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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이슈-저자 인터뷰

박영서,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시시콜콜한 오늘의 삶은 일기가 되고, 그 일기로 쌓아올린 삶은 역사가 된다!”
조선시대 선인들이 날마다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을 기록한 일기를
현재의 우리에게 소개해준 박영서 작가님과의 인터뷰, 지금 시작합니다.



1.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을 저술하게 된 계기와 스토리테마파크 사이트를 알게 된 경로가 궁금합니다.


저는 선배 세대분들처럼 성실히 도서관을 다니면서 자료를 찾는 타입이 아니었어요. 온종일 방 안에만 있는 게으름 덩어리라, 인터넷으로 거의 모든 자료를 찾거든요.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을 쓸 때 전산화된 다양한 한글 편지 자료를 접했듯, 일기 자료 또한 원문과 번역문이 수록된 데이터베이스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고, 한국국학진흥원 홈페이지를 뒤지다가 스토리테마파크를 발견할 수 있었어요. 그때의 기분은 마치, “심봤다!”를 외치는 심마니나 “유레카!”를 외친 아르키메데스랄까요. 제가 딱 원하던 자료가 있어서 너무나 기뻤고, 한편으로는 이 사이트를 구축하셨던 많은 분들의 노고가 구석구석 보여서 감사한 마음이었습니다.


2. 방대한 선인들의 일기를 대상으로 책을 집필하면서 에피소드 선별에 주안점을 둔 부분이 있었나요? 그리고 조선시대 선인의 일상이 기록된 여러 일기 자료 중, 가장 인상 깊은 기록과 그 이유를 말씀해주세요.


저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멀리서 볼 땐 비슷비슷하고, 가까이서 볼 땐 총천연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상의 한 사람이 맞이하는 생애주기를 나눠서 각 장의 주제를 잡고, 주제에 맞는 일기를 얽는 형식으로 구성했습니다. 책에 등장하는 8명 이상의 삶을 통해 조선 사회에 대한 선명도를 높이고, 책 전체로는 한 사람의 삶을 재구성하는 듯한 작업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일기 자료가 매우 많지만, 담고 있는 내용이 비슷할 때가 많아서 선별하는 작업에 애를 먹었습니다. 그래서 저자의 캐릭터가 묻어나거나, 다른 자료들을 통해 당시 사회를 풍부하게 볼 수 있는 자료를 골랐죠. 전자로는 이문건의 『묵재일기』나 오희문의 『쇄미록』이 좋았습니다. 각각 아들과 딸을 대하는 󰡐가장󰡑의 캐릭터가 극명하게 대비되었거든요. 후자로는 김령의 『계암일록』과 김광계의 『매원일기』가 적절하다고 생각했어요. 이 두 일기는 비슷한 시기, 한 집안에서 쓰인 기록이라 교차 검증이 되는 사건이 많잖아요? 한 지역의 관계망을 풍부하게 볼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습니다.


3. 옛 선인의 삶이 현재의 우리 삶과 다르지 않음을 현재의 언어(양봉 코인, 부장님, 광탈, 멘탈, 입시, 입사, 카드 값 등)로 표현해주셔서 더 와 닿았습니다. 문학적인 글쓰기에 대해 배우거나 공부하셨는지 궁금해요.


문학적인 글쓰기를 전문적으로 배우진 못했습니다. 최종적으론 조선시대 사회상을 매우 농밀하게 담아내는 소설을 쓰고 싶다는 욕심이 있긴 해요. 어쨌든, ‘양봉 코인’과 같은 단어를 쓸 땐 저도 고민이 많았는데요. ‘옛사람의 일기를 나의 일기처럼 읽을 수 있어야 공감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일반적으로 책이라는 플랫폼에 담기엔 적절하지 않은 편이니까요. 그런데 용기를 얻게 된 건 크게 두 가지 계기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스토리테마파크 덕분입니다. 하나의 일기를 ‘정확히’ 전하기보다, 그것이 콘텐츠가 될 수 있도록 각색하는 작업을 스토리테마파크가 먼저 하셨더라고요. ‘엄근진’할 것 같은 국학진흥원 마크가 딱 붙어 있는데도 이렇게 해주셨는데, 나라고 못 할 게 뭐냐, 그런 생각이 들었고요.

