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본문 바로가기

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

공직자의 출처진퇴(出處進退)를 보여주다,
용와(慵窩)

지금 우리 사회는 ‘공정’이 최대의 화두로 떠올랐습니다. 이는 제20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공정사회에 대한 국민들의 염원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대통령은 국가의 원수이자 한 국가를 대표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국민 대표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해야 합니다. 또한 공직자의 자리는 높은 윤리의식과 도덕성이 요구되는 자리입니다. 현재 대한민국의 공직자에게 요구되는 덕목 중 최우선은 사리사욕의 억제와 업무의 공정한 운영입니다. 이러한 점은 조선시대 관료들의 덕목과 비슷합니다.

이번 이야기에서는 조선시대 관료로서 백성을 위해 헌신한 류승현(柳升鉉, 1680~1746)의 삶과 생각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일선리에는 용와 종택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본래 용와 종택은 안동시 임동면에 위치해 있었으나, 1994년 임하댐의 건설로 인해 지금의 위치로 옮긴 것입니다. 용와 종택은 작은 집을 지어놓고, 두보와 소동파의 삶을 추구하고자 했던 용와 류승현의 삶과 철학이 녹아든 장소입니다. 조선시대 선비로서 벼슬에 나아가는 것과 물러서는 것을 분명히 했던 류승현과 그의 ‘용와’를 소개하겠습니다.


용와 종택의 전경(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천하의 공평함’으로 정무에 임하다, 용와(慵窩) 류승현(柳升鉉)


류승현은 본관은 전주이며, 자는 윤경(允卿), 호는 용와(慵窩)입니다. 1719년(숙종 45) 과거에 급제하여 관리로 등용되었습니다. 류승현은 사헌부 장령, 종성 부사, 공조 참의, 영해 부사, 풍기 군수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습니다. 류승현은 당대 사람들로부터 ‘공평한 사람이다’라는 평을 들었습니다. 이와 같은 평가는 류승현이 관직에 있으면서 공정하고 사사로움이 없이, 공평함으로 정무에 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천하의 공정함을 가지고 관직에 임했던 류승현은 당시의 공직자들에게 귀감이 되었습니다.



국가를 위해 의병을 일으키다


류승현은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 영남 지역까지 반란군의 세력이 뻗쳐 오자, 안동부에서 제일 먼저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류승현은 군사를 조련하여 병기를 가다듬으며 반란군을 토벌하고자 했습니다. 다만 반란군이 관군에게 곧 진압되어 류승현과 의병들은 해산하게 됩니다. 경상우도의 한 선비는 사람들에게 “흉한 역적을 빨리 소탕한 것은 신민의 경사입니다만, 하루도 류공(柳公)이 쓰이지 못한 것이 한스럽습니다.”라고 할 정도로 의병을 일으켰던 류승현의 공에 대해 아쉬워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행적은 훗날 정조에게 의병 선창의 공을 인정받으며 포상을 받았습니다.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한 자발적 군사 조직, 의병(출처: 한국국학진흥원)



흉년으로부터 백성을 구휼하다


류승현은 1733년(영조 9) 어사 이종백(李宗白, 1699~1759)의 천거로 함안 군수를 역임하게 됩니다. 당시 함안군은 계속되는 흉년으로 관아의 창고는 텅 비어있었습니다. 류승현은 피폐해진 고을과 병들고 지쳐있는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한 조치를 곧 시행하였습니다. 류승현은 제일 먼저 어량(魚梁)‧시전(市廛)에 대한 징세 및 아전과 관노의 무역을 철폐하였습니다. 류승현은 가난한 백성이 갚지 못한 환곡은 자신의 녹봉을 쪼개어 채웠습니다. 자신의 소비를 절약하여 백성을 위해 쓰도록 한 류승현의 조치로 인해 함안군은 그가 부임한지 2년이 되지 않아 재정을 회복하였습니다. 류승현은 공평하고 관대하게 고을의 정사를 펼쳐나갔습니다. 또한 류승현은 유학의 풍습을 보급하기 위해 자신의 봉급을 덜어 고을의 백성들을 교육시켰습니다.

