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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말

6월, 국민 스스로의 참여와 열망이
세상을 바꾼다

공병훈


지구라는 행성의 북반구는 6월에 낮이 가장 긴 날들의 시기입니다. 6월의 라틴어 “juniores”는 젊은이를 뜻하는 단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잔혹하고 슬픈 전쟁이었던 한국전쟁이 벌어졌던 달이기도 하지만 1987년의 6월 민주항쟁은 군사정권으로부터 대통령을 직접 선출할 수 있는 권리를 되찾은 날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2018년 6월은 남북의 분단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꾸기 위한 우리 국민의 오랜 염원이 실현될 가능성이 열리기 시작하는 때이기도 하지만 민주주의 꽃인 지방자치 선거에 참여하고 선출되는 때이기도 합니다.

조선에서 관료는 왕의 통치체제를 운영하는 이들이었으며 중국, 일본, 베트남 등과 마찬가지로 관리들은 과거제도를 통해 뽑았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과거 제도는 지역별로 할거하고 있던 귀족이나 권력을 지닌 세력이나 기득권을 지닌 전통적 세력을 대한 견제하고 왕의 통치를 효율적으로 실행할 목민관(牧民官)을 구하기 위한 방안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통령뿐만 아니라 지방자치단체와 지방의회의 구성원들을 국민이 직접 뽑는 방식은 민주주의를 이루는 뿌리를 내리는 과정입니다. 왕의 통치를 실행할 인재가 아니라 국민의 주권을 실행할 인재를 뽑는 의미겠지요. 조선의 목민관은 임금이 책임지고 선출하여 효율적이며 청렴하게 일하도록 관리할 수 도 있었지만 자주 부정부패에 빠지거나 탐관오리로 전락하여 백성들을 압제하는 역할도 했습니다. 하지만 조선의 선배와 학생들이 공부를 생활화하고 백성을 근본으로 삼은 관점은 올바른 목민관이 되고자 하는 꿈 때문이었습니다. 이번 웹진의 주제는 “지방관”입니다.

이정철 선생님은 유학을 국정 운영의 원칙으로 삼고 나라의 주권을 통치하던 국왕이지만 그 정당성은 민생(民生)과 안민(安民)에 있지 국왕의 절대 권력에 있지 않았다는 점을 이야기하십니다. 국왕을 대신하여 민생에 가장 깊고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바로 수령과 그들을 관리 감독하는 관찰사였습니다. 조선시대 수령의 주요 업무였던 수령칠사(守令七事)이던 농상성(農桑盛, 농업과 양잠에 힘씀), 호구증(戶口增, 호구를 증가시킴), 학교흥(學校興, 학교를 일으킴), 군정수(軍政修, 군정을 정비함), 부역균(賦役均, 부역 부과를 균등하게 함), 사송간(詞訟簡, 사송을 신속하고 분명하게 처결함), 간활식(奸猾息, 교활하고 간사한 버릇을 그치게 함)을 설명하십니다.

서정화 선생님은 ‘바다 끝에서’라는 글을 통해 퇴임을 앞둔 기관장의 이야기를 창작 시나리오의 형태를 띠고 있으면서도 글을 읽으면서 한 편의 영화를 상상하며 읽을 수 있도록 구성해 주셨습니다. 글에 나오는 에릭 사티(Erik Satie)의 명곡 짐노페디(Gymnopedi)는 비 내리는 6월의 어느 날에 어울리는 곡입니다. 시를 읊조리는 것처럼 반복되는 선율, 애잔함과 숭고함을 담은 음악에 퇴임을 앞둔 공무원의 심리를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달의 일기에서는 김령의 『계암일록』에 나오는 ‘예안현감의 박절한 손님접대’에 대한 내용을 정용연 작가님의 그림과 함께 담아주셨습니다. 예안 현감 때문에 관노가 말을 타고 사창가를 달려갈 지경으로 기강이 크게 무너지고 명분은 크게 문란해져 다시 어찌 해 볼 수가 없는 몹쓸 땅이 되어버린 예안현 고을에 대한 일기 내용입니다. 부패한 권력의 과거를 청산하는 과정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고 나면 정치인들과 관료들의 인사 청탁과 뇌물 수수에 대한  뉴스를 들어야 하는 현실들이 오버랩되게 하는 글입니다.

