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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

관아와 수령의 물건 – 동헌, 객사, 내아

하해빈


이번 호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에서는 조선시대 수령의 직무 공간이자 생활공간이던 관아와 수령이 업무와 관련해 사용한 물건에 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관아는 지역의 정치, 행정, 교육, 사법 등을 총괄하던 곳으로 다양한 기능의 건물로 구성되었는데, 수령의 주요 업무 공간으로 동헌과 객사가 있고, 개인 공간으로 내아가 있습니다. 관아에서 수령의 주요 활동 공간과 업무와 관련한 물건에 관해 한국국학진흥원 김형수 선생님과의 인터뷰를 통해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한국국학진흥원 조선의 건축 (http://hanok.ugyo.net) 에 구축된 관아 구성도


Q1. 관아는 무슨 공간인가요?


관아(官衙)는 중앙이나 지방의 관원(官員)들이 정무를 보는 건물의 총칭으로, 관서(官署)라고도 합니다. 또한 순수한 우리말로는 '마을'이라고 하는데, 이는 좁은 의미로 관아에 해당합니다. 관아 안에는 수령이 집무하는 정청(政廳)인 동헌(東軒)과 그의 식솔이 거주하는 사적 공간인 내아(內衙), 국왕의 위패를 모시고 사신 및 여행자를 맞이하는 객사(客舍), 지방교육을 담당한 향교(鄕校), 그리고 좌수(座首), 별감(別監) 등의 지방양반이 고을의 업무를 자문한 향청(鄕廳), 향리인 육방(六房)의 우두머리와 아전이 근무하던 질청(作廳), 회계 사무를 관장하던 공수청(公須廳), 노비들의 관노청(官奴廳), 죄인을 가두는 형옥(刑獄)등이 있습니다. 이 중에서 동헌과 객사, 내아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재판의 공간 – 동헌

조선시대 전주부 관아 동헌 ‘풍락헌’ ⓒ전주전통문화연수원


Q2. 동헌은 무슨 공간인가요?


관아의 중심이었던 동헌은 관할 지역의 중요한 업무가 행해지는 곳이었습니다. 수령이 동헌에서 치른 중요한 업무는 크게 3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수령이 부임 후부터 정기적으로 시행했던 군정(軍政)에 대한 점고가 있습니다. 점고(點考)는 수령이 명부에 점을 찍어 가면서 수효를 조사하는 것입니다. 군사에 대한 점고는 군사의 수를 점검하거나 군기(군대 물품)의 개수와 사용이 가능한지 점검이었습니다. 그리고 관노비에 대한 점고도 이루어졌습니다. 둘째는 양전, 호적, 호패 등의 성책(成冊)업무였습니다. 성책 업무 중에 토지조사 및 측량 업무와 관련해서는 유척이 사용되었습니다. 셋째는 사송(민사의 소송) 관련 업무로 관할 지역민의 소지(所志)에 대한 처리 등 여러 소송에 대한 처리 업무였습니다.


Q3. 수령이 쓰는 ‘유척’의 사용용도는 무엇인가요?


유척(鍮尺)은 놋쇠로 만든 자이며 조선시대 도량형제도상 척도의 표준이었습니다. 당초에는 주척이라고 하였다가 육전조례에서 유척이라 규정하였습니다. 암행어사에게는 2개의 유척이 주어졌는데요. 하나는 죄인을 매질하는 태(笞)나 장(杖) 등의 형구 크기를 통일시켜 법에 의거하지 않고 함부로 형벌을 가하는 것을 방지하는 데 쓰였습니다. 하나는 도량형을 통일해서 세금징수를 고르게 하는 데 쓰였습니다. 수령과 암행어사가 유척을 쓰는 용도는 같았으나 감시대상이 달랐습니다. 수령은 향리가 일을 제대로 하는지 감시하였고 암행어사는 수령이 일을 제대로 하는지 감찰하였던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어사가 도량형을 감찰했던 것은 지방수령의 자의적인 세금징수를 방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유척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


Q4. 소지의 종류와 절차는 어떻게 될까요?


