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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Issue

한국 세계기록유산 지식센터 개소식


‘만인소’ 2018년 아․태기록유산 등재, 한국국학진흥원 세계가 인정한 기록유산 3종 보유

한국국학진흥원, 기록유산 전문기관으로 발돋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프로그램 자문기구인 국제자문위원회(IAC : International Advisory Committee) 산하 교육연구소위원회에서 진행하고 있는 세계기록유산 지식센터의 국가별 센터인 ‘한국 세계기록유산 지식센터’가 6월 1일 한국국학진흥원에서 개소했다.

이는 2016년 11월 8일 한국국학진흥원과 IAC 교육연구소위원회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지식센터 설립에 관한 협약'을 체결한 후 약 1년 반의 준비를 거쳐 개소하게 된 것이다.

한국국학진흥원은 ‘한국 세계기록유산 지식센터’ 개소를 통해 기관의 국제적 위상을 제고하고, 기록유산 전문기관으로 발돋움하는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앞으로 기록유산에 대한 국제적 연대를 통해 한국 세계기록유산의 가치를 알리고,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국내활동을 통해 기록문화에 대한 가치를 공유하고 확장시켜 나갈 예정이다.

2018년 5월 말 현재 49만8천여 점의 기록유산을 소장하고 있는 한국국학진흥원은 그것이 가진 가치 발굴에 힘을 쏟아 2015년 '유교책판' 64,226점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2016년에는 '한국의 편액' 550점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아시아‧태평양 지역 목록인 아태기록유산으로 등재시켰다. 이와 함께 지난달 30일 ‘만인의 청원, 만인소’ 2점이 아·태기록유산으로 등재가 확정되었다. 이로써 한국국학진흥원은 세계가 인정하는 기록유산 3종을 보유하게 되었다.


▌목판아카이브    http://mokpan.ugyo.net

목판아카이브 사이트는 한국국학진흥원이 소장하고 있는 목판에 대한 지속적인 DB화의 결과물로 구축된 콘텐츠이다. 또한 본원에서 추진하고 있는 ‘유교목판 10만장 수집운동’ 및 유교목판 세계기록유산 등재추진에 호응해, 목판 기탁의 필요성을 알리고 일반인들이 우리 목판인쇄 문화의 의의와 중요성을 체험할 수 있도록 마련한 콘텐츠이다.


유교책판이 보관된 한국국학진흥원 장판각



▌한국의 편액    http://pyeonaek.kosnet.kr

한국의 편액(扁額) 사이트는 한국국학진흥원이 편액 DB화 결과물로 구축된 콘텐츠로 편액에 담긴 의미를 ‘서체별’, ‘공간별’, ‘기능별’, ‘지역별’로 구분하여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편액은 건물의 명칭과 건물의 성격을 표시하며, 또한 편액에 새긴 글귀는 매우 함축적이며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어, 건물주의 의리, 정감을 문학과 예술의 형식으로 표현한다.


한국국학진흥원 현판전시실(좌), 진성이씨 노송정종택(眞城李氏 老松亭宗宅)의 편액 ‘老松亭’



▌만인소    http://maninso.ugyo.net

만인소(萬人疏) 사이트는 한국국학진흥원이 소장하고 있는 ‘1855년 만인소’와 ‘1884년 만인소’의 제작배경, 내용 및 참여자에 관해 자세히 소개한다. 만인소는 "만명이 연명하여 올린 상소"이다. 만인소는 조선시대 만여 명에 달하는 재야 유학자들이 목숨을 걸고 왕에게 청원한 상소문을 의미하기도 하고, 동시에 상소 운동을 의미하기도 한다.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존하고 임오의리를 분명하게 할 것을 청하는 상소 ‘1855년 만인소’



한국 세계기록유산 지식센터 개소, 세계적인 기록유산 전문가들과 함께 하다

6월1일 개최된 한국 세계기록유산 지식센터 개소식에 이어 진행된 학술대회에서는 세계적 수준의 기록유산 전문가들이 참여한 가운데 개소를 축하하고 한국에서 세계기록유산 프로그램의 공유와 활용을 위한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이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프로그램의 심사와 자문을 맡고 있는 유네스코 IAC 교육연구소위원회 로타르 요단(Dr. Lothar Jordan) 교수와 IAC부의장이자 세네갈 전 국가기록원장인 파파 모마르 디오프(Dr. Papa Momar Diop)가 참가했다. 또한, 현재 유네스코 아‧태기록유산 총회 의장이자 현 중국 국가당안국(한국의 국가기록원과 같은 기능의 국가부처) 리밍화(李明華) 국장과 아‧태기록유산 총회 부의장이자 전 베트남 국가기록원장인 부 티 민홍(Dr. Vu Thi Minh Huong) 박사, 마카오 세계기록유산 지식센터 헬렌 이엉(Dr. Helen Ieong) 사무총장, 유네스코 베트남 위원회 사무총장 직무대행과 광역 지방 정부인 하띤성 부성장당 쿠옥 빈 (MR. DANG Quoc Vinh)등이 함께했다.

