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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생의 일기

정생의 어사일기

2월 1일은 머슴설날이라고 부른다. 정월 설날에 쉴 수 없었던 머슴들이 쉬는 날이다. 하인들에게 술과 음식을 내려주고 즐겁게 놀도록 한다. 이제 다음날부터는 농사 준비에 바빠지기 때문에 그 전에 즐기도록 배려한 것이다.

“스승님! 오늘은 머슴도 노는 머슴설날인데 오늘도 공부합니까?”

학동들이 자리에 채 다 앉기도 전에 재동이가 대뜸 불만을 나타냈다.

“너희는 머슴이 아니잖느냐? 머슴이라고 생각하면 나가서 놀거라.”

정생이 짧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바로 면박을 주었다. 하지만 재동이는 물러날 줄 몰랐다.

“아니, 그럼 저희는 언제 놉니까? 학동 설날도 만들어주십시오!”

접장이 어이없어 하면서 재동이 머리를 콩 쥐어박았다.

“이 녀석아, 너흰 설날에 놀았잖아.”

“저희도 내일부터 농사 준비에 바쁘단 말입니다. 그러니 오늘은 놀아야…”

재동이의 뻔뻔한 말에 접장이 다시 주먹을 치켜 올렸다. 재동이는 황 초시댁의 외동아들이다. 양반 집안의 도령이니 쟁기는 커녕 호미도 쥐어본 적이 없는 주제에 마치 농사일을 하는 것처럼 웃기지도 않는 말을 한 것이다.

“아니, 아니, 제가 아니라 광덕이가 그렇다~는 겁니다.”

재동이 때문에 난데없이 광덕이가 끌려 들어왔다. 광덕이는 평민 집안의 아이라 농사일을 도울 수도 있긴 했다. 멀리 장흥골에서 글을 배우겠다고 정생의 서당까지 찾아오는 기특한 아이기도 했다.

정생이 담뱃대로 서안을 탁 내리치며 말했다.

“재동이 이 녀석, 왜 얌전히 있는 광덕이 핑계를 대느냐? 너희는 오늘이 머슴설날이라는 것만 알고 중화절이라는 것은 모르느냐?”

재동이는 담뱃대가 머리로 날아오는 건 아닌가 하고 머리를 감싸 쥐고 있다가 말했다.

“중화절이 무엇입니까? 중화의 도를 숭상하는 날입니까?”

“그 중화(中華)가 아니라 중화(中和)라 쓰느니라. 어디 보자, 여기 어디 두었는데…”

정생이 일어나 벽장을 열고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자 하나를 꺼내 들었다. 대나무로 만든 자였다.


중화척(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이것이 무엇인지 알겠느냐?”

학동들이 몰려들어 살펴보았다. 병구가 먼저 말했다.

“포백척(바느질 자)인 것 같습니다.”

포백척은 옷감을 재단할 때 쓰는 자다.

“이건 포백척보다 좀 더 작은 크기다.”

이번에는 광덕이가 말했다.

“그럼 영조척이 아닙니까?”

영조척은 건물을 지을 때 사용하는 자로 포백척보다 작았다.

“영조척도 아니다. 이것은 중화척이라고 하는 것이다. 중화절에 임금님이 신하들에게 나눠주는 것이지.”

그러자 재동이가 깜짝 놀란 말투로 말했다.

“와, 그런 게 왜 스승님한테 있어요? 설마 훔치신 건…”

다시 접장의 주먹이 재동이 머리 위로 콩 하고 떨어졌다.

“아이고, 저 놈이 언제 사람 구실을 하게 되려나.”

정생이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중화척은 선대왕(정조)께서 내 백부에게 하사하셨던 물건이니라.”

재동이가 머리를 감싸 쥐고 말했다.

“백부면 큰아버지니까… 지난여름에 돌아가신 분 아닙니까? 그런 게 왜 스승님께 있습니까? 지난 장례식 때 훔치신…”

재동이는 말을 하다가 입을 틀어막고 제일 구석자리로 도망쳤다.

“허허, 그 놈 참. 내가 그런 도둑놈이면 어찌 사람을 가르치는 자리에 있겠느냐? 이건 내가 과거를 보러간다고 백부께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 상감마마의 기운을 가까이하라고 주셨던 물건이다.”

