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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

나라사랑의 정신을 기리다, 오계서원

6월은 호국보훈의 달입니다. 6월에는 의병의 날, 현충일, 민주항쟁기념일, 6.25전쟁, 제2연평해전 등 꼭 기억해야 할 날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바친 분들을 기리고 그 마음을 잊지 않음으로써, 평범한 일상이 주는 소중함을 되새겨야 합니다. 이번 호는 조선시대 나라사랑 정신과 연관된 인물의 일화를 통해 우리에게 교훈으로 삼고자 합니다.

영주시 평은면 천본리에 위치한 오계서원(迃溪書院)은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 1541~1596)의 학문을 기리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서원입니다. 이덕홍은 거북선 모양의 전투선인 귀갑선(龜甲船)을 설계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나라를 지키는 n가지 방법 중의 하나로, 전쟁을 대비하고 적을 섬멸하기 위해 군함을 설계했던 이덕홍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조선시대 명문가 영천이씨 가문



안동댐이 건설되어 도산면 가송리로 이건한 농암종택 전경(출처: 한국국학진흥원)


간재 이덕홍의 본관은 영천이씨입니다. 영천이씨는 조선시대에 많은 명신과 학자를 배출한 명문가로, 대표적인 인물로는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를 꼽을 수 있습니다. 이현보는 1467년(세조 13) 경상도 예안현의 분천리에서 태어났으며 1485년(성종 16) 19세 때 부친의 영향으로 예안향교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는 이때부터 공부에 힘써 20세 때 대표적 문장가 허백정(虛白亭) 홍귀달(洪貴達, 1438~1504)을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을 닦았습니다. 다음 해 1498년(연산군 4),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 숙부 송재(松齋) 이우(李堣, 1469~1517)와 함께 문과에 급제했습니다. 그는 과거에 급제한 뒤 예문관 검열, 춘추관 기사, 예문관 봉교 등을 역임하였습니다. 그리고 1504년(연산군 10) 38세 때, 임금의 하루 일과를 기록하고 잘못된 행동을 비판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사간원 정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현보는 연산군의 트집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습니다. 이현보가 서연에서 있었던 강관의 실수를 하루 늦게 보고했다는 이유로 연산군은 그를 의금부에 하옥하고 안동의 안기역으로 귀양을 보냈습니다. 그 뒤 이현보는 연산군을 몰아내고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한 중종반정으로 복직을 합니다. 이 후 밀양 부사, 안동 부사, 충주 목사를 지냈습니다. 1523년(중종 18) 성주 목사 등에서 백성을 바르고 어질게 잘 다스려 가는 곳마다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현보는 관직 수행 능력과 청렴(淸廉)·근검(勤儉)·도덕(道德)·경효(敬孝)·인의(仁義) 등의 덕목을 겸비한 조선시대의 이상적인 관료에게 주어진 ‘청백리(淸白吏)’에 뽑혔습니다.

본래 영천에 터를 닦고 살던 간재 이덕홍의 집안은 고려 말 낙은(洛隱) 이헌(李軒) 때부터 농암종택이 있는 예안의 분천(汾川)으로 옮겨와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할아버지인 광헌(廣軒) 이현우(李賢佑)는 분천의 상류에 위치한 천사촌(川沙村)에 정착하였습니다. 그의 아버지인 이충량이 결혼하면서 함께 영주로 옮겨 살게 되었습니다. 이충량은 관립 교육기관에서 유생을 가르쳤으며, 임진왜란 때 이덕홍이 세자인 광해군을 모셨던 공을 인정받아 사후에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습니다. 이후 이충량의 넷째 아들인 이덕홍이 만년에 안동시 녹전면 원천리 오계에 집을 짓고 살면서 집성촌이 형성되었습니다.


퇴계 이황에게 학문을 배우다



이덕홍이 퇴계 이황으로부터 보고 들었던 것을 모아 엮은 『계산기선록(溪山記善錄)』(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어려서부터 홀로 독서를 즐기던 이덕홍은 비교적 늦은 나이인 18세 때 형의 도움으로 성재(惺齋) 금난수(琴蘭秀, 1530~1604)를 만나 학문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 금난수의 소개로 퇴계 이황을 만나 스승과 제자의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이덕홍은 다른 사람에 비해 늦었던 출발을 만회하기라도 하듯 퇴계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자마자 분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퇴계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약 10여 년 동안 항상 스승의 곁에서 학문에 힘썼습니다. 그 기간 동안 퇴계를 아버지와 같이 섬겼던 이덕홍은 그의 행동과 언어를 꼼꼼히 기록하여 본받고자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만들어 진 것이 『계산기선록(溪山記善錄)』입니다. 성품이 선량하지 않으면 학식과 재능은 소용이 없습니다. 이덕홍은 퇴계로부터 보고 들었던 것을 책으로 만들만큼 그의 삶의 철학을 배우고자 하였습니다.