홍윤정 작가님의 미디어로 본 역사 시리즈 ‘뭉치면 백성이고 흩어지면 도적이다’의 글에서 2010년 개봉 영화 <방자전>의 변학도의 목민의 꿈을 내려놓은 관리 변학도와 2대, 3대를 이어 아전노릇을 해온, 지방의 유지, 터줏대감들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 주셨습니다. 탐관오리와 지방 토호의 작당으로 땅을 빼앗기고 가족을 빼앗긴 백성들은 결국 도적떼가 되는 것 외엔 살 방법이 없었습니다. 2014년의 영화, <군도:민란의 시대>의 땡중과 양반, 평민, 백정이 뒤섞인 도적떼 군도의 시원한 활약상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해빈 선생님의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에서는 조선시대 관아와 수령의 직무 공간이자 생활공간 이던 동헌, 객사, 내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업무와 관련하여 자주 사용하던 물건들인 유척과 소지에 대해서 소개합니다. 유적 답사 여행에서 자주 접하는 동원, 객사, 내아를 보고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 웹진의 스토리이슈에서는 ‘한국 세계기록유산 지식센터 개소식’을 전합니다. ‘만인소’가 2018년에 아․태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한국국학진흥원은 세계가 인정한 기록유산 3종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한국국학진흥원이 기록유산 전문기관으로 발돋음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관련하여 목판아카이브, 한국의 편액, 만인소 등의 기록 유산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2018년 6월 12일 북미정상회담과 6월 13일 지방선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군사적 긴장과 이산가족의 아픔이라는 분단 70년이 평화의 새로운 시대를 열고 반공 이데올로기를 무기로 부정부패로 민주주의를 압제하던 어둠의 시대가 저물고 어슴프레한 빛으로 새벽이 열리고 있습니다. 어둠에 잠긴 민중들의 심정을 노래한 1996년 드라마 임꺽정의 주제곡 ‘이 나라 이 강산’의 가사와 함께 새벽에 대한 소망을 공유합니다.

이 나라 이 강산에 이 몸이 태어나
삼베옷 나물 죽으로 이어온 목숨
기구하여라 고단한 세월
타고난 굴레는 벗을 길이 없어라
달은 기울고 별빛조차 희미한데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않는 세상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않는 세상
슬퍼 말어라 티끌같은 세상
슬퍼 말어라 이슬같은 인생
대장부 가는 길에 무슨 한이 있으리




“헤아리기 어려울만큼의 선정을 베푼 고을수령, 떠날 때 백성들이 눈물로 길을 막다”

서찬규, 임재일기, 1852-02-22

1852년 2월 22일, 홍직필 선생의 사위인 진사 민경호가 선생을 모시고 앉았다. 오곡 어른의 정치력 이야기가 나오자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그의 재량을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실은 헤아리기 어려운 바가 있다. 이 읍에 거주할 때에 어떠한 덕정(徳政)을 행하여 백성에게 이러한 믿음을 얻어서 떠난 뒤에 생각함이 더욱 간절하며, 시흥(始興)으로 옮길 때 과천(果川) 백성들이 길을 막고 눈물을 흘리기를 갓난아기를 잃은 것 같이하니, 과연 그가 백성에게 선정(善政)이 있었는가. 내가 평소에 그의 삼가고 성실함을 허여하였을 뿐인데, 지금 이와 같이 순량(循良)하게 될 줄은 생각지 못하였다.”

“예안현감 박선장이 파직되다”

김광계, 매원일기, 1609-04-05 ~

1609년 4월 5일, 아침에 제천 할아버지를 뵈러 갔던 김광계는 너무 애석한 소식을 듣고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작년 6월에 예안현에 부임하여 아직 한해도 안 된 현감 박선장(朴善長)이 파직되었다는 것이다. 그 이전 현감인 안담수(安聃壽)가 파직되었을 때는 예안현의 모든 사람들이 속이 시원하다며 좋아했는 데, 이번 박 현감의 파직 소식은 그야말로 애석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박선장은 예안현에 부임하여 마을 백성들의 사정을 살피고 자상하고도 소탈하 게 고을을 다스렸고, 가혹하게 조사하거나, 민간에서 거두어 들여 비용을 충당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박 현감이 처음 예안현에 부임했을 때 전임 안 현감의 비리와 부패로 인해 관아의 창고가 텅텅 비어 모양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형편이었으나, 반드시 필요한 물품만을 마련하여 점차 풍족해져 남아돌기까지 하였다.