나아가 류승현은 자신이 다스리는 고을 백성의 사정도 면밀히 살폈습니다. 류승현은 부역에 시달리는 백성이 있으면 그 실정을 듣고 그들을 위로하였는데, 그 때마다 감격하여 울지 않는 백성이 없었다고 합니다.



부패한 관리를 처벌하고, 공정을 기하다


1742년(영조 18) 겨울, 류승현은 영해 부사(寧海府使)에 제수되었습니다. 영해는 류승현의 고향인 안동과 가까웠기 때문에 친지와 친한 친구들이 많은 지역이었습니다. 류승현은 인척이 많아 업무를 보는데 공정함을 잃을까 걱정하며 문단속을 엄하게 하고 손님을 맞지 않았습니다. 또한 류승현은 낙후된 영해를 살리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당시 영해가 낙후된 고장이었던 이유는 관아 창고의 재산을 탐한 아전들이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류승현은 비리를 저지른 아전들을 처벌하기 위해 그들의 죄를 조사하였습니다. 하지만 아전 중 일부가 류승현의 조치에 반발하며 일부러 경상감영에 진상하는 인삼을 부실하게 준비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책임으로 류승현은 영해 부사직에서 파직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조치에 대해 당시 영해의 백성들은 몹시 분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이처럼 류승현은 관직자로서 법도에 따라 업무의 공정함을 다했습니다. 한편 류승현은 관직을 그만두고 산림에 은거하려는 선비로서의 바람은 있었지만 임금과 백성을 생각하며 자신의 업무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류승현은 간혹 자신의 정사가 잘못되었다는 말을 들으면 크게 걱정하며 자신을 돌아봤다고 합니다.


경상감영 전경(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사리사욕을 억제하다


류승현은 관직에 있으면서 자신의 욕심을 철저하게 제어했습니다. 1745년(영조 21) 류승현은 공조 참의에 제수되었습니다. 당시 공조는 국가의 물자를 담당하는 부서이기 때문에 공조를 맡은 관리는 나라의 물자를 이용하여 자신의 집을 수리하거나 의복 및 물품을 착복하는 일이 잦았습니다. 그러나 류승현은 자신과 집안의 물건을 고치는 일은 일체 하지 않았습니다. 류승현은 관직으로 재직하는 중에는 자신의 녹봉 이외에 어떠한 물건도 사사로이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류승현은 자제(子弟)들이 사소한 물건을 만들 것을 청해도 “내가 나라의 은혜를 받아 관의 녹봉을 받으니 너희들이 부형으로 인해 입에 풀칠만 해도 충분하다.”라고 말하며, 한 푼도 쓰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류승현 본인도 평소 사용하던 두건과 모자, 붓과 벼루 등의 물건이 해져도 바꾸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의 의복과 일용품은 새로운 물건은 없었고 모두 낡은 것뿐이었습니다.



퇴직 이후의 바람, 용와(慵窩)


류승현의 삶의 자세는 그의 호(號)와 편액인 ‘용와(慵窩)’를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류승현은 고향인 박실[瓢谷]에 집을 짓고 ‘용와’라고 이름을 지으며, 스스로 ‘용수(慵叟)’라고 일컬었습니다. 그가 작은 집을 지어놓고 ‘용와’라고 한 것은 은퇴 이후 게으른 본성을 기르며, 학문의 정진을 게을리 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류승현은 「용와음(慵窩吟)」이란 시를 지어 자신의 뜻을 드러냈습니다.


용와(慵窩)/ 47.5x68.0/ 행서(行書) /전주류씨 수곡파 용와종택(全州柳氏 水谷派慵窩宗宅)(출처: 한국국학진흥원)


감실 같은 집을 지으니 게으름만 늘고築屋如龕爲養慵
베갯머리 산골 물은 졸졸졸 흐르네枕邊鳴澗玉琤琮
두보의 동쪽 대숲을 새로 옮기고新移杜老東林竹
동파의 백학봉은 이미 사 두었네已買坡公白鶴峯
소리 그윽한 창가엔 골짝 새가 날아오고 幽響近囪來谷鳥
녹음 짙은 난간에는 바위 솔이 드리웠네濃陰滴檻倒巖松
사람들아 깊은 처마 너른 집을 말하지 마라深簷廣廈人休說
무릎을 들이기엔 이 집도 넓으니此室猶寬此膝容