낙방 후에 돌려주는 것이 마땅한 물건이었지만 정생은 모른 척하고 그냥 꿀꺽 삼켜버렸다. 과거에 붙으면 돌려드리겠다고 말했는데, 지금까지 과거에 붙지 못 했으니 계속 가지고 있을 뿐이라고 정생은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임금님이 중화척을 신하들에게 나눠주는 이유는 뭔가요?”

광덕이가 물었다.


정조 초상



“좋은 질문이다. 원래 중국의 제도인데 선대왕께서 도입을 하신 것이다. 중화절의 ‘중화’란 『중용』에 나오는 말로 만물이 중화에서 자라난다는 말에서 가져온 것이다. 2월이 되면 봄이 와서 농사를 시작하니 그 첫날을 기념해서 중화절이라 부른 것이다.”

정생이 중화척을 들어올렸다.

“자라는 것은 길이를 정확하게 재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니 매사 정확히 하고 어긋나지 않게 하라는 뜻으로 나눠주는 것이다. 관리란 백성들을 보살피는 사람이니 공정함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니라.”

정생은 자를 이리저리 돌려 보이며 말했다.

“중화척은 반점이 있는 대나무나 붉은색 나무로 만드는데, 이것은 대나무로 만들어진 것이다. 선대왕께서는 ‘이것은 국왕의 신임을 뜻하니 신들은 능력을 다해 과인을 보필하라’고 말씀하셨다.”

정생은 마치 자신이 듣기라도 한 것처럼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이 중화척에는 또 다른 사연이 있지.”

정생은 아련한 눈길이 되었다. 구석에 있던 재동이가 얼른 그 눈길에 부응했다.

“첫사랑과 연관된 이야기라도 있으십니까?”

“그런 건 아니지만…”

병구가 바짝 당겨 앉으며 말했다.

“말씀해주십시오!”

광덕이도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말씀해주십시오!”

심지어 접장도 헛기침을 하더니 말했다.

“말씀해주시지요?”

정생이 고개를 흔들었다. 어디다 대놓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

정생이 스무 살 때 한양에서 증광시가 치러진다는 말이 나왔다. 증광시는 각 지방에서도 치러지는데 경기도는 한양에서 함께 시험을 치게 되어있었다. 때문에 정생도 한양으로 가 과거를 봐야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한양 남쪽의 수원에 사는 백부가 정생을 불렀다. 중화척을 부적처럼 내려줄 테니 받아가라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뿐이었다면 정생도 굳이 길을 둘러가는 걸 사양했겠지만 부자인 백부가 노잣돈을 보태줄 것이 분명했으므로 수원을 들러 인사를 올리고 중화척을 받았다.

두둑한 노잣돈도 받고 다시 북쪽으로 올라가던 정생은 한 시라도 빨리 한양에 도착하려고 무리해서 길을 가다가 산속에서 방향을 잃고 말았다. 깜깜하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산속에서 길도 아닌 곳을 걸어가다가 결국 지쳐서 멈추고 말았다.

달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것인데 그믐 때라 달빛도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때가 겨울이 아니어서 얼어 죽을 걱정은 없었다. 하지만 따로 먹을 것을 챙기지 않아서 뱃가죽이 등가죽에 붙을 판이었다.

깊이 한숨을 내쉬며 나무둥치에나마 기대어 눈을 붙이려고 하던 참에 멀리서 가물대는 불빛을 보았다. 천만다행이다 싶어 억지로 나무와 덤불을 헤치고 그곳을 찾아갔다. 그러다보니 과거 보려고 차려입은 깨끗한 도포며 갓이며 모두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 완연히 망해먹은 비렁뱅이 선비 꼴이 되고 만 것이다.

도착해보니 산속에 있는 집치고는 제법 멀쩡해보였다. 초가집도 아니고 기와를 올려놓은 것을 보니 손님도 충분히 맞을만해 보였다.

“이리 오너라.”

정생이 살았다는 기분으로 우렁차게 외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열렸다.

“아니, 왜 이리 늦으셨습니까?”

문 안에서 비단치마를 감아쥐고 분칠을 하얗게 한 미녀가 만면에 미소를 띠며 정생을 맞이했다. 이게 대체 웬일인가? 정생은 뭔가 잘못된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그래도 침착함을 잃지 않고 입을 열었다.

