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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로 본 역사이야기

뭉치면 백성이고 흩어지면 도적이다

홍윤정


2010년 개봉한 영화 <방자전>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의 매력적인 주인공들을 넘어, 가히 씬스틸러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또 하나의 배우를 기억할 것이다. 마치 영화 <넘버쓰리>에서, 후배들을 개 패듯 두들겨 팬 다음에, 애써 분노를 삭이며 “배... 배신이야 배신!”을 외쳤던 송강호를 발견한 그 때 그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의 이름은 송새벽, 변학도를 연기한 배우다.

영화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춘향과 몽룡, 방자의 관계와 캐릭터를 살짝 비틀어 전혀 생각지 못했던 서사로 조명했음은 물론, 클리셰처럼 굳어져있던 조선시대의 ‘사또 변학도’의 이미지를 완전히 새롭게 풀어냈다. 혹여 19금 영화라는 시각으로만 보면 놓치고 지나갈 미덕들이 많다는 이야기다.

과거를 치르고 합격해 청운의 꿈에 부풀었던 몽룡이, 막상 암행어사라는 직책을 부여받고는, 겨우 이거 할라고 그렇게 노력했나 싶어, 과거시험 동기이자, 지방관으로 부임하게 된 변학도와 마주 앉아 실망감을 토로하자 어눌한 전라도 사투리로 변학도가 이렇게 답한다.

“난 진작에 알았어요, 별 거 아닐 줄. 난 솔직히 더 많은 여자와 잘라고 한 거예요. 아무래도 현감이면 그 고을 웬만한 여자들하곤 다 잘텐데... 전 인생 목표가 뚜렷해요. (원색적인 손동작) 이게 젤 좋아요. 그 외엔 아무것도 관심이 안 가요.”


영화 <방자전> 중 ‘변학도’(송새벽)가 ‘춘향’(조여정)을 주시하는 장면. ⓒ영화<방자전>홍보사진


이 부분에서 웃음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아, 변학도라면 그럴 수도 있겠구나. 지방수령이 반드시 목민(牧民)에 대한 원대한 꿈을 갖고 부임해야 할 필요는 없지(물론 변학도 입장에선 저걸 원대한 꿈이라 할 수도 있겠다).’ 싶어, 작가 입장에서 허를 찔린 느낌이었다.

변학도의 범상치 않은 캐릭터는 남원에 부임하자마자 향리들이 열어준 환영잔치에서도 나타난다. 사실 우리는 많은 사극에서, 이방이란 인물이 사또 옆에서 콧소리를 내며 “예이~~~~~ 사또오~~~” 정도나 하는 모습을 보았지만, 사실 향리와 수령의 관계는 끊임없는 기싸움의 관계였다. 향리들은 2대, 3대를 이어 아전노릇을 해온, 지방의 유지, 터줏대감들이었다. 임기를 마친 수령은 떠나도 향리들은 떠나지 않는다. 백성들이 향리들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이유다. 특히 영화 속 변학도처럼 지방관으로 첫 부임하는 젊은 관리라면, 꼼짝없이 그 지방 향리들에게 기가 눌리기 십상이다. 영화 속에서도 남원의 호방은 변학도에게 술을 따라주며 겉으론 공경하는 체하지만, 은근히 ‘일 만들까봐 걱정이다. 제발 뭣도 모르면서 나서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그러나 우리의 범상치 않은 변학도가 당하고만 있을쏜가. 춘향이 말을 안 듣는다는 빌미로, 호방과 춘향, 그리고 방자를 닥치는 대로 때린다. 심지어 주전자 뚜껑으로... 잔치자리는 선혈이 낭자한 공포의 자리로 변한다. 앞으로 그에게 아무도 함부로 하지 못하리란 것은 당연지사다.

1609년에 쓰여진 김광계의 ‘매원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박선장은 예안현에 부임하여 마을 백성들의 사정을 살피고 자상하고도 소탈하게 고을을 다스렸고, 가혹하게 조사하거나, 민간에서 거두어 들여 비용을 충당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박 현감이 처음 예안현에 부임했을 때 전임 안 현감의 비리와 부패로 인해 관아의 창고가 텅텅 비어 모양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형편이었으나, 반드시 필요한 물품만을 마련하여 점차 풍족해져 남아돌기까지 하였다. 이전의 수령들은 모두 관아 창고의 원곡(元穀)을 마음대로 사용하다가 마침내 모자라면 민간에서 마구 거두어 들여 원성이 높아지고 그 폐단이 많았으나 박 현감은 그렇게 하지 않아서 예안 현의 백성들은 모두 현감을 칭송하며 안정되게 살게 되었는데

(...)

