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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인의 일기로 보는 그날 (6) ]

의리는 아교나 옻처럼 끈끈하여라

이상호

“우리의 정은 형제와 같고, 의리는 아교나 옻처럼 끈끈하였네. 처음 그대의 부고를 듣고 미처 가서 이별하지 못하였으니, 유명을 달리한 지금 포복하는 것마저도 도리어 부끄럽기만 하네.”

이 글은 1582년 5월 13일 권문해權文海(호는 草澗, 1534~1591)가 아름다운 정자 백석정에서 지은 만시輓詩의 일부이다. 만시는 죽은 사람을 애도하면서 쓰는 시로, 권문해는 이 시를 통해 평생 백석정에 은거하면서 학문을 닦았던 친구 강명원姜明遠(이름은 강제姜霽, 자가 明遠, 호는 白石, 1526~1582)의 죽음을 애도했다.

권문해가 강명원의 죽음 소식을 들은 것은 음력 4월 5일이었다. 오랜 친구의 부고를 접한 권문해는 모든 일을 접고 친구의 집이 있는 문경으로 발걸음을 서둘렀다. 불과 한 달 전 강명원의 형 강숙망이 부고도 들었던지라, 안타까움이 더욱 커졌다. 한 달 상간으로 형제가 동시에 세상을 등졌다는 사실이 그를 더욱 아프게 했다. 더욱이 권문해는 한 달 전 강숙망의 부고가 왔을 때 열일 제쳐놓고 조문을 했어야 했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 때라도 왔으면, 강명원의 마지막 모습은 한 달 전으로 기억할 수 있었을 터였다. 그러나 권문해의 기억에 남은 강명원의 마지막 모습은 1년 전이 전부였다.

황망한 걸음으로 문명에 도착했지만, 권문해는 강명원의 빈소가 차려진 그의 집으로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권문해가 먼저 찾은 곳은 집 가까운 곳에 강명원이 지은 정자 백석정白石亭이었다. 권문해는 백석정에 올라 강명원이 강물을 내려다보던 자리에 서 보기도 하고, 강명원이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늘 여닫았을 법한 방 문고리도 어루만져 보았다. 결국 권문해는 터져 오르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백석정 중간에 앉아 목 놓아 슬픔을 토해 냈다. 친구에 대한 그리움과 일찍 찾아 생전에 한 번 더 얼굴을 보지 못했던 안타까움이 더해져 통곡소리는 더욱 커져만 갔다. 빈소에서는 차마 내지 못할 눈물의 통곡을 백석정 주위로 흐르는 낙동강물이 감싸 안았다. 자연으로 걸어간 강명원 역시 백석정을 감싼 물소리처럼 울음을 토해 내면서 권문해와의 이별을 슬퍼하는 듯 했다.

권문해가 빈소보다 백석정을 먼저 찾은 이유는 바로 그곳에 친구 강명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백석정은 벗 강명원이 사랑하여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으로, 권문해와의 추억이 가득한 곳이기도 했다. 문장으로 전국에 이름을 알렸던 강명원이 관직을 버리고 내려와서 지은 정자가 바로 백석정이다. 문경에 있는 금천과 내성천, 그리고 낙동강이 만나 하나의 물줄기를 이루는 곳을 찾아 정자를 짓고 자연을 벗하면서 살기를 자처했던 것이다. 관직에 나가는 것보다 효행과 청렴을 강조했던 가풍 탓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자연을 향한 그의 마음이 이곳에 정자를 짓게 했다. 사람과 자연의 경계에 정자를 짓고 늘 자연을 향해 그의 시선을 열어 두고자 했던 것이다.

이곳에서 강명원은 한껏 자연을 끌어들여 함께 노닐었고, 자연과 같은 사람들을 모아 자연과 벗하게 했다. 금천과 내성천, 낙동강 물이 하나가 되듯, 여러 선비들을 만나 소통하면서 마음을 하나로 나누었다. 자연이 담뿍 내려앉은 공간 속에서 자연을 벗 삼아 한 잔의 술로 마음을 나누고, 시로 인생을 노래했다. 사람이 없을 때에는 자연을 벗했고, 친우가 찾아오면 자신이 벗하는 자연을 함께 노래했다. 강명원은 이러한 공간 백석정을 사랑했고, 권문해는 이 같은 강명원의 백석정 사랑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권문해가 자연을 향해 표표히 떠난 친구를 백석정에서 자연과 함께 그리워하고 있는 이유이다.

조선선비들에게 있어서 정자는 쉼의 공간이자, 공부 공간이다. 정자는 사람과 자연의 경계지점에 서서, 때론 사람을 향해, 때론 자연을 향해 열려 있다. 사람과 사람을 잇고, 사람과 자연을 잇는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자연의 이치에 따라 사는 삶을 배우고, 자연의 이치에 따라 사는 사람들을 벗한다. 이렇게 사귄 벗은 살아서 의리가 아교나 옻처럼 끈끈하고, 죽어서는 그리움으로 인해 포복(匍匐)마저도 부끄럽지 않은 관계가 된다. 정자에서는 자연을 대하듯 사람을 벗하고, 사람을 벗하듯 자연을 사랑하게 되는 이유이다. 자연을 닮은 시와 음악이 느릿느릿 자연처럼 만들어지고, 자연을 닮은 친구와 이별하며, 자신도 자연을 닮아 갔던 것이다. 조선 정자는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의 ‘멋스러운 만남’이었다.


