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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

나눔과 베풂을 실천하다,
만취당(晩翠堂)

재테크는 재무와 테크놀로지의 합성어입니다. 오늘날 재테크는 사회 초년생뿐만 아니라 은퇴를 앞둔 노년층까지 연령과 지위를 막론하고 돈을 모우고 관리하는 것은 누구나 해야 하는 당연한 일이 되었습니다. 특히, 우리는 성적, 입시, 취업의 경쟁 속에서 남들이 가진 부와 비교하며 성공한 재테크를 위해 노력하고 갈망합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재테크를 했을까요? 선비들은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을 추구했습니다. 가난하면서 편안한 마음, 몹시 가난하고 부족하지만 그것에 구속되지 않고 평안하게 즐기는 삶의 자세를 견지하였습니다. 물론 가난한 자는 재물이 없으니 당연한 말이겠지만 가진 자들 또한 그러한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들은 권력이나 재력을 중요하게 생각하기보다 학문하는 즐거움을 최우선으로 두고 살며 어려운 이들에게 나눔과 베풂을 실천하고 살았습니다.

이번 이야기는 어려운 이들에게 나눔과 베풂을 아낌없이 실천한 선인의 일화를 통해 우리에게 교훈으로 삼고자 합니다. 의성군 점곡면 사촌리에 위치한 만취당(晩翠堂)은 퇴계 이황의 제자 만취당(晩翠堂) 김사원(金士元, 1539∼1601)이 학문을 닦고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건립한 건물입니다. ‘만취당’은 만년송이 오랫동안 푸르다는 뜻입니다.

조선시대 선비의 재테크라는 주제에 맞게, 재물의 증식보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만취당 김사원의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600여 년 동안 살았던 안동 김씨 집성촌, 사촌마을



사촌마을


의성군 점곡면 사촌리는 안동 김씨 도평의공파(都評議公派)가 600여 년 동안 세거한 곳입니다. 1392년에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창업하자 고려조의 함길도 감목관(監牧官)이던 도평의공(都評議公) 김구정(金九鼎)의 아들인 김자첨(金子瞻)이 안동 회곡(檜谷)을 떠나 이 마을에 정착하였습니다.


송은 김광수가 후학을 양성했던 영귀정(詠歸亭)


사촌마을에 입향한 안동 김씨 중에 가장 크게 이름을 낸 사람은 송은(松隱) 김광수(金光粹, 1468~1563)입니다. 서애 류성룡의 외할아버지인 김광수는 성균 진사에 입격하였으나 연산군의 정변이 있을 것을 예감하고 사촌으로 내려왔습니다. 이때 집 앞에 심은 한 그루의 만년송(향나무, 경상북도기념물 제107호)을 벗 삼고 시를 지으며 세월을 보냈습니다. 만년송은 뒷날 많은 묵객들에게 시상(詩想)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김광수가 지은 「만년송정운」을 보면 당시 그의 생각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만년송(경상북도기념물 제107호)


만년송정운(萬年松亭韻)


묻노니 조래산 떠나온 지 몇 해인가一別俎徠問幾時
만년송 푸른 그루 고이고이 심었노라栽封蒼翠萬年姿
맑은 향 은은하게 시축에 풍겨오고靑香細細來詩筆
송화가루 날아서 벼루에 떨어진다殘子紛紛落硯池 푸른 잎 무성하니 새 소리 한가롭고葉密幽禽啼自在
늙은 줄기 이끼끼니 인갑(鱗甲)인양 아롱진다苔斑鱗甲老尤奇
은사의 동산에 우뚝히 서 있으니昻莊獨立村園裏
심상한 저 속사야 몰라준들 어떠리不許尋常俗士知


그는 스스로 초야에 묻혀 사는 선비라는 뜻인 송은처사(松隱處士)라고 불렀습니다.

