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본문 바로가기

정생의 일기

정생의 풍수일기

오 진사네 아들 오명하가 살 집을 짓게 되었다. 이미 장가는 든 지는 이미 여섯 해가 넘었다. 이제 나이가 서른이 넘었고 아이들도 벌써 다섯 살, 세 살로 누나와 남동생이 있었으니 처가에서 식구들을 데리고 나와 독립할 때가 되기도 했고, 당당히 출사하여 춘추관의 한림이기도 하니 가장으로 집을 마련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안동에서 터를 보러 유명한 풍수가 올라왔다. 안동에 있는 오 진사의 사촌이 특별히 행하를 넉넉히 주고 하인까지 딸려서 보내준 사람이었다.

허관이라는 이름의 풍수는 패철(佩鐵)을 쥐고 오 진사네 땅을 두루 살펴본 끝에 산자락 밑의 남향 터를 명당이라고 골라주었다.


패철(출처: 서울대학교박물관)



새집을 짓는다고는 하지만 집을 지을 목재를 갑자기 찾기란 어려운 일이고 큰 나무를 가져오려면 가격도 만만치 않기 때문에 예전에 폐가가 된 이웃집을 헐어서 쓸 만한 나무 기둥과 서까래, 대들보를 모두 옮기기로 했다

“그 폐가를 헐기로 했다고? 빈집이라면 그 달아난 이가네 집이나 윤가네 집도 있지 않던가?”

정생이 마뜩찮은 표정으로 접장에게 말했다. 접장이 퀭한 눈을 들어 정생을 보다가 눈을 비비며 말했다. 벌써 밤이 꽤 깊었는데 일을 시키고 있는 정생에 대한 원망이 살짝 비치는 것 같았다.

정생이 배 정승 댁에서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을 빌려왔는데 빨리 필사하고 돌려줘야 한다고 접장을 불렀던 것이다. 정생과 접장 둘이서 나눠서 필사를 하는 중이었는데, 달랑 등잔불 하나만 켜놓고 빽빽한 책을 필사하고 있으려니 접장은 눈이 아파 죽을 지경이었다.


등잔(출처: 국립중앙박물관)



“그러게요. 그런데 허 풍수가 그 집 목재가 단단하다고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그 집에 사람이 안 산 지 벌써 오래되었는데도 나무들이 멀쩡하다니 그거 참 신기한 일이네. 설마 기둥이 꼼짝도 안 한다든가 하는 건 아니었겠지?”

“그럴 리가 있겠어요? 무슨 귀신 들린 것도 아니고.”

“귀신이라…자네, 그거 모르나? 그 집 별칭이 귀신 집이야.”

“네에? 귀신 집이요?”

“흠, 오래 된 일이라 자네는 모르는가 보군.”

접장은 원래 양주 출신이 아니라 옆 동네인 고양에서 컸다. 그러니 오래 된 마을 일은 모를 수도 있긴 했다.

“그러니까 나도 어릴 때 들었던 이야기지. 그 집에는 다섯 식구가 살았었다고 해. 할머니와 아들 부부, 그리고 손자, 손녀. 그런데 어느 날 할머니가 갑자기 안 보이게 되었다지. 소문이 여러 가지였어. 시어머니가 미웠던 며느리가 우물에 밀어 넣었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그런 흉흉한 소문이 나니까 이웃들도 그 집에 가기를 꺼려했어. 시체가 들어있는 우물물로 밥 해먹고 싶은 사람은 없는 법이니까.”

“으… 정말 할머니가 우물 속에 빠져 죽은 거예요?”

“들어봐. 할머니가 없어진 후로 그 집에선 이상한 소리가 들리곤 했대. 색색거리는 숨소리 같기도 하고, 흑흑 숨죽여 흐느끼는 것 같기도 한 소리가. 용하다는 스님을 불러 반야심경 독경도 하고, 신통하다는 무당 불러다 해원 굿도 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대.”


무당의 굿(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어째 무시무시합니다.”

