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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깊었네


막상막하의 기억력


김계광(金啓光)과 홍여하(洪汝河)는 같이 영남에 사는 사람이었다. 단순히 알고 지내는 사람이 아니라 시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서로 학문적 경쟁을 하는 벗 사이였다. 두 사람은 모두 어릴 때부터 재주와 학식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품격까지 있었다.

김계광은 안동에 살았고, 홍여하는 문경에 살았다. 1650년대 어느 날, 홍여하가 우연히 객점(客店)에서 김계광을 만났다. 서로가 서로를 잘 알고 있었지만, 홍여하는 실질적으로 누구의 두뇌가 더 명석한지 시험을 해 보고 싶었다. 그런 홍여하가 김계광에게 말하였다.
“김공(金公), 자네는 기억력이 매우 뛰어나다지. 책을 한 번 보면 다 외운다고 들었네.”
김계광이 대답했다.
“하찮은 재주일 뿐이라네.”
홍여하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김계광이 마땅치 않아 보였다. 홍여하는 망설이지 않고 내기를 제안하였다.
“그렇다면 우리 당장 여기에서 겨루어 보는 것이 어떤가?”
“좋지.”
김계광이 대답하였다.

둘은 객점 안에서 책을 찾기 시작하였다. 이곳에 읽을 만한 책이 있을 리가 만무하다. 두 사람은 구석구석 책을 찾다가 구석 후미진 곳의 낡은 서가에 놓인 두 권의 책을 발견했다. 그런데 이 책은 의서(醫書)였다. 비록 선비들이 읽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었지만, 기억력을 겨루기에는 더 없이 좋은 책이기도 하였다. 두 사람은 각자 한 권씩 가지고 읽기 시작했다. 두세 식경만에 두 사람은 책 읽기를 마쳤다. 그리고 각자 읽었던 책을 덮었다.

김계광이 먼저 읽었던 의서를 소리 내어 외우기 시작하였다. 홍여하는 맞는지 틀린지 다시 책을 보고 확인하였다. 김계광은 자신이 읽었던 의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유수장창 읊어댔다.

다음은 홍여하의 차례였다. 홍여하 역시 소리 내어 외우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외우는 과정에 뜨문뜨문 더듬거리기도 하고 잠시 동안 말문이 막히기도 하였다. 비록 외우기는 다 외웠으나, 이는 홍여하의 완패였다. 끝나자 둘은 승패에 관한 언급은 하지 않고 격식을 차리고서는 헤어졌다.

1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김계광과 홍여하는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서로 옛이야기를 하면서 정답게 담소를 나누다 문득 10년 전 그때 일이 떠올랐다. 서로 다시 한 번 그 당시의 외웠던 것을 다시 외워 보자 하였지만, 김계광은 그때 외웠던 것을 완전히 잊어버려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고 하였다. 김계광은 홍여하에게 “그럼 자네가 한 번 해 보게”라고 하자, 홍여하는 10년 전에 읽었던 것을 모조리 외웠다.

떠듬떠듬.

출전 : 골동록(汨董錄)
저자 : 조보양(趙普陽)
주제 : 학문, 기억력, 내기
시기 : 미상
장소 : 경상북도 안동시
일기분류 : 생활일기
인물 : 김계광, 홍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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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소개

글 그림 | 서은경
서은경
만화가. 1999년 서울문화사 만화잡지공모에 당선되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그간 지은 책으로 『마음으로 느끼는 조선의 명화』, 『소원을 담은 그림, 민화』, 『만화 천로역정』, 『만화 손양원』 등이 있으며, 『그래서 이런 명화가 생겼대요』, 『초등학생을 위한 핵심정리 한국사』 등에 삽화를 그렸다.
● 제5회 스토리테마파크 창작 콘텐츠 공모전 담임멘토
● 제6회 스토리테마파크 창작 콘텐츠 공모전 전문심사위원
● 제7회 전통 기록문화 활용 대학생 콘텐츠 공모전 면접심사위원
“무료한 틈에 계사년과 갑오년의 일기를 다시 읽어보다”

오희문, 쇄미록, 1597-07-04 ~

1597년 7월 4일, 벌써 올해 정유년도 절반이 지나갔다. 요사이 밤기운이 서늘하여 싸늘한 바람이 때로 불어 와서 아침저녁으로는 겹옷을 입지 않으면 안되었다. 심신이 상쾌하니, 가을 바람에 몸의 병이 나아가는 것을 스스로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요즘은 특별한 일이 없어 무료한 날이 많은데, 심심함을 이기려고 계사년과 갑오년의 일기를 꺼내어 다시 읽어보는 중이다. 전란을 피해 떠돌아다니며 병을 앓고, 추위와 굶주림에 지치며 고생한 내용을 다시 읽자니, 그때의 기분이 생생히 기억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슬하의 7남매가 모두 무고히 살아 있었으니, 비록 때로 끼니를 잇기 어려운 탄식이 있었어도 비통하고 마음 상하는 일은 없었다.