김광수는 집안이 가난하여 생활이 어려웠으나 마음에 두지 않고 조금도 불평 없이 만족하며 지냈습니다. 당시 이웃 마을에 사는 어진이나 어질지 못한 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김광수를 공경하고 사모하여 본받고자 하였습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김사원(金士元)



만취당 김사원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후산정사(後山精舍)


만취당 김사원는 김광수의 증손자이며, 품성은 인자했습니다. 그가 어려서 친구들과 까마귀가 우는 것을 듣고 가서 자세히 보니 길가에 얼어 죽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옷을 벗어 덮어주고 어른에게 말씀드려 제를 지내주었다고 합니다. 세월이 흘러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사원의 인자했던 품성은 ‘노블리스 오블리제’ 정신으로 빛을 발했습니다. 그는 병법이나 무술을 익힌 것은 아니었으나, 학문을 닦은 선비로서 의병으로 나서는 것은 당연한 의무였습니다.

그는 보급 관련 업무를 하는 의성 정제장(整齊將)에 추대됐습니다. 그의 아우들도 그의 뜻에 동참하여 독수헌(獨秀軒) 김사형(金士亨)과 후송재(後松齋) 김사정(金士貞)은 곽재우와 함께 경남 창녕 화왕산성에서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김사원은 의병활동 외에도 굶주린 자들을 돕는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이와 관련된 수많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백성들이 식량을 구하기 어려워지자 김사원은 곡식을 저장하여 두었던 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집에 이르면 사람을 불러 접대하게 하고 죽을 주거나 곡식을 주었습니다.

또 다른 일화도 있습니다. 김사원은 학문뿐만 아니라 농사에도 힘썼는데 흉년을 만났습니다. 그는 식량을 구하지 못해 힘들게 먹고 사는 이가 있으면 차용증을 받고 빌려주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빌려간 자들이 양식을 갚지 못하게 되자 토지문서를 가져와 변제를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김사원은 차용증을 태워 버렸습니다. 그러면서 김사원은 “내가 차용증을 쓴 이유는 빌려준 것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그 빚을 잊지 말고 부지런히 살라고 쓴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일로 인해 사람들은 김사원에게 감복하여 그의 창고를 김씨의 의로운 창고라는 뜻인 ‘김씨 의창(義倉)’이라고 불렀습니다.

김사원은 일찍이 “선비가 처세함에 의롭지 못하게 녹을 구해서는 안 된다. 오직 본분에 힘을 다하여야 거의 과오가 적을 것이다. 하물며 말과 행동을 삼가는 것, 독서를 부지런히 하는 것, 농업에 힘쓰는 것, 이 세 가지 일은 스승의 가르침이니 감히 힘쓰지 않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만년송이 오랫동안 푸르다, 만취당



만취당(晩翠堂)


만취당(晩翠堂) / 안동김씨 만취당종택(安東金氏晩翠堂宗宅)


만취당(晩翠堂)은 퇴계 이황의 제자 만취당 김사원(金士元)이 학문을 닦고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1582년(선조 12) 건립한 건물입니다.

당호는 인격 수양에 도움이 되는 자연물을 대상으로 정했습니다. 만년송이 오랫동안 푸르다는 뜻인 만취당은 김사원의 당호이며, 글씨는 석봉(石峯) 한호(韓濩, 1543∼1605)의 친필입니다. 만취당 앞에 있는 만년송은 김사원의 뜻과 정서이기도 합니다. 그가 만취당을 호로 정할 정도로 송은 김광수가 심은 만년송을 유심히 바라보며 마음의 수양을 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만취당은 1582년에 지어진 건물로, 안동 봉정사의 극락전,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에 이어 우리나라의 민간 목조 건축물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 중 하나입니다. 임진왜란 이전의 건축양식을 볼 수 있는 중요한 건축물이기도 합니다. 만취당은 안동김씨 사촌마을의 상징이며 문중의 집회소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선비는 학식이 있고 행동과 예절이 바르며 의리와 원칙을 지키고 관직과 재물을 탐내지 않는 고결한 인품을 지닌 사람을 이르는 말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는 선비는 재물을 가지려고 욕심을 부리기보다 어질고 너그러운 행동으로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는 것을 우선으로 하고 있습니다. 만취당 김사원은 만석꾼은 아님에도 굶주린 자들을 도와 ‘김씨 의창(義倉)’이라 불리며 어려운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선비정신에서 필요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는 모습입니다. 현재 우리는 사회 초년생부터 은퇴를 앞둔 노년층까지 연령과 지위를 막론하고 돈을 모우는 것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행복의 기준을 부(富)에 대입하면서 생긴 결과입니다. 만취당 김사원이 실천한 나눔과 베풂의 이야기는 지금도 우리에게 미담으로 전해내려 옵니다. 우리가 정하는 행복의 기준이 물질적인 부(富)로 너무 기울어 진건 아닌지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정      리
김광현 (한국국학진흥원)
자      문
권진호 (한국국학진흥원)
사진촬영
김광현 (한국국학진흥원)
“토지세 과다부과사건의 전말 - 담당 아전의 농간으로 드러나다”