이 시에서 류승현은 감실 같은 작은 집을 지어놓고 게으른 본성을 기르며, 두보와 소동파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뜻을 보였습니다. 특히 시의 마지막 7~8구절은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의 구절을 인용한 것으로, 은퇴 이후 사욕을 제어하고 소박하게 살고자 했던 그의 소망이었습니다.


용와 종택의 별당(출처: 한국국학진흥원)


류승현은 작은 집을 짓고 은퇴 이후의 소박한 삶을 꿈꿨습니다. 하지만 류승현은 백성을 위한 일에 있어서는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1746년(영조 22) 류승현은 흉년이 극심했던 풍기에 군수로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류승현은 병든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 60대 노인의 몸임에도 혼자서 말을 타고 관찰사에게 달려가 구황(救荒)의 대책을 건의하였습니다. 백성의 구휼을 위해 밤낮없이 노력한 류승현은 결국 병이 들고 말았습니다. 류승현은 쇠약해진 몸 상태에도 고을의 백성을 구휼하는 방법에만 몰두하였습니다.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은 채, 백성만 생각한 류승현은 결국 67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류승현은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노력으로 풍기의 백성들은 나라로부터 진휼을 받았습니다. 진휼을 받은 백성들은 “이것은 우리 사또께서 남긴 은혜이다.”라고 말하며 애통해 하였습니다.

관료로 출사해서는 나라와 백성들을 위해 선정을 베풀었고, 은퇴해서는 ‘용와’라는 작은 집을 지어 청빈한 삶을 살아가고자 했던 류승현의 삶은 공직자로서 추구해야 할 출처진퇴(出處進退)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조선시대와 현대의 공직자는 비록 임용 방식은 다르지만 권한을 위임 받아 국가의 살림을 책임지고 운영하는 점은 같습니다. 공직자로서 공명정대하게 정사를 펼치고, 자신의 사욕은 누르고 청빈한 삶을 살아갔던 류승현의 모습은 현대의 공직자에게도 요구되는 자세입니다. 병든 와중에도 자신보다는 백성들의 안위만 생각했던 류승현의 이야기가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지금의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공직자의 모습이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정      리
박나연 (한국국학진흥원)
자      문
권진호 (한국국학진흥원)
참      고
권진호, 『안동의 유교현판』, 2020.
류승현 저, 권인택 역, 영남선현문집국역총서 49 『용와집』, 한국국학진흥원, 2019.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 Ⅱ, 2015.
스토리테마파크(http://story.ugyo.net)
유교넷(http://www.ugyo.net)
한국고전종합DB(https://db.itkc.or.kr)
한국의 편액(http://pyeonaek.ugyo.net)
“권문해, 굶주린 백성을 위해 동분서주”

권문해, 초간일기,
1590-01-01 ~ 1590-02-02

1590년 1월 6일, 굶주린 백성들이 늘어갔다. 권문해는 굶주린 마을 사람들을 도울 방도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 했다. 그리고 결국 직접 백성들을 찾아다니며 곡식을 나누어 구휼하기 시작했다. 대구 달성지역의 하빈(河濱)의 동면, 북면, 서면의 각 마을로 향하여 분진(分賑)하였다. 아침부터 시작된 구휼은 밤이 깊어가도록 이어졌다. 권문해는 밤이 깊어지자 관아로 돌아오지 못하고 윤효언(尹孝彦)의 집을 찾았다. 다음날도 분진은 계속되었다. 하빈현의 동면과 북면 서면에 이어 남면의 구휼이 시작되었다. 남면의 사람들도 굶주린 이들이 마을의 정자 앞에서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오전부터 시작한 분진은 오후 1시 되어서 끝이 났다. 이어 신서촌(身西村) 성당리(聖堂里)로 향하였다. 1월 6일부터 시작된 구휼은 사흘간 계속되었다. 1월 9일, 마지막으로 임암현(立岩縣), 내역리(內驛里), 검정리(檢丁里), 해안현(解顔縣)의 동촌리, 상향리, 서부리의 마을까지 모두 분진을 하였다. 사흘간 계속되는 분진이지만 여전히 굶주린 백성들이 이어졌다. 권문해는 한 달이 지난 2월 2일에도 읍내의 마을을 순회하며 백성들에게 쌀과 소금, 간장을 나누어 주었다.

