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본문 바로가기

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

공간을 기록하다, 초간정(草澗亭)

1985년 5월 어느 날, 그날 아침에 비가 내렸나 보다. 비가 그친 후, 구름 사이로 보이는 햇살과 상쾌한 풀냄새가 어렴풋이 기억난다. 둑 위의 아름드리 큰 나무에 올라탄 동네 아이들이 나와 오빠를 쳐다봤다. 아마도 내 생애 최초의 기억이 아닐까 싶다.

지금 부모님이 살고 계시는 집으로 이사 오던 날의 풍경이다. 어른들이 리어카를 끌고 예전 집과 새집을 오가며 이사를 했다. 단출한 살림이라 가능했다. 그래도 어린 마음에 진짜 우리 집이라 그랬는지 동네 아이들이 쳐다봐도 주눅 들지 않았다.

우리 집은 6.25 전쟁이 끝나고 난 후 지어진 한옥이었다. 방 4칸에 부엌 하나 있는 ㄱ자 구조의 집이다. 대청마루가 안방과 작은 방 사이에 있었고 화장실은 따로 마당에 있었다. 아빠는 앞마당에 포도나무와 감나무를 심고 뒷마당에는 대추나무를 심었다. 엄마는 꽃밭에 채송화와 봉숭아, 사루비아, 맨드라미, 분꽃을 심었다.

2001년 여름, 비가 억수 같이 내리던 밤, 우리는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흙집은 그렇게 나이가 들어 기와 사이로 빗물이 흘러내렸던 것이다. 안방 이곳저곳에 받쳐둔 세숫대야와 바가지에 떨어지는 물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


큰집의 정주간에 비가 새서 무너지려고 하였으므로
하인을 시켜 수리하고 기와를 새로 덮도록 하였는데,
이틀을 일하여 마쳤다.


1588년 9월 15일의 일이다. 16세기 끝자락, 초간(草澗) 권문해(權文海, 1534~1591)가 쓴 『초간일기(草澗日記)』에 비가 새서 무너지려고 하는 정주간을 수리한 일이 기록되어 있다. 집도 나이가 들면 이곳저곳에서 앓는 소리를 한다.

문득, 장대비가 쏟아져도 끄떡없이 버티고 서서 위용을 자랑했을, 내 집의 시작이 궁금해진다.




공간을 생각하다


보물 제879호인 『초간일기』는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의 지은이로 유명한 권문해가 쓴 일기이다. 『초간일기』는 1580년 11월 1일부터 1591년 10월 6일까지, 총 10년간 2187일에 대한 기록이다.(햇수와 일수가 일치하지 않는 것은 중간 중간에 기록되지 않은 날들이 있기 때문이다.) 『초간일기』에는 권문해 개인으로서의 기록과 관료로서의 기록, 정치 · 국방 · 사회적 사건에 관한 기록, 문화·역사적 내용에 관한 기록이 있다. 권문해 자신의 일상생활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상세히 적고 있어 이를 통해 사대부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권문해의 『초간일기』 (출처: 예천박물관)



권문해는 1534년 7월 24일 예천군 용문면 죽림리, 아버지 권지(權祉)와 어머니 동래정씨(東萊鄭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예천(醴泉), 자는 호원(灝元), 호는 초간(草澗)이다. 1560년(27세), 별시 문과에 급제하고 권지성균관학유(權知成均館學諭)가 되었다. 1589년(56세) 정월에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인 『대동운부군옥』을 완성하였고, 그해 11월 29일 아들 별(鼈)이 태어났다. 1591년(58세), 사간원 사간 등을 거쳐 7월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고, 8월 좌부승지가 되었으나, 11월 20일 서울의 집에서 생을 마쳤다.


권문해 홍패(출처: 예천박물관)



권문해의 삶을 단 몇 줄로 정리하며 다 안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가족을 사랑했다는 것과 벼슬 수십 년을 지내며 나라에 충성을 다했다는 것, 그리고 후대에 오래 남을 책을 남겼다는 것이다.



