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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

선을 쌓은 집안에는 남은 경사가 있다,
경수당(慶壽堂)

부모나 형제 없이 혼자 사는 1인 가구가 점차 늘어나면서 우리 주변에는 많은 변화가 생겨났습니다. 혼술, 혼밥, 나홀로 여행과 같은 용어들이 생겨나면서, 누군가와 함께 했던 것들이 요즘은 혼자만 해도 낯설지 않은 세상이 된 것입니다.

조선시대는 어떠했을까요? 조선시대 선인들의 공동체는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 함께 노력했던 가족이나 촌락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농업 생산을 위한 협동을 강화하고, 구성원들 간의 화합을 증진하기 위해 공동체적 규범이 발달했습니다. 성인남자들이 협력하여 농사했던 두레가 있었으며, 동(洞)이나 리(里) 중심으로 공동행사의 계(契)가 있었습니다. 또한, 집 내부 건물에 약장을 놓고 동네 사람들이 약을 무료로 가져가도록 하며 선행을 베풀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조선시대는 공동체의 가치가 협동을 강화하고 화합을 증진하는 모습을 보이며 친밀성, 단합 등을 보여줬습니다.

분명한 것은 오늘날은 과거보다 공동체라는 단어가 조금 낯설게 느껴진다는 사실입니다. 공동체 정신의 기본은 공공의 이익을 추구하고 사회적 위치에 맞게 역할을 해야 합니다. 이번 호는 조선시대 공동체정신과 연관된 편액을 조명하고 선인의 일화를 통해 우리에게 교훈으로 삼고자 합니다.

영덕군 영해면 원구마을에 있는 ‘경수당(慶壽堂)’은 박세순(朴世淳, 1539~1612)의 당호입니다. ‘경수’는 집안에서 쌓은 업적이 선하면 경사가 자손에게 미친다는 의미입니다. 이를 실천하고자 박세순은 임진왜란 때 군량미가 떨어져 어려움을 겪고 있는 관군 등에게 곡식 800석을 내주었다고 합니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 재물을 아끼지 않았던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박세순의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무재(武才)의 인재가 넘쳐나다,
무안박씨 영해파



경수당 종택 전경(출처: 한국국학진흥원_유교넷)


경수당 종택(慶壽堂宗宅)은 임진왜란 때 선무원종공신 2등의 공훈을 받은 박세순이 건립한 가옥입니다. 박세순은 1570년(선조 3년)인 32세 때 99칸 규모로 경수당을 처음 건립하였습니다. 1668년(현종 9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후손 박문약이 1713년(숙종 39)에 현재 규모로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박세순의 집안이 영해에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그의 할아버지인 박지몽(朴之夢, 1445~1555) 때부터입니다. 그는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이 되는 사태가 벌어지자 경기도 여주로 피신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에는 큰아버지가 영해 현령(寧海縣令)으로 부임하자 큰아버지를 따라 영해에 옮겨와 살게 되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거주지를 옮겨 다니게 된 것은 갑자사화(甲子士禍)를 적극적으로 주도한 외사촌인 임사홍(任士洪, 1445~1506)이 자신과 함께 일하기를 권유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임사홍이 사화로 권력을 잡고 세도를 부리는 것이 마땅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위태롭게 여겨져 나중에 화가 자신에게 미칠 것을 예감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영해에 도착한 그는 영해박씨(盈海朴氏)로 함길도 도사(咸吉道都事)를 지낸 박종문의 딸과 결혼하여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박지몽의 선조 가운데는 무장출신이 많았습니다. 지금으로 보면 예비역 대장군인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을 지낸 박윤위를 비롯해 그의 아들인 박유, 그리고 손자인 박성기가 모두 무장들이었습니다.

이러한 가계의 내력으로 박세순 또한 학문보다는 무예를 익히는 환경에 더 노출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조카인 박의장(朴毅長, 1555~1615)과 박홍장 또한 무장이었으며, 특히 박의장은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워 경상좌도의 육군을 지휘하는 책임을 맡은 병마절도사를 지냈습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에 앞장서다



경수당 종택 전경(출처: 한국국학진흥원_유교넷)


박세순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익히는데 출중하여 아버지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학문에 힘쓰기보다는 무예에 더 많은 관심을 두었습니다. 이는 무예로써 세상에 이름을 알린 사촌 형들의 영향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박세순은 재물을 다루는 능력도 탁월했습니다. 그는 아버지와 분가할 때 받은 재산을 기반으로 재물을 불려 나갔습니다. 그래서 30세 이전에 이미 영해, 경주, 안강 등에 많은 토지를 소유하여 만석꾼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박세순의 집안은 이웃들로부터 많은 칭송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의 집안이 재물을 모으는 데만 급급한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돕는데도 재물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자 이 소문을 전해들은 퇴계 이황은 1543년(중종 38) 곁사돈의 관계에 있던 그의 아버지 박영기(朴榮基)에게 ‘경수당(慶壽堂)’이라는 편액을 손수 써서 보내 주었습니다. 그로부터 27년이 지난 1570년(선조3) 서른 살이 갓 지난 박세순은 자신이 모은 재산으로 고향인 원구리에 99칸의 웅장한 저택을 지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아버지는 퇴계선생이 손수 쓴 현판을 아들의 집 대청 가운데 걸어주고 그 뜻을 가슴 깊이 새기기를 당부했습니다.