“이웃 고을 수령들의 어진 정치를 듣다”

김령, 계암일록, 1631-11-28 ~

1631년 11월 28일, 엄동설한의 추위가 매서웠다. 둘째 아이가 밖으로 출타했다가 돌아왔다. 돌아와서는 요새 이웃 고을을 다스리는 수령들에 대한 이야기를 김령에게 들려주었다. 듣자하니 의성의 현령으로 부임한 정세규(鄭世規)는 자상하고 온화하여 백성을 보살피는 일에 온 마음을 쏟는다고 한다.
관아 창고에서 빌려간 곡식을 거두어들일 때가 되었는데, 이웃 고을에서는 모두 매질을 하며 급박하게 다그쳐 원곡을 채우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정세규는 “이러한 흉년을 당해 어찌 차마 백성들의 삶을 어렵게 만드는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내 차라리 죄를 받아서 파직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 일은 못하겠으니, 다그쳐 받아들이는 일을 그만두라.”라고 지시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백성들이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없는 곡식을 쥐어짜서 원곡을 갚은 것이 많았다고 한다. 혹시나 어진 수령이 파직되면 어쩌나 하는 백성들의 걱정이 이러한 기적 같은 일을 해낸 것이다.
경상 감사인 오숙(吳䎘)의 선정도 못지않았다. 오숙이란 사람은 매우 명민하게 다스렸는데, 온갖 폐단을 제거하는 데 힘을 쏟아 정사를 잘 한다는 명성이 자자했다. 전임 감사 조희일(趙希逸)이란 자는 아주 형편이 없었는데, 후임 관찰사인 오숙이 조희일이 행한 정치를 모두 뒤집어 개혁하니, 우러러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신임 예안현감 나무송이 부임하다”

김령, 계암일록, 1630-12-14 ~

1630년 12월 14일, 날씨가 맑고 바람이 불었다. 지난달 말 예안 고을의 수령이 교체되었다. 온갖 악행을 일삼던 김진이 수령에서 물러나고, 신임 현감으로 나무송이란 자가 부임하였다. 김령은 그를 잘 알지 못하였으나 며칠 간 그의 행실과 소문을 들어보니 사람됨이 성실하고 활달하여 속이고 꾸미는 짓을 일삼지 않는 듯 하였다. 또 어진 이를 존경하고 선비들을 아껴서 사대부의 풍모가 있는 듯 하였다. 실로 전임 현감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러나 굳세고 명철한 면을 다소 부족한 듯이 보였다. 이런 성격들은 자신의 생각을 굳게 지키는 면이 부족하게 마련인데 그 면이 다소 걱정이 되었다. 또 스스로 하고자 하는 일은 곧바로 자신의 뜻대로 행하는데 그 과정에서 다른 이야기나 상황은 크게 살펴보지 않은 점도 가진 듯 하였다. 이 면은 한편으로는 걱정스럽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가 속이는 짓을 행하지 않는데서 말미암은 것이기에 장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가 속이는 마음이 있다면 처음 부임한 고을에서 지금처럼 행동하지는 않을 듯 하였다. 그가 사람들을 잘 인도할 수 있다면 반드시 좋은 정치를 할 수 있을 듯 하였다.