이덕홍은 스승뿐만 아니라 당대의 이름난 선비들과도 인연을 맺고 학문에 대해 토론했습니다. 그의 학문적 깊이는 그들 사이에 서로 주고받은 글들을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일례로 성리학에 대해 토론하였던 송소(松巢) 권우(權宇, 1552~1590)는 “의리에 분명치 않은 곳이 있어 조목에게 질문하였으나 분명한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당신의 결단하는 가르침을 바랍니다.” 라며 이덕홍의 의견을 구하였던 일화도 있습니다.


귀갑선(龜甲船)을 설계하다



귀갑선도(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임진왜란 시기 조선의 수군이 일본에게 승리할 수 있었던 원인은 다양하게 있습니다. 그 중 하나인 이순신이 만든 거북선은 빼 놓을 수 없습니다. 거북선을 개발하기 위해 이순신이 많은 고민을 했던 것으로 추측되나, 동시대에 이순신의 거북선 모양과 유사한 배를 설계하여 왕에게 올린 상소에 첨부한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문집에 귀갑선(龜甲船)을 남긴 간재 이덕홍입니다.

“귀갑선의 제도는 등 부분에 창검을 부착하고 머리 부분에 쇠뇌(伏弩)를 숨겨 두고, 허리 부분에 작은 판옥(板屋)을 만들어서 사수(射手)가 그 가운데 들어갈 수 있게 한다. (판옥의) 곁으로는 쏘는 구멍으로 통하고, 아래로는 배의 중심부에 통하게 한 다음, 가운데에 총통(銃筒)과 큰 도끼(大斧)를 싣는다. 그리하여 때려 부수거나 포를 쏘아 대고, 쏘거나 들이치면 적들이 비록 많이 몰려오더라도 반드시 (우리 편을) 어찌하지 못할 것이다.”

위 글은 문집에 기록된 내용으로 귀갑선이 이순신의 거북선과 상당히 유사함을 알 수 있습니다. 간재 이덕홍은 임진왜란을 직접 겪은 인물로, 전란 당시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군사적 대책을 제시하는 글을 임금에게 바쳤습니다. 1593년(선조 26)에는 선조에게 「상행재소(上行在疏)」」를 올려 귀갑선의 건조를 제안하였고, 마지막에 「귀갑선도(龜甲船圖)」를 첨부하였습니다.

거북선은 뛰어나고 독창적인 배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진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덕홍은 류성룡과 한 살 차이로 퇴계의 문하에서 교우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또한 류성룡은 이순신과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습니다. 이후 류성룡은 임진왜란 직전에 이순신을 수군의 선봉에 있도록 선조에게 추천했습니다. 이러한 교우관계와 『간재집』의 귀갑선 그림을 근거로 이덕홍이 거북선에 대한 구상을 류성룡에게 전달했고 류성룡이 이순신에게 전했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습니다.


간재 이덕홍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다



오계서원 전경(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오계서원(迃溪書院) / 64.0x171.0 / 해서(楷書) / 영주 평은 오계서원(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오계(迃溪)’는 지명에서 따온 말입니다. 오계서원은 이덕홍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도존사(道存祠), 강당인 명륜당(明倫堂), 동재인 관성재(觀省齋), 서재인 관서헌(觀書軒), 출입문인 입도문(入道門), 그리고 서원 전체 이름을 ‘오계’라 하였습니다.

오계서원은 1570년(선조 3) 이덕홍이 세운 오계정사의 후신입니다. 이덕홍은 오계정사에서 학문과 마음을 닦고 후학을 양성했는데 이때 지은 시가 있습니다.


鑿壁開菴伴柳陰 절벽 깎아 암자 세우니 버들 그늘 드리우고
溪聲㶁㶁瀉前林 시냇물 콸콸 소리 내며 앞 숲에서 쏟아지네
觀瀾一術從何得 여울 보는 한 가지 방법 어디에서 얻었는가
抱病齋居試養心 병든 몸 서재에 머물며 마음 수양 해보려네


시 내용으로 보아 오계의 아름다운 경치를 느끼며 자기수양과 후학양성을 실천하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계정사는 임진왜란으로 훼손되었고, 1600년(선조 33)에 이덕홍의 장남인 선오당 이시가 쌍계마을로 이건하고 한호의 글씨로 관성재, 관서헌의 편액을 걸었고, 1665년(현종 6)에 이덕홍의 위패를 봉안하고 도존사를 건립했습니다.

이후, 1691년 오계서원으로 승격하고, 1699년과 1707년의 대홍수로 물길이 바뀌어 서원이 침수되는 피해가 있자 현재 위치로 이건했습니다. 고종 때 서원철폐령에 따라 철거되었지만 1919년에 복향했습니다.

