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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400번 젓기, 실 4000번 잣기.
달고나 커피도 우리 민족이었어.

출처_네이버 지식백과


만물이 생동하는 계절이건만, 많은 사람들이 나 스스로와 이웃을 지키기 위해 집 안에 틀어박혀 있다. 개중에는 넘치는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하고 자발적 단순반복노동을 오락으로 승화시키는 사람들도 있다.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야 특수한 상황이 아니면 집 안에 갇히는 경험을 할 일이 거의 없지만, 조선 여성들은 거의 매일 단순반복노동이 결부된 강도 높은 사회적 거리두기를 경험해야 했다.


출처_유튜브


드물게나마 숨통이 트일 만한 행사가 여성들의 주도로 기획되기도 하였다. 화전놀이 날은 늘 규중에 있어야 했던 조선 여성들이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날이었다. 먼저 집안 어른들의 허락을 받고 날을 잡아야 했지만 준비과정조차도 설레는 마음으로 즐길 수 있었을 것이다. 꽃이 아름답게 피어 있는 들과 산에서 여성들은 시와 노래를 지으며 평소 내보이기 어려웠던 문학적 재능을 표출하였다. 물론 노래에는 으레 미주가효(美酒佳肴)도 따라오기 마련이었다.


화전가, 가사, 출처_전통과 기록_옛문서생활사박물관


꿈같은 봄날의 하루를 보낸 뒤에는 다시 일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나마 요즘의 우리보다 나은 점이 있다면 아이들이 나가서 뛰어놀 수 있다는 것 정도일까.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하지 않더라도 여성들은 새벽부터 밤늦도록 쉴 새 없이 일해야 했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서는 양반 댁 여성들의 삶이 한가롭게 그려지지만 실제로는 결코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신분의 고하와 돈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여성이라면 반드시 해야 하는 일들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화전놀이에서 불리며 많은 공감을 얻었을 규방가사는 조선 여성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그 중 가장 짠한 내용을 담고 있는 가사를 골라 봤다. 오호라, 그 제목도 「여자 탄식가」이다.

어와 우리 동유들아 여자 ᄐᆞᆫ식 드러 보소
(중략)
남ᄌᆞ 몸이 되엿드면 긴들 안이 조흘손가/죠달공명 못ᄒᆞ거든 ᄯᅩ ᄒᆞᆫ가지 죠흔 일리
호질 남아 ᄃᆡ장부로 오입직을 버졀 삼아/소연풍ᄎᆡ 옥골남이 시쥬ᄀᆡᆨ을 버졀 삼아
츈풍삼월 츄구월아 ᄃᆞᆫ풍 구경 ᄭᅩᆺ 구경을/곳곳 마다 명승지예 그 어ᄃᆡ로 가자든고
금강산 만이천봉 기암괴셕 ᄃᆞ 본 후에/쥭셔누 경포ᄃᆡ난 관동팔경 노라 잇고
평양기생 젼쥬기생 ᄉᆡᆨ향으로 노라 보고/도쳐상봉 만ᄂᆡ 보니 일면여구 친구로다
ᄐᆡ평연호 간 곳마다 히히낙낙 죠흔 셰월/남자 몸이 도엿드면 긴들 안이 죠흘손ᄀᆞ
(중략)
아모리 여ᄌᆞ라도 죠흔 줄 알건마는/알고도 못 ᄒᆞ오니 ᄉᆞ람 갑셰 가ᄃᆞᆫ 말ᄀᆞ
보고도 못 ᄒᆞ오니 눈ᄯᅳᆫ 소경 안닐넌가/무용ᄒᆞᆫ 우리 여ᄌᆞ ᄋᆡ달ᄒᆞ고 가련ᄒᆞ다

가사는 여성의 탄식으로 시작된다. 초입 부분에는 남성이 누릴 수 있는 여러 유흥거리들이 오입질부터 시작하여 술 마시며 시 짓기, 꽃구경, 유람, 노름까지 길게 나열되어 있다. 여러 벗들과 명승지를 배경삼아 풍류를 즐기는 일이 좋은 줄은 안 해봐도 알 수 있는 일. 하지만 그 즐거움을 알면서도 다만 여성이기 때문에 한평생 그 풍류를 즐겨보지도 못하는 데에서 스스로에 대한 연민을 느끼고 있다. 이렇듯 운신의 자유가 제한되어 있었던 여성들이 일상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때는 언제였을까?

