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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이저우 이야기 (4) ]

후이저우 마을의 랜드마크, 패방

임세권



중국 패방의 고향 후이저우

아직도 후이저우의 많은 마을을 찾을 때 맨 먼저 볼 수 있는 것은 하늘 위에 우뚝 서 있는 패방(牌坊)들이다. 어떤 패방은 마을과 좀 떨어진 들판에 홀로 서 있기도 하고 어떤 패방은 마을 입구 광장에 번듯하게 서 있기도 하다. 흔히 후이저우의 세 가지 뛰어난 것을 꼽을 때 패방, 고택, 사당을 꼽는다. 실상 패방은 후이저우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중국 전역 어디에 가나 패방을 볼 수 있지만 후이저우의 패방을 특별히 일컫는 것은 그 수가 가장 많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후이저우의 패방은 기록에 있는 것까지 합하면 대략 천여 기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현재 남은 것은 백여 개라고 하는데 그렇다고 해도 중국에서 가장 분포 밀도가 높은 곳이다. 그래서 후이저우를 ‘중국 패방의 고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툰시 시내의 라오지에 거리 입구에 서있는 패방.
본래 패방은 이처럼 도시의 한 블록으로 들어가는 길 입구에 출입문으로서의 기능을 가진 건축물이었다.


패방의 수가 이처럼 급격히 줄어든 것은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무너져 없어진 것이 많기도 하겠지만, 현재의 중국 정권이 수립된 1949년 이후의 대약진운동이나 문화대혁명 등의 근 20여 년간에 이르는 혁명기를 거치면서 많은 수가 사라졌다. 특히 문화대혁명은 구시대의 모든 전통적 유산들을 부정하면서 중국 내의 많은 문화유산을 파괴시켰다. 지금 중국 내에 남아 있는 문화유산들은 이런 격변기를 거치면서 힘들게 살아남은 존재들이다. 또 이런 어려운 시기를 지나고 나서도 역사적 유산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한 주민이나 행정 관료들에 의해 훼손된 것도 부지기수다.

황산시 후이저우구(徽州區) 청칸(呈坎) 마을에는 모두 여섯 기의 패방이 있었는데 세 기는 청대에 이미 없어졌고 하나는 1958년 대약진운동 시기에 철거되었으며 또 1978년 사무용 건물을 짓는데 패방을 헐어 기초석으로 사용했다고도 한다. 청칸 사람들은 문화대혁명 때도 살아남은 패방을 그 후 무지한 관리들이 헐어냈다는 것에 대해 안타까움과 동시에 부끄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2007년 당시 후이저우 지역을 답사할 때 많은 패방들이 훼손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2007년 5월 촬영한 슈닝현 위춘 마을의 패방으로 윗 부분 지붕돌들이 많이 무너졌다.


마을의 출입문에서 기념물로 변신

패방은 패루(牌樓)라고도 한다. 이는 기둥을 한 줄로 세우고 위에 액방(額枋;기둥과 기둥을 가로지르는 사각의 판)을 올린 형태의 건축물이다. 나무로 된 것도 있고 돌로 된 것도 있는데 경우에 따라 기와지붕을 올리기도 한다.

중국에서 패방의 기원은 수나라에서 당나라에 이르는 시기의 제단의 문, 즉 영성문(欞星門)으로 보기도 하지만 현재의 패방과 가장 가까운 형태의 문은 송나라 때의 이방문(里坊門)에서 찾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방(里坊)은 사람들의 집단적 거주지역 단위이다. 현대적 의미에서 방형으로 짜인 구획도시라고도 할 수 있다. 이방은 사방에 담장을 세우고 바둑판처럼 만든 도로에 문을 만들어 주민의 출입을 통제했는데 나중에 담장이 없어지고 문만 남게 되었다고 한다. 이를 방문(坊門)이라고 했다. 원나라 이후에는 기념물 성격이 더해져 일반적으로 패방으로 부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송나라 때나 원나라 때의 이방 또는 패방은 대체로 목조로 되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없고 지금 볼 수 있는 오랜 패방들은 모두 명나라나 청나라 때의 것들이다.