두 번째는, 실록을 읽다가 느꼈습니다. 배움이 짧은 저로서는, 주석이나 한자를 풀어 봐도 도저히 그 정확한 의미를 알기 힘든 용어들이 많았거든요. 일기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런데 그러한 용어들이 사료의 시대성을 담아내고 있듯, 제 책 또한 시대성을 담아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 용어를 모르시는 분들께는 독해의 장벽을 만들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 자체로 소중한 사회사가 될 수 있다고 느꼈습니다.


4. ‘부민고소금지법’, ‘서계별단’, ‘회혼례도’, ‘양안(量案)’ 등 다양한 조선시대의 제도, 문서, 회화에 대해 추가 설명을 하셨는데 주로 참고한 전거(출처)는 무엇이었나요? 특히 설명하기 까다롭고, 어려웠던 내용을 찾기 위해 노력한 일화가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기본적으론 훌륭한 연구자 선생님들의 단행본과 논문에 많이 의지했습니다. 제가 한 작업은 연구자들의 번역과 연구 결과를 버무려서 MSG를 친 정도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어떻게 전달해야 할까’를 가장 많이 고민했습니다. 특히, 학부생들이 교양 수준의 리포트를 쓰기 위해서 자료를 찾을 때 하는 고민과 비슷했어요. 위키는 신뢰할 수 없어 쓰기 힘들고, 논문은 이해하기 어려워 쓰기 힘든. 그래서 국립중앙박물관의 소장품 소개 내용을 인용하거나, 스토리테마파크의 ‘배경 이야기’ 항목을 참고하는 등, 이러한 고민을 먼저 하신 분들의 서술을 보고 많이 배웠습니다.

하지만 설명이 많아져야만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 대목이 가장 어려웠습니다. 예컨대, ‘만인소’가 있죠. 만인소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기호학파와 영남학파의 철학적 이념까지 파고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개화에 반대했던 후기 만인소까지 적절하게 설명할 수 있거든요. 그러나 그러한 부분까지는 담아내기 힘들었어요. 앞으로도 계속 맞이할 숙제죠.


5. 과거 시험장의 문화, 관료 사회의 모습,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 등의 조선시대 모습은 현대의 모습과 크게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여요. 조선시대 일기를 보면서 현재의 문화와 많이 비슷한 부분 또는 현재와 너무나 달라진 부분은 어떤 모습이 있을까요?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가 달라졌다고 생각해요. ‘국학’이라는, 이를테면 예학(禮學)이나 도학(道學)의 학문도 우리에게 있지만, 이러한 학문이 현대의 정신문화에서는 조금씩 그 자리를 내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정함, 또는 옳음에 대한 기준이 서구의 근대적 인간관에서 발달한 ‘그 무엇’에 있다고 보거든요. 그런데 그렇다고 조선시대의 사람들이 비합리적이었냐?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들도 이치를 탐구하고, 이치를 만드는 힘을 탐구했거든요. 그 이치에 합당한 사회상을 구현하고자 노력했고요. 그러나 우리의 눈에는 도저히 ‘합리적’이라고 이해하기 힘든 면들이 있죠. 예컨대, 상복을 1년 입느냐, 3년 입느냐가 정치적 논쟁의 대상이 되는 부분이랄까요.

그러나 달라지지 않은 것은, 인간의 마음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이라고 생각해요. 공자가 사람들에게서 인(仁)을 발견하고 그것을 더 좋은 공동체를 만드는 베이스로 잡았던 것, 주자가 예(禮)를 ‘더 좋은 인(仁)의 공동체’를 만드는 수단으로 삼았던 것, 그러한 포착은 과거의 인간이나 지금의 인간에게서나 똑같이 포착할 수 있다고 봅니다. 자연히,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 땅 투기를 하거나, 반대로 안타까운 타인의 사연을 듣고 기부하는 삶의 양상들은 비슷할 수밖에 없겠죠.


6. 저자소개를 통해 작가님께서 충주의 작은 사찰에서 거주하며 불교학을 전공한 이력을 알 수 있었어요. 이러한 작가님의 이력이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을 저술하시는데 영향을 미친 부분이 있을까요? 또 후속 작품으로 조선시대 불교를 소개하는 작품을 쓰실 의향은 있으신지요?