공간을 짓다


우리는 누구나 나만의 밀실(密室)을 꿈꾼다. 동시에 광장(廣場)을 원한다. 방이 밀실이라면 거실은 광장이다. 정자에 오롯이 앉아 책을 읽고 글을 쓸 때 그곳은 밀실이 된다. 뜻있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학문에 대해 토론하고 후학을 양성하며 시를 짓고 노래를 부를 때 그곳은 광장이 된다.

1580년 9월에 공주 목사가 된 권문해는 이듬해 12월에 파직을 당한다. 공주 감옥에서 죄수가 탈옥한 일이 있었는데, 결국 이 일이 문제가 된 것이다. 공주 목사로서 1년 남짓한 기간의 공무를 수행했던 권문해, 그의 파직 소식에 “권문해는 정사를 돌봄에 있어 자상하면서도 강단이 있고, 몸가짐이 검소하다.”라고 하며 파면 결정을 거둬 주십사 하는 백성들의 바람이 있었다. 비록 파직을 당해 공주를 떠나지만 귀향길이 덜 외롭지 않았을까? 어쩌면 평소 읽고 싶었던 책을 읽고 지역 사람들과 교류의 시간을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하며 새로운 기대를 품었을지도 모르겠다.

1581년 12월 24일, 공주에서 예천 집에 도착한 권문해는 먼 길을 떠나온 여독에 며칠 동안 식은땀을 흘리며 힘들어한다. 다행히 2월에는 파직의 충격과 여독의 피로감이 어느 정도 풀렸던 것일까? 그는 밀실과 광장이 공존하는 정사(亭舍)를 짓기 시작한다. 초간정사(草澗精舍)의 건축주, 권문해의 건축일기를 들여다보자.


계곡 건너편에서 바라본 초간정


1582년 2월 8일, 흐리다가 맑다가 하였다.

정사의 터를 초간 도연의 가에 얻었다. 이웃에 사는 사람 30명을
빌려 술과 음식을 먹이고 터를 메워서 축대를 쌓았다.

1582년 2월 12일, 맑음

또 용문사의 승려 및 용문동 주민들의 힘을 빌려 정사의 터를 닦았다.
단지 돌을 메워 고르게 하기만 하였고 일을 마치지는 못하였다.

1582년 2월 17일, 맑음

집 앞의 몇 리 밖 들판 가운데 한 나무가 있는데,
박정(朴亭)이나 김정(金亭)으로 불려졌다.
(중략)
작은 괴목(槐木)을 구하여 그 곁에 심고서
뒷날 (이 나무가 자라) 오늘 같기를 기다린다.

1582년 2월 19일, 맑음

박공직과 초간정사로 가서 소나무 몇 그루를 심게 하였다.

권문해는 예천 본가로부터 약 2Km 떨어진 강가에 터를 잡고 용문동 주민들과 용문사 승려들의 힘을 빌려 터를 닦고 나무를 심는다. 좋은 날, 술과 음식이 빠질 수 없다. 왁자지껄한 웃음소리, 땅을 다지며 내는 기합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초간일기』에는 초간정사의 마루와 방, 난간, 문, 창, 지붕 등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다만, 지금은 없는 초간정 연못에 대한 기록이 있다.

1582년 2월 24일 구름이 끼어 흐렸다

초간정의 동쪽 가 바위 아래 물이 떨어지는 곳이 있어 연못을 만들만하였다.
노복들 수십 명에게 명을 하여 둑을 쌓고 물을 끌어오니
깊이는 어깨가 잠길 만하고, 맑기는 물고기를 기를 만하였다.

1582년 2월 25일 흐리다가 빛이 나다가 하였다.

쌓은 연못의 둑이 애초 견실하게 쌓여지지 않아 물이 새는 곳이 많았다.

1582년 2월 26일 오후에 비가 내렸다.

정이수가 용문사의 승려들을 권하여 괴목 여러 그루를
초간지(草澗池) 가에 옮겨 심도록 하였는데,
한 그루는 말라 죽고 한 그루는 마르지 않았다.