지금 나무로 된 패방으로 유명한 것은 황산시 셔현 창시 마을의 목패방이다. 이 패방은 현재 중국의 유일한 목패방이라 알려져 있는데 창시 마을 원공지사(圓公支祠) 사당의 문이다.


셔현 창시 마을의 원공지사 문방. 대표적인 목패방이다.


현재 패방은 대부분 돌로 된 석패방이다. 처음 나무나 벽돌로 지은 패방들은 쉽게 썩거나 무너져 점차 돌로 바뀌었다. 그러나 재료가 돌로 바뀌었어도 구조 자체는 목조 건축물을 그대로 모방하였으며 지붕의 형태나 기둥 위의 공포 등의 정교함은 목조 건축의 그것을 그대로 빼닮았다.

패방은 기능으로 나누는 경우와 형태로 나누는 경우가 있다. 기능 또는 목적에 따라 패방을 나누는 경우 여러 방법이 있지만 표지방(標志坊), 공덕방(功德坊), 과거성취방(科擧成就坊) 등으로 나누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표지방이란 지역이나 도로의 명칭 등을 표시해주는 기능을 하며 대문의 기능을 하는 경우도 있다. 툰시 시내의 라오지에 거리 입구에 있는 패방을 예로 들 수 있다. 최근 유명 관광지나 역사유적 등지에는 출입구에 큰 패방을 세워 지역 명칭을 새겨놓은 것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이는 모두 표지방이라 할 수 있다.


쟝시성 우위엔현 샤오치 마을의 출입문. 표시방의 하나로 ‘샤오치촌’이라는 마을 이름이 크게 새겨져 있다.


공덕방이란 국가나 사회에 큰 공을 세운 사람을 기리는 패방이다. 대표적인 공덕방으로는 황산시 셔현의 쉬궈패방(許國牌坊)을 들 수 있다. 쉬궈는 윈난 지역의 반란을 평정하여 명 조정에 큰 공을 세웠으며 그로 인해 소보(少保)로 승진하고 무영전대학사(武英殿大學士)에 봉해졌다. 공덕방에는 정절방(貞節坊)이나 효자방 같은 것도 포함된다. 남편에게 정절을 지킨 부인이나 부모에 효도한 아들에게 내려지는 정표(旌表)를 패방을 세워 기념하는 것이다. 이러한 패방들은 국가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고 남편에 정절을 지킨다는 유교적 가치관이 반영되어 있는데 후이저우 지역에 이러한 패방이 특별히 많은 것은 이 지역이 유교적 전통이 다른 지역에 비해 깊이 뿌리박혀 내려오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특히 여성들의 정절을 기리는 정절방이 많은 것은 후이저우 지역 여성들이 처한 특수한 여건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즉 후이저우 여성들은 결혼하면서 바로 외지로 장삿길을 떠난 남편 때문에 과부 아닌 과부 생활을 해야 하고 농사일과 육아 시부모 봉양까지 온갖 험한 일을 도맡아 해야 했다. 이런 환경은 여성들을 정절의 유교적 가치관이 강요되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 내게 되었다.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정절패방들은 이런 사회적 배경을 살펴보아야 이해가 가능하다.

정절패방으로 유명한 곳은 황산시 셔현 탕위에(棠樾) 마을의 패방군(牌坊群)이다. 이 마을에는 모두 7기의 패방이 마을로 들어가는 길에 한 줄로 늘어서 있는데 둘이 정절방이고 셋은 효자방, 나머지는 지방관으로의 공적을 기리는 상서방(尙書坊)과 자선을 크게 베푼 것을 기리는 낙선호시방(樂善好施坊)이 하나씩 있다. 이 하나하나의 패방은 모두 긴 이야기들을 가지고 있으나 그중에서도 두 기의 정절방의 사연은 후이저우 여인들의 기구한 운명을 대표하는 이야기들로 널리 회자된다.

