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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수령의 주요업무,
수령7사(守令七事)

이정철


조선왕조는 국왕이 나라의 주권을 가진 ‘王國’이었지만, 유학을 국정 운영의 원칙으로 삼았다. 두 가지는 얼핏 서로 대립하지 않을 것처럼 생각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유학에서 통치권의 정당성은 민생(民生)과 안민(安民)에 있지 국왕의 절대 권력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맹자가 역성혁명을 정당화하는 곳이 바로 이 둘의 충돌 지점이다. 그는 백성이 귀하고 군주는 가볍다고 명확히 천명했다. 때문에 명목적으로든, 아니면 상투적으로든 조선 국왕은 끊임없이 백성의 안위를 염려해야 했다. 국왕의 권력을 신에게 받았다는 서양의 ‘왕권신수설’ 같은 주장이 조선에서는 나올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같은 조선시대 연대기에 반복해서 나오는 말이 있다. 민생에 가장 깊고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바로 수령과 그들을 관리 감독하는 관찰사라는 말이다. 이들보다 더 강한 힘을 가졌어도 멀리 떨어져 있는 국왕과 조정 대신들은 민생에 간접적일 뿐이라는 뜻이다. 정상적으로 업무를 수행하는 국왕이라면 보여주는 모습이 있다. 새로 임명받은 수령이 임지로 출발할 때 국왕은 그들에게 다시 한 번 임무에 충실할 것을 당부하곤 했다. 국왕의 그런 행동은 상투적이거나 의례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꼭 그렇지는 않았다.

중앙정부가 관리를 파견해서 지방을 행정적 사법적으로 직접 지배하는 것이 한국인들 눈에는 자연스럽다. 길게 보면, 고려가 건국된 10세기 이래 1995년 지방자치제에 따라 광역 및 기초단체장을 선거로 뽑기까지 장구하게 이어진 행정 관행 때문이다. 하지만 세계사적인 차원에서 보면 그것은 전혀 일반적인 일도, 쉬운 일도 아니다. 유럽의 봉건제에서 볼 수 있듯이,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의 지배를 지방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지역마다 그 지역을 긴 세월 지배한 세력이 있게 마련이었다. 영지 내 사람들에 대한 영주의 통치가 공정한지 아닌지를 따지는 일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았다. ‘왕권신수설’은 괜히 나왔던 게 아니다.


영월 관아 시설 중 객사 ‘관풍헌(觀風軒)’ 도면.
객사는 중앙집권적 왕권을 상징하는 대표적 시설 ⓒ한국국학진흥원


널리 알려졌듯이 조선시대 수령의 주요 업무를 요약한 내용이 ‘수령7사(守令七事)’이다. 수령이 관할 지역을 다스림에 있어서 힘써야 할 사항들이다. ‘수령7사’는 조선시대에 처음 나온 것이 아니다. 이미 고려시대에 ‘수령5사’가 있었다. ‘수령7사’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1406년(태종6)인데, 『경국대전』에 나오는 것과 같은 내용의 ‘수령7사’가 실록에 등장하는 것은 더 나중인 1483년(성종 14)이다. 말하자면 ‘수령7사’ 내용의 일부는 이미 고려시대에 시작되었고, 그 내용도 조금씩 바뀌다가 15세기 후반에 확정되었던 것이다. ‘수령7사’는 고려에서 조선으로 이어지는 오랜 진화 과정의 결과였고, 조선의 지방행정이 최종적으로 도출한 핵심내용이다. 그랬기에 그것은 조선 후기까지도 계속해서 강조되었다.

‘수령7사’의 내용은 이렇다. 농상성(農桑盛, 농업과 양잠에 힘씀), 호구증(戶口增, 호구를 증가시킴), 학교흥(學校興, 학교를 일으킴), 군정수(軍政修, 군정을 정비함), 부역균(賦役均, 부역 부과를 균등하게 함), 사송간(詞訟簡, 사송을 신속하고 분명하게 처결함), 간활식(奸猾息, 교활하고 간사한 버릇을 그치게 함)이 그것이다. 이 7가지는 다시 세 범주로 나눠 볼 수 있다. 농상성, 호구증, 학교흥, 부역균은 행정, 사송간, 간활식은 사법, 그리고 군정수는 군사 영역이다.