간재 이덕홍은 높은 벼슬을 하지는 않았지만 성리학의 대학자인 퇴계 이황의 제자로 학문적 조예가 깊었습니다. 또한 그는 배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학문을 통해 외세로부터 나라를 지키고자 ‘귀갑선’을 설계하여 전쟁에 대비하고 국력을 강화했습니다. 선비는 학문에만 뛰어나다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현재 우리는 나라의 안위보다 취업, 결혼 등과 같이 사회적 관계에서 발생되는 고민을 더욱 가깝게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헌신하신 분들이 있었기에 다른 고민이 생겼는지도 모릅니다. 간재 이덕홍이 실천한 나라사랑을 통해 우리가 누리는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감사하는 마음을 되새기며 이 달을 의미 있게 보내면 좋겠습니다.




정      리
김광현 (한국국학진흥원)
자      문
권진호 (한국국학진흥원)
“조선시대 군인들의 강무”


마상재(馬上才)는 달리는 말 위에서 사람이 행하는 갖가지 재주로, 농마(弄馬), 희마(戱馬), 마희(馬戱), 곡마(曲馬), 원기(猿騎), 무마(舞馬), 표기희(驃騎戱), 마기(馬技), 마기(馬伎), 입마기(立馬技), 마술(馬術) 또는 말광대, 말놀음 같이 다양한 용어로 불린다. 이들 용어 가운데 훈련된 말에게 여러 기예를 익히게 하는 무마(舞馬)를 제외하고, 그 나머지 용어는 기수가 달리는 말 위에서 여러 가지 동작을 취하여 재주를 부리는 기예를 뜻하는 말이다. 특히 마상재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붙여진 명칭으로 민간에서는 주로 마기(馬伎)라 불렀다. 하지만 마기가 아니라 희마(戱馬)가 옳다는 주장이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서 확인되는 것으로 미루어 희마가 옳은 표현으로 보인다.

“사족의 필수교양, 활”

금난수, 성재일기,
1592-11-20 ~ 1592-12-29

금난수와 그 벗들은 젊을 적부터 간간히 활을 쏘며 놀았다. 활쏘기는 사족들이 반드시 익혀야 할 교양 중 하나였다. 나라에서도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도 향사례(鄕射禮)를 「군례(軍禮)」 의식으로 규정하여 매년 3월 3일과 9월 9일에 여러 도, 주, 부, 군, 현에서 행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성종 때 까지도 제대로 시행되지 않다가, 이후 향촌사회의 안정을 도모하는 정책이 논의되면서 향사례가 시행되었다. 활쏘기는 단순히 화살로 과녁을 맞히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뜻을 바로 하는 예의와 덕과 선을 권하는 데 의의가 있었다.
그리하여 금난수를 비롯한 사족들은 젊을 때부터 활을 쏘는 데 익숙하였다. 비록 평소엔 붓보다 무거운 것은 들지 않는 백면서생이라 할지라도 모두 활은 쏠 줄 알았던 것이다. 금난수는 활쏘기를 구경하는 것도 좋아했는데, 11월 20일에는 이성여의 집으로 가서 활쏘기를 구경하였다. 활을 쏘는 사람들은 젊은이들이 아니었다. 젊은이들은 왜적에 대항하기 위해 의병으로 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향촌을 지키고 있는 것은 노인들이었다. 노인들은 오랜만에 활을 들어 보았다. 모인 사람들은 금응훈, 이공숙, 박몽담 등 10여 명이었다.
활쏘기 구경만 하고 돌아왔던 금난수는 12월 29일에는 직접 아들들을 거느리고 집 뒤 정자에서 활쏘기를 익혔다. 오랜만에 활을 든 이유는 둘째 아들 금업이 두 손자 정일(貞一)과 일생(一生)를 데리고 왔기 때문이었다. 어린 손자들과 세 아들 앞에서 금난수는 노익장을 가감 없이 발휘하였다. 손자들은 과녁에 화살을 꽂아 넣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천진하게 박수를 쳤다..

“활 입문자에게 무과응시는 아직 먼 이야기”

노상추, 노상추일기,
1770-11-03 ~ 1770-11-11

무과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지난 5월부터 활쏘기에 여념이 없었던 노상추는 슬슬 좋은 활을 가지고 싶었다. 마침 공성(功城)에 사는 궁인(弓人) 김룡(金龍)이 노상추가 활을 쏘러 다니는 고남(古南)에 왔다고 하기에 김룡을 만나러 갔다. 노상추는 김룡과 더불어 한동안 활 이야기며, 무과 시험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노닥거렸다. 하지만 노상추는 지금 노닥거릴 때가 아니었다. 곧 과거시험이 열릴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왕이 한동안 병환에 시달리다가 얼마 전 병을 털고 일어났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한 정시(庭試)의 초시가 열흘 뒤인 11월 17일에 치러진다는 소식이 횡성(橫城)으로부터 전해졌다. 노상추와 함께 활을 쏘며 과거시험을 준비하던 동접(同接)들이 모두 술렁였다. 신포(新浦)의 활터에서 언제 과거를 보러 출발할 예정이냐는 등, 지금부터 출발하면 도성에서는 어디에서 묵을 것이냐는 등 서로 대화를 나누는 동접들을 보면서 노상추는 자신도 과거시험을 보러 가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아직 무과를 위한 준비를 한 지가 반년밖에 안 된 터라 자신이 없었다. 노상추는 잠자코 활을 집어 들고 과녁을 향해 활을 쏘면서 상념에 빠졌다.