“뭘 해도 안 되자 아들은 별채를 짓기 시작했어. 그 집이 언덕 아래서 보면 별채는 안 보여. 본채 뒤편에 지은 거라서. 아들은 혼자 아름드리나무를 베어 와서 예쁜 별채를 지었지.”

“본채는 무서우니까 별채서 살려고 한 건가요?”

“그런 것 같아. 그런데 별채를 지은 걸 축하하러 간 사람들이 이상한 걸 알게 된 거야.”

긴장한 접장이 침을 꼴깍 삼키며 물었다.

“뭔가요?”

“그 집 남매가 안 보이더라는 거지. 남매가 어디 갔느냐고 물어보니까 우물쭈물 대답을 못하다가 친척 집에 보냈다고 둘러댔다는 거야.”

접장이 고개를 흔들었다.

“설마요. 친척 집에 보냈겠죠. 자기 자식들을 해코지 하진 않잖아요? 설마 친자식이 아니었나요?”

“당연히 친자식이었지. 그런데 그 후 며칠 동안 아무 기척이 없어서 사람들이 어느 날 그 집을 찾아가봤더니…”

“가봤더니요?”

정생이 잠시 뜸을 들이더니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말했다.

“아무도 없더래. 방금까지 사람이 살았던 것 같은 흔적만 남고 아무도 없었다는 거지. 그렇게 해서 폐가가 된 거야. 우리 어릴 때 개구쟁이 녀석 하나가 담력을 시험한다고 그 집에 가서 잔 적이 있었는데, 한밤중에 비명을 지르며 달려갔었지.”

“왜 그랬답니까?”

“밤중에 흐느껴 우는 소리를 들었다는 거야. 도망치는데 누군가 뒷덜미를 잡는 것 같아서 너무 무서웠다고 하지. 그 후론 그 집이 있는 길은 절대로 안 가게 되었다네.”

“그게 누군가요? 설마 훈장 어르신?”

“어허, 이 사람이. 공자 가라사대 괴력난신은 논하지 않는 거라고 했네. 난 그런 건 믿지 않아.”

정생이 정색을 하자 접장이 얼른 잘못했다고 사과를 올렸다.

“당연히 나는 아니고… 배 첨지였다는 말이 있긴 하지.”

“그거 정말 으스스한데요. 그런 집 목재를 가져다 써도 되는 걸까요?”

“글쎄, 유명하다는 풍수가 괜찮다고 했으니까 가져다 쓰는 거 아닐까?”

정생의 생각이 맞았다. 허 풍수는 귀신 집이라는 말을 듣고 코웃음을 치면서 그건 그 집의 풍수가 잘못 된 탓일 뿐, 목재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빨리 집을 허물어야 귀신이 머물 곳이 없어져 마을에도 복이 된다고 하니 모두들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풍수서(風水書)』(출처: 국립민속박물관)



“그런데 집 주인은 따로 있었던 건데, 오 진사 나리라고 해서 막 허물어도 괜찮은 건가요?”

“괜찮고말고. 그 집 사람들이 없어진 다음에 오 진사네가 그 집 땅을 다 사들였지. 그 집안 친척들도 그 집이라면 고개를 흔들었으니까 아주 헐값에 사들인 걸로 아네.”

접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였군요. 왜 사람 무섭게 그런 이야기를 하신 거예요?”

“글쎄. 귀신 집 이야기하니까 문득 생각이 난 것뿐일세. 사실 그 집은 환곡을 못 갚아서 야반도주 한 거라는 말도 있고 역병이 돌 때 아이들이 죽는 바람에 상심한 부부가 집을 버려둔 채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떠난 거라는 이야기도 있긴 하네.”

“그건 또 그것대로 슬픈 이야기군요. 그런데 아이들이 죽었으면 마을 사람들이 모를 리가 없지 않나요?”