‘농상성’이 ‘수령7사’의 첫 번째로 나온 것은 당연하다. 농업은 조선의 기간산업이다. 더구나 고려 말의 외침과 정치적 경제적 혼란을 실질적으로 극복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경제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비록 새로운 나라 조선을 세웠지만, 백성들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면 헛일에 불과했다. 새로 세운 나라를 빨리 안정시키고, 민생을 회복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농상성’이었다. 지방관이 현지에 부임하기 전에 세종이 그때마다 불러서 가장 강조했던 것 역시 ‘농상성’이었다.

‘호구증’은 민생의 지표였다. 적어도 수령의 관할 지역에서 호구수가 증가했다면 종합적으로 볼 때 삶의 조건이 개선되고 있음을 뜻한다. 근대사회 이전 사람들은 삶을 위협하는 다양한 요소들에 상시적으로 노출되어 있었다. 흉년이 들거나, 심각한 자연재해가 들면 사람들은 살던 자리를 지킬 수 없었다. 세금이 고르지 않거나 지나쳐도 마찬가지였다. 살던 자리에서 죽거나 조건이 조금이라도 나은 곳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어찌되었든지 살던 곳을 지켜서 살지 못한다는 것은 삶의 조건이 악화되었음을 뜻한다. 조선은 그 일차적 책임을 수령에게 물었다. 수령은 이런 상황에 대비하여 평시에 구휼물자를 준비해야 했고, 그렇지 못하면 중앙정부에 요청해서라도 물자를 끌어와야 했다.


나주향교 배치도.
향교는 조선시대 지방교육 기관으로 수령은 향교 설립과 관리, 교육 전반을 관리했다. ⓒ나주향교


‘학교흥’과 ‘군정수’는 고려시대 ‘수령5사’에는 없던 내용이다. 조선은 이 두 가지 사항을 새롭게 강조했다. 태조는 즉위교서에서 이미 향교의 설치를 강조하였다. 사실상 조선 국가기구의 기틀을 잡은 태종은 태조 이상으로 향교 설치에 온 힘을 쏟았다. 이렇듯 국가적 차원에서 향교 설치를 강조했던 것은 국가의 지배이념을 불교에서 유교로 바꿨던 것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었다. 수령들은 향교 설립, 향교 건물의 수리, 향교 학생의 모집과 그들에 대한 교육 내용 등을 점검하고 보고해야 했다.

조선시대에는 서울뿐 아니라 지방에서도 수령이 책판(冊板)을 제작하여 서책을 간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지방 향교에서 책이 필요했기 때문인데, 기본적으로 ‘학교흥’과 관련해서 진행되었던 일이다. 잘 나가던 중앙의 관리가 지방 고을 수령으로 자원해서 나가는 경우가 간혹 있었다. 자기 조상의 문집을 간행하기 위해서 그리했던 것이다.

수령은 한 고을에 대해 전권을 행사했다. 따라서 행정, 사법 권한과 함께 군사문제에 대한 권한도 가졌다. 이 권한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백성들 삶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수령이 반드시 챙겨야 하는 군사적 업무는 얼핏 생각해도 여러 가지이다. 군적(軍籍) 작성, 군사 충원, 병사를 시기에 맞춰 서울과 변경으로 보내는 일, 군대 훈련, 군기(軍器) 제작과 관리, 성 쌓기 등이 그것이다. 모두 성인 남성들에게 물자를 거두고, 그들의 노동력을 동원하고, 그들을 먼 곳으로 보내는 일이다. 성인 남성과 관련되니, 자연히 그가 가장인 한 가족 모두와 관련된 일이었다. 공정하지 않거나, 조금만 지나쳐도 백성들이 받는 부담과 고통은 대단히 커지는 일들이었다.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이 모든 사항을 수행했을 때 비로소 ‘군정수(軍政修)’가 되는 것이다.