하나는 바오원옌(鮑文淵)의 둘 째 부인 오씨(吳氏)의 패방이고 또 하나는 바오원링(鮑文齡)의 처 왕씨(汪氏)의 패방이다. 오씨는 스물 두 살에 셔현(歙縣)에 후처로 시집와서 스물아홉에 남편을 여의었다. 그는 의지할 데 없는 외로운 신세로 수십 년을 수절하면서 전 처 소생의 아들을 훌륭하게 키웠다. 오씨는 자신의 희생으로 포씨 집안의 대를 잇게 한 가장 큰 공로자였다. 패방 위에 새겨진 "절경삼동(節勁三冬)"은 오씨부인이 정절을 지키고 오랜 세월 고초를 이겨낸 것을 의미하며 또 반대쪽에 새겨진 "맥존일선(脈存一線)" 전처 소생의 자식을 잘 키워 인재로 성공시켰음을 의미한다. 또 한사람의 수절 부인 왕씨는 25세에 남편을 잃고 수절해서 혼자 몸으로 가난을 이기고 온갖 고생을 해서 아들을 키워내고 45세에 죽었으니 그들이 시집을 온 것은 결과적으로 아들을 낳아 키워 가문을 잇게 하기 위한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후이저우의 여인들에 대한 비극적 이야기는 중국 전체에서도 유명한데 그중에서도 탕위에 마을이 대표적이다. 여성들에게 가족과 남편 아이들에 대한 끝없는 희생을 강요하는 유교 윤리의 잔인성을 확인하는 이야기들이기도 하다.

또한, 일곱 기나 되는 패방들이 줄지어 서 있는 곳은 탕위에가 중국에서 유일하며 이로 인해 탕위에는 중국 패방의 고향 마을로 불리기도 한다.


황산시 셔현 탕위에 마을의 패방군


과거성취방은 과거에 급제하여 고위 관직에 오르고 국가에 공적을 세운 것을 기리는 패방이다. 황산시 후이저우구(徽州區) 탕모촌(唐模村)의 동포한림방(同胞翰林坊)은 대표적 과거성취방이라 할 수 있다. 이 패방은 청나라 때 세워진 것으로 쉬청쉬엔(许承宣) 쉬청지아(许承家) 형제가 청 강희연간에 진사에 합격하고 뒤에 모두 한림원에 오른 것을 기리는 패방이다.


황산시 셔현 탕모촌의 동포한림방


패방을 구별하는 기준으로 규모와 형태를 내세우는 경우가 있다. 즉 기둥의 개수, 기둥 사이의 칸수, 지붕의 유무, 지붕의 층 수 등이다. 지붕의 층수는 ‘루(樓)’라고 표현하는데 가장 작은 규모의 패방은 1칸 2주 1루 양식이다. 기둥이 두 개이며 지붕이 하나인 패방이다. 기둥이 둘이기 때문에 자연히 기둥 사이의 칸은 하나뿐이다. 이러한 간단한 형태는 송원 양조는 물론 명초까지 계속되었다. 명나라 영락(永樂) 시기(1402~1424)에 들어와 칸수와 지붕 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는데 일반적으로 3칸 4주 3루가 많고 5루도 나타났다. 이후 16세기 중엽에는 5칸 6주 11루의 패방도 등장했다. 또 기둥이 한 줄로 늘어선 일자형에서 기둥을 방형으로 둘러 세운 입구자(口) 형도 세워졌다.

이러한 다양한 형태 중 고형으로 볼 수 있는 것은 한 칸짜리의 단순한 패방이다. 패방의 변화는 1칸에서 여러 칸으로, 지붕이 없는 것에서 지붕이 여럿 있는 것으로, ‘一’자형에서 ‘口’자형으로 발전했고 또 재료도 나무로 된 것(木坊)에서 벽돌(磚坊), 다시 돌을 사용한 것(石坊)으로 발전했다.

또 부분 좁은 골목에 서 있는 문루 기능의 패방이나 소규모의 사찰문 등으로 건립된 패방들은 대부분 1칸 2주 3루의 단순한 형식이다. 이들은 지붕은 있으나 두 개의 기둥만으로 세워져 매우 간소하게 보이면서도 아담하고 예쁜 느낌을 준다. 문루 기능이 아닌 인물의 공덕방으로는 1칸짜리 패방을 그리 많이 볼 수 없는데 후이저우 고성 안의 치수중광방(豸绣重光坊)이 대표적인 예다. 명 숭정년간에 건립된 이 패방은 쟝잉샤오(江应晓) 쟝빙치엔(江秉谦) 두 사람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이 패방은 공덕방이지만 현성 안의 좁은 거리 입구에 서 있어 골목 문과 같은 기능을 겸하고 있다.