김택룡, 조성당일기,
1617-03-13 ~ 1617-03-25
1617년 3월 13일, 김응희가 문단(文壇)으로 가서 그 편에 충의위 이절과 좌수 황열에게 소식을 전했더니, 김택룡에게 답장이 왔다. 김응희의 전세[田稅, 논밭의 세금 즉 토지세]를 결정할 때 경작한 수량을 지나치게 많게 하였는데, 이것은 서원[書員, 세금담당 아전] 김국(金國)이 농간을 부렸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황열과 김개일이 김택룡을 찾아 와서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 5일 뒤 3월 18일, 김택룡은 별감 김개일에게 편지를 보내어, 세금담당 아전 김국이 시경[時耕, 진전이 아니라 현재 경작하고 있는 토지]의 수량을 지나치게 많이 책정한 것에 대해 그 사정을 물어봐달라고 했다.
3월 24일, 김택룡은 풍종을 영주 군내로 보내 별감 김개일에게 말을 전하도록 했다. 세금담당 아전인 김국을 보내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 3월 25일, 아침에 풍종이 영주 군내에서 와서 김택룡은 별감 김개일의 답장을 받을 수 있었다. 편지에는 세금담당 아전 김국을 보내 전결[田結, 논밭의 조세]의 부풀린 수량을 조사하라고 시키겠다는 말이 있었다. 김택룡의 답세(畓稅)는 읍인(邑人)이 75복(卜) 7속(束), 명이(命伊)가 28속(束)을 속여서 숨기고 명산호(命山戶)에게 이송하였는데 지금 되돌려 보낸다고 하였다. 이것은 김응희와 호노[戶奴, 중요한 일을 도맡아 하는 노비]의 일인데,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으므로 김택룡은 매우 통탄스러워했다. 시기[時起, 현재 농사를 짓고 있는 논밭]도 역시 30여 복(卜)을 더 부풀려 기록해놓았으므로 모두 없애버리기로 하였다. 세금담당 아전 김국은 유숙하였다. 김택룡은 김응희와 상의해 처리하려 하였지만, 김응희가 김 참판 장례에 석회를 굽는 일 때문에 미움을 받아 구속되어 있기 때문에 자세한 상의는 미룰 수밖에 없었다.

“지방 수령과 양반의 기싸움”

김광계, 매원일기,
1634-10-08 ~ 1634-11-23

1634년 김광계가 살던 예안 지역은 큰 사업을 앞두고 있었다. 토지의 비옥도와 면적을 조사하는 조선시대의 토지 조사, 양전(量田)이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양전 결과에 따라 납부해야 하는 세금 액수가 크게 달라지기 때문에 양전 사업은 상당히 민감한 문제였고 지방관과 거주민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기도 쉬웠다.
양전을 앞두고 새로 부임한 예안 현감 남연은 양전 실무를 담당할 사람으로 김광계의 친척 김확을 지명하려 했다. 김확은 김광계와 촌수는 멀어도 자주 왕래하며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기에 김광계와 친지들은 크게 걱정한다. 일단 양전 사업과 연관되면 농민 및 지주들과 현감 사이에 끼어 고생하며 비난받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김확은 양전도감 지명을 피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 10월 들어 양전 사업이 실제 실시되는 과정에서 역시 토지 측량 문제로 양전도감 측과 지역민들 사이에 갈등이 생겼다. 김확과 김광계의 형제들은 조정에서 내려 보낸 양전사와 직접 이 문제를 상의하려 시도했다. 특히 김광계의 동생 김광악은 양전 결과에 대해 불만이 컸는지 현감 남연에게 함부로 주사를 부리기까지 했다. 분노한 예안 현감 남연은 김광계의 동생이자 김광악의 형인 김광보를 양전도감으로 임명하고, 이어서 다음 달에는 김확을 좌수로 삼겠다는 임명서 까지 내려 보냈다. 현감은 예안 지역의 유력 가문 출신들을 활용해 양전으로 동요된 분위기를 통제하려 했을 가능성이 높다.