“역병이 돌면 집집이 사람이 죽어나가는데 다른 집 사정까지 일일이 알 순 없지. 아무튼 내가 어릴 때 그 집 한 번 둘러보고 오기 같은 담력 시험도 하곤 했어. 그럴 때마다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는 아이들이 있었고.”

“아유, 또 무서워지네요. 아무튼 이젠 그 집은 없습니다. 벌써 다 해체해버렸더라고요. 일손들이 참 빨라요.”

“아, 그래? 자네 손도 좀 빨랐으면 좋겠구만.”

“제 손이 빨라지려면 초를 하나 더 켜주시면 됩니다만…”

정생은 그 말은 못 들은 척 다른 말을 했다.

“다 해체했다는 건 나무 기둥감을 다 가져갔다는 이야기겠지?”

“네, 아까 해 질 녘에 오다가 봤는데, 언덕 위로 아무것도 안 남았더라고요.”

정생의 눈이 왠지 모르게 반짝였다.

“그렇군. 오늘 필사는 마치도록 하지. 자네 눈을 보니까 이제 옮겨 쓰다가 잘못 쓸 일만 남은 것 같아. 나머지는 내일 마저 하지.”

“네? 네.”

접장이 보기엔 내일 종일해도 필사를 마칠 수는 없을 것 같았지만, 당장 눈앞의 화를 모면할 수 있는데 굳이 이의를 제기할 필요는 없었다. 접장은 얼른 정리를 마치고 정생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부리나케 내빼버렸다.

정생은 접장이 대문을 나서는 걸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등롱을 챙겨서 문간방에서 자는 마당쇠도 모르게 살그머니 집을 나섰다. 다행히 날이 맑아 달빛이 아주 어둡지는 않았다. 정생은 귀신 집, 아니 귀신 집터에 도착한 뒤에야 등롱에 불을 붙이려고 했다. 그런데 아뿔싸, 부시를 챙겨오는 걸 깜빡했다.

정생은 이마를 툭툭 치며 자책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필요도 없어진 등롱(燈籠)은 옆으로 밀쳐놓고 집터를 가로 질렀다. 정생은 별채 자리 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섰다.


등롱(출처: 국립중앙박물관)



“그러니까 여기가 가운데면 저쪽일 텐데…”

정생이 귀퉁이를 바라보는데 갑자기 날이 어두워졌다. 조금 전까지 맑았던 날씨가 돌변해서 먹구름이 밀려들더니 달빛을 완전히 가려버렸다.

“아, 이것 참.”

그래도 그 전에 위치는 대충 확인했다. 정생은 별채 귀퉁이 자리로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겼다. 별채의 오른쪽 귀퉁이 주춧돌은 어느 절터의 석등 받침돌을 집어온 것인지, 연꽃잎 조각이 새겨진 아름다운 돌이었다. 그래서 아이들 사이에서는 그 돌 아래 숨겨놓은 보물이 있다는 말이 무성했다. 유리왕이 기둥 아래서 동명성왕의 보검을 찾은 것처럼 그 안에 뭔가 있을 거라는 이야기였다.

물론 정생이 그런 황당한 이야기를 믿은 건 아니었다. 주춧돌 아래 보물이 있다면 그 집 사람들이 그렇게 사라질 리가 없을 테니까. 정생은 그 주춧돌이 탐이 나서 몰래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분명 신라 시대나 고려 시대의 절터에 있던 물건일 것이다.

집은 다 해체했으니 그 주춧돌을 챙겨간다고 해도 상관없을 것이다. 그래도 밝은 낮에 와서 가져갈 수는 없으니 한밤중에 몰래 올 수밖에 없었다.

“여기, 어디 있을 텐데. 있어야 하는데…”

정생은 주춧돌이 있음직한 곳을 무릎걸음으로 옮겨가면서 손으로 더듬었다. 그러다 갑자기 허방이 나타나는 바람에 그 안으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사, 사람 살려!”