박 현감이 파직된 이유는 다음날 알 수 있었는데, 담당 아전인 오학(吳鶴)이 꾸민 짓이라는 것이다. 박 현감은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가 상부에 예안현감이 세초군(歲抄軍)에 관한 일을 “끝내 거행하지 않았다”고 보고하여 결국 파직되었는데, 이 일은 담당 아전인 오학(吳鶴)이 자신의 사사로운 감정으로 박 현감을 파직시키려고 일부러 일을 일으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는 재작년부터 지방 수령이 등장하는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자료조사를 해왔는데, 임금을 대신해 백성을 사랑하고 돌본 수많은 지방관들의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미디어에서 흔히 다루던 ‘탐관오리’가 아닌, ‘좋은 지방관’들이 곳곳에 존재했다는 것이다.

좋은 지방관, 즉 수령이란, 무엇보다 수령칠사(守令七事, 고을 다스리는 수령이 힘써야 할 일곱 가지)를 잘 해내는 이를 말한다. 그 일곱 가지는 농상성(農桑盛, 농사를 성하게 함), 호구증(戶口增, 호구를 늘림), 군정수(軍政修, 군정을 닦음), 부역균(賦役均, 부역을 균등하게 함)과, 학교흥(學校興, 학교를 일으킴), 사송간(詞訟簡, 소송을 간명하게 함), 간활식(奸猾息, 교활하고 간사한 버릇을 그치게 함)이다. 현재라 치면,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고루 나누어 해야 할 일을, 비록 향리들이 있다고는 하나, 수령이 도맡아 해야 했기 때문에 그들의 하루는 무척이나 바빴다. 수령들은 묘시(새벽 5 ~7시)에 출근해 유시(저녁 5 ~ 7시)에 퇴근했다고 하니, 꼬박 열두 시간을 동헌에 나와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들의 임무는 동헌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수령의 7가지 주요 업무 가운데 그 첫 번째는 농상성(農桑盛, 농사를 성하게 함)으로
고을 사람들이 굶주리지 않게 하는 것. ⓒ정석호


단적인 예로, 수령칠사의 첫째인 ‘농상성’을 위해 많은 수령들이 직접 땅을 개간하고, 작물을 재배하거나, 농법서를 쓰기까지 했는데, 우리가 잘 아는 주세붕(周世鵬)은 풍기군수로 가서, 비로소 인삼을 재배하기 시작했다고 하니, 풍기인삼의 시작이 그때부터다. 그는 5년간 풍기에 있는 동안 백성들의 구황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고, 후에 황해도 관찰사로 임명되어 갔을 때 개성에 인삼을 재배토록 했다고 전해진다.

동래 부사를 지낸 조엄도 마찬가지다. 그는 서른여덟의 나이로 동래에 부임했는데, 당시 동래부는 ‘왜’와의 외교와 무역을 관장하는 중심지였다. 당시 조선은 일본에서 물품을 수입하고 면포로 결제했는데, 조엄은 이 과정에 폐단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면포 대신 돈을 받아 지급하는 형태로 조선의 생산자와 왜의 상인 모두를 만족시켰다. 그런데 조엄의 특별한 공로는 다른 데에 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통신사로 선발되어 ‘왜’를 방문했을 때, 쓰시마섬에서 고구마 종자를 몰래 들여온 것이다. 조엄의 사행 기록인 ‘해사일기(海槎日記)’에는 고구마에 대해 이렇게 적혀 있다.

“이 섬에 먹을 수 있는 풀뿌리가 있는데, 감저(甘藷) 또는 효자마(孝子麻)라 불리었다. 왜음으로 고귀마(古貴麻)라고 하는 이것은 산약(山藥)과도 같고 무뿌리와도 같으며 오이나 토란과도 같아 그 모양이 일정하지 않았다. (...) 그것은 생으로 먹을 수도 있고, 구워서도 먹으며 삶아서 먹을 수도 있었다. 곡식과 섞어 죽을 쑤어도 되고 썰어서 정과(正果)로 만들어도 된다. 떡을 하거나 밥에 섞는 등 되지 않는 것이 없으니 흉년 때 지낼 밑천으로 좋을 듯하였다.”

