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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인테리어’ 작고 낮은 문갑 위에 놓였을 퇴계의 분매(盆梅)

“분매(盆梅)에 물을 주라”

이 말은 생전에 늘 방에 두고 감상했던 매화를 잘 돌봐주기를 당부한 퇴계 선생의 유언입니다. 매화에 대한 시를 모아 매화 시 첩까지 만들었을 정도이니 퇴계 선생의 매화 사랑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데요, 방에 두고 늘 돌보던 매화 사랑은 특별했다고 전해집니다. 12월에 피는 매화를 가장 사랑했던 퇴계 선생의 방 어딘가에는 화분에 담긴 매화가 자리했었던 것입니다. 대체로 선비의 방에는 글을 읽거나 쓰기 위한 작은 책상(서안)과 작은 등잔(서등), 그리고 길고 낮은 문갑, 종이와 붓, 먹 등을 보관하는 연상, 문서, 편지, 종이 등을 꽂아두는 고비 정도가 걸려 있습니다. 퇴계 선생의 방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텐데요, 아마도 창문 아래쪽에 둔 낮은 문갑 위에 놓였을 매화 화분이 다른 선비의 방과 다른 퇴계 선생의 취향과 개성을 보여주는 ‘인테리어’였을 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퇴계 선생이 떠난 뒤에도 그의 방문이 열리면 은은한 매화향이 퍼져나갔을 것입니다.

스토리테마파크 웹진 담 101호는 퇴계 선생이 피운 매화를 상상하며, 조선 시대 주거공간에 담긴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김정호 선생님의 〈조선 시대 목가구에 나타나는 아름다운 비례미〉는 조선 시대 안방과 사랑방에 놓인 목가구를 중심으로 한옥의 공간과 조화를 이루는 비례미에 관해 담아주셨습니다. 안방에는 장과 농, 그리고 화려한 장식을 덧댄 문갑이 놓이는데, 사랑방에서 사용되었던 가구는 우리가 눈으로 보기에 단순한 형태미를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선과 면으로 구성된 요소들은 반복과 대칭적 표현으로 질서와 통일성 그리고 조화성을 함축하고 있어 정돈된 비례의 짜임새 있는 모습을 보인다고 합니다. 이처럼 비례미를 엿볼 수 있는 한국의 목가구는 면 분할과 대칭의 형태에서는 장식을 최소화하고 순수한 자연의 나뭇결을 살린 우리만의 자연주의 사상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서은경 작가님의 웹툰 〈우물, 굴뚝, 땔감〉에서는 전란을 피해 변두리로 이사한 오희문 일가의 새집 적응기를 통해 ‘좋은 집’의 조건을 흥미롭게 전해주셨습니다. 오늘날, 숲세권, 역세권에 따라 집세가 결정됐다면 조선시대는 물세권(?)이었다는데, 수도가 없던 시대에 하루 세끼 밥하고 빨래하려면 우물이 가까운 곳이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이지요. 물을 구하기도, 땔감을 구하기도 힘든 집에서 고군분투하는 오희문 가족의 이야기를 재미있는 그림체로 만나볼 수 있습니다.

이문영 작가님의 이번 호는 〈정생의 풍수일기〉입니다. 오진사네 아들의 새집 마련을 위해 유명한 풍수가를 불러 명당을 확보하고 본격적인 집을 짓는데, 목재 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결국, ‘귀신의 집’으로 불리는 폐가의 목재를 재사용하기로 하는데, 정생은 찜찜함을 떨쳐버리지 못합니다. 어느 야심한 밤 그 ‘귀신의 집’을 등불도 없이 지나가는데 기둥 아래 파인 구덩이를 보고 혼절해버립니다. 하필, 그날 밤 『고려사』, 「최충헌 열전」을 필사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 필사한 내용은 최충헌이 십자각이라는 별당을 지었는데, 이때 사내아이와 계집아이를 잡아다가 색동저고리를 입혀 네 모퉁이에 묻어 액운을 방지했다는 소문에 관한 것이었다. 이번 호에서 ‘우리의’ 정생은 이문영 작가님 손에 또 한 번 더 겁쟁이가 되었습니다.