정생이 떨어진 구덩이는 그리 크진 않았다. 크지 않은 게 또 좋지도 않았던 것이 발목을 심하게 접질렀는데, 부러진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팠다. 정생은 몸 반절은 구덩이 밖에 있다는 걸 알고서야 간신히 그 안에서 빠져나왔다. 그때 발아래서 뭔가가 팍삭 소리를 내는 걸 들었다.

뭔가가 있기는 있는가 싶었다. 설마 전설의 보물인가 하는 생각도 같이 떠올랐다. 정생은 엎드려서 손을 집어넣어 구덩이 안에 있는 걸 꺼내 올렸다. 손가락에 간신히 걸려서 잡아 올렸는데, 가벼운 것이어서 보물일 리는 없는 것 같았다. 옛날 도자기 같은 것인지 뭔가 둥근 형태라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이리저리 만져보는데 번쩍 벼락이 쳤다. 그 빛에 손에 들고 있는 게 뭔지 보였다. 정생은 비명을 지르며 그것을 내던지고 말았다. 해골바가지가 데굴데굴 굴러갔다.


해골조각상(출처: 국립민속박물관)



기절해 있던 정생은 다음날 그곳을 지나가던 접장이 귀신 나온다는 집터는 어찌 생겼나 궁금해서 올라온 바람에 다행히 발견되었다. 밤새 내린 비에 홀딱 젖어서 심하게 고뿔이 걸린 것 말고 다른 탈은 나지 않았지만 접장이 흔들어 깨웠을 때는 완전 혼이 나간 사람 같았다.

“기둥 아래 아이를 묻었어! 기둥 아래 아이를 묻었다고!”

고려 때 무신정권의 최충헌이 십자각이라는 별당을 지었는데, 이때 사내아이와 계집아이를 잡아다가 색동저고리를 입혀 네 모퉁이에 묻어 액운을 방지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하필 정생이 『고려사』에서 필사를 하고 있던 부분이 바로 그 「최충헌 열전」이었다. 그러니 그가 기절초풍할 수밖에.


『고려사』, 「최충헌 열전」(출처: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오 진사네 일꾼들은 집안 목재를 다 옮긴 뒤에, 정생이 노렸던 예쁜 주춧돌도 챙겨갔다. 집터를 살펴본 허 풍수도 그 주춧돌에 눈독을 들였었다. 때문에 허 풍수가 특별히 그 주춧돌을 가져오라고 명을 내려놨던 터였다. 일꾼들은 주춧돌 아래 구덩이가 있는 건 알았지만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빈집이었으니 너구리나 여우가 굴을 팠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어차피 집도 허물고 남은 것도 없는데 구덩이가 있거나 말거나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그 구덩이는 여우가 파놓았던 것이다. 여우는 그 근방에 일찌감치 자리를 잡고 있다가 사람들이 없어지자 얼른 들어와 집을 차지해버렸다. 여우는 본래 온갖 소리를 다 낼 줄 알아서 여우에 홀렸다는 말까지 있는 요물이다. 사람들이 귀신 소리라 여겼던 것은 여우가 낸 소리였다.

정생이 집어 들었다가 기겁을 하고 내던진 해골은 사람 해골이 아니라 여우 해골이었다. 수구초심이라고 하더니 자기 굴 안에서 죽었던 모양이었다.

“에추! 이 이야긴 절대 밖에 하지 말게.”

정생이 재채기를 하며 접장의 손을 잡고 부탁했다. 접장이 약간 거드름을 피며 말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고뿔이 드셨으니 서당은 제게 맡기고 필사만 하면서 몸조리 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저는 고뿔 옮으면 안 되니까 서당에 있다가 돌아가겠습니다.”

“그, 그, 그…”

정생은 그러면 안 된다는 말을 끝내 꺼내지 못하고 손짓만 해서 접장을 내보냈다. 속이 쓰려도 이번에는 방법이 없었다. 정생은 이불을 뒤집어쓰며 투덜댔다.

“지난번에는 산 여우한테 희롱을 당하더니, 이번엔 죽은 여우한테 희롱을 당했구나. 풍수가 어쩌고 저째? 다 허풍이었… 에, 에취!”