절간에서 살다 보면, 정말 가지각색의 사연을 어깨너머로 접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 불가의 언어로 표현하면, 고해(苦海)를 어떤 사람들은 자유영으로, 어떤 이는 배영으로, 어떤 이는 호화유람선을 타고 건너는데, 그 각양각색의 방법들이 제게는 흥미로운 주제였어요. 자연히, 같은 역사라도, 정치사보다 일상사에 보다 관심을 두게 된 것 같습니다.

예컨대, 호주제가 2007년에 폐지됐잖아요? 그런데 호주제가 담고 있는 제도적 한계 때문에 발생한 각종 안타까운 사연이 절간으로 밀려 들어왔어요. 원래 절간엔 행복한 분들보다 고통 받는 분들이 오시는 곳이니까요. 훗날, 〔한국사〕 과목에서는 ‘호주제는 2007년에 폐지되었다’라는 한 줄의 문장으로 기술되겠지만, 그 한 줄의 문장 속에 담긴 오만 개의 사연을 밝혀내는 것 또한 흥미로운 연구 주제가 되겠죠. 그래서 『일기들』은 저의 ‘절간 속의 삶’ 덕분에 맺어진 인연 같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그때 그 사람들은 어떠한 마음으로 절에 갔을까?’라는 질문을 담아내는 책을 쓰고 싶습니다. 「감로도」와 조선시대 일기 및 편지 자료를 구성해서 당시의 사회상을 조명해나가는 책이나, 또, 유생들과 승려의 기묘한 공생 관계를 야무지게 뜯어보는 책도 재밌을 것 같아요.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7. 전작으로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을 쓰셨는데, 어떤 내용인지 설명을 부탁드려요. 그리고 후속 작품으로 생각하는 조선시대 일상사의 또 다른 대상 자료가 있으신가요?


『일기들』도 제 맘대로 윤색하고 편집한 일기가 좀 많은데요. 일기보다는 편지가 조금 더 가벼운 매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은 그러한 ‘장난’을 두 배쯤 더 많이 한 책입니다. 특히, 사람들 사이의 복잡한 관계성을 더 강하게 조명했어요. ‘삼송’ 중 한 명이었던 송규렴이 노비 기축이에게 쩔쩔매는 편지나, 정약용이 아들들에게 잔소리하는 편지, 혹은 양반과 기생이 주고받았던 러브레터 등을 각색해서 수록했죠. 우리가 조선시대 사람들을 생각할 때 가지게 되는 어떠한 인식적 틀에서 벗어나, 역사가 아니라 사람으로서 그들을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일기들』의 후속 시리즈로는 『상소들』을 쓰려고 합니다. 물론, 상소에 국한하지 않고 격쟁, 민소장, 소송 문서 등을 종합적으로 인용하여, 조선시대의 법적 테두리와 사회상이 어떻게 맞물려 돌아갔는지 보고 싶거든요. 이해하기 어려운 상소 용어를 살펴볼 생각에 벌써 손발이 덜덜 떨리고 현기증이 납니다만, 꼭 쓰고 싶습니다.


8. 특별히 이 책을 권하고픈 독자는 누군가요? 일반 독자들에게 이 책이 어떻게 다가가길 바라시나요?


역사라는 주제가 저변이 점점 좁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연구자의 수도 점점 줄고 있고, 사극 또한 비중이 크게 줄었고요. 조회수가 많이 나오는 역사 유튜브 콘텐츠는 섹슈얼한 이슈를 담고 있거나 어떤 사건을 매우 비난하는 류의 자극적인 콘텐츠가 장악하고 있죠. 저 또한 학부생인데, 역사 관련 교양 과목의 비중도 점차 줄어만 가는 듯합니다.