조엄은 고구마 종자를 부산진과 동래부 아전들에게 나누어 주어 재배하도록 하였다. 백성의 구휼작물로 더없이 적합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수령들이 백성의 구휼에 애썼던 것은 그만큼 백성의 삶이 팍팍하다는 반증이다. 단지 가뭄이나 홍수 같은 자연 재해 때문이 아니라 ‘인재’라 불리는 잘못된 제도와 수탈의 콜라보가 언제나 없는 이들을 사지로 내몰았다.

2014년의 영화, <군도:민란의 시대>를 보면 이 같은 참상이 잘 드러나 있다. 탐관오리와 지방 토호의 작당으로 땅을 빼앗기고 가족을 빼앗긴 백성들은 결국 도적떼가 되는 외엔 살 방법이 없다. 영화의 첫 시퀀스에서 나주목사 최현기 집에 들이닥친 군도 무리의 대호는 목민심서의 한 구절을 읽으며 그를 응징한다.


영화<군도: 민란의 시대> 중 ‘대호’(이성민)가 나주목사 ‘최현기’(김종구)의 집에 들이닥쳐 응징하는 장면
ⓒ영화<군도:민란의시대>홍보사진


“오늘날 백성을 다스리는 자들은 오직 거두어들이는 데만 급급하고, 백성을 부양할 바를 알지 못하니 이 때문에 하민들은 여위고 곤궁하고 병까지 들어 진구렁 속에 줄이어 가득한데도 그들을 다스리는 자는 바야흐로 고운 옷과 맛있는 음식에 자기만 살찌고 있으니 슬프지 아니한가.”

영화는 땡중과 양반, 평민, 백정이 뒤섞인 도적떼 군도의 시원한 활약상을 보여주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그들을 위해 일하는 목민관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어 씁쓸하다. 죽은 나주목사와 그의 후임 나주목사, 그리고 관찰사까지, 모두 한 덩어리가 되어 백성들을 엄혹하게 다룬다.

6.13 지방선거로 온 나라가 뜨겁다. 여야의 대립으로 단식투쟁과 막말이 오가는 가운데, 국회는 민생법안 처리도 못하고 소득 없이 회기를 마감했다. 무노동 무임금 원칙대로, 일하지 않는 국회의원의 세비를 주지 말자는 국민청원까지 등장했지만, 발의돼도 번번이 유야무야되는 ‘국회의원 국민소환제’ 법안처럼, 아마도 실현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그나마 국민들에게 ‘직접선거’라는 권리가 주어졌음이 얼마나 다행인지... 그 때문에 평소 큰소리 땅땅 치던 의원 나으리들이 갑자기 점퍼로 갈아입고 먼지 날리는 사거리에 서서 ‘한번만 도와주세요’, ‘싹 다 바꾸겠습니다’ 라 쓰인 피켓을 들고 넙죽넙죽 절이라도 하는 게 아닌가. 일회성이든 아니든 국민의 눈을 의식한다는 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일회를 2회로, 그리고 10회로, 항상으로 늘리게 하면 될 일이다. 우리 손으로 뽑은 이들이 제대로 일을 해내도록하기 위해 국민 역시 더 부지런하고 지혜로워져야 한다.

군도의 첫 시작에서 백정 도치가 말했다.
“뭉치면 도적이고 흩어지면 백성이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에서 도치는 이렇게 외친다.
“뭉치면 백성이고 흩어지면 도적이다.”

뭉치자, 백성들아! 우리를 편 가르는 그 어떤 시도도 용납하지 말고 전진하자꾸나!





작가 소개

홍윤정
홍윤정
1999년에 KBS 시트콤 작가로 데뷔, 드라마와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 중이다.
대표작은 영화 <수상한 그녀>, <반창꼬>, <블랙가스펠>, <최강로맨스> 등이며, <수상한 그녀>로 춘사영화상 각본상을 수상했다.
“헤아리기 어려울만큼의 선정을 베푼 고을수령, 떠날 때 백성들이 눈물로 길을 막다”

서찬규, 임재일기, 1852-02-22

1852년 2월 22일, 홍직필 선생의 사위인 진사 민경호가 선생을 모시고 앉았다. 오곡 어른의 정치력 이야기가 나오자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그의 재량을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실은 헤아리기 어려운 바가 있다. 이 읍에 거주할 때에 어떠한 덕정(徳政)을 행하여 백성에게 이러한 믿음을 얻어서 떠난 뒤에 생각함이 더욱 간절하며, 시흥(始興)으로 옮길 때 과천(果川) 백성들이 길을 막고 눈물을 흘리기를 갓난아기를 잃은 것 같이하니, 과연 그가 백성에게 선정(善政)이 있었는가. 내가 평소에 그의 삼가고 성실함을 허여하였을 뿐인데, 지금 이와 같이 순량(循良)하게 될 줄은 생각지 못하였다.”