유정ᄒᆞ다 우리 동유 언ᄌᆡ ᄃᆞ시 만ᄂᆡ볼고/츄식 즁구 셰시ᄯᆡ난 츈몽갓치 만ᄂᆡ오고
혼인잔치 회갑잔치 번ᄀᆡ갓치 흣터지니/츈삼월 화젼 ᄯᆡ난 ᄭᅩᆺ구경도 낫부더라
육칠월 첨외ᄯᆡ난 셕양도 날ᄂᆡ로다/통분ᄒᆞ다 우리 여ᄌᆞ 시시이 ᄉᆡᆼ각ᄒᆞ니
열 가지예 ᄒᆞᆫ가지로 흔ᄒᆞᆫ 셰계 못볼너라/깁고 깁흔 이 규중에 여ᄌᆞ들이 ᄯᅡᆨ자 ᄒᆞ니
빙옥 갓흔 ᄋᆡ졀을 유슌키만 쥬장ᄒᆞ고/션당에 늘근 부모 지셩으로 효도ᄒᆞ고
동기간 모든 형제 우ᄋᆡᄒᆞ고 화슌ᄒᆞ여/이ᄅᆡ면 흉 날셰라 져ᄅᆡ면 말 날ᄉᆡ라
ᄉᆞ랑에 오난 손임 문틈으로 잠관 보고/이웃집에 가난 양반 든장 우에 엿보라고
눈 맛치며 뭇참할 졔 츈분 쥬니 ᄶᅩ겨오니/이목구비 바로 쓰고 오장육부 갓치 삼겨
ᄃᆞ 갓치 ᄉᆞ람으로 무삼 죄가 지즁ᄒᆞ와/고양 압히 쥐가 되고 ᄆᆡ계 ᄶᅩ긴 ᄭᅯᆼ이 되어


출처_무등산웹생태박물관


화자는 의성에서 안동으로 시집을 온 여성이다. 의성과 안동은 그리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여성의 몸으로는 자주 친정과 왕래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부모형제 등 친지를 만날 수 있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을 것이다. 하지만 친정 부모형제를 만날 수 있는 명절은 봄밤의 짧은 꿈같으며, 또 잔치 때 만나게 되더라도 번개같이 흩어져 버릴 따름이다. 화전놀이 꽃구경도 마음을 달래주지 못한다. 흔한 세상을 볼 기회도 박탈당하고 집 안에서 그저 부모를 모시고 형제의 우애를 지키며 유순하게 지내기만을 요구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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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여성은 한 집에 살면서도 사랑에 오는 손님을 문틈으로 잠깐 엿볼 수 있을 따름이며, 이웃집에 가는 사람은 담장 위로 흘긋 볼 수 있을 뿐이다. 죄인도 아닌데 담장과 문 안에 갇혀 있다. 잠깐 바깥을 엿보는 것 정도로도 행실에 대한 말이 나올까봐 전전긍긍한다. 고양이 앞의 쥐처럼, 매에게 쫓기는 꿩처럼 늘 마음을 졸이며 사는 삶이다. 이것이 바로 ‘규중’이다. 오늘날 락다운 때문에 집 밖에 나가지 못하게 된 사람들이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발코니에서 색소폰을 부는 그 심정을 규중의 여성들은 한 평생 느끼며 살았을 것이다.