이를 통해 기록유산 프로그램이 지향하는 목적에 좀 더 다가서고, 세계적 수준을 자랑했던 한국의 기록문화를 세계와 공유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로 작용하게 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헤아리기 어려울만큼의 선정을 베푼 고을수령, 떠날 때 백성들이 눈물로 길을 막다”

서찬규, 임재일기, 1852-02-22

1852년 2월 22일, 홍직필 선생의 사위인 진사 민경호가 선생을 모시고 앉았다. 오곡 어른의 정치력 이야기가 나오자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그의 재량을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실은 헤아리기 어려운 바가 있다. 이 읍에 거주할 때에 어떠한 덕정(徳政)을 행하여 백성에게 이러한 믿음을 얻어서 떠난 뒤에 생각함이 더욱 간절하며, 시흥(始興)으로 옮길 때 과천(果川) 백성들이 길을 막고 눈물을 흘리기를 갓난아기를 잃은 것 같이하니, 과연 그가 백성에게 선정(善政)이 있었는가. 내가 평소에 그의 삼가고 성실함을 허여하였을 뿐인데, 지금 이와 같이 순량(循良)하게 될 줄은 생각지 못하였다.”

“예안현감 박선장이 파직되다”

김광계, 매원일기, 1609-04-05 ~

1609년 4월 5일, 아침에 제천 할아버지를 뵈러 갔던 김광계는 너무 애석한 소식을 듣고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작년 6월에 예안현에 부임하여 아직 한해도 안 된 현감 박선장(朴善長)이 파직되었다는 것이다. 그 이전 현감인 안담수(安聃壽)가 파직되었을 때는 예안현의 모든 사람들이 속이 시원하다며 좋아했는 데, 이번 박 현감의 파직 소식은 그야말로 애석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박선장은 예안현에 부임하여 마을 백성들의 사정을 살피고 자상하고도 소탈하 게 고을을 다스렸고, 가혹하게 조사하거나, 민간에서 거두어 들여 비용을 충당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박 현감이 처음 예안현에 부임했을 때 전임 안 현감의 비리와 부패로 인해 관아의 창고가 텅텅 비어 모양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형편이었으나, 반드시 필요한 물품만을 마련하여 점차 풍족해져 남아돌기까지 하였다.

“이웃 고을 수령들의 어진 정치를 듣다”

김령, 계암일록, 1631-11-28 ~

1631년 11월 28일, 엄동설한의 추위가 매서웠다. 둘째 아이가 밖으로 출타했다가 돌아왔다. 돌아와서는 요새 이웃 고을을 다스리는 수령들에 대한 이야기를 김령에게 들려주었다. 듣자하니 의성의 현령으로 부임한 정세규(鄭世規)는 자상하고 온화하여 백성을 보살피는 일에 온 마음을 쏟는다고 한다.
관아 창고에서 빌려간 곡식을 거두어들일 때가 되었는데, 이웃 고을에서는 모두 매질을 하며 급박하게 다그쳐 원곡을 채우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정세규는 “이러한 흉년을 당해 어찌 차마 백성들의 삶을 어렵게 만드는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내 차라리 죄를 받아서 파직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 일은 못하겠으니, 다그쳐 받아들이는 일을 그만두라.”라고 지시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백성들이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없는 곡식을 쥐어짜서 원곡을 갚은 것이 많았다고 한다. 혹시나 어진 수령이 파직되면 어쩌나 하는 백성들의 걱정이 이러한 기적 같은 일을 해낸 것이다.
경상 감사인 오숙(吳䎘)의 선정도 못지않았다. 오숙이란 사람은 매우 명민하게 다스렸는데, 온갖 폐단을 제거하는 데 힘을 쏟아 정사를 잘 한다는 명성이 자자했다. 전임 감사 조희일(趙希逸)이란 자는 아주 형편이 없었는데, 후임 관찰사인 오숙이 조희일이 행한 정치를 모두 뒤집어 개혁하니, 우러러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신임 예안현감 나무송이 부임하다”

김령, 계암일록, 1630-12-14 ~

1630년 12월 14일, 날씨가 맑고 바람이 불었다. 지난달 말 예안 고을의 수령이 교체되었다. 온갖 악행을 일삼던 김진이 수령에서 물러나고, 신임 현감으로 나무송이란 자가 부임하였다. 김령은 그를 잘 알지 못하였으나 며칠 간 그의 행실과 소문을 들어보니 사람됨이 성실하고 활달하여 속이고 꾸미는 짓을 일삼지 않는 듯 하였다. 또 어진 이를 존경하고 선비들을 아껴서 사대부의 풍모가 있는 듯 하였다. 실로 전임 현감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러나 굳세고 명철한 면을 다소 부족한 듯이 보였다. 이런 성격들은 자신의 생각을 굳게 지키는 면이 부족하게 마련인데 그 면이 다소 걱정이 되었다. 또 스스로 하고자 하는 일은 곧바로 자신의 뜻대로 행하는데 그 과정에서 다른 이야기나 상황은 크게 살펴보지 않은 점도 가진 듯 하였다. 이 면은 한편으로는 걱정스럽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가 속이는 짓을 행하지 않는데서 말미암은 것이기에 장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가 속이는 마음이 있다면 처음 부임한 고을에서 지금처럼 행동하지는 않을 듯 하였다. 그가 사람들을 잘 인도할 수 있다면 반드시 좋은 정치를 할 수 있을 듯 하였다.