“똑 부러지는 수령의 살림살이로 벌꿀이 넘치는 관고(官庫)”

김령, 계암일록, 1616-07-13 ~

1616년 7월, 안동부사(安東府使) 박동선(朴東善)이 판관 임희지(任羲之)의 탐욕과 포악함을 다스리지 못하여 관고(官庫)가 점점 탕진되고 있었다. 박동선은 장자의 기량이 있긴 했지만, 한스럽게도 재주도 없고, 염치도 모자랐다.

반면 예안현 수령 이계지(李繼祉)는 청렴하고 근실하며, 성정이 곧아서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자였다. 관내의 창고에는 물품이 가득하여 쓰고도 남아돌았다. 옛날에는 관아에서 사용하는 벌꿀이 매번 부족해서, 다음해의 공납을 미리 거두었으며, 소금과 장은 중들에게서 지나치게 취하였고, 관아의 창고에 곡식이 모자라거나 떨어지면 또 백성들로부터 거두었다.

그러나 이계지가 고을을 다스린 이후로는, 갈무리해놓은 벌꿀이 넉넉하고 풍족해서 매년 묵히고 있다. 오래된 벌꿀만 쓰고, 지난해 받은 것은 저장해 두고 열지도 않았다. 장독이 많아 스무 개 남짓에 이르고, 관아의 급료도 여유가 있었다. 수십 년 이래 최고의 수령이라고 할 수 있다.

“목숨을 건 상소를 올린 용안현감 이정”

최흥원, 역중일기, 1759-09-06 ~

1759년 9월 6일. 오늘 이평중이 최흥원을 찾아왔다. 그는 품속에서 상소문 한편을 꺼내었는데, 매우 놀라운 소식을 함께 전해주었다. 용안현의 현감인 이정이란 사람이 동궁마마에게 상소를 올리려 하였는데, 승정원에서 이를 제지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이정이란 사람이 자신의 목에 칼을 찔러 자결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상소가 장안의 화제가 되었는데, 지금 자신이 그 상소문을 가져온 것이라고 하였다.

최흥원은 소식을 듣고 몹시 놀랐다. 그리고 상소문의 내용을 살펴보았는데, 역시 나라를 근심하는 벼슬아치의 심정이 매우 간절히 녹아 있었다. 최흥원처럼 관직을 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있는 선비가 감히 그 내용을 뭐라고 평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그는 소감을 묻는 이평중의 질문에, 감히 내가 뭐라 평할 수 없는 글이라고 답하였다.

이평중이 돌아간 후, 최흥원은 홀로 생각에 잠겼다. 예전부터 도끼를 들고 상소를 한다든지, 자신의 목숨을 걸고 바른말을 한다는 고사를 여럿 들어보았지만, 실제로 상소가 막히자 자신의 목에 칼을 찔러 자결하였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비록 그의 죽음이 크게 논란이 되지 못하였으나, 참으로 사람에게 놀랍고 두려운 마음이 들게 하는 것이었다. 아직까지 우리 조선에 이런 관료가 있는가……. 최흥원은 어렴풋한 희망을 느꼈다. 동시에, 자신은 나라를 위해 그리할 수 있는지를 반문하며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헤아리기 어려울만큼의 선정을 베푼 고을수령, 떠날 때 백성들이 눈물로 길을 막다”

서찬규, 임재일기, 1852-02-22

1852년 2월 22일, 홍직필 선생의 사위인 진사 민경호가 선생을 모시고 앉았다. 오곡 어른의 정치력 이야기가 나오자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그의 재량을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실은 헤아리기 어려운 바가 있다. 이 읍에 거주할 때에 어떠한 덕정(徳政)을 행하여 백성에게 이러한 믿음을 얻어서 떠난 뒤에 생각함이 더욱 간절하며, 시흥(始興)으로 옮길 때 과천(果川) 백성들이 길을 막고 눈물을 흘리기를 갓난아기를 잃은 것 같이하니, 과연 그가 백성에게 선정(善政)이 있었는가. 내가 평소에 그의 삼가고 성실함을 허여하였을 뿐인데, 지금 이와 같이 순량(循良)하게 될 줄은 생각지 못하였다.”