“험! 지나가던 과객인데, 산속에서 길을 잃어 하룻밤 유숙할까 들렀소. 이 몸은 양줏골의…”

그러자 미녀의 눈이 순간적으로 동그랗게 커졌다.


신분을 숨긴 남루한 차림의 어사(영화 〈방자전〉, 2010)



“아니, 무슨 거렁뱅이가… 저짝으로 내려가면 민가가 있으니 그리로 가시오. 난 또 사또 나리 오신 줄 알았더니… 허 참.”

정생이 그때서야 알았다. 여긴 보통 민가가 아니라 기생집-기방이었던 것이었다. 기생이 가르친 방향을 보니 여전히 불빛 하나 보이지 않는데 얼마나 걸어가야 할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곳이 기방이면 먹을 것이 있을 터였고, 자기 전대에는 돈냥도 들어있었으니 굳이 어딜 갈 필요가 있겠나 싶었다. 한창인 이십 대이다 보니 말로만 듣던 기방이 어떤 곳인지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허, 야박하기가 이를 데 없구나. 이 몸은 양줏골의 정아무개인데 이번에 열리는 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이니라. 이 늦은 시각에 어딜 가겠느냐? 이곳은 기방인 모양인데 객을 내친다니 말이 되느냐? 요기 좀 하고 눈만 붙이면 되니 하루 묵어가도록 하지.”

하면서 정생이 전대를 흔들어 돈이 있다는 것을 소리로 들려주었다. 기생의 얼굴에 살짝 미소가 떠올랐다.


과거시험(출처: 한국국학진흥원)



“과거 보러 가는 선비셨군요. 행색을 보고 미처 몰라 뵈어서 죄송합니다. 헌데 오늘 마침 현감 나리가 들르신다 하여 다른 객은 받을 수가 없습니다.”

“내 마치 없는 듯이 조용히 있을 터이니 일단 요기만 좀 하게 해주게.”

때를 맞춰 정생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니 기생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렇게 사정을 한 덕분에 봉놋방에 자리를 잡고 요기를 할 수 있었다. 배가 부르고 나자 문득 현감이 괘씸하게 여겨졌다. 고을의 현감은 관내의 기생에게 수청을 받을 수가 없는 것이 국법인데 감히 기생과 놀아나다니 있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런 산속에 별장처럼 집을 지어놓은 것도 세상 눈에 안 보이게 하려는 수작일 것이 분명했다.

더구나 수원 내려갈 때 이 동네에 하룻밤 머물렀을 때 환곡 문제가 보통이 아니라는 한탄을 들은 바도 있었다. 수령이 제대로 백성을 보살피고 있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밥상을 치우러 들어온 하인에게 정생이 말을 걸었다.

“잘 먹었네. 주인께 인사를 드리고 싶으니 이리 오시라 해주겠나?”

기생이 오자 정생이 가볍게 인사를 했다.

“대접이 변변치 않아 죄송합니다. 오늘 날이 날인지라 송구하게 되었습니다.”

“괜찮네. 그런데 현감이 여길 오면 관리숙창률(官吏宿娼律) 위반이 아닌가?”

관리숙창률이란 수령이 자기 관할의 기생과 동침할 수 없다는 규정이다. 기생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요, 요즘 세상에 누가 그런 걸 따집니까요?”

“누군가는 따지겠지? 이곳 사또는 진휼곡을 내놓지 않고 다 환곡으로 처리한 뒤에 포흠곡도 악착같이 긁어내고 있다고 하던데…”


환곡 등의 세금 출납을 기록한 장부, 「곡부내력(穀簿來麽)」(출처: 국립민속박물관)



가뭄이 들었을 때 구제를 위해 무상으로 내주는 쌀이 진휼곡이다. 환곡은 나중에 갚기로 하고 빌려주는 쌀이다. 하지만 가뭄이 또 들면 갚을 수가 없으니 그것을 탕감시켜 주기도 했다. 하지만 갚으라고 닦달을 해도 못 갚을 때는 포흠곡이라 하여 유예를 시켜주는데, 포흠곡은 결국은 갚아야 하는 것을 미뤄준 것뿐이라 나중에라도 내야 했다.