후이저우 고성 안의 1칸짜리 치수중광방(豸绣重光坊)



황산시 슈닝현의 구청옌 마을에 있는 지붕 없는 3칸 4주 형식의 패방. 장식이 거의 없는 단순한 구조다.


여덟 개의 다리로 서 있는 중국 최대의 쉬궈(许国) 패방

‘口’자 형 패방으로 대표적인 것은 앞에서 잠깐 언급했던 셔현 고성(古城)의 쉬궈(許國) 패방이다. 이 패방은 정면에서 보면 3칸 4주 3루 형식이고 측면에서 보면 1칸 2주 3루 형식이다.

쉬궈(1527~1596)는 1565년 진사에 합격하여 승진을 거듭하다가 윈난(雲南) 지방의 반란을 평정하여 큰 공을 세워 벼슬이 소보(少保)에 이르렀고 무영전대학사(武英殿大學士)에 봉해졌다. ‘무영전’은 황궁 안에서 쉬궈가 사무 보는 건물이고 ‘대학사’는 내각의 구성원으로서의 칭호다. 패방의 위에 가로질러 걸린 액방에는 ‘소보겸태자태보례부상서무영전대학사허국(少保兼太子太保礼部尚书武英殿大学士许国)’이라 새겨 있는데 유명한 동치창(董其昌)의 글씨다. ‘口’자 형 패방은 흔하지 않으나 다른 곳에도 있다. 셔현에도 또 하나의 ‘口’자 형 패방이 있고 또 후이저우 이외의 다른 지방에도 알려진 것이 있으나 쉬궈 패방만큼 규모면에서나 예술성에서나 뛰어난 것은 찾기 어렵다.


셔현의 쉬궈 패방. 중국 유일의 ‘口’자 형 팔각패방


윈난의 반란을 평정하고 무영전 대학사의 높은 관직에 오른 쉬궈는 황제의 특별한 은총을 입어 패방 건립을 허가 받고 일시 고향으로 내려오게 된다. 고향으로 내려온 쉬궈는 정교하고 아름다운 목조건축물을 모방하여 석패방을 세울 계획을 세웠다. 패방은 마을마다 많이 세워져 있었는데 대부분 기둥이 4개인 사각패방(四脚牌坊)으로 3칸 4주의 일반적 형식이었다.

당시 후이저우는 상업으로 성공한 거상들은 많았으나 고위관직에 오른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쉬궈는 이 지역의 자랑스러운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패방이 평범한 사각패방(四脚牌坊)이라면 그의 높은 관직이 가진 위엄이 드러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크고 화려한 모양의 패방을 만드는 것은 황제의 허락을 얻어야 했다. 쉬궈는 일단 저질러 놓고 볼 심산으로 지금 우리가 보는 전체 8개의 기둥을 가진 ‘口’자 형 팔각패방(八脚牌坊)을 만들고 추후 황제의 허가를 받았다고 전한다.

패방에는 12마리의 사자와 방향마다 편액이 있고 정교한 조각을 장식하였고 패방의 명칭은 동치창(董其昌, 1555~1636 명대의 서화가)의 글씨로 새겼으니 가히 후이저우 최고의 예술품이라 할 만하다. 쉬궈는 뒤 늦게 황궁으로 돌아와 가까스로 8각 패방에 대한 황제의 허락을 얻었다. 이로써 이 패방은 중국 유일의 ‘口’자 형 팔각패방으로 지금까지 전해져 올 수 있었다. 이와 같은 명대 고위 관료의 호화로운 패방이 문화대혁명의 혼란기에 살아남은 것이 기적이라 할 만하다.