저는 『일기들』이 역사 교양서를 단 한 번도 읽지 않은 분들께도 재미를 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썼습니다. 어쩔 수 없이 한계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만, 서사를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꽤 재밌게 읽으실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해요. 그래서 제 책이 ‘역사 입덕 포인트’가 된다면, 그것보다 더 값진 결과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정민, 강명관, 안대회, 정창권 선생님 등의 책을 읽고 ‘입덕’했던 것처럼 말이죠.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꿈으로 공부를 완성하다”

장흥효, 경당일기,
1616-05-09 ~ 1616-05-14
1616년 5월 9일, 장흥효의 성리학 공부는 꿈속에서 완성되었다. 아무리 논어와 맹자를 들여다보아도, 이황과 김성일, 정구와 같은 선현들의 글을 들여다보아도 이해되지 못하는 부분이 있는 것은 너무 당연했다. 그는 공부하는 내내 그 문제를 궁극적으로 파헤쳐 보았지만 알 수 없는 것들이 분명히 존재했다.
문제는 선현들에게 직접 질문을 할 수 없다는 데 있었다. 이미 그들은 고인이 된지 오래되었으므로 남아 있는 선현들의 글 속에서 스스로 찾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장흥효에게는 자신만의 독특한 공부 방법이 있었다. 바로 꿈이었다.
하루는 꿈에 학봉 김성일 선생께서 나오셔서 집에서 도(道)를 강론하셨다. 이틀 뒤에는 꿈속에 한강 정구 선생님을 모시고 산에 들어가 약초를 캤다. 다음날에는 꿈속에 북송시대 유명한 유학자였던 소순이 나타나 집 근처의 상이 나서 하관하는데 호상(護喪)을 하고 있었다.
그는 연일 세 번이나 꿈속에 나타난 선현들을 보고 자신의 공부가 미진한 것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한강 정구 선생께서 몸소 약초를 캐서 자신에게 보여준 것은 장흥효 자신의 마음속 병을 고치고자 하는 선생의 깊은 마음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였다. 그래서 장흥효는 삼가 충(忠)과 서(恕) 두 글자로 마음을 치료하는 약방(藥方)으로 삼고 이 마음을 죽을 때까지 계속하면서 성현께서 타일러 주신 말씀으로 자신을 위로하였다.

“오늘 공부한 내용이 꿈에 나오다”

장흥효, 경당일기, 1617-02-20 ~

1617년 2월 20일, 장흥효는 마을 친구들과 더불어 『논어』의 이인 편을 읽고 있었다. 여기서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삼아. 나의 도는 하나의 이치로 만 가지 일을 꿰뚫고 있다”라고 하니 증자가 말하기를, “예”라고 하였다. 처음에는 하나의 도로 만 가지 일을 볼 수 있다는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는 친구들과의 『논어』 강론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잠을 청하는데 꿈에 류성룡 선생이 나타나셨다. 선생께서 당에 앉아 있는데 그는 띠와 주머니를 드리며 예를 갖추자 선생께서 앉으라고 청하셨다. 선생께서는 장흥효가 낮에 공부했던 일을 말씀하셨다. “공자께서 천하의 일을 어찌 감당하셨던가.” 장흥효가 이해하지 못했던 바로 그 내용이었다. 그러자 장흥효가 궁금했던지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하지만 선생은 대답하지 않으시고 장흥효가 생각한 바를 말하도록 했다. 그는 “하늘은 하나일 뿐인데 무슨 번거로움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선생께서는 바로 답하지 않으시고 “예전에 이(理)와 기(氣)로 나누어 말한 사람이 있었다.”고 하셨다.
장흥효는 그제야 공자가 말한 말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즉 기로 말하자면 만 가지 변화가 한결같지 않을 수 있지만 이로 말하자면 굳이 그러한 번거로움 자체가 불필요해지기 때문이다. 그는 꿈속 선생의 말씀을 통해 공자의 말의 의미를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중용혹문을 외우고 다시 중용을 외우다”