수령은 사송(詞訟)과 옥송(獄訟)의 재판을 관장했다. 전자가 개인 간 사적 분쟁에 대한 것이라면 후자는 강도, 살인, 반역 등 중대 범죄와 관련된 것이다. 요즘 식으로 말한다면 사송은 민사사건에, 옥송은 형사사건에 가깝다. ‘수령7사’에서 옥송이 아닌 사송을 강조한 것은 조선정부가 백성들 삶에 대해서 깊이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옥송보다는 사송이 훨씬 자주 발생하고, 백성들 삶과 깊이 연관되기 때문이다. 사송은 대부분 재화의 소유권 분쟁에 대한 것이었다. 전답(田畓)・전택(田宅)・산지(山地)・노비(奴婢) 등에 관한 것과 상속(相續)・처첩(妻妾)・혼인(婚姻)・양자(養子) 등 신분상 문제들이었다. 수령의 심리는 신속한 처리가 요구되었다. 『경국대전』에는 사송과 옥송의 처결 기한이 규정되어 있다. 재판에 필요한 문서가 모두 제출되고 증거가 모두 도착한 날로부터 사죄(死罪)는 30일, 도(徒)・유형(流刑)은 20일, 태(笞)・장형(杖刑)은 10일을 기한으로 했다.

‘수령7사’의 다른 항목들이 그 항목명만으로 내용이 곧 짐작되는 것에 비해서 ‘간활식’은 그렇지 못하다. 하지만 ‘수령7사’ 항목의 내용은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이다. ‘간활식’은 강력한 재지세력에 대한 억제를 뜻했다. 강력한 재지세력으로 흔히 두 범주를 들 수 있는데 향리(鄕吏)와 품관(品官)이 그들이다. 향리는 지역에 뿌리박은 채 행정실무를 장악한 사람들이다. 또 품관은 현직에 있지는 않지만 관품을 가진 사람들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들이 법을 어기고 사사로이 백성들을 수탈하는 것에 대한 질타와 고발이 가득하다.

조선은 고려와 달리 전국 모든 행정단위에 수령을 보내어 다스렸다. 얼핏 보면 중앙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고려시대보다 훨씬 강화된 것처럼 보이지만, 겉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오랜 세월 권세를 유지해온 지방 세력을 일시에 제압할 수는 없었다. 물론 건국 초창기인 15세기에는 중앙정부가 이들에 대해서 강력한 억제정책을 폈다. 하지만 이들의 도움이 없이 중앙정부가 지방을 지속적으로 다스릴 수는 없었다. 결국 16세기가 되면 중앙정부도 제지세력을 어느 정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한 인정의 대가로 수령은 어느 정도 이들의 도움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재지세력에 대해서 근본적으로는 경계의 시선을 유지했다. 그것이 바로 ‘간활식’이다.

얼마 뒤면 민선 7기 자치단체장과 기초의원을 뽑는 6·13 지방선거이다. 지금 한국이 과거의 조선이 아니듯이 이번에 뽑히는 사람들이 조선시대 수령은 아니다. 하지만 지역의 살림을 운영한다는 점에서 비슷한 점이 많다. 조선시대 고을 수령이 해야 할 일의 중점은 ‘수령7사’에 담겨있다. 오늘날은 어떨까? 얼핏 봐도 비슷한 점이 적지 않다.




집필자 소개

이정철 박사
이정철
조선시대의 경제 정책인 대동법에 대해서 연구했다. 제도 변동을 통해서 제도와 인간 사이의 상호작용을 밝히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저서로 <대동법, 조선최고의 개혁>, <언제나 민생을 염려하노니> 등이 있다
“헤아리기 어려울만큼의 선정을 베푼 고을수령, 떠날 때 백성들이 눈물로 길을 막다”

서찬규, 임재일기, 1852-02-22

1852년 2월 22일, 홍직필 선생의 사위인 진사 민경호가 선생을 모시고 앉았다. 오곡 어른의 정치력 이야기가 나오자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그의 재량을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실은 헤아리기 어려운 바가 있다. 이 읍에 거주할 때에 어떠한 덕정(徳政)을 행하여 백성에게 이러한 믿음을 얻어서 떠난 뒤에 생각함이 더욱 간절하며, 시흥(始興)으로 옮길 때 과천(果川) 백성들이 길을 막고 눈물을 흘리기를 갓난아기를 잃은 것 같이하니, 과연 그가 백성에게 선정(善政)이 있었는가. 내가 평소에 그의 삼가고 성실함을 허여하였을 뿐인데, 지금 이와 같이 순량(循良)하게 될 줄은 생각지 못하였다.”