쉬궈는 1567년 명나라 융경황제의 즉위를 알리는 사신으로 조선에 오기도 하여 한국과의 관계도 있다는 점에서 특별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쉬궈가 조선에 왔을 때 조선의 선조 임금은 많은 선물을 주었는데 그는 모두 받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에서는 그 사실을 비에 새겨 칭송했다고 하는데 어느 비에 새겨 있는지는 확인하지 못하였다.


쉬궈 패방의 내부에서 밖을 내다본 후이저우 고성의 거리 풍경



쉬궈 패방의 내부 중심에서 하늘을 보면 패루 지붕이 사각형을 이루어 아름다운 기하학적 도형을 만든다.


대부분의 3칸 4주의 패방들은 앞서 본 것처럼 위에 3개의 지붕을 2층으로 얹어 전체적으로 화려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지붕이 없이 기둥 위에 단순한 액방 등을 얹어 장식을 가미하지 않은 소박한 형태도 많다. 황산시 슈닝현 구청옌(古城岩) 마을은 주변의 여러 마을에서 고건축물과 패방, 사당 등을 옮겨와 조성한 관광 명승구역이다. 이곳에는 다양한 패방들을 볼 수 있는데 지붕이 없는 단순한 양식의 패방도 두 기가 있다. 그 중 장잉양(张应扬) 공덕방(功德坊)은 가운데 두 개의 기둥 양쪽에 앉힌 네 마리의 사자를 제외하면 아무런 장식도 없는 단순 소박한 형태를 보여준다. 화려하고 복잡한 건축물이나 패방들을 보다가 이런 단순한 구조물은 오히려 신선하게 보인다.


구청옌(古城岩) 쌍절방(双節坊) - 의자방(義字坊)에서 본 모습


패방은 후이저우 석각 예술의 결정판

앞의 쉬궈 패방에서 보았지만 패방은 뛰어난 예술작품이다. 패방을 자세히 보면 사자상을 비롯한 크고 작은 다양한 조각 작품들이 배치되어 있고 패방의 여러 면석들에는 후이저우를 대표하는 문양들이 새겨져 있다. 황산시 시디 마을의 교주자사(膠州刺史) 후원광(胡文光) 패방은 중국 패방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일컬어진다. 명 만력 6년 1578년 세운 것으로 높이 13m 폭 9.8m의 거대 패방이다. 3층으로 올려진 지붕은 마치 진짜 기와지붕으로 착각할 만큼 사실적이며 위로 솟구친 처마는 화강암의 거대 기념물을 하늘로 가볍게 들어 올린 듯 보인다.

특히 후원광 패방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조각 작품으로는 하나하나 독립된 형태로 제작되어 패방의 두공(斗拱, 대들보와 기둥을 잇는 구조물)부분 끝에 올려진 팔선상(八仙像)이다. 이 작은 인물상들은 패방 속 어딘가에 깃들어 살면서 바람 쐬러 나와 대화를 나누는 듯한 모습이다.

또 패루 지붕의 용마루에는 모두 세 쌍의 오어(鰲魚)가 올려져 있다. 오어는 잉어가 용의 구슬을 훔쳐 용이 되기 위해 하늘로 오르다가 머리만 용으로 되고 몸은 그대로 물고기의 형태로 남았다는 전설상 동물이다. 오어는 과거에서 일등을 한다거나 고위관직으로 고속 출세를 한다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후이저우 지역의 마을 다니다 보면 사당 같은 큰 건물의 지붕 용마루 양쪽 끝에 오어가 올려져 있음을 자주 볼 수 있다.


명 만력6년(1578) 세워진 황산시 이현 시디 마을의 후원광자사(胡文光刺史) 패방



후원광 패방의 투각으로 된 조각 작품



후원광 패방의 팔선(八仙)


쉔청시 지시현 롱추안 마을의 후씨(胡氏) 사당 앞에는 두 기의 패방이 있는데 이중에서 쉬쫑시엔(胡宗憲) 패방은 화려함의 극치를 이룬다고 할 정도로 조각예술이 뛰어나다. 후쫑시엔(1512~1565)은 동남해안 왜구를 소탕하여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후원광 패방과 마찬가지로 3칸 4주 5루로 되어 있는 이 패방은 맨 위 지붕의 용마루 양 끝에 치문(鴟吻)이라고 하는 망와(望瓦)가 올려져 있다. 한국에서는 치미가 있는데 ‘치(鴟)’는 전설상의 매 종류의 새를 말한다. 치문은 치의 부리를 말하고 치미는 치의 꼬리를 말한다. 용마루 중간에는 기풍선인상(骑风仙人像)이 서 있는데 이는 중국에서 지붕의 용마루에 세우는 열한가지 동물 중 하나라고 한다.