‘경수당’을 지은 지 22년 뒤인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박세순은 후방의 군수물자를 조달하는 군자감 정(軍資監正)의 직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조카인 박의장은 경주 부윤(慶州府尹)으로 명나라 군대와 힘을 합쳐 경주, 울산 등에서 왜적과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박의장이 군량미가 떨어져 큰 곤경에 처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박세순은 곡식 800석을 내어 700석은 군량미로 쓰고, 나머지 100석은 난민을 구제하는데 쓰도록 했습니다.

그 후 1599년(선조 32) 무과에 급제하여 내섬시봉사(內贍寺奉事)가 되었으며, 1605년(선조 38)에는 임진왜란에서 세운 전공으로 선무원종공신 2등의 포상을 받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오위장(五衛將)의 벼슬을 거쳐 용양위부호군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고향에서 지내다 1612년(광해 4) 향년 73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집안에서 쌓은 업적이 선하면
경사가 자손에게 미친다



경수당 편액이 걸린 건물(출처: 한국국학진흥원_한국의 편액)


경수당(慶壽堂) / 78.55x169.5 / 해서(楷書) / 무안박씨 영해파 경수당 종택(출처: 한국국학진흥원_한국의 편액)


경수당은 박세순이 1570년(선조 3)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원구리에 건립한 종택의 당호 편액입니다. 밀암(密菴) 이재(李栽, 1657~1730)의 「경수당중수기(慶壽堂重修記)」에 따르면 『주역』, 「곤괘(坤卦)」 문언(文言)에 “선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남은 경사가 있다.[積善之家 必有餘慶]” 고 했는데, 이는 집안에서 쌓은 업적이 선하면 경사가 자손에게 미친다는 의미입니다.

퇴계 이황의 친필로 알려진 경수당 편액은 박세순의 둘째형 박세현(朴世賢, 1521~1593)의 인연으로 시작됩니다. 그는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무과에 급제한 뒤 선전관·김해 부사를 거쳐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를 역임하였습니다. 이후 퇴계 이황의 질녀와 혼인했는데, 이 인연으로 퇴계가 무안박씨(務安朴氏) 가문에 ‘경수당’이라는 당호를 친필로 써서 보내 주었습니다. 이것이 후일 넷째 아우 박세순의 집에 걸리게 된 것입니다. 1668년(현종 9) 화재 때 온 집이 다 탔으나 ‘경수당’ 편액만 한 아이의 기지로 온전히 보존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나라와 백성이 어려울 때 자신의 재산을 기부하여 도움을 줬던 박세순은 개인 이익보다 사회적 위치에서 공공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노력한 인물입니다.

경수당 박세순은 30세 이전에 영해와 경주, 안강 등에 많은 토지를 소유한 만석꾼으로 가난하고 불쌍한 백성들을 도왔으며, 특히 임진왜란 때 군량미가 떨어져 곤욕을 겪고 있는 관군 등에게 곡식 800석을 내주었습니다.

오늘날 황금만능주의의 팽배로 개인주의 등 사회적 문제가 대두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경수당’ 편액과 박세순의 일화가 우리에게 큰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개인의 이익이 아닌 공공의 이득을 위해 배려하는 정신, 잊혀져가는 공동체정신에서 꼭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정      리
김광현 (한국국학진흥원)
자      문
권진호 (한국국학진흥원)
“존애원, 그 탄생의 시초”

이준, 존애원기, 미상

1598년, 임진왜란은 겨우 끝났다. 그러나 전란이 수습되기도 전에 정치는 또다시 붕당의 세력 싸움으로 정국이 흘러가고 있었다. 정경세(鄭經世), 그는 관직에 몸을 담고 있었지만 그 역시 붕당의 세력 싸움에 밀려, 아니 정인홍(鄭仁弘)에 밀려 조정에서 쫓겨났다. 무엇보다 서애 류성룡도 탄핵을 받고 있었고, 그 역시 사직소를 올리고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류성룡과 정경세는 사제지간이었다. 정경세는 스승의 탄핵을 막지도 못하고, 자기 역시 스승과 함께 탄핵을 받았다. 스승 류성룡은 조정에 나갈 생각 없이 고향인 안동 풍산에 낙향하였다. 그래서 정경세 역시 사직상소를 올리고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1598년 겨울, 정경세는 다시 청송부사(靑松府使)에 임명되었다는 교지가 내려졌지만 벼슬자리에 나가지 않았다. 이후 또다시 벼슬이 내려졌지만 그저 고향 상주에 머물며 마음을 가다듬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정치를 떠나 있어도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은 변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조정에서 이미 녹을 먹었던 것에 크나큰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비록 유학자였지만 보살과 같은 자비심을 지녔고, 세상을 경영하여 백성들을 구할 포부를 지니고 있었다.