누ᄃᆡ 죵가 죵부로셔 봉졔ᄉᆞ도 조심이오/통지즁문 호가ᄉᆞ에 졉빈ᄀᆡᆨ도 어렵드라
모시 낫키 삼비 낫키 명쥬 ᄶᆞ기 무명 ᄶᆞ기/다담이러 뵈을 보니 직임 방젹 괴롭더라
용정ᄒᆞ여 물여ᄃᆞ가 졍구지임 귀ᄎᆞᆫ터라/밥 잘 짓고 슐 잘 비져 쥬ᄉᆞ시예 어렵드라
함담을 맛기ᄒᆞ여 반감분기 어렵더라/셰목중목 골나ᄂᆡ여 주ᄌᆡ ᄯᅡ듬 괴롭더라
ᄌᆞ쥬비ᄃᆞᆫ 잉물치마 염ᄉᆡᆨᄒᆞ기 어렵드라/츈복 짓고 ᄒᆞ복 지여 ᄲᅡᆯᄂᆡᄒᆞ기 어렵드라
동지장야 ᄒᆞ지일에 ᄒᆞ고 마는 져 셰월에/쳡쳡히 ᄊᆞ인 일을 ᄒᆞ고 ᄒᆞᆫ들 ᄃᆞ할숀가

집 안에서 하고 싶은 소일거리만 할 수 있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가사에는 여성이 해야만 하는 집안일 리스트가 쭉 나열된다. 화자는 시집 와서 종부가 되었는데, 친정이고 시집이고 지금까지도 명맥이 이어져 내려오는 유구한 양반 댁이다. 하지만 양반 댁 아씨라고 해서 해야만 하는 일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었다. 종부로서 봉제사(奉祭祀) 접빈객(接賓客)은 물론이요, 모시, 삼베, 명주, 무명을 짜고 다듬이질, 그리고 밥 짓고 술 빚기, 천 염색하기, 철따라 옷 짓기가 매일의 노동으로 이어졌다.


출처_서울역사아카이브


천을 짜는 데 쓰이는 실은 목화, 마, 누에에게서 뽑아내야 했다. 물레를 수천 번 돌리며 손이 부르트도록 실을 꼬아낸다. 그렇게 만들어진 실을 베틀에 걸고 수천, 수만 번 교차하여 천을 짠다. 괴롭게만 느껴지는 이 일들은 무릇 여성이라면 반드시 잘 해야만 하는 일로 여겨졌다. 오죽하면 직녀는 선녀인데도 베를 짜겠는가. 요즘 집 안에만 있기 지루한 사람들이 커피를 400번씩 저어서 달고나 커피를 만들고 달걀을 500번씩 저어서 수플레 팬케이크를 만드는 노동을 자청하는 것을 보면 우리가 과연 한민족임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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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분 잠 ᄃᆞ 못 자고 놀고져워 어이 할고/상육 쳑ᄉᆞ ᄯᅳ던지고 넉동 ᄂᆡ기 윳철 노니
여자의 ᄇᆡ운 노름 그 밧ᄀᆡ ᄃᆞ시 업다/열 노름에 ᄒᆞᆫ 노름도 임의ᄃᆡ로 다 못 늘고
십리 츄립 오리 츄립 임의ᄃᆡ로 어이 가리/지옥 갓흔 이 규중에 등잔을 비겨 안자
인도 가위 차ᄌᆞ 놋코 즁침 셰침 골나 ᄂᆡ야/시쳬 보고 척슈 보아 아쥬 ᄒᆞ기 어렵더라
장단 보고 척슈 보아 졔도 범졀 어렵더라/쥴저고리 상첨 박아 도포 짓고 보선 기여
셔울 출립 향중 출립 ᄂᆡ일 갈지 모ᄅᆡ 갈지/부지불각 춍망즁에 션문 업시 찬난 의복
ᄉᆞ랑에 져 양반은 셰정 물졍 어이 알리/ᄒᆞᆫ슈만 부죡ᄒᆞ면 셔리 갓ᄒᆞᆫ 져 호령이