“예안현감 박선장이 파직되다”

김광계, 매원일기, 1609-04-05 ~

1609년 4월 5일, 아침에 제천 할아버지를 뵈러 갔던 김광계는 너무 애석한 소식을 듣고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작년 6월에 예안현에 부임하여 아직 한해도 안 된 현감 박선장(朴善長)이 파직되었다는 것이다. 그 이전 현감인 안담수(安聃壽)가 파직되었을 때는 예안현의 모든 사람들이 속이 시원하다며 좋아했는 데, 이번 박 현감의 파직 소식은 그야말로 애석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박선장은 예안현에 부임하여 마을 백성들의 사정을 살피고 자상하고도 소탈하 게 고을을 다스렸고, 가혹하게 조사하거나, 민간에서 거두어 들여 비용을 충당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박 현감이 처음 예안현에 부임했을 때 전임 안 현감의 비리와 부패로 인해 관아의 창고가 텅텅 비어 모양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형편이었으나, 반드시 필요한 물품만을 마련하여 점차 풍족해져 남아돌기까지 하였다.

“이웃 고을 수령들의 어진 정치를 듣다”

김령, 계암일록, 1631-11-28 ~

1631년 11월 28일, 엄동설한의 추위가 매서웠다. 둘째 아이가 밖으로 출타했다가 돌아왔다. 돌아와서는 요새 이웃 고을을 다스리는 수령들에 대한 이야기를 김령에게 들려주었다. 듣자하니 의성의 현령으로 부임한 정세규(鄭世規)는 자상하고 온화하여 백성을 보살피는 일에 온 마음을 쏟는다고 한다.
관아 창고에서 빌려간 곡식을 거두어들일 때가 되었는데, 이웃 고을에서는 모두 매질을 하며 급박하게 다그쳐 원곡을 채우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정세규는 “이러한 흉년을 당해 어찌 차마 백성들의 삶을 어렵게 만드는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내 차라리 죄를 받아서 파직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 일은 못하겠으니, 다그쳐 받아들이는 일을 그만두라.”라고 지시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백성들이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없는 곡식을 쥐어짜서 원곡을 갚은 것이 많았다고 한다. 혹시나 어진 수령이 파직되면 어쩌나 하는 백성들의 걱정이 이러한 기적 같은 일을 해낸 것이다.
경상 감사인 오숙(吳䎘)의 선정도 못지않았다. 오숙이란 사람은 매우 명민하게 다스렸는데, 온갖 폐단을 제거하는 데 힘을 쏟아 정사를 잘 한다는 명성이 자자했다. 전임 감사 조희일(趙希逸)이란 자는 아주 형편이 없었는데, 후임 관찰사인 오숙이 조희일이 행한 정치를 모두 뒤집어 개혁하니, 우러러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신임 예안현감 나무송이 부임하다”

김령, 계암일록, 1630-12-14 ~

1630년 12월 14일, 날씨가 맑고 바람이 불었다. 지난달 말 예안 고을의 수령이 교체되었다. 온갖 악행을 일삼던 김진이 수령에서 물러나고, 신임 현감으로 나무송이란 자가 부임하였다. 김령은 그를 잘 알지 못하였으나 며칠 간 그의 행실과 소문을 들어보니 사람됨이 성실하고 활달하여 속이고 꾸미는 짓을 일삼지 않는 듯 하였다. 또 어진 이를 존경하고 선비들을 아껴서 사대부의 풍모가 있는 듯 하였다. 실로 전임 현감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러나 굳세고 명철한 면을 다소 부족한 듯이 보였다. 이런 성격들은 자신의 생각을 굳게 지키는 면이 부족하게 마련인데 그 면이 다소 걱정이 되었다. 또 스스로 하고자 하는 일은 곧바로 자신의 뜻대로 행하는데 그 과정에서 다른 이야기나 상황은 크게 살펴보지 않은 점도 가진 듯 하였다. 이 면은 한편으로는 걱정스럽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가 속이는 짓을 행하지 않는데서 말미암은 것이기에 장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가 속이는 마음이 있다면 처음 부임한 고을에서 지금처럼 행동하지는 않을 듯 하였다. 그가 사람들을 잘 인도할 수 있다면 반드시 좋은 정치를 할 수 있을 듯 하였다.