지금 지내는 산속 고을로 들어온 이후로는 양식과 반찬을 조달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고, 또 종종 맛난 반찬도 얻어다가 어머님을 봉양하고 아랫사람들도 먹일 수 있으니, 가히 근심이 없다고 할만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매번 좋은 음식을 앞에 두면 문득 슬피 울기를 그치지 않으니, 얼마전 죽은 딸 단아 때문이었다.

갑오년 봄과 여름에 굶주려 곤궁한 중에도 막내딸과 추자 놀이를 하면서 무료한 회포를 보낸 대목에 이르러서는 더더욱 막내딸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쳐 애통한 마음이 치솟았다. 일기를 읽어 내리던 오희문은 눈가가 촉촉이 젖어왔다.

“종이가 모자라 일기를 쓰지 못하다”

장흥효, 경당일기,
1621-08-21 ~ 1621-08-22

1621년 8월 21일, 일기는 장흥효에게 있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성찰의 기회가 될 수 있는 자신만의 공간이었다. 그의 일기는 다른 어떤 것에도 구애되지 않으면서 자기가 추구한 성리학적인 삶을 완성하는 하나의 경전과도 같았다. 공자의 논어와 맹자의 맹자, 주자의 사서집주(集註)가 있다면 장흥효에게는 일기가 있었다. 그만큼 그에게는 어떠한 것보다도 소중한 보물이었다.

그런데 종이가 모자랐다. 일기를 작성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기록할 종이가 공급되어야 했다. 물론 제자들이 공부를 배우는 대가로 종이를 가져오기도 하였고 친지들이나 아는 관원들이 종이를 지급해 주기도 하였다. 유력 양반이라면 사찰에서 질 좋은 종이를 공급받을 수 있었지만, 장흥효의 형평상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결국 종이가 모자라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장흥효는 심지어 20여 일 동안 종이가 없는 상태로 일기를 작성하기도 했다. 그러한 날이면 그는 날짜, 간지, 날씨만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래야 어찌 되었든 일기를 이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천신만고 끝에 종이를 구했지만 문제는 모두 다 기록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있었다. 너무 오래되어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매일매일 쓰지 않으면 기억이 사라지는 나이가 된 것이다.

“서울 소식 전해주는 신문, 조보(朝報)”

김광계, 매원일기,
1634-01-17 ~ 1644-04-11

예나 지금이나 시골 사람들의 생활은 도시보다 단조롭기 마련이다. 김광계의 일상 역시 늘 읽던 책을 또 읽고 항상 만나던 사람을 다시 만나는 일의 연속이었지만 그렇다고 새로운 사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1634년 1월 중순, 김광계는 ‘경보(京報)’를 읽었다는 기록을 일기에 남겼다.

경보란 조선시대 승정원에서 매일의 소식을 적어 발행하던 조보(朝報)를 의미한다. 김광계처럼 지방에 거주하던 양반들은 서울 소식이라는 뜻에서 조보를 경보라고도 불렀다. 조보를 읽으면 새로 바뀌는 세금 정책이나 조정의 정치적 논쟁, 당장 다음 달에 올 신임 수령의 인선까지 알 수 있었으니 지방 양반들에게 조보는 중요한 소식 창구였다.

현대의 종이 신문은 구독을 신청하면 매일 아침마다 집으로 배달받아 간편하게 볼 수 있지만 조선시대의 조보는 그렇지 않았다. 승정원에서 매일 조보를 발행하면 각 지방 관청의 서리들이 일일이 손으로 베껴 발송하는 식이었다. 따라서 관직이 없는 지방 양반들은 거주지의 수령에게서 빌려 읽거나 서울에서 오는 인편에 조보를 가져다 줄 것을 부탁하는 등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조보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서울에서 발행된 조보가 지방까지 오려면 시차가 생길 수밖에 없었고 매일 나오는 조보를 지방에서 그때그때 챙겨 읽기란 불가능했으므로, 보통 지방 양반들은 며칠이나 몇 달치 조보를 한 번에 얻어다 읽곤 했다. 김광계의 재종숙부 김령의 일기에는 예안 현감에게서 조보를 빌려 읽었다는 기록이 자주 등장한다. 열성 구독자로 거의 달마다 조보를 구해 읽고 그 내용도 상세히 적어 놓은 김령과 달리 김광계는 조보 읽기에 큰 흥미를 보이지 않고 어쩌다 들어오면 읽어 보는 수준이었던 듯하다. 번다한 세상사에 관심을 갖기보다 스스로의 공부와 수양에 더 마음을 쏟은 것이 김광계의 성품이었다.