힘든 일에 지쳐 감기는 눈을 하고서도 화자는 놀고 싶어 한다. 꺼낸 것은 쌍륙과 윷놀이. 여성이 놀이라고 배운 것이라 해봤자 저 두 가지 밖에 없다. 참, 인현왕후가 폐출되어 사가로 나갔을 때, 밖으로 다니지도 못하는 와중에 무료함을 달래고자 ‘여행도(女行圖)’라는 여성을 위한 일종의 보드게임을 만들었다고도 한다. 하지만 널리 유통되지는 못한 듯하다. 요즘 밖에 못 나다니는 사람들이 숲에서 수렵 채집하여 너구리에게 대출을 갚아나가는 힐링게임을 한창 하고 있는 중이라는데, 아마 ‘여행도’와 비슷한 체제를 가진 ‘승람도(勝覽圖)’놀이가 유람을 다니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주었을 것이다. 전국의 명승지를 주사위와 말로 누빌 수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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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화자는 그마저도 다 놀지도 못하고 다시 바느질에 매진한다. 자신의 놀이는 중단되었건만, 언제 서울로 동네로 놀러 나갈지 모르는 남편의 도포와 버선을 짓는다. 남편은 승람도 놀이를 하지 않아도 현실 속에서 명승지에 가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채에 있는 ‘저 양반’은 세상물정도 모르고, 아내가 힘들게 지어 놓은 옷에 부족함이 있으면 서릿발 같은 호령을 내지를 뿐이다. 다듬잇방망이로 다듬어 주고 싶은 것이 반드시 옷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몃푸는치 안된 남자 가소롭고 갓잔터라/아모리 여잔ᄃᆞᆯᄉᆞ 그만 남자 양두ᄒᆞ리
얼금벌금 키 큰 남자 키만 잔득 커 먹엇지/알분시런 셩민노장 납작납작 말만 ᄒᆞᄃᆡ
어리슝슝 문셔씨난 거질불도 일슐너라/통ᄉᆞ ᄒᆞᆫ 권 못 이르고 ᄉᆞ셔삼경 어이 알며
오원 칠원 못 짓거던 치부표ᄎᆡᆨ 어이 ᄒᆞ며/졔 이름도 모르거든 죠상 셰계 어이 알며
ᄒᆞᆫ 짐 닷 뭇 모르거든 문셔 치부 어이 ᄒᆞ리/이팔 쳥츈 졀문 ᄯᅵ예 허도 셰월 무삼 일고
(후략)

하지만 화자는 다듬잇방망이는 내려놓은 채 고상하게 문학적 재능을 발휘한다. 화자가 지은 가사는 남성들에 대한 불만을 대대손손 전하고 있다. 키 작은 남자든 키 큰 남자든 말만 할 줄 알지 문서도 쓸 줄 모르며, 통사 한 권을 다 읽지도 못하고 사서삼경일랑 알지도 못한다. 남자들이 모르는 것에 대해 할 말은 아직도 많다. 남자들은 집안 재산 출납도 못 하고, 심지어는 자기 이름이며 조상 세계며 모르는 것투성이이다. 남성들이 글공부고 제사고 놀러 다니기 바쁘기 때문이었을까. 화자가 비록 집안에 갇혀 있을지언정, 여성을 가두어 놓은 세상일에 대해 통렬히 비웃는 그 기세는 대문을 부수고 나갈 정도다.

집 안에 갇혀 넘치는 기세를 주체하지 못하고 커피를 젓고 있는 2020년의 후손들. 다행히 우리를 지금 집 안에 가둔 것은 서로에 대한 배려심이며 시민으로서의 자각이다. 랜선을 타고 함께 따로 또 같이 화전놀이를 즐겨보자.

참고문헌

국립국어원 언어정보나눔터 데이터베이스 자료>역사/병렬 자료
[역사/원시/미정제] 규방가사 Ⅰ 백발가 외 10편_A0BA0008_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_?_?_문어_시가류_6592어절




집필자 소개

강유현
강유현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며, 연세대에서 조선후기 중인층의 서화완상문화에 관해 공부하고 석사학위를 받았다. 인간의 욕망이 문화 저변에 드러나는 모습에 주목하였다. 지금은 19세기 이래 근대기의 미술과 권력의 유착에 관심을 두고 연구하고 있다.
“아이들을 돌보다가 병이 옮은 부부”