노송과 초간정



권문해는 이 연못에 물고기가 노닐고 이제 막 심은 소나무가 크게 자라 멋진 경관이 될, 초간정사를 꿈꿨나 보다. 하지만 그의 바람과 달리 연못의 둑은 부실하고 옮겨 심은 나무 한 그루는 말라 죽고 만다. 초간정사의 정원은 권문해 마음에 아쉬움을 남겼지만 정사는 무사히 완공되었다. 그래서 그는 3월 3일에 초간정에서 소일을 한다.

집을 지을 때, 건축주가 특별히 신경 쓰는 공간이 있게 마련이다. 요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넓은 주방을 원한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서재 공간에 각별한 신경을 쓴다. 권문해는 그런 공간이 연못인 듯하다.

초간정사가 완공되고 난 뒤인, 6월 21일 그의 아내 현풍곽씨는 세상을 떠난다. 아내의 장례 준비로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던 그는 7월 15일 저녁에 홀로 초간정에 간다. 아내를 떠나보내야 하는 답답한 마음을 잠시 내려놓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연못의 물고기 중 큰 놈들은 수통을 통하여 다 나가고 작은놈들만 조금 남아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의 곁을 떠난 아내처럼 물고기들마저 연못을 떠난 모습을 봐야 했던 권문해 심정은 어땠을까?

1582년 8월 23일, 맑음

초간정 아래에 전날 이미 못을 파서 물을 채우고
물고기를 풀어 놓았는데, 길이와 폭이 좁은 듯하여
또 사람 50여 명을 얻어 밥을 먹이고 다시 파게 하였다.
깊이는 1장이나 되었고 폭은 작은 배를 띄울 만하였다.

텅 빈 연못을 보고 난 뒤 한 달이 지나서야 권문해는 연못을 더 넓고 깊게 그리고 튼튼하게 만들기 시작한다.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와 권문해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 그는 아내를 위한 만사(輓詞)에서 ‘나무는 꽃과 열매가 있고 풀에는 풀뿌리와 껍질이 있으며 물고기는 알이 배에 가득하고 메뚜기는 새끼가 아흔이나 되는데….’ 라고 하며 애통해한다. 그는 아마도 연못의 물고기를 바라보며 자식 없이 먼저 간 아내를 생각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공간에 머물다


초간정을 찾아간 날, 비가 내렸다. 초간정을 눈에 담기도 전에 우리를 맞이해 준 것은 정자를 휘감아 도는 계곡의 물소리와 솔향 가득한 숲길이었다.


나무들로 둘러싸인 초간정


초간정사 편액이 보이는 초간정의 정면 모습



초간정은 ‘봉황이 찾아오는, 단술이 샘솟는 고장’인 경북 예천에 있다. 1582년에 권문해가 지은 이 정자는 임진왜란으로 불탔다가 1626년에 그의 아들인 죽소(竹所) 권별(權鼈, 1589~1671)이 다시 건립하였는데, 이 역시 화재로 불타고 말았다. 오랫동안 고치지 못하였다가, 1739년에 현손인 권봉의(權鳳儀)가 옛터에 집을 짓고는 바위 위에도 정자 3칸을 세웠다. 지금의 건물과 원림 배치는 이때 만들어졌다.

지금의 초간정은 1739년에 지은 건물을 일컫는데, 주변의 원림 속에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특히 금곡천(金谷川)을 바라보는 경관을 확보하려고 절벽 위에 지었기에, 북쪽과 서쪽은 담장이 없이 개울에 바로 붙어 있다.


초간정 담장



정자는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겹처마에 팔작지붕을 올린 모습이다. 자연석으로 쌓은 받침
처마에는 남쪽에 초간정사, 북쪽에 초간정(草澗亭), 동쪽에 석조헌(夕釣軒)이라고 쓴 각기 다른 편액이 걸려 있다.