“활쏘기 시합에서 첨사에게 멋지게 복수하다”

박계숙, 부북일기,
1606-04-03 ~ 1606-04-04

1606년 4월 3일, 함경도 최북단 회령에도 완연한 봄이 찾아왔다. 박계숙(朴繼叔)이 이곳 보을하진에서 근무한지도 어언 4개월이 되었다. 부임 초 몸에 병도 들고, 습진에 참석하지 못해 곤장도 맞아 곤경에 처한 일도 있었지만 이제 이곳에서 생활도 제법 익숙해져가고 있었다.
어제 3일에는 보을하진의 무사들과 박계숙(朴繼叔)처럼 남쪽에서 온 일당백장사들 사이에 큰 내기가 벌어졌다. 바로 활쏘기 시합을 하기로 한 것이다. 보을하진에서는 첨사 민열도가 주장이 되고, 남쪽 장사들 중에서는 박계숙(朴繼叔)이 주장이 되었다. 한 사람이 활 5순씩 쏘아 종일토록 쏘았다. 시합 결과 박계숙(朴繼叔)과 남래장사들이 14발을 더 맞추어 이겼다. 박계숙(朴繼叔)은 총 48발을 명중시켰고, 첨사는 46발을 명중시켰다. 항상 원칙을 내세워 부하들을 엄하게 다루는 첨사(僉使)이지만, 활쏘기에서 지고 나니 크게 멋쩍어 하였다.
어제의 패배가 분했던지 오늘 첨사가 다시 한번 활쏘기 시합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오늘도 역시 박계숙(朴繼叔)과 남래장사들이 11발을 더 맞추어 이겼다. 첨사가 3순씩만 더 쏘아 승부를 겨루자하여 하는 수 없이 3순씩을 더 쏘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래도 남래장사편이 4발을 더 맞추어 이겼다. 첨사는 분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하였다. 보을하진 소속 무사들 중에 토병군관인 서기충이란 자가 있는데, 두 번 시합에서 모두 꼴찌를 하였다. 가뜩이나 분한 마음이 들었던 첨사는 서기충에게 곤장 5대를 치도록 지시했다. 박계숙(朴繼叔)은 쌀 1석과 콩 1석을 상으로 받았다. 몇 달전 첨사에게 곤장을 맞고 분해했던 것을 멋지게 복수한 것 같아 박계숙(朴繼叔)은 마음이 뿌듯해졌다.

“김덕령의 군대 구성과 그의 복장”

정경운, 고대일록,
1594-02-07 ~ 1594-02-08

1594년 2월 7일, 김덕령(金德齡)은 함양에 이르렀다. 김덕령의 군대는 왼쪽에는 충용기(忠勇旗)를 세우고, 오른 쪽에는 익호기(翼虎旗)를 세웠으며, 또 삼군사명표(三軍司命標)를 세웠다.
군(軍)은 충용군(忠勇軍)이라 하고, 군관(軍官)은 부절사(赴節師)라 부르고, 대장 밑에 있는 군사인 아병(牙兵)은 첩평려(捷平旅)라고 불렀다. 군의 모습이 매우 엄숙했고, 호령이 엄정하고 분명하여 참으로 옛 양장(良將)의 풍모가 있었다.
2월 8일, 김덕령의 복장과 그의 풍모를 기록하였는데, 철립(鐵笠)을 쓰고 두 겹의 갑옷을 입었으며, 철혜(鐵鞋)를 신었고 철상(鐵裳)을 둘렀고, 칠척의 장검을 쥐었다고 한다. 또한 말에 뛰어올라 앞서 달리면서 스스로 진법(陣法)을 펼치고 몸소 지휘한 연후에, 산으로 올라가 명령을 내려 싸우고 달리고 격돌하는 것을 익히게 하니, 그 진법은 그가 스스로 만든 것이었다고 한다. 김덕령의 사람됨은 매우 무게가 있으며, 완력이 뛰어나, 그의 날랜 용맹은 비할 데가 없어서 사람들이 한계를 알지 못했다고 한다.
낮엔 흐리고 비가 내렸지만 저녁에는 날이 개고 달빛이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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