“예안 현감 홍석우의 어리석음을 논하다”

김령, 계암일록, 1631-11-07 ~

1631년 11월 7일, 매우 추운 날씨였다. 근래 들리는 말에 의하면 예천 군수 허휘(許徽), 의성 현령 정세규(鄭世規)가 백성들을 잘 다스린다는 명성이 널리 퍼져 있었다. 김령이 보기에는 풍기 군수인 김상윤(金尙尹)도 백성들을 잘 다스렸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의성 현령이 가장 백성들을 아껴서 옛날 선량한 관리의 풍모가 있었다. 안동 부사인 홍명구(洪命耉) 또한 정사에 재능이 있었으나, 판관인 윤정(尹淨)은 가렴주구가 날로 심하여 백성들이 모두 원망하고 욕을 하는 실정이었다.
김령이 사는 예안현의 수령은 홍석우(洪錫禹)란 자였는데, 어둡고 괴팍하여 일을 헤아려 처리할 줄 모르고 오직 형벌만을 앞세워 위엄을 세우는 것에 급급하였다. 그리하여 일을 처리하는 결정이 모두 아전의 수중에 있었고, 수령은 망령되게 교만을 부리며 성내고 화내는 것이 일정하지 않았다. 최근 우처인(禹處仁), 황유장(黃有章) 등 10여 명이 글을 올려 집안이 가난하여 환곡을 갚지 못하겠으니, 다른 곡식으로 대신 납부하거나 아니면 그 반만 납부할 수 있도록 청하였다. 그러자 홍석우가 크게 노하여 사찰관에게 매질을 하면서 말하기를 “네가 독촉하지 않은 까닭에 이러한 건의가 올라온 것이다.”라고 탓하였고, 더불어 권농관까지 매질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상서를 올렸던 우처인이 사찰관의 억울함을 불쌍히 여겨 다시 호소하기를 “사찰관이 독촉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스스로 마련하지 못하여 그런 글을 올린 것이니, 사찰관의 죄가 아닙니다.”라고 호소하였다. 그러자 홍석우가 다시 화를 내면서 우처인의 머리채를 잡아 쥐고 끌고 가니 거의 목이 빠질 뻔하였다. 그리고 다음날에는 우처인의 종을 잡아들이라 명하였다고 한다.

“고을수령과 지방토호의 기싸움”

김령, 계암일록,
1607-03-13 ~ 1614-11-01

1607년 3월 13일, 들으니, 우리 읍의 새 수령이 풍산의 안담수라고 했다.
윤6월 13일, 우리 읍의 수령 안담수의 첩은 읍내 사람 권학(權鶴)의 딸이다. 안담수가 그의 첩의 친족인 권산해(權山海)와 노비 문제로 소송을 했는데, 안담수가 위세로 누르려 하자 산해가 공손하지 못한 말을 했다. 안담수가 크게 화를 내어 산해를 차꼬에 채워 옥에 가두고 토호가 수령을 능욕했다며 감사에게 보고했다.
산해의 처 동생인 봉화 사람 변흠(邊欽)이 감사가 진주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그 이유를 호소했다. 감사가 바로 호소를 받아들여 예안에서 올린 첩정의 끝에 뎨김[題音]했다.
“현감의 처사가 아주 이치에 맞지 않으므로, 속히 산해를 풀어주고 또 현감은 높은 직위가 아니므로 사건은 반드시 서로 소송해서 결말을 보아야 하기 때문에 영천군(榮川郡)으로 이관하는 것이 옳다.”
이렇게 처분하자 안담수가 크게 부끄러워했다. 감사의 공평하고 정직함과 지혜롭고 사리에 밝음이 이와 같았다.
9월 27일, 들으니 우리 고을 수령 안(安) 공이 고강(考講)할 유생을 불렀는데, 주패(朱牌)를 사용했다고 한다. 해괴하고도 우습다.
1608년 2월 27일, 듣자하니, 평보 형이 우리 고을 수령 안담수에게 욕을 보았다고 한다. 지난 23일 우리들이 함께 제천 표숙댁에 갔을 때, 이지(以志)가 자기의 집에 관아에서 손님이 왔다는 말을 듣고 먼저 일어서서 나갔다. 우리들은 돌아올 때 이지를 불러내었는데, 관아에서 온 손님도 따라 나왔다. 그는 즉 우리 고을 수령의 처조카이고, 이지에게는 내외종간이 되는데, 이름이 이할(李硈)이다. 땅바닥에 앉아 잠시 있다가 헤어졌다.
이할이 여러 가지 말을 지어내어 두 형을 헐뜯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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