남붕, 해주일록,
1922-05-15(윤) ~ 1922-05-19

남붕은 아침마다 어머님께 문안을 드리고 사당을 배알하는 일로 하루를 시작한다. 1922년 윤5월 15일, 이날도 잠자리에서 일어나 세수를 마친 남붕은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어머님께 문안을 올리고 사당에 배알을 했다. 그리고 집을 나섰다. 오늘은 마을 안에 있는 선조의 사당에도 찾아다니며 두루 배알하였다.
집에 돌아 온 남붕은 책부터 펼쳤다. 아침에 어머님께 문안인사를 올리고 사당을 배알한 후에 책을 보면 마음이 차분해 지고 머리가 맑아 글이 더욱 잘 외워지기 때문에 이미 오래된 습관이 되었고, 게다가 아침밥을 먹기 전에 아이들이 공부를 하러 오기 때문에 이 시간은 그야말로 금쪽같은 시간이었다. 요즘 남붕은 『중용혹문中庸或問』을 외우고 있다. 이젠 꽤 많이 외웠기 때문에 며칠 내에 책을 뗄 작정으로 집중하여 외웠다.
아이들을 가르친 후 하루 일과를 마친 후엔 『심경心經』을 읽었는데 내용이 친절함을 자못 깨달았다. 밤에는 온 집안사람들을 가르치고 훈계하였다.
사흘 뒤에 드디어 『중용혹문』 외우기를 마친 남붕은 며칠 전 읽었던 『심경』이 떠올랐다. 과연 이렇게 부지런히 읽고 음미하며 체득한 학문을 한결같이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을지... 이날 밤엔 『중용』을 외우기 시작했다.
5월 19일(윤) 아침 일찍 어머님께 문안드리고 사당에 배알을 한 남붕은 전날부터 외우기 시작한『중용』을 다시 펼쳤다. 아침을 먹기 전에 아이에게 공부를 가르쳐 주고 하루 종일 집안일과 마을 일을 돌본 후에 저녁에 집에 돌아왔다. 밤에 다시『중용』을 외웠다.

“아들이 공부할 책을 직접 쓰다”

금난수, 성재일기,
1585-06-04 ~ 1585-08-12

금난수는 막내아들 금각을 유별나게 아꼈다. 금각은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이미 7살에 『논어』를 읽었다. 그 뒤로도 형들을 따라다니며 공부를 열심히 하는 기특한 아이였다. 금난수는 아이가 어릴 때부터 하루에 책 10장씩을 암기하도록 하였는데, 일견 가혹한 처사인 것 같지만 금각은 책을 곧잘 외우곤 하였다. 금난수는 그런 막내아들을 무척 귀여워하여 임지에도 데려가 여러 어른들에게 인사시켰고, 금각의 총명함을 특별하게 여긴 주위 어른들은 금각이 읽을 책을 직접 구해다 주기도 하였다.
이번에도 금난수는 임지에 금각을 데리고 갔다. 이번에는 『강목(綱目)』, 즉 주희가 지은 『통감강목(通鑑綱目)』을 아들이 읽도록 할 참이었다. 열다섯 살이 되었으니 이제는 좀 어려운 책을 읽을 필요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들은 공부를 하는데 자신이 노는 것도 교육에 좋지 않겠다고 여겼는지 금난수는 『강목』을 날마다 7장에서 10장씩 베껴 쓰기로 하였다. 금각은 아버지의 결심을 듣고 자신은 매일 『강목』을 15장에서 17장씩 외우겠다고 하였다. 두 부자의 굳은 약조는 일단 순조롭게 지켜지는 것처럼 보였다.
금난수는 약속한 날로부터 보름쯤 지난 6월 12일까지 『강목』 1권을 베껴 썼다. 또 12일이 지난 24일에는 2권을 베껴 써서 아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6월 말에서 7월 초까지는 손님도 많고 제사도 있어서 다음 책을 베껴 쓸 때까지는 조금 더 기일이 소요되었다. 금난수가 『강목』 필사를 끝낸 것은 8월 12일이었다. 공무로 바빴기 때문에 아들의 공부를 매일 봐 주지는 못하였지만 아버지가 바쁜 와중에도 매일 조금씩 필사해 나간 『강목』을 읽으며 금각은 아버지의 사랑을 물씬 느꼈을 것이다.

“책을 널어 말리다”

김광계, 매원일기,
1607-05-25 ~ 1607-05-27

1607년 5월 25일, 요 며칠 날씨가 계속 맑았다. 김광계는 오전에 기제사를 지낸 후에 방으로 들어가 방안 곳곳에 있던 서책을 모두 마루로 가지고 나왔다. 그동안 벼르고 있던 책 말리기를 하려는 것이다. 꺼내 온 책을 마루며 마당이며 곳곳에 펴서 널어놓기 시작하는데 덕유(김광업) 형이 와서 찾아 왔다. 덕유는 김광계가 펼쳐 놓은 책을 간간히 넘겨가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돌아갔다.
이틀 뒤에는 집에 있는 옛날 책을 모두 점검하였다. 한동안 펼쳐보지 않은 책들이라 얼룩이 지거나 벌레를 먹은 곳이 없는지 꼼꼼히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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