정생의 기침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집 앞을 지나던 나그네까지 깜짝 놀랐다고 한다.




집필자 소개

이문영
이문영
역사, 추리, SF, 판타지를 넘나들며 글쓰기를 하고 있다. 소설 뿐만 아니라 인문서 쪽으로도 출간을 하고 있으며, 청소년 글쓰기 사이트 글틴의 소설게시판지기로도 활동했다. 장르소설 전문 출판사 파란미디어 편집주간으로 있으면서 여전히 활발한 창작활동을 겸하고 있다. 역사추리소설 『신라 탐정 용담』, 어린이 그림책 『색깔을 훔치는 마녀』, 역사동화 『역사 속으로 숑숑』, 어린이 인문서 『그게 정말이야?』, 역사인문서 『만들어진 한국사』를 비롯해서 MMORPG 『무혼』 등 여러 편의 게임 시나리오도 만든 바 있다.
“동생과 함께 옛 터에 집을 짓다”

노상추, 노상추일기,
1774-01-10 ~ 1774-03-03

노상추와 동생 노억(盧檍)은 새해부터 새집을 짓느라 분주했다. 두 형제가 집을 한꺼번에 지으니 신경 쓸 일도 많고 돈이 한꺼번에 나가게 되어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옛집의 자재를 재활용하는 데에는 한 번에 두 채를 새로 짓는 것이 더 합리적이었다. 노억은 집터를 월판(越阪)에 잡았다고 알려왔고, 노상추는 남자종 일만(日萬)을 점쟁이에게 보내 공사를 시작할 길일을 잡아 오게 시켰다. 점쟁이는 1월 15일이 터를 닦는 데 길하고, 18일이 대들보를 올릴만한 날이라고 점지하였다.

그래서 터를 닦기 전에 먼저 자재부터 준비하기로 했다. 1월 13일에 노상추는 남자종들에게 종기(宗基)에 있는 옛집과 도개(桃開)에 있는 옛집을 헐게 했다. 종기 집에서 나온 목재로는 노상추의 집 곁채를 지을 것이고, 도개에서 나온 자재로는 노억의 집을 지을 예정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에는 공사를 전체적으로 책임질 사람을 정하였는데, 송만(宋萬)이 노상추의 집을, 일돌(日乭)이 노억의 집을 짓게 되었다.

마침내 공사가 시작된 1월 15일, 노억은 남동쪽을 향한 방향으로 집터를 정하고, 터를 닦기 시작했다. 이전에 이곳에 세워져 있던 집은 주춧돌의 방향으로 짐작건대 정남향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다음날에는 노상추도 자기 집의 터를 닦았다. 노상추가 새집을 짓기 시작한 터는 긴 사연이 있는 곳이었다.

노상추의 조부인 노계정(盧啓禎)이 자신의 부모가 돌아가신 뒤 옛집을 헐값에 팔고, 이곳에 있던 초가삼간을 사서 5~6년간 살다가 1725년에 과거시험에 합격하였다. 노계정은 이후 위원(渭原) 군수를 하면서 1737년에 이 자리에 큰 집을 지었고, 그로부터 약 20여 년 후인 1759년에 제사를 지낼 때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큰 집을 헐었다. 그래서 이 터가 공터로 남아 있게 되었으며, 이번에 노상추가 이곳에 다시 거처를 지으려 계획한 것이다.

점지를 받아 놓은 날인 1월 18일에는 차질 없이 노억의 집 대들보가 올라갔다. 노상추도 이틀 후에 기둥을 세우고 들보를 올렸다. 이제 뼈대 공사는 끝났으니 흙을 바르고 기와를 올릴 차례였다. 노상추는 기동(耆洞)의 토공(土工) 정발(鄭發)을 불러와 노상추와 노억의 집 벽과 천장에 흙을 바르게 했다. 흙을 바르고 기와를 이는 작업은 비가 오는 날을 피해서 하다 보니 거의 한 달이 넘게 걸렸다. 집안의 여러 문과 기물을 만드는 목수를 불러온 것은 3월이 되어서였다. 아직도 집이 완성되려면 여러 날을 기다려야 했다.