다음으로는 이번 호부터 시작하는 새 코너 ‘선인의 이야기, 무대와 만나다’를 소개합니다. 이 코너는 〈지킬 앤 하이드〉, 〈그리스〉, 〈넌센스〉, 〈에비타〉 등 유명 뮤지컬 번역가이자 〈신과 함께 가라〉 등의 뮤지컬 작품을 집필한 이수진 작가님의 에너지 넘치는 글로 연재됩니다. 그 첫 번째 글은 〈무대 위에 집을 짓다〉라는 제목으로 마당놀이 〈놀부전〉에서의 ‘화초장’, 〈발레 춘향〉에서의 ‘책가도’ 등 전통 주거공간 안에 놓은 소품이 무대 위의 작품으로 어떻게 연출되었는지 흥미진진하게 소개해주셨습니다.

“이달의 편액-공간을 기록하다, 초간정(草澗亭)”에서 초간정사와 그곳의 편액인 초간정을 소개합니다. 이곳은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의 지은이로 유명한 권문해의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권문해는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공주 목사에서 파직당하지만 예천으로 돌아와 자신만의 밀실, 그리고 후학을 양성하는 광장인 초간정사를 짓고 이곳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써내려갑니다. 쉼의 공간이자, 소통의 공간이 되어준 초간정사의 이야기는 우리네 공간이 갖는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보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지난 100호 특집에서 다 담지 못한 ‘담사모’의 좌담회 내용을 이어갑니다. 스토리테마파크와 깊이 관계된 세 명의 작가가 생각하는 전통 기록자료를 활용하는 방법과 각자의 노하우를 공유합니다. 놓치지 말고 꼭 확인하시기를 바랍니다.

7월 시작과 함께 담담하게 101호를 전합니다.




편집자 소개

글 : 김민옥
경성대학교 글로컬문화학부 조교수.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낙안읍성의 역사문화자원과 문화콘텐츠 개발에 관해 박사논문을 썼다. 주요 연구 분야는 역사 공간의 장소성과 스토리텔링, 타문화 이해와 소통을 위한 지역문화콘텐츠 개발이다. 공저로 『영화 춘향전과 한옥』, 『정보혁명』 등이 있고, 「아우서호퍼의 전쟁일기 맥락지식 분석과 스토리테마파크에서의 전유 가능성」, 「글로벌 콘텐츠화를 위한 전통의 복원과 시각적 재현: 영화 〔춘향뎐〕을 중심으로」, 「타문화 이해와 소통 과정을 통한 로컬 지식의 상호작용적 확장: 베른슈토르프의 부탄 영상물을 중심으로」 등의 논문을 썼다.
“동생과 함께 옛 터에 집을 짓다”

노상추, 노상추일기,
1774-01-10 ~ 1774-03-03

노상추와 동생 노억(盧檍)은 새해부터 새집을 짓느라 분주했다. 두 형제가 집을 한꺼번에 지으니 신경 쓸 일도 많고 돈이 한꺼번에 나가게 되어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옛집의 자재를 재활용하는 데에는 한 번에 두 채를 새로 짓는 것이 더 합리적이었다. 노억은 집터를 월판(越阪)에 잡았다고 알려왔고, 노상추는 남자종 일만(日萬)을 점쟁이에게 보내 공사를 시작할 길일을 잡아 오게 시켰다. 점쟁이는 1월 15일이 터를 닦는 데 길하고, 18일이 대들보를 올릴만한 날이라고 점지하였다.

그래서 터를 닦기 전에 먼저 자재부터 준비하기로 했다. 1월 13일에 노상추는 남자종들에게 종기(宗基)에 있는 옛집과 도개(桃開)에 있는 옛집을 헐게 했다. 종기 집에서 나온 목재로는 노상추의 집 곁채를 지을 것이고, 도개에서 나온 자재로는 노억의 집을 지을 예정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에는 공사를 전체적으로 책임질 사람을 정하였는데, 송만(宋萬)이 노상추의 집을, 일돌(日乭)이 노억의 집을 짓게 되었다.

마침내 공사가 시작된 1월 15일, 노억은 남동쪽을 향한 방향으로 집터를 정하고, 터를 닦기 시작했다. 이전에 이곳에 세워져 있던 집은 주춧돌의 방향으로 짐작건대 정남향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다음날에는 노상추도 자기 집의 터를 닦았다. 노상추가 새집을 짓기 시작한 터는 긴 사연이 있는 곳이었다.