“그, 그런 것까지… 호, 혹시 선비님은…”

기생이 머리를 조아렸다. 정생은 호기롭게 개다리소반 위에 탁 소리를 내며 뭔가를 꺼내놓았다. 기생이 살그머니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다.

“이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이것이 바로 상감마마께서 지방 수령들을 공정하게 처리하라고 내주신 유척(鍮尺)이야.”


유척(출처: 한국국학진흥원)



물론 유척이 정생 손에 있을 리는 없었다. 정생이 호기롭게 내려놓은 것은 백부에게 받은 중화척이었다. 어쨌든 상감마마께 받은 건 맞으니까.

“그, 그럼 선비님은 아, 아, 암행어…”

“쉿! 조용히 하게.”

기생이 나지막하게 물었다.

“어사 나리, 그런데 유척이라는 건 나무가 아니라 구리로 만들어지는 거라 들었사온데…”

기생이 그런 걸 알 줄이야.

“요즘 나라 재정이 좋지 않아 특별히 나무로 만들었네. 미리 말하지만 마패는 내가 이미 감영으로 보냈으니 곧 나졸들이 올 것이야.”


마패(출처: 국립중앙박물관)



기생이 마패를 보여달랄까봐 미리 선수를 친 것이다.

“나리, 나리, 제발 저희 사또 나리를 살려주십시오. 이번 한 번만 살려주십시오. 소첩이 포흠곡은 징수치 말라 말씀 올리겠습니다.”

“네 말을 사또가 듣겠느냐?”

“그러믄입쇼. 소첩의 말이라면 한밤중에 속곳차림으로 동네 순찰을 돌라고 해도 듣습니다요!”

정생이 점잔을 빼며 말했다.

“자네 간청이 그러면 내가 며칠 고을에 머물며 지켜보겠네. 하지만 제대로 일이 처리되지 않으면 바로 암행어사 출도를 보게 될 것이야.”

기생이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잘 압니다. 잘 알고말고요. 아무 염려 마십시오.”

정생은 속으로 킥킥 웃으면서 몸을 일으켰다.

“이만 가봐야겠네. 자네와 내가 함께 있었다고 하면 사사로이 공무를 봐줬다는 소문이 날 것이니 내가 왔다는 말은 결코 해서는 안 될 것이야.”

“명심, 또 명심하겠나이다.”

*

“훈장 어르신, 이제 그만 일어나시죠?”

접장이 깨우는 소리에 정생이 눈을 떴다. 점심을 과하게 먹었는지 식곤증이 몰려와 잠을 청했다가 옛날 일이 꿈에 나온 것이다. 감히 백면서생 주제에 관직을 사칭하였으니 죽을 죄를 짓긴 했지만 덕분에 많은 백성들이 목숨을 건졌다. 정생은 모두 이 자 덕분이었다고 생각하고 대나무로 만들어진 중화척을 쓰다듬었다.




집필자 소개

이문영
이문영
역사, 추리, SF, 판타지를 넘나들며 글쓰기를 하고 있다. 소설 뿐만 아니라 인문서 쪽으로도 출간을 하고 있으며, 청소년 글쓰기 사이트 글틴의 소설게시판지기로도 활동했다. 장르소설 전문 출판사 파란미디어 편집주간으로 있으면서 여전히 활발한 창작활동을 겸하고 있다. 역사추리소설 『신라 탐정 용담』, 어린이 그림책 『색깔을 훔치는 마녀』, 역사동화 『역사 속으로 숑숑』, 어린이 인문서 『그게 정말이야?』, 역사인문서 『만들어진 한국사』를 비롯해서 MMORPG 『무혼』 등 여러 편의 게임 시나리오도 만든 바 있다.
“권문해, 굶주린 백성을 위해 동분서주”