“예안 현감 홍석우의 어리석음을 논하다”

김령, 계암일록, 1631-11-07 ~

1631년 11월 7일, 매우 추운 날씨였다. 근래 들리는 말에 의하면 예천 군수 허휘(許徽), 의성 현령 정세규(鄭世規)가 백성들을 잘 다스린다는 명성이 널리 퍼져 있었다. 김령이 보기에는 풍기 군수인 김상윤(金尙尹)도 백성들을 잘 다스렸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의성 현령이 가장 백성들을 아껴서 옛날 선량한 관리의 풍모가 있었다. 안동 부사인 홍명구(洪命耉) 또한 정사에 재능이 있었으나, 판관인 윤정(尹淨)은 가렴주구가 날로 심하여 백성들이 모두 원망하고 욕을 하는 실정이었다.
김령이 사는 예안현의 수령은 홍석우(洪錫禹)란 자였는데, 어둡고 괴팍하여 일을 헤아려 처리할 줄 모르고 오직 형벌만을 앞세워 위엄을 세우는 것에 급급하였다. 그리하여 일을 처리하는 결정이 모두 아전의 수중에 있었고, 수령은 망령되게 교만을 부리며 성내고 화내는 것이 일정하지 않았다. 최근 우처인(禹處仁), 황유장(黃有章) 등 10여 명이 글을 올려 집안이 가난하여 환곡을 갚지 못하겠으니, 다른 곡식으로 대신 납부하거나 아니면 그 반만 납부할 수 있도록 청하였다. 그러자 홍석우가 크게 노하여 사찰관에게 매질을 하면서 말하기를 “네가 독촉하지 않은 까닭에 이러한 건의가 올라온 것이다.”라고 탓하였고, 더불어 권농관까지 매질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상서를 올렸던 우처인이 사찰관의 억울함을 불쌍히 여겨 다시 호소하기를 “사찰관이 독촉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스스로 마련하지 못하여 그런 글을 올린 것이니, 사찰관의 죄가 아닙니다.”라고 호소하였다. 그러자 홍석우가 다시 화를 내면서 우처인의 머리채를 잡아 쥐고 끌고 가니 거의 목이 빠질 뻔하였다. 그리고 다음날에는 우처인의 종을 잡아들이라 명하였다고 한다.

“고을수령과 지방토호의 기싸움”

김령, 계암일록,
1607-03-13 ~ 1614-11-01

1607년 3월 13일, 들으니, 우리 읍의 새 수령이 풍산의 안담수라고 했다.
윤6월 13일, 우리 읍의 수령 안담수의 첩은 읍내 사람 권학(權鶴)의 딸이다. 안담수가 그의 첩의 친족인 권산해(權山海)와 노비 문제로 소송을 했는데, 안담수가 위세로 누르려 하자 산해가 공손하지 못한 말을 했다. 안담수가 크게 화를 내어 산해를 차꼬에 채워 옥에 가두고 토호가 수령을 능욕했다며 감사에게 보고했다.
산해의 처 동생인 봉화 사람 변흠(邊欽)이 감사가 진주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그 이유를 호소했다. 감사가 바로 호소를 받아들여 예안에서 올린 첩정의 끝에 뎨김[題音]했다.
“현감의 처사가 아주 이치에 맞지 않으므로, 속히 산해를 풀어주고 또 현감은 높은 직위가 아니므로 사건은 반드시 서로 소송해서 결말을 보아야 하기 때문에 영천군(榮川郡)으로 이관하는 것이 옳다.”
이렇게 처분하자 안담수가 크게 부끄러워했다. 감사의 공평하고 정직함과 지혜롭고 사리에 밝음이 이와 같았다.
9월 27일, 들으니 우리 고을 수령 안(安) 공이 고강(考講)할 유생을 불렀는데, 주패(朱牌)를 사용했다고 한다. 해괴하고도 우습다.
1608년 2월 27일, 듣자하니, 평보 형이 우리 고을 수령 안담수에게 욕을 보았다고 한다. 지난 23일 우리들이 함께 제천 표숙댁에 갔을 때, 이지(以志)가 자기의 집에 관아에서 손님이 왔다는 말을 듣고 먼저 일어서서 나갔다. 우리들은 돌아올 때 이지를 불러내었는데, 관아에서 온 손님도 따라 나왔다. 그는 즉 우리 고을 수령의 처조카이고, 이지에게는 내외종간이 되는데, 이름이 이할(李硈)이다. 땅바닥에 앉아 잠시 있다가 헤어졌다.
이할이 여러 가지 말을 지어내어 두 형을 헐뜯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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