이 외에 천마 태양 불꽃무늬 등의 도안과 여러 가지 전설상의 동물과 식물들이 가득 새겨져 있다. 물론 모두가 투조 기법을 사용했다. 액방(額枋)에도 맨 위, 중간, 아래쪽의 여러 액방마다 후쫑시엔의 관직과 인물관련 기록 등이 가득하다. 이와 유사한 형태의 패방으로는 슈닝현 치엔커우(潛口) 마을의 방씨종사(方氏宗祠) 패방이 있다. 이 패방은 명 가정(嘉靖) 정해년(1527)에 건립된 것으로 기본적으로는 쉬쫑시엔 패방과 같은 형식이다. 전체적으로 백색조가 강한 백마석이란 돌로 되었는데 조각들이 모두 깊은 부조로 되어 거의 환조에 가깝다. 위의 액방 도안들은 모두 투각 기법으로 되어 전체적으로 화려함이 돋보인다. 패방 전체에 다양한 신화적 내용의 그림들이 새겨져 있으며 대체로 고위관직으로 출세하고자 하는 욕구를 실현하고자 하는 내용들이다.

패방의 맨 위에는 글자가 없고 이를 들어내고 입을 벌리고 있는 귀신이 새겨 있다. 귀신은 오른 손에 붓을 쥐고 왼손에는 저울추를 들고, 발 뒤에는 크고 네모난 말(斗)이 있는데 저울추나 네모난 말은 재능을 재는 도구라고 하며 붓은 과거 시험에서 장원을 하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 또 귀신의 귀(鬼)와 말의 두(斗)를 합하면 괴(魁)자가 되는데 이는 북두칠성의 머리에 있는 네 개의 별로 학문이 가장 높은 자를 의미한다고 한다. 참으로 중국사람들의 이야기와 상징은 끝이 없다.


롱추안 마을의 후쫑시엔 패방.
패방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조형물들이 정교하고 화려하게 장식되어 명대 패방의 뛰어난 예술성을 보여준다.



후쫑시엔 패방은 조각과 함께 액방에 새겨진 다양한 서체의 글씨를 감상하는 재미도 있다.



치엔커우 마을의 팡씨종사 패방.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치엔커우 마을의 팡씨종사 패방에 새겨진 귀신으로 오른손에는 붓을 왼손에는 저울추를 들고 있다.
과거급제에서 장원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았다.


패방은 중국에서만 그치지 않고 한국과 일본에서도 동일한 형태의 문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우리나라에서 외형적으로 비슷한 건축물을 찾는다면 왕릉 같은 곳에서 볼 수 있는 홍살문, 또는 효자‧열녀 등을 기리기 위한 정려문 등을 들 수 있다. 또 일본의 신사 입구에 서 있는 토리이(鳥居) 또한 같은 종류에 넣어야 할 것이다.

한국이나 일본의 이러한 유사한 건축물들은 중국의 패방에서 왔을 가능성이 클 것으로 생각된다. 또 하나 인도의 스투파 사방에 세워진 문도 패방과 유사하여 중국의 패방과 한국 일본의 유사한 유적들이 스투파의 문에서 왔다는 설도 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오랜 전통과 거기에서 만들어진 문화적 유산들이 한국 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 또 거기서 인도나 동남아로 확대되는 넓은 공간 속에서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을 패방을 보면서도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셔현 탕위에 마을의 패방이 나뭇잎에 맺힌 물방울에 거꾸로 비쳐 보인다.




