과 소금, 간장을 나누어 주었다.

“똑 부러지는 수령의 살림살이로 벌꿀이 넘치는 관고(官庫)”

김령, 계암일록, 1616-07-13 ~

1616년 7월, 안동부사(安東府使) 박동선(朴東善)이 판관 임희지(任羲之)의 탐욕과 포악함을 다스리지 못하여 관고(官庫)가 점점 탕진되고 있었다. 박동선은 장자의 기량이 있긴 했지만, 한스럽게도 재주도 없고, 염치도 모자랐다.

반면 예안현 수령 이계지(李繼祉)는 청렴하고 근실하며, 성정이 곧아서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자였다. 관내의 창고에는 물품이 가득하여 쓰고도 남아돌았다. 옛날에는 관아에서 사용하는 벌꿀이 매번 부족해서, 다음해의 공납을 미리 거두었으며, 소금과 장은 중들에게서 지나치게 취하였고, 관아의 창고에 곡식이 모자라거나 떨어지면 또 백성들로부터 거두었다.

그러나 이계지가 고을을 다스린 이후로는, 갈무리해놓은 벌꿀이 넉넉하고 풍족해서 매년 묵히고 있다. 오래된 벌꿀만 쓰고, 지난해 받은 것은 저장해 두고 열지도 않았다. 장독이 많아 스무 개 남짓에 이르고, 관아의 급료도 여유가 있었다. 수십 년 이래 최고의 수령이라고 할 수 있다.

“목숨을 건 상소를 올린 용안현감 이정”

최흥원, 역중일기, 1759-09-06 ~

1759년 9월 6일. 오늘 이평중이 최흥원을 찾아왔다. 그는 품속에서 상소문 한편을 꺼내었는데, 매우 놀라운 소식을 함께 전해주었다. 용안현의 현감인 이정이란 사람이 동궁마마에게 상소를 올리려 하였는데, 승정원에서 이를 제지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이정이란 사람이 자신의 목에 칼을 찔러 자결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상소가 장안의 화제가 되었는데, 지금 자신이 그 상소문을 가져온 것이라고 하였다.

최흥원은 소식을 듣고 몹시 놀랐다. 그리고 상소문의 내용을 살펴보았는데, 역시 나라를 근심하는 벼슬아치의 심정이 매우 간절히 녹아 있었다. 최흥원처럼 관직을 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있는 선비가 감히 그 내용을 뭐라고 평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그는 소감을 묻는 이평중의 질문에, 감히 내가 뭐라 평할 수 없는 글이라고 답하였다.

이평중이 돌아간 후, 최흥원은 홀로 생각에 잠겼다. 예전부터 도끼를 들고 상소를 한다든지, 자신의 목숨을 걸고 바른말을 한다는 고사를 여럿 들어보았지만, 실제로 상소가 막히자 자신의 목에 칼을 찔러 자결하였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비록 그의 죽음이 크게 논란이 되지 못하였으나, 참으로 사람에게 놀랍고 두려운 마음이 들게 하는 것이었다. 아직까지 우리 조선에 이런 관료가 있는가……. 최흥원은 어렴풋한 희망을 느꼈다. 동시에, 자신은 나라를 위해 그리할 수 있는지를 반문하며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헤아리기 어려울만큼의 선정을 베푼 고을수령, 떠날 때 백성들이 눈물로 길을 막다”

서찬규, 임재일기, 1852-02-22

1852년 2월 22일, 홍직필 선생의 사위인 진사 민경호가 선생을 모시고 앉았다. 오곡 어른의 정치력 이야기가 나오자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그의 재량을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실은 헤아리기 어려운 바가 있다. 이 읍에 거주할 때에 어떠한 덕정(徳政)을 행하여 백성에게 이러한 믿음을 얻어서 떠난 뒤에 생각함이 더욱 간절하며, 시흥(始興)으로 옮길 때 과천(果川) 백성들이 길을 막고 눈물을 흘리기를 갓난아기를 잃은 것 같이하니, 과연 그가 백성에게 선정(善政)이 있었는가. 내가 평소에 그의 삼가고 성실함을 허여하였을 뿐인데, 지금 이와 같이 순량(循良)하게 될 줄은 생각지 못하였다.”

“사이 나쁜 사람을 무고했다가 죽도록 맞다”

노상추, 노상추일기, 1787-01-04

입직하여 무겸청에 들어간 노상추는 오늘도 조보를 펴 보았다. 조보에는 어제 별군직(別軍職) 구순(具純)과 병마절도사 조학신(曺學臣)이 곤장을 맞았다는 소식이 적혀 있었다. 임금을 시위하는 사람이 사소한 잘못으로 곤장을 맞는 일은 왕왕 있었기에 별 큰일인가 싶었는데, 죄목이 무고인데다가 이번에는 유배까지 가게 되었다고 적혀 있었다. 구순은 같은 별군직에 있는 이윤빈(李潤彬)과 평소에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지난번 세자의 상을 치를 때 이윤빈의 부친인 이방일이 자기 집 공사를 한 일로 문초를 받을 때 그 기회를 타서 이윤빈 역시 공사를 했다고 무고를 한 것이었다. 또한 뇌물 문제까지 함께 거론하였다.

하지만 조사 결과 이윤빈이 자기 집 공사를 한 일이나 뇌물을 받은 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이에 왕은 이윤빈을 무고한 구순을 잡아들여 남을 함정에 빠뜨린 죄를 다스리기로 했다. 특히 자신의 신변을 늘 지키고 있는 무관으로서 모범을 보이지 않고 사특한 마음을 품었다는 것이 왕이 더욱 분노한 이유 중 하나였다. 왕은 구순을 죽도록 때리라고 명하고는 죽지 않으면 제주목에 정배하라고 하였다. 왕의 분노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왕은 자신의 휘하 군관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병마절도사 조학신이 곡식만 축낸다고 비난하며 마찬가지로 곤장을 때리고 먼 곳에 유배를 보내도록 했다. 구순과 조학신의 일은 무고에 대한 왕의 강력한 경고였다. 병마절도사까지 처분을 받게 된 살벌한 상황에 노상추 역시 간담이 서늘해졌다.

“담배피우며 시강하다가 귀양 간 시관”

노상추, 노상추일기, 1792-02-18

학례강(學禮講) 시관이 귀양을 갔다. 시강을 할 때 생도들 앞에서 몸을 비스듬히 하고 앉아 관을 비뚤게 쓰고 담배까지 피웠으며 잡스러운 농담도 툭툭 던져댔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왕의 귀에도 들어갔다. 왕은 한심해하며 시관 모두를 먼 지방으로 귀양을 보내게 하였다. 또 이런 풍조를 알면서도 감찰해내지 못한 감찰, 사관, 승문원·성균관·교서관의 여러 관원들도 잡아들여 신문하며 혼을 냈다. 당연히 이들 기관의 책임자인 대사성도 불려가 곤욕을 치렀다. 성균관의 재임(齋任)과 동재(東齋)·서재(西齋)의 반수(班首) 역시 모두 그 직무를 정지시켰고, 공무를 집행한 관리들도 추고 당했다. 미리 경계하지 못하고 왕의 귀에 들어 갈까봐 쉬쉬하며 서로 입을 다물고 있었던 죄 때문이었다. 이런 한심스러운 일이 있었음을 노상추는 조보를 읽고 알았다. 마침 생원시가 있는 날이었는데, 아마도 더욱 엄정한 분위기에서 치러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벌벌 떨면서 시험을 보겠구먼! 하며 노상추는 담뱃대에 불을 붙여 일부러 비뚜름하게 물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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