그날


계암일록

1582년 5월 13일 맑음.
백석정(白石亭)으로 가서 죽은 벗 강명원[姜明遠, 강제(姜霽)]의 빈차(殯次)에 전(奠)을 올렸다. 그리고 오룡동(五龍洞)으로 가서 강숙망(姜叔望)의 빈소(殯所)[處]에 전을 올렸는데, 지난달에 이미 집의 뒷산에 장사를 지냈다. 저녁에 금당(金堂)의 집에 도착하였다. 죽은 벗 강명원을 위한 제문 祭亡友姜明遠文. (이하 생략)




스토리테마파크 참고 스토리

작가소개

이상호
이상호
경상북도 상주에서 태어나, 계명대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같은 대학에서 한국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의 책임연구위원으로 재직 중이며, 전통문화의 현대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 조선시대의 디자이너, 철학에 기초하여 옷을 짓다 ”

서찬규, 임재일기,
1849-06-15 ~ 1859-07-17
1849년 6월 15일, 안동의 신재기(申在箕)[자는 범여(範汝)]씨가 서찬규를 찾아와서 위문하고 제복(祭服)을 만들었다.
1853년 1월 19일, 안동의 신재기 씨가 내방하였다.
1854년 2월 24일, 춘당대에 국왕이 친림하는 인일제를 설하여 시제(詩題)에 내었는데 근래에 없던 것이었다. 과거에 응시한 후에 곧 노량진에 가서 선생의 제사상에 조문을 드리고 곧바로 성균관에 들어갔다.

“ 20년만에 만난 관기 몽접, 그녀의 노래실력은 여전하다 ”

양경우, 역신연해군현잉입두류상쌍계신흥기행록,
1618-05-05 ~
1618년 5월 5일, 남도일대를 유람중이던 양경우가 수령에게 접대를 받았다. 관기인 몽접(夢蝶)이란 이가 들어와 인사를 드리는데, 이 기생은 젊었을 때 노래를 잘 불렀다. 난리를 만나 떠돌아다니다가 용성에 이르러 내가 거처하는 촌사(村舍)에 3년 동안 붙어살았는데, 그 이후로 20년간을 어디에서 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 문득 만나니 또한 세상사는 사람의 우연한 일이다. 서로 옛날이야기를 하였고 그녀로 하여금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아직도 옛날과 마찬가지로 한들한들 멋들어지게 노래를 부른다. 태수가 나를 위하여 술자리를 마련하니 밤늦도록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파하였다.

“ 음악과 시로 어울렸던 광대와 양반, 눈물로 헤어지다 ”

서찬규, 임재일기,
1846-09-16
1846년 9월 16일, 서찬규는 며칠 간 망설였던 일을 하고 말았다. 창부(倡夫)들을 내보낸 것이다. 사실, 반년 동안이나 와서 의지했던 터라 그의 마음도 참으로 서운하고 허전하기 짝이 없었다.
창부 일행의 마음도 착잡하긴 마찬가지였다. 모두 돌아간다고 말해놓고 행장은 이미 꾸렸음에도 눈물이 앞을 가려 쉽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간 서찬규 생원 댁에서 편안하게 지냈는데, 이제 어디로 가서 입에 풀칠을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비라도 오면 좋으련만, 맑은 날씨가 발길을 재촉하는 것 같아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 아름다운 노랫말과 슬픈 과거를 지닌 여인, 시희(詩姬) 얼현을 만나다 ”

김령, 계암일록,
1625-01-03 ~
1625년 1월, 추운 겨울 고향을 떠나온 지 오래된 나그네 신세의 김령에게 아침 일찍 지인들이 찾아왔다. 김령은 놀랍고 기쁜 마음으로 회포를 풀고, 날이 저물 때까지 그들과 함께 했는데, 무리 중에는 김령을 찾아온 시희(詩姬) 얼현(乻玄)이 있었다.
그녀는 천성(川城) 청암(靑巖) 권동보(權東輔)의 여종이었다. 20년 전에 고향을 떠나 이리저리 떠돌다가 서울에 들어와서 어떤 자의 첩이 되었는데, 미모가 시들자 이별을 당했다. 이때 와서 시권(詩卷)을 가지고 김령을 찾아왔는데, 그 시어(詩語)가 매우 맑고 아름다웠다. 창석(蒼石) 이준(李埈) 어른이 때마침 왔다가 그 시를 보고 칭찬하면서 그것을 소매 속에 넣어서 돌아갔다.

“ 밀양 기생 보금을 연주하다 ”

황사우, 재영남일기,
1519-02-04 ~ 1519-07-09
1519년 2월 4일, 황사우는 밀양의 수산현과 금동역을 거쳐 밀성(密城)에 들어갔다. 집무를 마친 황사우는 저녁에 기녀를 불러 거문고를 연주하게 하고 회포를 풀었다.
7월 8일, 아침 일찍 양산군을 출발하여 밀양에 이르렀다. 춘추 포폄 때문에 감사가 좌수사와 우수사와 함께 집무를 보았다. 황사우는 이들을 뵙고 저녁 식사를 함께 하였다. 그리고 이날 황사우는 밀양에 처음 왔을 때 만났던 기녀를 다시 불렀다. 그녀를 보자 황사우의 가슴이 뛰었다. 그녀의 이름은 보금(寶琴). 보배로운 거문고라는 뜻이었다.
7월 9일, 밀양. 감사와 좌수사, 우수사가 누각에서 집무를 하고, 여러 사람들이 모두 머물렀다. 여러 훈도를 고강하였다. 황사우는 저물 무렵 방으로 내려와 밀양현감과 전 고령현감과 잠깐 술자리를 하고 잤다. 좌수사와 우수사가 감사에게 고기를 먹고 술 마시기를 권하여 밤중까지 이르렀다. 황사우는 그 자리에 끼지 않았는데, 내심 다행으로 여겼다. 칠원현감과 영산현감에게 대전(大典)을 고강했다. 이날도 황사우는 보금을 몰래 연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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