금난수, 성재일기,
1579-02-12~1579-02-23

지난 연말부터 무섭게 번져나간 전염병은 금난수의 집에도 마수를 뻗쳐 집안의 여종들과 금난수의 딸들이 차례로 몸져눕게 되었다. 병을 피해보려고 이리저리 피접을 다니고는 있었지만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해지는 병을 피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금난수의 집에서도 여종 두 명이 사망하였고, 금난수의 두 딸도 병세가 나아졌다 나빠졌다를 반복하였다.
남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집에서 가장 먼저 발병한 금난수의 막내아들 금각의 병세는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집안의 아이들 명석(命石)과 연문(連文)도 앓아누운지 이미 이레가 다 되었다. 그러던 중 아이들을 돌보던 금난수의 아내가 몸이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땀을 좀 낸 뒤에는 괜찮아진 것 같았으나 곧 다시 앓아누웠고, 금난수도 연이어 잠자리가 편치 않고 입맛도 없어지더니 결국 함께 앓아눕게 되었다.
거처하기 편하지 않은 재사(齋舍)에서 부부가 함께 앓고 있자, 아들들이 배행하여 금난수의 아내는 가마를 타고, 금난수는 말을 타고 동계서재로 거처를 옮겼다. 서재로 옮긴 뒤 아내는 입맛이 점점 돌아오고 차도가 있었으나, 금난수는 병이 더욱 심해졌다. 그래서 밤에 땀을 좀 흘리고 나니 열이 잠시나마 내린 것 같았다. 하지만 아이들이 걱정되었기 때문에 결국 세 아들들을 서재에서 내보내고 아내와 단 둘이서 병조리를 하기로 하였다. 아이들이 떠나고 나자 전염에 대한 불안감이 줄어들어서인지 조금씩 몸이 회복되는 것이 느껴졌다.

“아내의 병으로 어린 아이를 남에게 맡기다”

최흥원, 역중일기, 1740-03-28~

1740년 3월 28일, 어머니의 환후는 평소와 다름없었으나, 아내의 병이 위독해져서 큰 근심이었다. 올해 들어 갑자기 병이 들더니 하루가 다르게 병세가 악화되어 거의 죽기 직전에 이른 것이다. 갑작스러운 아내의 병으로 최흥원은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오늘은 병든 아내가 최흥원에게, 법흥댁이 젖먹이 아이를 길러주겠다고 하였다고 전하면서 고맙기 그지없다고 하였다. 아마도 아내는 자신이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젖먹이 아이를 키울 방도를 그간 열심히 궁리하였던 것 같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지난밤 최흥원이 꿈을 꾸었는데, 거기에 아버지께서 나오셨다. 아버지는 둘째 제수씨를 부르더니 젖먹이 용장의 이름을 부르면서, 이 아이를 제수씨에게 키우라 명하였던 것이다. 최흥원은 이 꿈을 꾸고도 행여 아내가 다른 생각을 하지 않을까 싶어 꿈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지금 아내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는 너무도 놀랍고 괴이쩍은 생각을 숨길 수 없었다.
아! 아내는 정녕 세상을 버릴 것인가. 그래서 꿈에서 아버지께서 나오셔서 자신의 손주 걱정까지 하신 것인가! 최흥원은 마음이 착잡해져왔다. 병든 아내에게 아이는 걱정하지 말고 어서 몸을 추스르라고 말하고는 조용히 방문을 나섰다.

“아내가 병이 나서 의녀를 부르다”

김광계, 매원일기, 1608-03-26

1608년 3월 26일, 하루도 쉴 수 있는 날이 없을 정도로 바쁜 나날을 지내고 있던 김광계는 바쁜 와중에 오래 전부터 계획했던 서당을 짓기 시작하면서 집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거의 대부분을 아내에게 맡겨놓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아내의 얼굴 색이 좋지 않아 무슨 일이라도 있는지 물어 보았으나 아내는 아무 일도 없다며 집안 일은 걱정하지 말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마음을 놓고 바깥일에만 몰두했었다. 그런데 며칠 전에 드디어 아내가 몸이 아파서 일어나 앉는 것도 힘겨워하기 시작했다. 김광계는 의술에 뛰어난 집안 어른들께 여쭈어 보려고 했으나 아내는 펄쩍 뛰며 손사래를 쳤다. 이날 결국 집사람은 의녀(醫女)를 불러 진맥을 받은 후, 침을 맞고 뜸을 떴다. 소식을 들은 노산 재종조부가 걱정이 되어 찾아 왔다.