“존애원을 설립하다”

이준, 존애원기, 미상

정경세(鄭經世)와 성람(成覽)은 의국(醫局, 의료원)을 세워 각기 약재의 수급과 진료를 맡았다. 우선 정경세는 약재의 수급을 맡았다. 다행히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도와주는 사람들은 이른바 낙사계(洛社契)의 사람들이었다. 낙사계란 명망 있는 선비들의 모임이다. 정경세는 낙사계를 위한 글을 쓰기도 하였다. 낙사계에 모인 사람은 거의 서른 명이나 되었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정경세가 의국을 세워 백성들을 구제하겠다는 뜻에 모두 동의하였다. 그들은 각기 쌀과 포를 내었다. 이것이 의국을 운영하는 기본 자금이 되었다.
정경세는 이를 이용하여 우선 노는 일손부터 모았다. 정경세는 그들로 하여금 우리나라에서 나는 약재들을 채집하게 하였다. 정경세는 또한 중국 약재를 구할 방안을 마련하였다. 중국 약재는 무역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었다. 정경세는 쌀과 포로 중국과 무역을 하여 이를 마련코자 하였다. 일은 순조로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나라 약재는 물론 중국의 약재까지 마련되었다.
약재가 그럭저럭 마련되자 이를 보관하고 출납할 장소가 필요하였다. 정경세는 낙사계로부터 모은 종자돈으로 약재 보관 창고를 지었다. 그리고 성람은 병자들을 진료하기 시작했다. 의국에 대한 소문이 퍼지고 퍼져 진료 받으려는 병자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찾아오는 병자들이 북적였지만 그들을 수용할 공간이 없었다. 정경세는 그들을 위해 다시 집을 짓기 시작했다. 집이 완성되자 이곳은 병사(病舍, 병자들이 머물며 치료를 받는 병동)로 바뀌었다. 이곳에서 성람은 꾸준히 병자들을 진료하였다.

“노비들의 계모임과 싸움, 하늘 두려운 줄 모르고 사건을 조작하다”

김령, 계암일록,
1607-05-22 ~ 1607-06-02

1712년 4월 5일, 박권(朴權)은 아침 일찍 출발하여 함관령을 넘었다. 그런데 고갯길이 높고 가파른 것이 철령보다 훨씬 더했다. 도중에 교체되어 이동하는 길주부사 박내경(朴來卿)을 만나 매우 기뻤다. 함원참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은 홍원현에서 유숙하였다. 이 날은 70리를 갔다. 객사의 벽에 지천(芝川) 황정욱(黃廷彧)과 택당(澤堂) 이식(李植) 등 여러 사람의 천도(穿島)를 읊은 시가 걸려 있었다. 사람들에게 물으니 천도는 홍원에서 동쪽으로 5리쯤 가면 있다고 하여 즉시 가마를 타고 갔다.
이른바 천도는 포구 가에 긴 둑이 있어 가로로 길게 뻗어 있었다. 그런데 둑 가운데 굴이 하나 있었으며, 그 굴은 사방이 다 암석이었다. 한편으로 맷돌에 구멍이 패인 듯하여 대문과 같았으며, 높이는 30자, 폭은 40자 정도였다. 바닷물이 밀려오고 밀려나가는 것이 참으로 특이한 구경거리였다. 조금 남쪽으로 대가 하나 있는데 평평하고 넓어서 수백 명이 앉을 수 있다. 앞으로는 큰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고, 좌우로는 12개의 섬들이 고리처럼 둘러있다. 그 중에 가장 기이하게 생긴 섬이 주도(珠島)라고 하였다. 시를 읊으며 오래 즐기고 돌아와서 지천 황정욱의 시에 차운하여 시를 지었다.
어떤 기생이 시 두루마리[詩輔] 4권을 올리면서 자기는 옛 기생 조씨의 손녀라고 하였다. 대개 참의 윤선도(尹善道)가 광해군 때 상소로 인해 북쪽에 유배되었는데, 기생 조씨가 술을 갖고 와서 위로하여, 이때 말하고 침묵하는 사이에 시대를 비난하는 뜻이 있으니, 윤선도가 5언시 1절을 지어 주었으며,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 북청에 유배되었을 때에 또한 7언시 한 수를 지어 주었다고 한다. 그 후 여러 사람이 그 시에 화답하였다. 박권도 재주 없음을 잊고 그 시 두루마리 끝에 차운하여 시를 지었다.

“달빛이 밝은 어느 여름날, 모두 모여 마을 공금으로 빚은 일곱병의 술을 마시다”

김령, 계암일록, 1605-07-14

1605년 7월 14일, 김령의 동네에서는 오늘 양정당(養正堂)에서 모임을 가졌다. 얼마 전에 마을 공금으로 술을 빚었기 때문이다.
술이 일곱 병, 참석한 사람은 열네 명이었다. 권인보(權仁甫)도 와서 참여했다.
낮엔 흐리고 비가 내렸지만 저녁에는 날이 개고 달빛이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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