초간정사 편액


초간정 편액


석조헌 편액



결국 정자에 올라서야 초간정의 진면목을 알 수 있다.
정자의 뒤태는 평범한 3칸 한옥으로 별다를 바 없으나
살짝 열린 마루 너머로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것 같다.
(중략)
마루 끝에 이르자 정자 앞 3칸이 모두 열려 있다.
후련한 풍경에 이내 넋을 잃고 만다.
마루에 털썩 주저앉아 난간에 기대어 본다.
그제야 무릎을 탁 친다.
‘아, 이거였어.’

인문여행가, 김종길님의 『한국 정원 기행』 중 「시냇가의 별천지, 예천 초간정 원림」의 내용 중 일부이다. 초간정의 원래 주인은 오래전에 떠났어도 그곳은 끊임없이 누군가의 밀실이 되고, 광장이 된다.


정자 위에서 내려다 본 모습


석조헌 편액이 있는 곳에서 바라본 정자 난간과 계곡



초간정의 아름다운 풍경을 사진으로 담아도 아쉬움이 남고 글로 표현하려 해도 부족함이 느껴진다. 그래서 그 옛날 초간정의 풍경을 읊은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 1679~1759)이 지은 「초간정술회(草澗亭述懷)」를 싣는다. 초간정 마루 위에 편액으로 남아있다.

초간정술회(草澗亭述懷)

시냇가 풀잎 푸르디 푸르러 세속에 물들지 않고
옛 성현들 남긴 향기 다시 사람을 감동시키네
속세 떠난 마음 천종의 녹봉을 사양하였고
작은 집 막 완성되어 길이길이 봄이로구나
성현의 춘추는 의리를 근본에 두었고
책상머리에 경전은 밝은 정신 지어 내누나
내가 와서 손을 씻고 남긴 책을 펼쳐 보니
상자에 가득 넘쳐 정녕 가난하지 않으리


초간정술회 편액



세월이 흐른 시간만큼 초간정에 머물다 간 많은 사람들은 그곳에서 어떤 것을 얻고 느끼고 갈까? 권문해는 그곳에서 글을 쓰며 오롯이 나 자신과 대면하는 시간을 보내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저주서간[滁州西澗, 저주의 서쪽 계곡 물]

獨憐幽草澗邊生계곡물 가에 자란 그윽한 풀이 유달리 사랑스러운데
上有黃鸝深樹鳴그 위에 꾀꼬리 있어 잎 무성한 나무에서 울고 있네
春潮帶雨晩來急비를 거느린 봄날의 조수 저녁이 되면서 물살 급해지는데
野渡無人舟自橫들판의 나루터엔 사람 없이 배만 가로 놓여 있다.

권문해의 호이자 정자의 이름인 ‘초간(草澗)’은 당나라 시인 위응물의 「저주서간」의 시구에서 따온 말이다. ‘홀로 물가에 자란 풀을 사랑한’ 권문해의 공간 속으로 들어간 아들, 권별은 아마도 그곳에서 『죽소부군일기(竹所府君日記)』를 쓰고 『해동잡록(海東雜錄)』을 쓰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때론 벗과 술잔을 기울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뜨거운 여름 한낮, 귀뚜라미 우는 달 밝은 가을밤, 눈 내린 겨울 아침 그리고 다시 봄꽃 가득한 날의 언젠가, 초간정을 찾아 나설 것이다. 나의 밀실이 되어주고 우리의 광장이 되어줄 그곳으로….



명창정궤(明窓淨几)를 꿈꾸며


나의 고향 집은 결국 2002년 월드컵이 한창일 때 허물어지고, 단층 양옥이 되었다. 한옥의 멋과 운치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공간과 공간 사이의 편리함이 남았다.

최근 몇 년간 집값 이야기는 늘 우리 삶의 화두가 되었다. 집의 경제적 가치가 인생 성공의 척도가 되니 내가 사는 집이 초라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하지만 ‘햇빛 밝은 창 밑에 깨끗이 정돈된 책상(明窓淨几)’이 있는 내 방이 있어 좋다.