“이시명에게 시집간 누이가 당홍역에 걸려서 죽다”

김광계, 매원일기,
1614-09-01~1614-10-16

1614년 9월 1일, 김광계는 인동에서 열린 과거 시험에 낙방하고 안음 형과 같이 예안으로 돌아가는 길에 또 일직(一直)에 사는 류실 누이 집에 들러 자고 가기로 했다.
누이가 차려준 저녁상을 받아 맛있게 먹은 후에 과거 시험장에서 벌어진 이야기며, 오산서원을 구경한 이야기, 그리고 천생산성에 올라 사방을 내려다 본 이야기 등등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몇 년 전 갑자기 매형이 돌아가신 후로 적적하고 무료하게 지내는 누이에게 세상 이야기를 전해 주고 싶어서 더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하인이 달려 들어와 영해(寧海) 누이의 부고를 전해 주었다.
김광계는 너무 놀라서 믿을 수가 없었다. 다시 종을 불러 물어보니 지난 달 27일에 당홍역에 걸려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고 하였다. 김광계는 류실 누이와 생질녀를 붙들고 목을 놓아 통곡하였다. 김광계는 어린 누이가 가여워서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태어나 얼마 안 되어 왜란 와중에 두 부모를 모두 잃고 부모님의 얼굴도 기억하지 못한 채 자란 누이였다. 그래도 심성이 착하고 유순해 손윗누이들과 오빠들의 귀여움을 많이 받다가 이시명(李時明)에게 시집을 갔는데, 시집간 지 7년 만에 어린 자식을 둘을 남겨 두고 갑자기 세상을 떠났으니 그 눈을 어찌 감았을까. 누이 얼굴이 떠올라 김광계는 오장(五臟)을 도려내는 것 같았다. 잠을 잘 수 없었다.
눈도 붙이지 못했지만 그대로 있을 수가 없어 김광계는 깊은 달밤에 류실 누이의 집에서 나와 새벽에 집에 도착했다. 집에 들어가니 아내도 잠을 못 이루고 있었다. 김광계는 아내를 보자마자 또 다시 통곡하였다. 아내는 이미 영해 누이의 부고를 들었고, 마을에도 전염병이 돌아 집에 계시는 할머니와 아픈 아우를 침락서당으로 피접을 보내 놓았다고 했다. 김광계가 돌아 왔다는 소식을 듣고 아침부터 노산 재종조부가 와서 조문을 왔다. 다음날 아침에는 판사 재종숙이 와서 조문하고, 밥을 먹은 뒤에 여희·덕회 형, 그리고 김참 아재가 와서 조문하였다.
9월 4일 아침에 성복(成服)을 하였다. 노산 재종조부와 몇몇 사람들이 보러 왔다. 다음날 둘째 아우 이도(以道)가 부고를 듣고 예천(醴泉)에서 왔는데, 이들은 당장 영해에 갈 수가 없었다. 마을에도 전염병이 돌아 모두 조심스러웠고, 피접을 나가 있는 아픈 아우와 할머니에게 큰 일이 날까봐 마을을 떠날 수도 없었다. 제천 할아버지도 이질에 걸려 모두 염려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김광계도 몸이 매우 아팠지만, 아픈 몸을 이끌고 문병을 다니거나 사람들을 만나야 했다.
24일에도 영해(寧海)로 길을 나서려고 하였으나 병이 낫질 않아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나마 26일이 되어 피접 나가셨던 할머니가 집으로 돌아 오셨는데, 김광계는 이제야 할머니께 영해(寧海) 누이의 부고를 말씀드렸다.
영해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선 것은 10월 15일이었다. 다음날 저녁이 되서야 누이의 집에 당도하였는데, 조문객은 이미 아무도 없고, 빈소에 들어가니 붉은 만장과 혼백상자만 놓인 채 촛불이 깜빡이고 있을 뿐이었다. 쓸쓸한 모습에 김광계는 설움이 더욱 북받쳐 목을 놓아 통곡하였다. 매부인 이회숙(李晦叔)과도 서로 부여잡고 통곡을 하였다. 어린 남매를 보니 슬픔이 한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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