권문해, 초간일기,
1590-01-01 ~ 1590-02-02

1590년 1월 6일, 굶주린 백성들이 늘어갔다. 권문해는 굶주린 마을 사람들을 도울 방도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 했다. 그리고 결국 직접 백성들을 찾아다니며 곡식을 나누어 구휼하기 시작했다. 대구 달성지역의 하빈(河濱)의 동면, 북면, 서면의 각 마을로 향하여 분진(分賑)하였다. 아침부터 시작된 구휼은 밤이 깊어가도록 이어졌다. 권문해는 밤이 깊어지자 관아로 돌아오지 못하고 윤효언(尹孝彦)의 집을 찾았다. 다음날도 분진은 계속되었다. 하빈현의 동면과 북면 서면에 이어 남면의 구휼이 시작되었다. 남면의 사람들도 굶주린 이들이 마을의 정자 앞에서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오전부터 시작한 분진은 오후 1시 되어서 끝이 났다. 이어 신서촌(身西村) 성당리(聖堂里)로 향하였다. 1월 6일부터 시작된 구휼은 사흘간 계속되었다. 1월 9일, 마지막으로 임암현(立岩縣), 내역리(內驛里), 검정리(檢丁里), 해안현(解顔縣)의 동촌리, 상향리, 서부리의 마을까지 모두 분진을 하였다. 사흘간 계속되는 분진이지만 여전히 굶주린 백성들이 이어졌다. 권문해는 한 달이 지난 2월 2일에도 읍내의 마을을 순회하며 백성들에게 쌀과 소금, 간장을 나누어 주었다.

“똑 부러지는 수령의 살림살이로 벌꿀이 넘치는 관고(官庫)”

김령, 계암일록, 1616-07-13 ~

1616년 7월, 안동부사(安東府使) 박동선(朴東善)이 판관 임희지(任羲之)의 탐욕과 포악함을 다스리지 못하여 관고(官庫)가 점점 탕진되고 있었다. 박동선은 장자의 기량이 있긴 했지만, 한스럽게도 재주도 없고, 염치도 모자랐다.

반면 예안현 수령 이계지(李繼祉)는 청렴하고 근실하며, 성정이 곧아서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자였다. 관내의 창고에는 물품이 가득하여 쓰고도 남아돌았다. 옛날에는 관아에서 사용하는 벌꿀이 매번 부족해서, 다음해의 공납을 미리 거두었으며, 소금과 장은 중들에게서 지나치게 취하였고, 관아의 창고에 곡식이 모자라거나 떨어지면 또 백성들로부터 거두었다.

그러나 이계지가 고을을 다스린 이후로는, 갈무리해놓은 벌꿀이 넉넉하고 풍족해서 매년 묵히고 있다. 오래된 벌꿀만 쓰고, 지난해 받은 것은 저장해 두고 열지도 않았다. 장독이 많아 스무 개 남짓에 이르고, 관아의 급료도 여유가 있었다. 수십 년 이래 최고의 수령이라고 할 수 있다.

“목숨을 건 상소를 올린 용안현감 이정”

최흥원, 역중일기, 1759-09-06 ~

1759년 9월 6일. 오늘 이평중이 최흥원을 찾아왔다. 그는 품속에서 상소문 한편을 꺼내었는데, 매우 놀라운 소식을 함께 전해주었다. 용안현의 현감인 이정이란 사람이 동궁마마에게 상소를 올리려 하였는데, 승정원에서 이를 제지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이정이란 사람이 자신의 목에 칼을 찔러 자결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상소가 장안의 화제가 되었는데, 지금 자신이 그 상소문을 가져온 것이라고 하였다.

최흥원은 소식을 듣고 몹시 놀랐다. 그리고 상소문의 내용을 살펴보았는데, 역시 나라를 근심하는 벼슬아치의 심정이 매우 간절히 녹아 있었다. 최흥원처럼 관직을 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있는 선비가 감히 그 내용을 뭐라고 평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그는 소감을 묻는 이평중의 질문에, 감히 내가 뭐라 평할 수 없는 글이라고 답하였다.

이평중이 돌아간 후, 최흥원은 홀로 생각에 잠겼다. 예전부터 도끼를 들고 상소를 한다든지, 자신의 목숨을 걸고 바른말을 한다는 고사를 여럿 들어보았지만, 실제로 상소가 막히자 자신의 목에 칼을 찔러 자결하였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비록 그의 죽음이 크게 논란이 되지 못하였으나, 참으로 사람에게 놀랍고 두려운 마음이 들게 하는 것이었다. 아직까지 우리 조선에 이런 관료가 있는가……. 최흥원은 어렴풋한 희망을 느꼈다. 동시에, 자신은 나라를 위해 그리할 수 있는지를 반문하며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헤아리기 어려울만큼의 선정을 베푼 고을수령, 떠날 때 백성들이 눈물로 길을 막다”