440년 전, 초간정사를 짓고 작은 방에 책상 하나, 그 옆에 문방사우를 두고 글을 쓰고 책을 읽었을 권문해의 삶을 돌아본다. 쉼의 공간이면서 동시에 소통의 공간이 되어준 초간정사! 내 사는 곳이 그의 그곳처럼 의미 있는 공간이 되기를….




정      리
이복순 (한국국학진흥원)
자      문
권진호 (한국국학진흥원)
사진촬영
한국국학진흥원
참      고
1. 스토리테마파크 (http://story.ugyo.net) 더보기
2. 유교넷 (https://www.ugyo.net) 더보기
3. 예천박물관 (https://ycg.kr/open.content/museum) 더보기
4. 권문해, 장재석 외 3명 역, 『초간일기』, 한국국학진흥원, 2012.
5. 권별, 장재석 역, 『죽소부군일기』, 한국국학진흥원, 2012.
6. 김종길, 『한국 정원 기행』, 미래의 창, 2020.
7. 노은주·임형남, 『집을 위한 인문학』, 인물과 사상사, 2019.
8. 위응물, 권호종 역, 『위응물시선』, 문이재, 2002.
“동생과 함께 옛 터에 집을 짓다”

노상추, 노상추일기,
1774-01-10 ~ 1774-03-03

노상추와 동생 노억(盧檍)은 새해부터 새집을 짓느라 분주했다. 두 형제가 집을 한꺼번에 지으니 신경 쓸 일도 많고 돈이 한꺼번에 나가게 되어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옛집의 자재를 재활용하는 데에는 한 번에 두 채를 새로 짓는 것이 더 합리적이었다. 노억은 집터를 월판(越阪)에 잡았다고 알려왔고, 노상추는 남자종 일만(日萬)을 점쟁이에게 보내 공사를 시작할 길일을 잡아 오게 시켰다. 점쟁이는 1월 15일이 터를 닦는 데 길하고, 18일이 대들보를 올릴만한 날이라고 점지하였다.

그래서 터를 닦기 전에 먼저 자재부터 준비하기로 했다. 1월 13일에 노상추는 남자종들에게 종기(宗基)에 있는 옛집과 도개(桃開)에 있는 옛집을 헐게 했다. 종기 집에서 나온 목재로는 노상추의 집 곁채를 지을 것이고, 도개에서 나온 자재로는 노억의 집을 지을 예정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에는 공사를 전체적으로 책임질 사람을 정하였는데, 송만(宋萬)이 노상추의 집을, 일돌(日乭)이 노억의 집을 짓게 되었다.

마침내 공사가 시작된 1월 15일, 노억은 남동쪽을 향한 방향으로 집터를 정하고, 터를 닦기 시작했다. 이전에 이곳에 세워져 있던 집은 주춧돌의 방향으로 짐작건대 정남향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다음날에는 노상추도 자기 집의 터를 닦았다. 노상추가 새집을 짓기 시작한 터는 긴 사연이 있는 곳이었다.

노상추의 조부인 노계정(盧啓禎)이 자신의 부모가 돌아가신 뒤 옛집을 헐값에 팔고, 이곳에 있던 초가삼간을 사서 5~6년간 살다가 1725년에 과거시험에 합격하였다. 노계정은 이후 위원(渭原) 군수를 하면서 1737년에 이 자리에 큰 집을 지었고, 그로부터 약 20여 년 후인 1759년에 제사를 지낼 때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큰 집을 헐었다. 그래서 이 터가 공터로 남아 있게 되었으며, 이번에 노상추가 이곳에 다시 거처를 지으려 계획한 것이다.

점지를 받아 놓은 날인 1월 18일에는 차질 없이 노억의 집 대들보가 올라갔다. 노상추도 이틀 후에 기둥을 세우고 들보를 올렸다. 이제 뼈대 공사는 끝났으니 흙을 바르고 기와를 올릴 차례였다. 노상추는 기동(耆洞)의 토공(土工) 정발(鄭發)을 불러와 노상추와 노억의 집 벽과 천장에 흙을 바르게 했다. 흙을 바르고 기와를 이는 작업은 비가 오는 날을 피해서 하다 보니 거의 한 달이 넘게 걸렸다. 집안의 여러 문과 기물을 만드는 목수를 불러온 것은 3월이 되어서였다. 아직도 집이 완성되려면 여러 날을 기다려야 했다.