소지(所志)는 민사의 소송(사송)에서 주로 쓰였습니다. 소지는 사서(士庶), 서리(胥吏), 천민(賤民)이 관부에 올리는 소장, 청원서, 진정서입니다. 모두 소지라고 하나 그 내용은 소송, 청원, 진정 등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당시의 사서들이 생활하는 중에 일어난 일로서 관부의 결정과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민원에 관한 문서입니다. 소지를 수령이나 관계 관부에 올리면 해당 관원은 그 소지에 대한 처분을 내리게 되는데 이를 제음(題音, 간략하게 판결을 내리는 것) 또는 제사(題辭, 판결을 길게 내리는 것)라고 합니다.


을축년 11월 이조영이 장종욱에게서 논 값을 추심해달라고 관에 청원한 소지(출처 : 옛문서생활사박물관)
전월 장종욱에게 논 값을 도로 되찾고자 하는 소지를 올려 성주께서 장종욱과 거간인 구갑손을 잡아
10월 27일내에 갚겠다는 다짐을 받았는데, 기한을 기다려주었으나 지금까지 갚지 않아 소지를
올리니 종욱과 갑손을 다시 잡아 엄히 다스려 이를 받아주시기를 바란다는 내용이다.



소지의 종류는 발괄(白活) 등장(等狀) 원정(原情) 상서(上書) 의송(議送) 등이 있습니다. 등장은 다수가 연달아 이름을 적어 올린 문서이며, 원정과 상서도 진정서의 성격을 가진 문서입니다. 특히 상서는 등장처럼 다수가 연달아 이름을 적어 관찰사 수령 암행어사에게 올렸습니다. 의송은 소지와 같은 종류의 문서이나 소지는 수령에게 올린 문서이고, 의송은 순찰사나 관찰사에게 올린 문서라는 것이 다릅니다. 의송은 대개 소지로 민원이 해결되지 못하였을 때 올렸습니다.


▌예의 공간 - 객사

안동 선성현 객사 ⓒ스토리테마파크
경상북도 안동시 성곡동에 있는 조선 후기의 객사,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9호. 1712년(숙종 38)


Q5. 객사는 무슨 공간인가요?


객사(客舍)는 조선시대 지방의 행정을 담당하는 곳에서 중앙집권적 왕권을 상징하는 대표적 시설이었습니다. 이 시기 객사는 전패(殿牌)의 봉안과 의례적인 기능을 수용하는 정청(正廳)과 손님의 숙박과 접대라는 실용적 기능을 담당하는 좌우 익헌(翼軒)이 일체화되어 전체를 구성하고 있다는 점이 큰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객사에 봉안되어 있는 전패는 ‘殿(전)’자를 새긴 나무패이자 왕을 상징하는 일종의 위패(位牌)입니다. 객사는 완전한 제사시설도 아니며 직접적인 통치시설도 아닌 복합적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수령들은 부임하게 되면 먼저 객사에 들려 예를 갖추어 인사하였고,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나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망궐례를 통해 임금에 대한 충성과 목민관으로서의 소임을 다짐하였습니다. 객사는 외국에서 온 사신들과 공무를 위해 파견된 중앙 관리들이 숙소로 사용하거나 고을의 인사들을 초대하여 연회를 베푸는 기능도 하였습니다.


임금의 궐패를 모셨던 선성현 객사의 정당(좌) 임금의 궐패 봉안 모습(우) ⓒ스토리테마파크



▌생활의 공간 - 내아

Q6. 내아는 무슨 공간인가요?


내아는 수령 가족의 생활공간으로 수령의 개인공간입니다. 내아의 건축구조는 당시의 사대부 집안의 안채와 같은 모습을 하였습니다. 안방 대청 건넌방 부엌 찬방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주위에 곳간 등의 부속 건물이 딸려 있었습니다. 장대석으로 마무리한 낮은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이나 다듬은 돌 초석을 놓고, 네모난 기둥을 세웠습니다. 대청은 연등천장(천장을 만들지 않고 서까래가 그냥 노출되어 보이도록 한 것)을 하고, 온돌방은 종이천장을 하였습니다. 지붕은 대개 팔작지붕으로 단청을 하지 않았습니다.