“예안 현감 홍석우의 어리석음을 논하다”

김령, 계암일록, 1631-11-07 ~

1631년 11월 7일, 매우 추운 날씨였다. 근래 들리는 말에 의하면 예천 군수 허휘(許徽), 의성 현령 정세규(鄭世規)가 백성들을 잘 다스린다는 명성이 널리 퍼져 있었다. 김령이 보기에는 풍기 군수인 김상윤(金尙尹)도 백성들을 잘 다스렸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의성 현령이 가장 백성들을 아껴서 옛날 선량한 관리의 풍모가 있었다. 안동 부사인 홍명구(洪命耉) 또한 정사에 재능이 있었으나, 판관인 윤정(尹淨)은 가렴주구가 날로 심하여 백성들이 모두 원망하고 욕을 하는 실정이었다.
김령이 사는 예안현의 수령은 홍석우(洪錫禹)란 자였는데, 어둡고 괴팍하여 일을 헤아려 처리할 줄 모르고 오직 형벌만을 앞세워 위엄을 세우는 것에 급급하였다. 그리하여 일을 처리하는 결정이 모두 아전의 수중에 있었고, 수령은 망령되게 교만을 부리며 성내고 화내는 것이 일정하지 않았다. 최근 우처인(禹處仁), 황유장(黃有章) 등 10여 명이 글을 올려 집안이 가난하여 환곡을 갚지 못하겠으니, 다른 곡식으로 대신 납부하거나 아니면 그 반만 납부할 수 있도록 청하였다. 그러자 홍석우가 크게 노하여 사찰관에게 매질을 하면서 말하기를 “네가 독촉하지 않은 까닭에 이러한 건의가 올라온 것이다.”라고 탓하였고, 더불어 권농관까지 매질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상서를 올렸던 우처인이 사찰관의 억울함을 불쌍히 여겨 다시 호소하기를 “사찰관이 독촉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스스로 마련하지 못하여 그런 글을 올린 것이니, 사찰관의 죄가 아닙니다.”라고 호소하였다. 그러자 홍석우가 다시 화를 내면서 우처인의 머리채를 잡아 쥐고 끌고 가니 거의 목이 빠질 뻔하였다. 그리고 다음날에는 우처인의 종을 잡아들이라 명하였다고 한다.

“고을수령과 지방토호의 기싸움”

김령, 계암일록,
1607-03-13 ~ 1614-11-01

1607년 3월 13일, 들으니, 우리 읍의 새 수령이 풍산의 안담수라고 했다.
윤6월 13일, 우리 읍의 수령 안담수의 첩은 읍내 사람 권학(權鶴)의 딸이다. 안담수가 그의 첩의 친족인 권산해(權山海)와 노비 문제로 소송을 했는데, 안담수가 위세로 누르려 하자 산해가 공손하지 못한 말을 했다. 안담수가 크게 화를 내어 산해를 차꼬에 채워 옥에 가두고 토호가 수령을 능욕했다며 감사에게 보고했다.
산해의 처 동생인 봉화 사람 변흠(邊欽)이 감사가 진주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그 이유를 호소했다. 감사가 바로 호소를 받아들여 예안에서 올린 첩정의 끝에 뎨김[題音]했다.
“현감의 처사가 아주 이치에 맞지 않으므로, 속히 산해를 풀어주고 또 현감은 높은 직위가 아니므로 사건은 반드시 서로 소송해서 결말을 보아야 하기 때문에 영천군(榮川郡)으로 이관하는 것이 옳다.”
이렇게 처분하자 안담수가 크게 부끄러워했다. 감사의 공평하고 정직함과 지혜롭고 사리에 밝음이 이와 같았다.
9월 27일, 들으니 우리 고을 수령 안(安) 공이 고강(考講)할 유생을 불렀는데, 주패(朱牌)를 사용했다고 한다. 해괴하고도 우습다.
1608년 2월 27일, 듣자하니, 평보 형이 우리 고을 수령 안담수에게 욕을 보았다고 한다. 지난 23일 우리들이 함께 제천 표숙댁에 갔을 때, 이지(以志)가 자기의 집에 관아에서 손님이 왔다는 말을 듣고 먼저 일어서서 나갔다. 우리들은 돌아올 때 이지를 불러내었는데, 관아에서 온 손님도 따라 나왔다. 그는 즉 우리 고을 수령의 처조카이고, 이지에게는 내외종간이 되는데, 이름이 이할(李硈)이다. 땅바닥에 앉아 잠시 있다가 헤어졌다.
이할이 여러 가지 말을 지어내어 두 형을 헐뜯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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