“예안현감 박선장이 파직되다”

김광계, 매원일기, 1609-04-05 ~

1609년 4월 5일, 아침에 제천 할아버지를 뵈러 갔던 김광계는 너무 애석한 소식을 듣고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작년 6월에 예안현에 부임하여 아직 한해도 안 된 현감 박선장(朴善長)이 파직되었다는 것이다. 그 이전 현감인 안담수(安聃壽)가 파직되었을 때는 예안현의 모든 사람들이 속이 시원하다며 좋아했는 데, 이번 박 현감의 파직 소식은 그야말로 애석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박선장은 예안현에 부임하여 마을 백성들의 사정을 살피고 자상하고도 소탈하 게 고을을 다스렸고, 가혹하게 조사하거나, 민간에서 거두어 들여 비용을 충당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박 현감이 처음 예안현에 부임했을 때 전임 안 현감의 비리와 부패로 인해 관아의 창고가 텅텅 비어 모양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형편이었으나, 반드시 필요한 물품만을 마련하여 점차 풍족해져 남아돌기까지 하였다.

“이웃 고을 수령들의 어진 정치를 듣다”

김령, 계암일록, 1631-11-28 ~

1631년 11월 28일, 엄동설한의 추위가 매서웠다. 둘째 아이가 밖으로 출타했다가 돌아왔다. 돌아와서는 요새 이웃 고을을 다스리는 수령들에 대한 이야기를 김령에게 들려주었다. 듣자하니 의성의 현령으로 부임한 정세규(鄭世規)는 자상하고 온화하여 백성을 보살피는 일에 온 마음을 쏟는다고 한다.
관아 창고에서 빌려간 곡식을 거두어들일 때가 되었는데, 이웃 고을에서는 모두 매질을 하며 급박하게 다그쳐 원곡을 채우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정세규는 “이러한 흉년을 당해 어찌 차마 백성들의 삶을 어렵게 만드는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내 차라리 죄를 받아서 파직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 일은 못하겠으니, 다그쳐 받아들이는 일을 그만두라.”라고 지시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백성들이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없는 곡식을 쥐어짜서 원곡을 갚은 것이 많았다고 한다. 혹시나 어진 수령이 파직되면 어쩌나 하는 백성들의 걱정이 이러한 기적 같은 일을 해낸 것이다.
경상 감사인 오숙(吳䎘)의 선정도 못지않았다. 오숙이란 사람은 매우 명민하게 다스렸는데, 온갖 폐단을 제거하는 데 힘을 쏟아 정사를 잘 한다는 명성이 자자했다. 전임 감사 조희일(趙希逸)이란 자는 아주 형편이 없었는데, 후임 관찰사인 오숙이 조희일이 행한 정치를 모두 뒤집어 개혁하니, 우러러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신임 예안현감 나무송이 부임하다”

김령, 계암일록, 1630-12-14 ~

1630년 12월 14일, 날씨가 맑고 바람이 불었다. 지난달 말 예안 고을의 수령이 교체되었다. 온갖 악행을 일삼던 김진이 수령에서 물러나고, 신임 현감으로 나무송이란 자가 부임하였다. 김령은 그를 잘 알지 못하였으나 며칠 간 그의 행실과 소문을 들어보니 사람됨이 성실하고 활달하여 속이고 꾸미는 짓을 일삼지 않는 듯 하였다. 또 어진 이를 존경하고 선비들을 아껴서 사대부의 풍모가 있는 듯 하였다. 실로 전임 현감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러나 굳세고 명철한 면을 다소 부족한 듯이 보였다. 이런 성격들은 자신의 생각을 굳게 지키는 면이 부족하게 마련인데 그 면이 다소 걱정이 되었다. 또 스스로 하고자 하는 일은 곧바로 자신의 뜻대로 행하는데 그 과정에서 다른 이야기나 상황은 크게 살펴보지 않은 점도 가진 듯 하였다. 이 면은 한편으로는 걱정스럽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가 속이는 짓을 행하지 않는데서 말미암은 것이기에 장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가 속이는 마음이 있다면 처음 부임한 고을에서 지금처럼 행동하지는 않을 듯 하였다. 그가 사람들을 잘 인도할 수 있다면 반드시 좋은 정치를 할 수 있을 듯 하였다.