“기울어 넘어질 것 같은 행랑채를 수리하다”

남붕, 해주일록,
1926-04-23 ~ 1926-04-27

1926년 4월 23일. 남붕은 며칠 전 방구들을 새로 놓는 공사를 하였는데, 이참에 미루었던 집수리를 더 하기로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쓰러질 듯 기울어 있는 행랑채를 수리하기로 했는데, 일이 시작되기 전에 일해 줄 사람과 몇 가지 정해야 할 일이 있어 종일 기다렸다.

다행히 저녁이 다 되어 정 목수가 찾아왔다. 남붕은 정 목수와 공사를 해야 할 행랑채를 살피며 어느 정도 공사를 해야 할지와 치러야 할 비용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합의를 본 후 내일부터 일을 시작하기로 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정목수는 일꾼들을 데리고 남붕의 집으로 와서 집을 고치기 시작했다. 남붕은 그들이 하는 일을 살펴보며 필요할 때마다 일손을 보탰다. 행랑채 공사는 작은 일이 아니었다. 앞 행랑채 4칸이 기울어 넘어져 가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바로 세우려면 기둥부터 새로 세워야 했기 때문이다. 정 목수는 일꾼들과 함께 다 썩은 긴 기둥 10개를 모두 잘라내고 주춧돌 위에 큰 돌을 얹어놓아 튼튼하게 하였다.

1926년 4월 27일 아침을 먹은 후에 정 목수가 돌아가면서 그날 일한 값을 달라고 했다. 남붕은 지난번에 2원을 주었고 이날도 2원을 지급했는데, 정 목수는 8원을 달라고 청하였다. 남붕은 아직 일을 다 마치지 않았으므로 일이 끝나면 나머지 돈을 주겠다고 했다. 정 목수가 일을 잘하고 있긴 했지만, 이런 공사라는 게 일이 다 끝나기 전에 돈을 미리 주는 법은 없었기 때문이다.

“짐승의 털을 넣은 방석을 만들게 하다”

방석(출처: 국립민속박물관) 남붕, 해주일록, 1926-06-21

1926년 6월 21일, 남붕은 언제나 그렇듯이 새벽에 일어나 치성을 드리고 책을 읽고 어머님께 문안을 드리고 사당에 배알을 했다.

날이 어찌나 더운지 밤잠도 설쳤고, 아침부터 땀이 흘렀다. 입맛도 떨어져 겨우 아침을 몇 술 뜬 후 남붕은 아이들을 불렀다. 방에서 사용할 커다란 방석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자루 모양으로 만든 안감 안에는 틈틈이 준비해 다락에 두었던 짐승의 털을 꺼내 잘 펴 넣었고, 겉감은 푸른 베를 준비해 앉거나 눕기에 적당한 크기로 만들게 했다. 잠자리라도 편하면 잠을 설치는 일이 덜할듯해서 시킨 것인데, 아이들도 땀을 뚝뚝 흘리며 바느질을 했다.

남붕은 아이들을 보며 아내 생각이 났다. 아내가 살아 있었다면 미리 살피고 마련해 주었을텐데 이토록 아내의 빈자리가 크다는 것을 갈수록 더 크게 느끼게 되었다.

잠시 지켜보던 남붕은 아무래도 오늘 안에 만들기는 어려울 듯하여 천천히 만들라 이르고 논과 밭을 살펴보기 위해 집을 나섰다.

“종이를 보관할 지통을 만들다”

권별, 죽소부군일기,
1626-08-26 ~ 1626-08-30

1626년 8월 26일, 을축. 맑음. 권별은 용문에 가서 지통(紙桶)을 만들 판자 11립(立)을 떠왔다. 능내 형님이 도촌에 왔기에 가서 그를 만나보았다.