Q7. 관아 안에 ‘내아’가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관아는 수령들에게 정무를 보는 장소이자 생활의 공간이었습니다. 수령들은 자신이 살던 지역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관직을 받아서 내려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래서 관아 안에 수령들이 생활 할 수 있는 내아를 마련한 것입니다. 내아에서 부모를 모시고 같이 사는 경우들이 존재하였는데, 부모님에게 효도를 하는 방법 중에서 최고는 지방관이 되는 것이라는 이야기도 내려오고 있습니다.


Q8. 수령의 공간 ‘관아’와 수령의 주요 직무와 관련된 물건을 살펴봤는데요, 지방관으로서 파견된 조선시대 수령은 어떤 사람들인가요?


관아는 수령의 생활의 터전이었을 것입니다. 생활하는 장소이자 일을 하는 장소였습니다. 수령은 관아 외에도 업무상 많은 곳을 다니며 일했습니다. 마을마다 수령의 일은 다르지만 대표적으로 수령은 ‘유척’을 통해 토지조사 및 측량을 진행하였고 마을 사람들에게 ‘소지’를 받아 마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해결해야했습니다. 그리고 객사에서는 정해진 날짜마다 망궐례를 진행하여 조선의 왕에게 예를 갖추어야했습니다.

수령의 임기는 보통 60개월이었으며 10개월을 1기로 해서 6기제라고도 합니다. 하지만 수령들 중에서는 5년 임기를 채운 사람은 드뭅니다. 그리고 지방관이 마지막 관직인 사람이 많으며 지방관을 연이어하는 수령에 관한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수령들은 자신이 권력을 이용하여 많은 이익을 챙긴 경우가 많았고, 지방관으로 근무하고 난 이후 상당히 큰 부를 축적한 수령도 상당히 많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피해들은 대부분은 백성들이 보게 되었습니다.


    리  :  하해빈 (한국국학진흥원 국학정보센터)

도움말  :  김형수 (한국국학진흥원 기록유산센터 수석연구원)

“헤아리기 어려울만큼의 선정을 베푼 고을수령, 떠날 때 백성들이 눈물로 길을 막다”

서찬규, 임재일기, 1852-02-22

1852년 2월 22일, 홍직필 선생의 사위인 진사 민경호가 선생을 모시고 앉았다. 오곡 어른의 정치력 이야기가 나오자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그의 재량을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실은 헤아리기 어려운 바가 있다. 이 읍에 거주할 때에 어떠한 덕정(徳政)을 행하여 백성에게 이러한 믿음을 얻어서 떠난 뒤에 생각함이 더욱 간절하며, 시흥(始興)으로 옮길 때 과천(果川) 백성들이 길을 막고 눈물을 흘리기를 갓난아기를 잃은 것 같이하니, 과연 그가 백성에게 선정(善政)이 있었는가. 내가 평소에 그의 삼가고 성실함을 허여하였을 뿐인데, 지금 이와 같이 순량(循良)하게 될 줄은 생각지 못하였다.”

“예안현감 박선장이 파직되다”

김광계, 매원일기, 1609-04-05 ~

1609년 4월 5일, 아침에 제천 할아버지를 뵈러 갔던 김광계는 너무 애석한 소식을 듣고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작년 6월에 예안현에 부임하여 아직 한해도 안 된 현감 박선장(朴善長)이 파직되었다는 것이다. 그 이전 현감인 안담수(安聃壽)가 파직되었을 때는 예안현의 모든 사람들이 속이 시원하다며 좋아했는 데, 이번 박 현감의 파직 소식은 그야말로 애석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박선장은 예안현에 부임하여 마을 백성들의 사정을 살피고 자상하고도 소탈하 게 고을을 다스렸고, 가혹하게 조사하거나, 민간에서 거두어 들여 비용을 충당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박 현감이 처음 예안현에 부임했을 때 전임 안 현감의 비리와 부패로 인해 관아의 창고가 텅텅 비어 모양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형편이었으나, 반드시 필요한 물품만을 마련하여 점차 풍족해져 남아돌기까지 하였다.