서찬규, 임재일기, 1852-02-22

1852년 2월 22일, 홍직필 선생의 사위인 진사 민경호가 선생을 모시고 앉았다. 오곡 어른의 정치력 이야기가 나오자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그의 재량을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실은 헤아리기 어려운 바가 있다. 이 읍에 거주할 때에 어떠한 덕정(徳政)을 행하여 백성에게 이러한 믿음을 얻어서 떠난 뒤에 생각함이 더욱 간절하며, 시흥(始興)으로 옮길 때 과천(果川) 백성들이 길을 막고 눈물을 흘리기를 갓난아기를 잃은 것 같이하니, 과연 그가 백성에게 선정(善政)이 있었는가. 내가 평소에 그의 삼가고 성실함을 허여하였을 뿐인데, 지금 이와 같이 순량(循良)하게 될 줄은 생각지 못하였다.”

“사이 나쁜 사람을 무고했다가 죽도록 맞다”

노상추, 노상추일기, 1787-01-04

입직하여 무겸청에 들어간 노상추는 오늘도 조보를 펴 보았다. 조보에는 어제 별군직(別軍職) 구순(具純)과 병마절도사 조학신(曺學臣)이 곤장을 맞았다는 소식이 적혀 있었다. 임금을 시위하는 사람이 사소한 잘못으로 곤장을 맞는 일은 왕왕 있었기에 별 큰일인가 싶었는데, 죄목이 무고인데다가 이번에는 유배까지 가게 되었다고 적혀 있었다. 구순은 같은 별군직에 있는 이윤빈(李潤彬)과 평소에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지난번 세자의 상을 치를 때 이윤빈의 부친인 이방일이 자기 집 공사를 한 일로 문초를 받을 때 그 기회를 타서 이윤빈 역시 공사를 했다고 무고를 한 것이었다. 또한 뇌물 문제까지 함께 거론하였다.

하지만 조사 결과 이윤빈이 자기 집 공사를 한 일이나 뇌물을 받은 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이에 왕은 이윤빈을 무고한 구순을 잡아들여 남을 함정에 빠뜨린 죄를 다스리기로 했다. 특히 자신의 신변을 늘 지키고 있는 무관으로서 모범을 보이지 않고 사특한 마음을 품었다는 것이 왕이 더욱 분노한 이유 중 하나였다. 왕은 구순을 죽도록 때리라고 명하고는 죽지 않으면 제주목에 정배하라고 하였다. 왕의 분노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왕은 자신의 휘하 군관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병마절도사 조학신이 곡식만 축낸다고 비난하며 마찬가지로 곤장을 때리고 먼 곳에 유배를 보내도록 했다. 구순과 조학신의 일은 무고에 대한 왕의 강력한 경고였다. 병마절도사까지 처분을 받게 된 살벌한 상황에 노상추 역시 간담이 서늘해졌다.

“담배피우며 시강하다가 귀양 간 시관”

노상추, 노상추일기, 1792-02-18

학례강(學禮講) 시관이 귀양을 갔다. 시강을 할 때 생도들 앞에서 몸을 비스듬히 하고 앉아 관을 비뚤게 쓰고 담배까지 피웠으며 잡스러운 농담도 툭툭 던져댔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왕의 귀에도 들어갔다. 왕은 한심해하며 시관 모두를 먼 지방으로 귀양을 보내게 하였다. 또 이런 풍조를 알면서도 감찰해내지 못한 감찰, 사관, 승문원·성균관·교서관의 여러 관원들도 잡아들여 신문하며 혼을 냈다. 당연히 이들 기관의 책임자인 대사성도 불려가 곤욕을 치렀다. 성균관의 재임(齋任)과 동재(東齋)·서재(西齋)의 반수(班首) 역시 모두 그 직무를 정지시켰고, 공무를 집행한 관리들도 추고 당했다. 미리 경계하지 못하고 왕의 귀에 들어 갈까봐 쉬쉬하며 서로 입을 다물고 있었던 죄 때문이었다. 이런 한심스러운 일이 있었음을 노상추는 조보를 읽고 알았다. 마침 생원시가 있는 날이었는데, 아마도 더욱 엄정한 분위기에서 치러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벌벌 떨면서 시험을 보겠구먼! 하며 노상추는 담뱃대에 불을 붙여 일부러 비뚜름하게 물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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