1626년 8월 30일, 기사. 맑음. 초간에 갔다. 새로 지통을 만들었다. 박 좌수 형님이 오셨다. 이술·이망도 왔다.

“불난 집에서 지붕 없이 지내다”

노상추, 노상추일기,
1772-05-14 ~ 1772-06-03

사랑에 앉아 식사를 기다리고 있던 노상추는 벌떡 일어났다. 타는 냄새가 진동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부엌에서 음식을 잘못해서 태우는가 싶었는데, 그 정도 냄새가 아니었다. 창문을 여니 사람들이 불을 끄러 다니느라 분주했다. 노상추는 일단 중요한 문서들과 아이들을 챙겨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다행히 곧 불길이 잡혔고, 노상추와 가족들이 기거하는 건물에는 불이 옮겨붙지 않았다. 하지만 부엌과 연결된 행랑 10여 칸이 다 타버렸다. 이엉을 이어놓은 지붕은 모조리 다 무너져 내렸고, 행랑채 뼈대만 앙상하게 남았다.

노비들이 기거하는 행랑채에 지붕이 없으니 사람이 살 만한 모습이 아니었다. 빨리 새로 지붕을 얹어야 하는데 5월이라 지붕을 덮을 짚이 있을 시기가 아니었다. 마구간 지붕도 모두 타버렸기 때문에 말들은 비가 내려도 비를 피할 수가 없었다. 노상추는 궁리 끝에 차라리 이번에 화재에 강한 기와와 벽돌로 집을 짓기로 했다. 노상추의 옛집 한편에는 오래된 기와가 쌓여 있었는데, 이 기와는 20년 전에 불이 났을 때 역촌(驛村)에서 사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이후로 집안에 초상이 계속 났고, 기와를 얹을 엄두를 못 내서 그저 쌓아두기만 했었다.

일단은 지붕을 무엇으로든 덮어 비바람을 막기는 해야 했다. 노비들의 원성이 자자했기 때문이었다. 노상추는 관아에다가 불에 탄 건물이 수십 칸이라는 내용의 문서를 제출하여 곡식을 담는 데 쓰는 빈 섬 300닢(立)을 내려달라고 청하였다. 일단 이것도 짚은 짚이고, 다행히 여름이니만큼 바람만이라도 임시로 막아두자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관아에서는 고작 15닢을 내려줄 뿐이어서 노상추는 해도 해도 너무한 수령의 처사에 분통을 터뜨렸다. 얼마 전 새집을 짓는 사람은 화재를 당하지도 않았는데 관아에서 빈 섬 300닢을 얻어갔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기에 더욱 화가 났다.

노상추가 화를 내 봤자 관아에서 빈 섬을 더 내려줄 것도 아니었다. 일단 노상추는 집으로 돌아가 집을 짓는 데 쓸 못 등을 만들 야장(冶匠)과 기와를 만들 목수 신덕기(申德器)를 불러왔다. 엿새 만에 기와를 모두 만든 신덕기에게 노상추는 100동(銅)을 주었다. 기와를 이을 개장(盖匠) 소통(小通)은 벽돌이 운반되기 전에 도착하여 일을 바로 시작할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역촌에 있는 기와와 벽돌을 옮겨오게 하고 싶었으나, 당장 급한 일은 지붕보다는 모내기였다.

닷새 후에 드디어 모내기까지 일단락되자 노상추는 동군(洞軍)들에게 역촌의 기와를 옮겨오게 하고, 일단 돌아갔던 개장 소통을 불렀다. 소통은 다음 날 노상추의 집으로 와서 바로 기와 얹는 일을 시작했다. 기와를 얹는 일도 하루 이틀 만에 되는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날씨도 도와줘야 했다. 날이 맑으면 작업이 수월하지만, 비라도 내리면 전혀 작업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노상추의 노비들은 불이 난 이래로 거의 한 달 가까이 지붕 없는 집에서 매일 지내야 했다.

닫기
닫기
관련목록
시기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장소 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