작가소개

임세권 (포토갤러리 유안사랑 관장)
임세권
1948년 생. 1981년부터 2013년까지 안동대학교 교수로 재직했으며, 한국과 동북아시아 선사암각화와 고대 금석문 연구자로 다양한 조사‧연구를 진행했다. 1992년 2월부터 1년간 중국에 체류하면서 중국 암각화 유적 조사, 이후 2012년까지 러시아 몽골 중국 등 동북아시아 암각화 현장 조사, 1999년 8월부터 1년간 미국에 체류하면서 미국 남서부 암각화 유적 조사. 2007년부터 현재까지 중국 후이저우 지역 전통마을 조사 및 촬영 작업을 진행중이다. 2013년 9월 포토갤러리 유안사랑 개관하고, 현재 사진작가로 활동 중이다.

지은 책
<중국 변방을 가다>(신서원), <한국의 암각화>(대원사),
<한국금석문집성1 고구려 광개토왕비>(한국국학진흥원) 등이 있다.
“ 뒷배 믿고 기고만장한 관노, 말에서 내릴 줄을 모르다 ”

저자미상, 을묘청의변, 시기미상
1859년 봄, 예안지역의 신유(新儒: 새로 유안에 편입된 유생)들이 김수근의 위패를 운계서원에 배향하였다. 서원 공사가 역시 광대하였지만, 예안 현감이 성심으로 돌보고 도와주었다. 예안 사람들은 김진형과 연관 되었다고 지목하였다. 예안 사람들의 말은 확실히 믿을 수가 없거니와, 관노(官奴) 이종릉(李鍾陵)은 운계서원의 공사에 상당한 노고가 있음으로 인하여 한양의 권력자들에게서 믿음이 적지 않았다. 예안 현감이 거꾸러지며 반가이 대우하니 이종릉이 그가 거꾸러지며 반가이 대우하는 것을 보고, 자기 눈앞에 거리낄 것이 없었다. 이휘녕의 장례를 봉성(鳳城)에서 치를 적에 관가의 말을 타고 의기양양하게 달려가다가 판중추부사 이효순(李孝淳)의 가마를 만나서 들이받을 뻔하여, 판중추부사가 일어나 지나갔는데, 조심할 줄을 몰랐다. 그리하여 고을 사람들이 그의 집을 헐어버리고 관내 다른 지역으로 쫓아버렸다. 그 사람이 한양으로 도망가서 사동 행랑채에 몸을 의탁하였다. 예안 현감이 매양 살뜰한 정을 다하여 돌보아 주었다. 예안 현감의 둘째 아들이 1861년(철종12, 신유) 봄에 문과에 급제를 하자 이종릉이 모든 일을 주관하였다. 둘째아들이 영광스럽게 고향에 돌아옴에 이르러 이종릉이 말을 나란히 타고 길에 올랐다. 예안 사람들이 직접 눈으로 보고 전하는 자가 많았다.

“ 서책을 찍을 종이를 백성들에게 거두어들이다 ”

김령, 계암일록, 1631-05-10 ~
1631년 5월 10일, 완연한 봄인데도 날이 흐리고 추웠다. 금처겸이 하회 마을에서 돌아와 그의 장인인 류계화의 편지를 전해주었다. 류계화는 김령과 오랜 친구 사이였는데, 얼마 전 합천 군수를 제수 받고 서울에 올라갔다가 돌아왔다. 이제 조만간 합천군으로 부임할 것이라 한다. 오랜 친구가 관직을 얻었다고 하니 김령은 마음이 흡족하였다.
그러나 흡족한 마음도 잠시, 오후에는 다소 언짢은 소식도 들었다. 이번에 나라에서 『태평어람(太平御覽)』과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인쇄하도록 경상도 감영에 명령하였던 모양이다. 감사 조희일이 이 서책을 인쇄하는 데 쓸 종이를 각 고을에 배정하여 거두어들었다. 우리 예안현에는 숙후지(熟厚紙) 6권, 후백지(厚白紙) 12권, 백지(白紙) 6권 등 총 24권을 내도록 하였다고 한다. 가뭄에 백성들의 요역이 더욱 많아졌으니 괴로운 마음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태평어람』과 『자치통감』은 올바른 정치를 가르치는 역사책인데, 이런 책들을 백성의 고혈로 찍어내고 있으니 황당한 마음도 드는 김령이었다.