“기울어 넘어질 것 같은 행랑채를 수리하다”

남붕, 해주일록,
1926-04-23 ~ 1926-04-27

1926년 4월 23일. 남붕은 며칠 전 방구들을 새로 놓는 공사를 하였는데, 이참에 미루었던 집수리를 더 하기로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쓰러질 듯 기울어 있는 행랑채를 수리하기로 했는데, 일이 시작되기 전에 일해 줄 사람과 몇 가지 정해야 할 일이 있어 종일 기다렸다.

다행히 저녁이 다 되어 정 목수가 찾아왔다. 남붕은 정 목수와 공사를 해야 할 행랑채를 살피며 어느 정도 공사를 해야 할지와 치러야 할 비용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합의를 본 후 내일부터 일을 시작하기로 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정목수는 일꾼들을 데리고 남붕의 집으로 와서 집을 고치기 시작했다. 남붕은 그들이 하는 일을 살펴보며 필요할 때마다 일손을 보탰다. 행랑채 공사는 작은 일이 아니었다. 앞 행랑채 4칸이 기울어 넘어져 가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바로 세우려면 기둥부터 새로 세워야 했기 때문이다. 정 목수는 일꾼들과 함께 다 썩은 긴 기둥 10개를 모두 잘라내고 주춧돌 위에 큰 돌을 얹어놓아 튼튼하게 하였다.

1926년 4월 27일 아침을 먹은 후에 정 목수가 돌아가면서 그날 일한 값을 달라고 했다. 남붕은 지난번에 2원을 주었고 이날도 2원을 지급했는데, 정 목수는 8원을 달라고 청하였다. 남붕은 아직 일을 다 마치지 않았으므로 일이 끝나면 나머지 돈을 주겠다고 했다. 정 목수가 일을 잘하고 있긴 했지만, 이런 공사라는 게 일이 다 끝나기 전에 돈을 미리 주는 법은 없었기 때문이다.

“짐승의 털을 넣은 방석을 만들게 하다”

방석(출처: 국립민속박물관) 남붕, 해주일록, 1926-06-21

1926년 6월 21일, 남붕은 언제나 그렇듯이 새벽에 일어나 치성을 드리고 책을 읽고 어머님께 문안을 드리고 사당에 배알을 했다.

날이 어찌나 더운지 밤잠도 설쳤고, 아침부터 땀이 흘렀다. 입맛도 떨어져 겨우 아침을 몇 술 뜬 후 남붕은 아이들을 불렀다. 방에서 사용할 커다란 방석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자루 모양으로 만든 안감 안에는 틈틈이 준비해 다락에 두었던 짐승의 털을 꺼내 잘 펴 넣었고, 겉감은 푸른 베를 준비해 앉거나 눕기에 적당한 크기로 만들게 했다. 잠자리라도 편하면 잠을 설치는 일이 덜할듯해서 시킨 것인데, 아이들도 땀을 뚝뚝 흘리며 바느질을 했다.

남붕은 아이들을 보며 아내 생각이 났다. 아내가 살아 있었다면 미리 살피고 마련해 주었을텐데 이토록 아내의 빈자리가 크다는 것을 갈수록 더 크게 느끼게 되었다.

잠시 지켜보던 남붕은 아무래도 오늘 안에 만들기는 어려울 듯하여 천천히 만들라 이르고 논과 밭을 살펴보기 위해 집을 나섰다.

“종이를 보관할 지통을 만들다”

권별, 죽소부군일기,
1626-08-26 ~ 1626-08-30

1626년 8월 26일, 을축. 맑음. 권별은 용문에 가서 지통(紙桶)을 만들 판자 11립(立)을 떠왔다. 능내 형님이 도촌에 왔기에 가서 그를 만나보았다.