“예안 현감 홍석우의 어리석음을 논하다”

김령, 계암일록, 1631-11-07 ~

1631년 11월 7일, 매우 추운 날씨였다. 근래 들리는 말에 의하면 예천 군수 허휘(許徽), 의성 현령 정세규(鄭世規)가 백성들을 잘 다스린다는 명성이 널리 퍼져 있었다. 김령이 보기에는 풍기 군수인 김상윤(金尙尹)도 백성들을 잘 다스렸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의성 현령이 가장 백성들을 아껴서 옛날 선량한 관리의 풍모가 있었다. 안동 부사인 홍명구(洪命耉) 또한 정사에 재능이 있었으나, 판관인 윤정(尹淨)은 가렴주구가 날로 심하여 백성들이 모두 원망하고 욕을 하는 실정이었다.
김령이 사는 예안현의 수령은 홍석우(洪錫禹)란 자였는데, 어둡고 괴팍하여 일을 헤아려 처리할 줄 모르고 오직 형벌만을 앞세워 위엄을 세우는 것에 급급하였다. 그리하여 일을 처리하는 결정이 모두 아전의 수중에 있었고, 수령은 망령되게 교만을 부리며 성내고 화내는 것이 일정하지 않았다. 최근 우처인(禹處仁), 황유장(黃有章) 등 10여 명이 글을 올려 집안이 가난하여 환곡을 갚지 못하겠으니, 다른 곡식으로 대신 납부하거나 아니면 그 반만 납부할 수 있도록 청하였다. 그러자 홍석우가 크게 노하여 사찰관에게 매질을 하면서 말하기를 “네가 독촉하지 않은 까닭에 이러한 건의가 올라온 것이다.”라고 탓하였고, 더불어 권농관까지 매질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상서를 올렸던 우처인이 사찰관의 억울함을 불쌍히 여겨 다시 호소하기를 “사찰관이 독촉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스스로 마련하지 못하여 그런 글을 올린 것이니, 사찰관의 죄가 아닙니다.”라고 호소하였다. 그러자 홍석우가 다시 화를 내면서 우처인의 머리채를 잡아 쥐고 끌고 가니 거의 목이 빠질 뻔하였다. 그리고 다음날에는 우처인의 종을 잡아들이라 명하였다고 한다.

“고을수령과 지방토호의 기싸움”

김령, 계암일록,
1607-03-13 ~ 1614-11-01

1607년 3월 13일, 들으니, 우리 읍의 새 수령이 풍산의 안담수라고 했다.
윤6월 13일, 우리 읍의 수령 안담수의 첩은 읍내 사람 권학(權鶴)의 딸이다. 안담수가 그의 첩의 친족인 권산해(權山海)와 노비 문제로 소송을 했는데, 안담수가 위세로 누르려 하자 산해가 공손하지 못한 말을 했다. 안담수가 크게 화를 내어 산해를 차꼬에 채워 옥에 가두고 토호가 수령을 능욕했다며 감사에게 보고했다.
산해의 처 동생인 봉화 사람 변흠(邊欽)이 감사가 진주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그 이유를 호소했다. 감사가 바로 호소를 받아들여 예안에서 올린 첩정의 끝에 뎨김[題音]했다.
“현감의 처사가 아주 이치에 맞지 않으므로, 속히 산해를 풀어주고 또 현감은 높은 직위가 아니므로 사건은 반드시 서로 소송해서 결말을 보아야 하기 때문에 영천군(榮川郡)으로 이관하는 것이 옳다.”
이렇게 처분하자 안담수가 크게 부끄러워했다. 감사의 공평하고 정직함과 지혜롭고 사리에 밝음이 이와 같았다.
9월 27일, 들으니 우리 고을 수령 안(安) 공이 고강(考講)할 유생을 불렀는데, 주패(朱牌)를 사용했다고 한다. 해괴하고도 우습다.
1608년 2월 27일, 듣자하니, 평보 형이 우리 고을 수령 안담수에게 욕을 보았다고 한다. 지난 23일 우리들이 함께 제천 표숙댁에 갔을 때, 이지(以志)가 자기의 집에 관아에서 손님이 왔다는 말을 듣고 먼저 일어서서 나갔다. 우리들은 돌아올 때 이지를 불러내었는데, 관아에서 온 손님도 따라 나왔다. 그는 즉 우리 고을 수령의 처조카이고, 이지에게는 내외종간이 되는데, 이름이 이할(李硈)이다. 땅바닥에 앉아 잠시 있다가 헤어졌다.
이할이 여러 가지 말을 지어내어 두 형을 헐뜯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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