“40여 년 동안 쓴 『해주일록(海洲日錄)』은 전감으로 삼을 만하다”

남붕, 해주일록, 1930-06-05

1930년 6월 5일, 남붕은 며칠 동안 읽은 『중용혹문(中庸或問)』 등사본의 후지(後識)를 작성하려다가 붓을 멈췄다. 등사했던 날짜를 쓰려고 했는데 기억이 나지 않아서였다. 남붕은 날짜를 확인하기 위해 『해주일록(海洲日錄)』을 가져 와 꼼꼼히 살펴보았는데, 아들 원모(元模)가 죽기 전인 기유년(1909) 봄에 난고정(蘭皐亭)에서 원모가 등사한 것임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남붕은 아들이 등사한 『중용혹문』에 발문을 짓고 점심 때 발문을 다시 베껴 썼다.

이렇게 오래 전의 일이 기억나지 않을 때 『해주일록』을 살펴보면 마치 어제 일처럼 기억이 역력하니 40여 년 동안의 기록이 지난 일을 살피고 증거로 삼을 수 있으니 여간 큰 도움이 되는 게 아니었다.

한 달 정도 지난 윤6월 4일 아침을 먹은 뒤에 남붕은 『해주일록』을 처음 쓰기 시작한 병술년(1886) 조 부터 살펴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40여 년이고 해마다 기록한 것이 거의 50여 권이니, 전감(前鑑)이 될 만하다고 생각되었다.

“세월이 흘러도 『동소만록』은 썩지 않고 전해질 책이다”

남붕, 해주일록,
1926-03-06 ~ 1930-11-02

1926년 3월 8일. 남붕은 이틀 전에 우현(禹玄) 족조를 찾아갔다가 빌려 온 『동소만록(桐巢漫錄)』을 읽고 있었다. 남붕은 『동소만록』을 쓴 남하정(南夏正)이 조야의 고사를 수집하여 사건마다 평론을 붙여 마치 옛날의 『사기史』의 사례와 같이 글을 쓴 것에 관해 감탄하였다. 또한 남인(南人)과 노론(老論)이 벌인 당론의 시비에 대하여 더욱 분명하게 분석하여 놓았으니, 실로 남인의 보배이고 서인에게는 눈엣가시임이 분명했다고 생각했다.

남붕은 『동소만록』을 눈에서 떼지 못할 정도로 푹 빠져있었다. 누가 찾아오기라도 하면 함께 보거나, 책 속의 사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족제 호의(浩義)가 왔을 때도 함께 보았고, 백우길이 찾아왔을 때도 책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늘 빠짐없이 밤마다 경문을 외우는 일도 그만두고 『동소만록』을 보았다.

11일에는 8대조 통덕랑공(通德郞公)의 묘소, 부곡(釜谷)의 조부 부군의 묘소, 도동(道洞)의 부모님의 묘소를 참배하고, 뒷산의 여러 묘소와 위 봉우리 뒤 증조부 묘소까지 찾아 가 참배를 하기 위해 집을 나섰는데, 그 행낭 속에도 『동소만록』 1책을 챙겨 넣었다. 2~3일간 오고 가는 짬짬이 아직 다 보지 못한 것을 보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길을 나선 남붕은 긴 고개에 이르러 아들의 묘소를 둘러본 후 8대조 통덕랑공(通德郞公)의 묘소를 참배하고, 부곡(釜谷)으로 가서 조부 부군의 묘소를 참배하고, 정오에 도동(道洞)에 도착하여 부모님의 묘소를 참배한 후 그날 밤에 재사에서 잠을 잤다. 잠들기 전까지 『동소만록』을 보다가 자려고 하였는데, 금계(金溪) 종숙이 찾아와서 또 함께 이 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 날 아침에 뒷산의 여러 묘소와 증조부 묘소를 참배하고 재사에 머무르며 드디어『동소만록』을 다 보았다. 그리고 오후에는 금계 족숙의 집에서 머무르며 다시 『동소만록』을 보았다.

남붕은 몇 년이 지난 후 『동소만록』을 또다시 보았는데, 다시 보아도 이 책에서 기록한 국가와 조정의 고사나 의론은 정밀하고 분명하며 문장이 간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책이야말로 참으로 썩지 않고 오래도록 전해질 글이라고 생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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