“사이 나쁜 사람을 무고했다가 죽도록 맞다”

노상추, 노상추일기, 1787-01-04

입직하여 무겸청에 들어간 노상추는 오늘도 조보를 펴 보았다. 조보에는 어제 별군직(別軍職) 구순(具純)과 병마절도사 조학신(曺學臣)이 곤장을 맞았다는 소식이 적혀 있었다. 임금을 시위하는 사람이 사소한 잘못으로 곤장을 맞는 일은 왕왕 있었기에 별 큰일인가 싶었는데, 죄목이 무고인데다가 이번에는 유배까지 가게 되었다고 적혀 있었다. 구순은 같은 별군직에 있는 이윤빈(李潤彬)과 평소에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지난번 세자의 상을 치를 때 이윤빈의 부친인 이방일이 자기 집 공사를 한 일로 문초를 받을 때 그 기회를 타서 이윤빈 역시 공사를 했다고 무고를 한 것이었다. 또한 뇌물 문제까지 함께 거론하였다.

하지만 조사 결과 이윤빈이 자기 집 공사를 한 일이나 뇌물을 받은 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이에 왕은 이윤빈을 무고한 구순을 잡아들여 남을 함정에 빠뜨린 죄를 다스리기로 했다. 특히 자신의 신변을 늘 지키고 있는 무관으로서 모범을 보이지 않고 사특한 마음을 품었다는 것이 왕이 더욱 분노한 이유 중 하나였다. 왕은 구순을 죽도록 때리라고 명하고는 죽지 않으면 제주목에 정배하라고 하였다. 왕의 분노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왕은 자신의 휘하 군관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병마절도사 조학신이 곡식만 축낸다고 비난하며 마찬가지로 곤장을 때리고 먼 곳에 유배를 보내도록 했다. 구순과 조학신의 일은 무고에 대한 왕의 강력한 경고였다. 병마절도사까지 처분을 받게 된 살벌한 상황에 노상추 역시 간담이 서늘해졌다.

“담배피우며 시강하다가 귀양 간 시관”

노상추, 노상추일기, 1792-02-18

학례강(學禮講) 시관이 귀양을 갔다. 시강을 할 때 생도들 앞에서 몸을 비스듬히 하고 앉아 관을 비뚤게 쓰고 담배까지 피웠으며 잡스러운 농담도 툭툭 던져댔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왕의 귀에도 들어갔다. 왕은 한심해하며 시관 모두를 먼 지방으로 귀양을 보내게 하였다. 또 이런 풍조를 알면서도 감찰해내지 못한 감찰, 사관, 승문원·성균관·교서관의 여러 관원들도 잡아들여 신문하며 혼을 냈다. 당연히 이들 기관의 책임자인 대사성도 불려가 곤욕을 치렀다. 성균관의 재임(齋任)과 동재(東齋)·서재(西齋)의 반수(班首) 역시 모두 그 직무를 정지시켰고, 공무를 집행한 관리들도 추고 당했다. 미리 경계하지 못하고 왕의 귀에 들어 갈까봐 쉬쉬하며 서로 입을 다물고 있었던 죄 때문이었다. 이런 한심스러운 일이 있었음을 노상추는 조보를 읽고 알았다. 마침 생원시가 있는 날이었는데, 아마도 더욱 엄정한 분위기에서 치러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벌벌 떨면서 시험을 보겠구먼! 하며 노상추는 담뱃대에 불을 붙여 일부러 비뚜름하게 물어보았다.

닫기
닫기
관련목록
시기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장소 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