“이웃 고을 수령들의 어진 정치를 듣다”

김령, 계암일록, 1631-11-28 ~

1631년 11월 28일, 엄동설한의 추위가 매서웠다. 둘째 아이가 밖으로 출타했다가 돌아왔다. 돌아와서는 요새 이웃 고을을 다스리는 수령들에 대한 이야기를 김령에게 들려주었다. 듣자하니 의성의 현령으로 부임한 정세규(鄭世規)는 자상하고 온화하여 백성을 보살피는 일에 온 마음을 쏟는다고 한다.
관아 창고에서 빌려간 곡식을 거두어들일 때가 되었는데, 이웃 고을에서는 모두 매질을 하며 급박하게 다그쳐 원곡을 채우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정세규는 “이러한 흉년을 당해 어찌 차마 백성들의 삶을 어렵게 만드는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내 차라리 죄를 받아서 파직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 일은 못하겠으니, 다그쳐 받아들이는 일을 그만두라.”라고 지시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백성들이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없는 곡식을 쥐어짜서 원곡을 갚은 것이 많았다고 한다. 혹시나 어진 수령이 파직되면 어쩌나 하는 백성들의 걱정이 이러한 기적 같은 일을 해낸 것이다.
경상 감사인 오숙(吳䎘)의 선정도 못지않았다. 오숙이란 사람은 매우 명민하게 다스렸는데, 온갖 폐단을 제거하는 데 힘을 쏟아 정사를 잘 한다는 명성이 자자했다. 전임 감사 조희일(趙希逸)이란 자는 아주 형편이 없었는데, 후임 관찰사인 오숙이 조희일이 행한 정치를 모두 뒤집어 개혁하니, 우러러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신임 예안현감 나무송이 부임하다”

김령, 계암일록, 1630-12-14 ~

1630년 12월 14일, 날씨가 맑고 바람이 불었다. 지난달 말 예안 고을의 수령이 교체되었다. 온갖 악행을 일삼던 김진이 수령에서 물러나고, 신임 현감으로 나무송이란 자가 부임하였다. 김령은 그를 잘 알지 못하였으나 며칠 간 그의 행실과 소문을 들어보니 사람됨이 성실하고 활달하여 속이고 꾸미는 짓을 일삼지 않는 듯 하였다. 또 어진 이를 존경하고 선비들을 아껴서 사대부의 풍모가 있는 듯 하였다. 실로 전임 현감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러나 굳세고 명철한 면을 다소 부족한 듯이 보였다. 이런 성격들은 자신의 생각을 굳게 지키는 면이 부족하게 마련인데 그 면이 다소 걱정이 되었다. 또 스스로 하고자 하는 일은 곧바로 자신의 뜻대로 행하는데 그 과정에서 다른 이야기나 상황은 크게 살펴보지 않은 점도 가진 듯 하였다. 이 면은 한편으로는 걱정스럽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가 속이는 짓을 행하지 않는데서 말미암은 것이기에 장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가 속이는 마음이 있다면 처음 부임한 고을에서 지금처럼 행동하지는 않을 듯 하였다. 그가 사람들을 잘 인도할 수 있다면 반드시 좋은 정치를 할 수 있을 듯 하였다.