“노비를 죽인 것은 재산을 줄인 것이니 살인죄에 해당하지 않는다”

조재호, 영영일기, 1752-03-17 ~

1752년 3월 17일, 진주(晉州)의 토호(土豪)인 하수륜(河壽崙)이 병인년(1746) 2월 17일 밤에 그의 계집종 만단(萬丹)의 남편인 유대은악(劉大隱岳)을 구타하여 그 자리에서 죽이고 시신의 목을 매달았다가 만단의 방 안에다 끌어다 두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러다가 유대은악의 형인 유봉안(劉奉安)의 고소장으로 인하여 전례에 따라 사건의 진상이 밝혀진다. 그러나 유대은악은 노비로서 주인이 식구를 줄이려 계획한 것이니 하수륜의 죄악은 전례에 따르면 살인(殺人)은 될 수 없고 독란(瀆亂)의 죄에 해당하였다.

“소작료가 걷히지 않는 논, 상황 조사를 시작하다”

김택룡, 조성당일기,
1617-09-27 ~ 1617-10-08

1617년 9월 27일, 김택룡이 종손(從孫)이를 농사짓는 논이 있는 마평(馬坪)에 보냈다. 또 그 곳에는 다른 사람이 농사짓는 전답 두 곳도 있는데 그 동안 대가는 커녕 요역과 부세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김택룡은 김응희에게 양전행심책(量田行尋冊)을 가지고 가서 살펴보라고 청했다. 아울러 별감 이여함에게 사표(四標)를 찾아 조사해보라고 요청했다. 그 결과 양전[量田, 논밭을 측량]할 때 복만(卜萬)의 전답으로 측정되었던 것을 다른 사람이 경작하여 먹고 있었음을 알았다. 김택룡은 서서히 찾아서 바로잡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10월 4일, 김택룡은 아침에 풍종을 도촌에 보냈다. 마평(馬坪) 전답 두 곳을 권굉(權宏)의 노비 윤복(允卜)과 이성간(李成榦)의 노비 일년(一年), 그리고 김 서방이라고 칭하는 여러 사람이 갈아 먹은 지 오래 되었는데 세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가서 부르게 한 것이다. 풍종이가 와서 고하길, 모두 모레 오겠다고 했다 하였다.
10월 8일, 아침에 김호학(金好學) · 윤복(允福)이 마평 전답 일로 왔기에, 상황을 깨우쳐 보내며 부세(賦稅)를 내라고 명령했다.

“매 그물을 쳤으나 허탕을 치다”

오희문, 쇄미록, 1598-10-08

1598년 10월 8일, 오희문은 아침 일찍부터 앞뜰에 있는 밭에서 수확한 팥을 두드렸다. 모두 1석 2두가 났는데, 이 중 2두는 언명의 집에 주었다. 언명이는 춘금이를 데리고 아침에 황촌으로 건너가서 둔전 곡식 두드리는 것을 손수 감독했다.
팥 타작을 마치자 오희문은 퍼뜩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지난달 이맘때쯤 매 그물을 쳐 놓았는데 여태까지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다. 그나마 최근에는 매가 잡혔는지 여부도 확인해 본지 오래 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종 한 명을 데리고 매 그물을 친 곳에 가 보았다.
가서 확인해 보니, 매를 유인하기 위해 메어 놓은 닭 두 마리가 모두 죽어버렸다. 요 며칠 사이 일이 많아 가보지 못하였으니 아마 먹이를 먹지 못해 굶어 죽은 것이리라. 이 그물에다 미끼로 메어 놓은 닭이 모두 5마리였는데, 그 닭을 모두 잃고 한 마리 매도 잡지 못하였으니 억울하고 분한 일이었다. 게다가 그물을 치고 묶고 하는 수고까지 더하면 이 얼마나 허망스러운 것인가. 오희문은 화가 나서 사람들을 시켜 그물을 모두 걷어 오도록 하였다. 미끼로 쓴 닭이라도 잡았으면 5일 동안 어머니 밥상은 근사하게 차렸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자, 더더욱 아까운 생각이 밀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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