노상추의 조부인 노계정(盧啓禎)이 자신의 부모가 돌아가신 뒤 옛집을 헐값에 팔고, 이곳에 있던 초가삼간을 사서 5~6년간 살다가 1725년에 과거시험에 합격하였다. 노계정은 이후 위원(渭原) 군수를 하면서 1737년에 이 자리에 큰 집을 지었고, 그로부터 약 20여 년 후인 1759년에 제사를 지낼 때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큰 집을 헐었다. 그래서 이 터가 공터로 남아 있게 되었으며, 이번에 노상추가 이곳에 다시 거처를 지으려 계획한 것이다.

점지를 받아 놓은 날인 1월 18일에는 차질 없이 노억의 집 대들보가 올라갔다. 노상추도 이틀 후에 기둥을 세우고 들보를 올렸다. 이제 뼈대 공사는 끝났으니 흙을 바르고 기와를 올릴 차례였다. 노상추는 기동(耆洞)의 토공(土工) 정발(鄭發)을 불러와 노상추와 노억의 집 벽과 천장에 흙을 바르게 했다. 흙을 바르고 기와를 이는 작업은 비가 오는 날을 피해서 하다 보니 거의 한 달이 넘게 걸렸다. 집안의 여러 문과 기물을 만드는 목수를 불러온 것은 3월이 되어서였다. 아직도 집이 완성되려면 여러 날을 기다려야 했다.

“기울어 넘어질 것 같은 행랑채를 수리하다”

남붕, 해주일록,
1926-04-23 ~ 1926-04-27

1926년 4월 23일. 남붕은 며칠 전 방구들을 새로 놓는 공사를 하였는데, 이참에 미루었던 집수리를 더 하기로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쓰러질 듯 기울어 있는 행랑채를 수리하기로 했는데, 일이 시작되기 전에 일해 줄 사람과 몇 가지 정해야 할 일이 있어 종일 기다렸다.

다행히 저녁이 다 되어 정 목수가 찾아왔다. 남붕은 정 목수와 공사를 해야 할 행랑채를 살피며 어느 정도 공사를 해야 할지와 치러야 할 비용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합의를 본 후 내일부터 일을 시작하기로 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정목수는 일꾼들을 데리고 남붕의 집으로 와서 집을 고치기 시작했다. 남붕은 그들이 하는 일을 살펴보며 필요할 때마다 일손을 보탰다. 행랑채 공사는 작은 일이 아니었다. 앞 행랑채 4칸이 기울어 넘어져 가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바로 세우려면 기둥부터 새로 세워야 했기 때문이다. 정 목수는 일꾼들과 함께 다 썩은 긴 기둥 10개를 모두 잘라내고 주춧돌 위에 큰 돌을 얹어놓아 튼튼하게 하였다.

1926년 4월 27일 아침을 먹은 후에 정 목수가 돌아가면서 그날 일한 값을 달라고 했다. 남붕은 지난번에 2원을 주었고 이날도 2원을 지급했는데, 정 목수는 8원을 달라고 청하였다. 남붕은 아직 일을 다 마치지 않았으므로 일이 끝나면 나머지 돈을 주겠다고 했다. 정 목수가 일을 잘하고 있긴 했지만, 이런 공사라는 게 일이 다 끝나기 전에 돈을 미리 주는 법은 없었기 때문이다.

“짐승의 털을 넣은 방석을 만들게 하다”

방석(출처: 국립민속박물관) 남붕, 해주일록, 1926-06-21

1926년 6월 21일, 남붕은 언제나 그렇듯이 새벽에 일어나 치성을 드리고 책을 읽고 어머님께 문안을 드리고 사당에 배알을 했다.

날이 어찌나 더운지 밤잠도 설쳤고, 아침부터 땀이 흘렀다. 입맛도 떨어져 겨우 아침을 몇 술 뜬 후 남붕은 아이들을 불렀다. 방에서 사용할 커다란 방석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자루 모양으로 만든 안감 안에는 틈틈이 준비해 다락에 두었던 짐승의 털을 꺼내 잘 펴 넣었고, 겉감은 푸른 베를 준비해 앉거나 눕기에 적당한 크기로 만들게 했다. 잠자리라도 편하면 잠을 설치는 일이 덜할듯해서 시킨 것인데, 아이들도 땀을 뚝뚝 흘리며 바느질을 했다.

남붕은 아이들을 보며 아내 생각이 났다. 아내가 살아 있었다면 미리 살피고 마련해 주었을텐데 이토록 아내의 빈자리가 크다는 것을 갈수록 더 크게 느끼게 되었다.