“ 7년 간 휘두른 영의정의 무소불위 권력, 서서히 막을 내리다 ”

김령, 계암일록,
1608-01-29 ~ 1608-03-29
1608년 1월 29일, 추웠다. 평보 형을 지나는 길에 만났다. 듣자하니, 이달 20일쯤에 전 참판 정인홍이 상소하여, 영의정 류영경(柳永慶)이 동궁을 모위했다고 탄핵하면서 그가 마음대로 자행한 정상을 극단적으로 말하였다고 한다.충주의 진사 이정원과 경상우도의 하성 등이 상소하여 류영경(柳永慶)의 죄를 논했는데, 이를 들은 자는 속이 시원해 했다고 한다.
영경이 나라 일을 담당한 것이 7년인데, 권세를 마음대로 휘두르고 자기 무리들을 포진시켜 재물을 탐내고 관직을 더럽히기를 거리낌이 없어서 뇌물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성품마저 교활하여 군왕에게 아첨을 잘하였는데, 이것 때문에 임금의 총애가 시들지 않고, 국혼을 빙자하여 왕실과 교분을 맺었다. 변방의 장수나 지방 수령들이 그에게 뇌물을 바쳐 벼슬자리를 얻지 않은 자가 없었다.

“ 성난 평양 백성들, 목숨 걸고 왕의 피난길을 막아서다 ”

정탁, 피난행록,
1592-05-07 ~ 1592-06-09
1592년 5월 7일, 선조는 왜적들의 난을 피해 평양에 도착하였다. 그 후 선조는 정치적으로 여러 인사를 단행하였다. 비록 여러 가지로 정세는 어수선했지만 선조는 평양에 머물며 백성들을 위로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과거를 실시하여 군사들을 충원하려 하였다.
그런데 6월 1일 임진강 방어에 실패했다는 도순찰사(都巡察使) 김명원(金命元)의 장계가 이르렀다. 행재소의 경계는 삼엄해지고 급한 마음에 선조는 파직했던 유성룡(柳成龍)을 다시 불러들이기까지 하였다. 그럼에도 아직 여유로운 수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대동강이 적을 막아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선조는 마음을 놓을 수만은 없었다. 이에 6월 6일 내전(內殿)과 세자빈을 보다 안전한 함흥부(咸興府)로 곡절 끝에 보냈다. 또한 명나라에서 온 관료들을 맞이하여 조선의 상황을 설명하기도 하였다.

“ 규정을 위반한 좌수, 마을의 논의를 통해 파직되다 ”

김령, 계암일록,
1620-07-09 ~ 1620-11-20
온 동네가 좌수 이협(李莢)의 이야기로 어지럽다. 그의 죄상이 매우 심각했던 것이다. 지난 6월 15일에 여러 사람들이 도산에 모였는데, 고을에 문서를 돌려 그의 죄를 성토하고 내쫓기로 했으나 일단 유보하였다. 이협은 이 소문을 듣고서야 병을 핑계대고 문 밖을 나오지 않았다.
머지않아 이협은 좌수직에서 내려왔다. 김령은 침락정(枕洛亭)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이 소식을 들었는데, 이를 들은 자들이 모두 다행스럽고 시원해 하면서도 오히려 그의 죄를 바로 잡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이협이 좌수직에서 내려온 지 며칠 지나지 않아 별감 황유문(黃有文)이 왔다. 좌수 자리에 누구를 천거할 것인가를 의논하러 온 것 같았다. 이 날은 향임들이 모여 그동안 사용한 대동포(大同布) 공물의 여러 가격을 조사해보았다. 그랬더니 이협이 항상 규정 이외로 백여 필을 소비한 것이다. 이밖에도 자잘하게 규정을 위반한 것이 실로 헤아릴 수 없다. 듣고 보니 놀랍고 분통 터지는 일이 아닌 것이 없었다.
겨울이 되었다. 별감 신진부(申盡夫)가 이협의 죄를 정하는 일 때문에 물으러 왔는데, 훼가출송(毁家黜送)은 심한 것 같았다. 그 밖의 벌은 어떤 벌도 괜찮다고 생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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