“예안 현감 홍석우의 어리석음을 논하다”

김령, 계암일록, 1631-11-07 ~

1631년 11월 7일, 매우 추운 날씨였다. 근래 들리는 말에 의하면 예천 군수 허휘(許徽), 의성 현령 정세규(鄭世規)가 백성들을 잘 다스린다는 명성이 널리 퍼져 있었다. 김령이 보기에는 풍기 군수인 김상윤(金尙尹)도 백성들을 잘 다스렸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의성 현령이 가장 백성들을 아껴서 옛날 선량한 관리의 풍모가 있었다. 안동 부사인 홍명구(洪命耉) 또한 정사에 재능이 있었으나, 판관인 윤정(尹淨)은 가렴주구가 날로 심하여 백성들이 모두 원망하고 욕을 하는 실정이었다.
김령이 사는 예안현의 수령은 홍석우(洪錫禹)란 자였는데, 어둡고 괴팍하여 일을 헤아려 처리할 줄 모르고 오직 형벌만을 앞세워 위엄을 세우는 것에 급급하였다. 그리하여 일을 처리하는 결정이 모두 아전의 수중에 있었고, 수령은 망령되게 교만을 부리며 성내고 화내는 것이 일정하지 않았다. 최근 우처인(禹處仁), 황유장(黃有章) 등 10여 명이 글을 올려 집안이 가난하여 환곡을 갚지 못하겠으니, 다른 곡식으로 대신 납부하거나 아니면 그 반만 납부할 수 있도록 청하였다. 그러자 홍석우가 크게 노하여 사찰관에게 매질을 하면서 말하기를 “네가 독촉하지 않은 까닭에 이러한 건의가 올라온 것이다.”라고 탓하였고, 더불어 권농관까지 매질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상서를 올렸던 우처인이 사찰관의 억울함을 불쌍히 여겨 다시 호소하기를 “사찰관이 독촉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스스로 마련하지 못하여 그런 글을 올린 것이니, 사찰관의 죄가 아닙니다.”라고 호소하였다. 그러자 홍석우가 다시 화를 내면서 우처인의 머리채를 잡아 쥐고 끌고 가니 거의 목이 빠질 뻔하였다. 그리고 다음날에는 우처인의 종을 잡아들이라 명하였다고 한다.

“고을수령과 지방토호의 기싸움”

김령, 계암일록,
1607-03-13 ~ 1614-11-01

1607년 3월 13일, 들으니, 우리 읍의 새 수령이 풍산의 안담수라고 했다.
윤6월 13일, 우리 읍의 수령 안담수의 첩은 읍내 사람 권학(權鶴)의 딸이다. 안담수가 그의 첩의 친족인 권산해(權山海)와 노비 문제로 소송을 했는데, 안담수가 위세로 누르려 하자 산해가 공손하지 못한 말을 했다. 안담수가 크게 화를 내어 산해를 차꼬에 채워 옥에 가두고 토호가 수령을 능욕했다며 감사에게 보고했다.
산해의 처 동생인 봉화 사람 변흠(邊欽)이 감사가 진주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그 이유를 호소했다. 감사가 바로 호소를 받아들여 예안에서 올린 첩정의 끝에 뎨김[題音]했다.
“현감의 처사가 아주 이치에 맞지 않으므로, 속히 산해를 풀어주고 또 현감은 높은 직위가 아니므로 사건은 반드시 서로 소송해서 결말을 보아야 하기 때문에 영천군(榮川郡)으로 이관하는 것이 옳다.”
이렇게 처분하자 안담수가 크게 부끄러워했다. 감사의 공평하고 정직함과 지혜롭고 사리에 밝음이 이와 같았다.
9월 27일, 들으니 우리 고을 수령 안(安) 공이 고강(考講)할 유생을 불렀는데, 주패(朱牌)를 사용했다고 한다. 해괴하고도 우습다.
1608년 2월 27일, 듣자하니, 평보 형이 우리 고을 수령 안담수에게 욕을 보았다고 한다. 지난 23일 우리들이 함께 제천 표숙댁에 갔을 때, 이지(以志)가 자기의 집에 관아에서 손님이 왔다는 말을 듣고 먼저 일어서서 나갔다. 우리들은 돌아올 때 이지를 불러내었는데, 관아에서 온 손님도 따라 나왔다. 그는 즉 우리 고을 수령의 처조카이고, 이지에게는 내외종간이 되는데, 이름이 이할(李硈)이다. 땅바닥에 앉아 잠시 있다가 헤어졌다.
이할이 여러 가지 말을 지어내어 두 형을 헐뜯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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