1626년 8월 30일, 기사. 맑음. 초간에 갔다. 새로 지통을 만들었다. 박 좌수 형님이 오셨다. 이술·이망도 왔다.

“불난 집에서 지붕 없이 지내다”

노상추, 노상추일기,
1772-05-14 ~ 1772-06-03

사랑에 앉아 식사를 기다리고 있던 노상추는 벌떡 일어났다. 타는 냄새가 진동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부엌에서 음식을 잘못해서 태우는가 싶었는데, 그 정도 냄새가 아니었다. 창문을 여니 사람들이 불을 끄러 다니느라 분주했다. 노상추는 일단 중요한 문서들과 아이들을 챙겨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다행히 곧 불길이 잡혔고, 노상추와 가족들이 기거하는 건물에는 불이 옮겨붙지 않았다. 하지만 부엌과 연결된 행랑 10여 칸이 다 타버렸다. 이엉을 이어놓은 지붕은 모조리 다 무너져 내렸고, 행랑채 뼈대만 앙상하게 남았다.

노비들이 기거하는 행랑채에 지붕이 없으니 사람이 살 만한 모습이 아니었다. 빨리 새로 지붕을 얹어야 하는데 5월이라 지붕을 덮을 짚이 있을 시기가 아니었다. 마구간 지붕도 모두 타버렸기 때문에 말들은 비가 내려도 비를 피할 수가 없었다. 노상추는 궁리 끝에 차라리 이번에 화재에 강한 기와와 벽돌로 집을 짓기로 했다. 노상추의 옛집 한편에는 오래된 기와가 쌓여 있었는데, 이 기와는 20년 전에 불이 났을 때 역촌(驛村)에서 사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이후로 집안에 초상이 계속 났고, 기와를 얹을 엄두를 못 내서 그저 쌓아두기만 했었다.

일단은 지붕을 무엇으로든 덮어 비바람을 막기는 해야 했다. 노비들의 원성이 자자했기 때문이었다. 노상추는 관아에다가 불에 탄 건물이 수십 칸이라는 내용의 문서를 제출하여 곡식을 담는 데 쓰는 빈 섬 300닢(立)을 내려달라고 청하였다. 일단 이것도 짚은 짚이고, 다행히 여름이니만큼 바람만이라도 임시로 막아두자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관아에서는 고작 15닢을 내려줄 뿐이어서 노상추는 해도 해도 너무한 수령의 처사에 분통을 터뜨렸다. 얼마 전 새집을 짓는 사람은 화재를 당하지도 않았는데 관아에서 빈 섬 300닢을 얻어갔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기에 더욱 화가 났다.

노상추가 화를 내 봤자 관아에서 빈 섬을 더 내려줄 것도 아니었다. 일단 노상추는 집으로 돌아가 집을 짓는 데 쓸 못 등을 만들 야장(冶匠)과 기와를 만들 목수 신덕기(申德器)를 불러왔다. 엿새 만에 기와를 모두 만든 신덕기에게 노상추는 100동(銅)을 주었다. 기와를 이을 개장(盖匠) 소통(小通)은 벽돌이 운반되기 전에 도착하여 일을 바로 시작할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역촌에 있는 기와와 벽돌을 옮겨오게 하고 싶었으나, 당장 급한 일은 지붕보다는 모내기였다.

닷새 후에 드디어 모내기까지 일단락되자 노상추는 동군(洞軍)들에게 역촌의 기와를 옮겨오게 하고, 일단 돌아갔던 개장 소통을 불렀다. 소통은 다음 날 노상추의 집으로 와서 바로 기와 얹는 일을 시작했다. 기와를 얹는 일도 하루 이틀 만에 되는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날씨도 도와줘야 했다. 날이 맑으면 작업이 수월하지만, 비라도 내리면 전혀 작업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노상추의 노비들은 불이 난 이래로 거의 한 달 가까이 지붕 없는 집에서 매일 지내야 했다.

닫기
닫기
관련목록
시기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장소 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