잠시 지켜보던 남붕은 아무래도 오늘 안에 만들기는 어려울 듯하여 천천히 만들라 이르고 논과 밭을 살펴보기 위해 집을 나섰다.

“종이를 보관할 지통을 만들다”

권별, 죽소부군일기,
1626-08-26 ~ 1626-08-30

1626년 8월 26일, 을축. 맑음. 권별은 용문에 가서 지통(紙桶)을 만들 판자 11립(立)을 떠왔다. 능내 형님이 도촌에 왔기에 가서 그를 만나보았다.

1626년 8월 30일, 기사. 맑음. 초간에 갔다. 새로 지통을 만들었다. 박 좌수 형님이 오셨다. 이술·이망도 왔다.

“불난 집에서 지붕 없이 지내다”

노상추, 노상추일기,
1772-05-14 ~ 1772-06-03

사랑에 앉아 식사를 기다리고 있던 노상추는 벌떡 일어났다. 타는 냄새가 진동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부엌에서 음식을 잘못해서 태우는가 싶었는데, 그 정도 냄새가 아니었다. 창문을 여니 사람들이 불을 끄러 다니느라 분주했다. 노상추는 일단 중요한 문서들과 아이들을 챙겨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다행히 곧 불길이 잡혔고, 노상추와 가족들이 기거하는 건물에는 불이 옮겨붙지 않았다. 하지만 부엌과 연결된 행랑 10여 칸이 다 타버렸다. 이엉을 이어놓은 지붕은 모조리 다 무너져 내렸고, 행랑채 뼈대만 앙상하게 남았다.

노비들이 기거하는 행랑채에 지붕이 없으니 사람이 살 만한 모습이 아니었다. 빨리 새로 지붕을 얹어야 하는데 5월이라 지붕을 덮을 짚이 있을 시기가 아니었다. 마구간 지붕도 모두 타버렸기 때문에 말들은 비가 내려도 비를 피할 수가 없었다. 노상추는 궁리 끝에 차라리 이번에 화재에 강한 기와와 벽돌로 집을 짓기로 했다. 노상추의 옛집 한편에는 오래된 기와가 쌓여 있었는데, 이 기와는 20년 전에 불이 났을 때 역촌(驛村)에서 사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이후로 집안에 초상이 계속 났고, 기와를 얹을 엄두를 못 내서 그저 쌓아두기만 했었다.

일단은 지붕을 무엇으로든 덮어 비바람을 막기는 해야 했다. 노비들의 원성이 자자했기 때문이었다. 노상추는 관아에다가 불에 탄 건물이 수십 칸이라는 내용의 문서를 제출하여 곡식을 담는 데 쓰는 빈 섬 300닢(立)을 내려달라고 청하였다. 일단 이것도 짚은 짚이고, 다행히 여름이니만큼 바람만이라도 임시로 막아두자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관아에서는 고작 15닢을 내려줄 뿐이어서 노상추는 해도 해도 너무한 수령의 처사에 분통을 터뜨렸다. 얼마 전 새집을 짓는 사람은 화재를 당하지도 않았는데 관아에서 빈 섬 300닢을 얻어갔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기에 더욱 화가 났다.

노상추가 화를 내 봤자 관아에서 빈 섬을 더 내려줄 것도 아니었다. 일단 노상추는 집으로 돌아가 집을 짓는 데 쓸 못 등을 만들 야장(冶匠)과 기와를 만들 목수 신덕기(申德器)를 불러왔다. 엿새 만에 기와를 모두 만든 신덕기에게 노상추는 100동(銅)을 주었다. 기와를 이을 개장(盖匠) 소통(小通)은 벽돌이 운반되기 전에 도착하여 일을 바로 시작할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역촌에 있는 기와와 벽돌을 옮겨오게 하고 싶었으나, 당장 급한 일은 지붕보다는 모내기였다.

닷새 후에 드디어 모내기까지 일단락되자 노상추는 동군(洞軍)들에게 역촌의 기와를 옮겨오게 하고, 일단 돌아갔던 개장 소통을 불렀다. 소통은 다음 날 노상추의 집으로 와서 바로 기와 얹는 일을 시작했다. 기와를 얹는 일도 하루 이틀 만에 되는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날씨도 도와줘야 했다. 날이 맑으면 작업이 수월하지만, 비라도 내리면 전혀 작업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노상추의 노비들은 불이 난 이래로 거의 한 달 가까이 지붕 없는 집에서 매일 지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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