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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겸과 홍대용,
두 음악 대가의 수표교 거문고 협주

정조와 함께 예악 부흥에 힘쓴 김용겸


지금의 서울시 중구 을지로입구 지하철역 3번 출구 앞쪽에 옛 장악원 터 표지석이 있다. 장악원은 예조에 속한 국가기관으로 조선시대 궁중과 국가 행사에서 모든 음악과 무용에 관한 일을 담당한 관청이다. 장악원의 조직은 문관 출신의 행정관리와 음악교육 및 연주를 관장했던 체아직 녹관으로 구성되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장악원의 행정관리 직제는 당상관인 제조(提調) 2인과 낭관, 첨정, 주부, 직장 등 6인으로 구성되었다. 조선시대 내내 몇 차례의 조직 개편이 있었지만 거의 이러한 직제를 후기까지 유지했다.


『경국대전』 중 장악원 관련 조항(출처: 서울대학교_규장각한국학연구원)


김용겸(金用謙, 1702~1789)은 정조 2년인 1778년 희정당(熙政堂)에서 정조와의 면대를 거쳐 11월에 장악원 제조로 임명되어 정조와 함께 예악 부흥을 위해 헌신한 사람이다. 그는 김수항(金壽恒)의 손자이고 김창즙(金昌緝)의 아들이며 김창집(金昌集)의 조카로 명문가 사람이었다. 악률(樂律)에 밝았고, 악기 연주도 상당한 수준이었는데 특히 거문고 타기를 무척 즐겼다. 그가 장악원 제조 벼슬을 맡게 된 것은 전문 음악인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음악에 조예가 있는 문관을 임명하는 통례에 따른 것이다. 정조는 즉위 초부터 조선의 예악을 정비하고자 하였는데 김용겸이 적임자로 선택된 것이다.


창덕궁 희정당(출처: 문화재청)




생황과 양금이 연주된 그날 밤, 홍대용의 집에서는…


어느 겨울 달빛 교교한 밤에 효효재(嘐嘐齋) 김용겸이 수표교를 건너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의 집에 약속 없이 들렀다. 김용겸의 집은 청계천의 북쪽이고 홍대용의 집은 남쪽이었으니, 두 사람이 만나기 위해서는 수표교를 건너야 했다. 김용겸은 홍대용보다 서른 살이나 많았지만, 둘 사이는 스스럼이 없었고, 친구처럼 대했다. 김용겸의 사교성에 대해서 연암 그룹의 한 사람인 이덕무(李德懋, 1741~1793)가 『사소절(士小節)』에서 평하기를, “효효재 김용겸 공은 늙어 흰 머리가 되어서도 배우기를 좋아하여 게을리 하지 않았다. 총명한 젊은이를 만나기만 하면 반드시 흔쾌히 손수 쌓여있는 책을 뒤적여서 옛사람의 아름다운 일과 뜻이 담긴 말을 찾아 읊조리며 강론하고, 너무너무 기뻐하며 당부해마지 않았다. 내가 한차례 뵐 적마다 빈손으로 갔다가 가득 채워 돌아오곤 했다”고 했을 정도로, 젊은 선비들에게 허물없이 대하고 아낌없이 주려고 했던 인물이다. 이덕무는 홍대용보다 열 살이 어렸으니, 김용겸이 젊은 선비를 얼마나 아끼고 존중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그는 자유로운 지성의 소유자로서 30~40살의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홍대용이나 박지원 그룹 사람들과 어울렸다. 때론 시로, 때론 음악으로 그들은 조선의 문화를 풍요롭게 하는 스토리를 수없이 만들어냈다.


수표교(출처: 문화재청)


이날 홍대용의 집에는 연암 박지원(朴趾源, 1737~1805)과 장악원의 금사(琴師)이자 가객(歌客)으로 유명한 풍무(風舞) 김억(金檍, 1746~?) 등 여러 명이 모여 악기 합주를 하고 있었다. 김용겸이 그 집에 막 들어섰을 때 생황과 양금이 연주되고 있었다. 양금은 홍대용이 연주법을 터득한 이래로 악기 매니아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었는데, 그 합주가 너무나 아름다워 김용겸은 쟁반을 두드리며 가락을 맞추고 『시경』 「벌목」시를 노래로 읊었다.

이날의 모임에 대해서 박지원의 『연암집』의 기록과 박지원의 아들 박종채가 아버지의 구술을 바탕으로 지은 『과정록(過庭錄)』의 기록이 시간대가 정확히 서로 부합하지 않지만 대체로 1770년대의 어느 날이다. 『연암집』의 기록도 이날을 회상하며 남긴 것이고, 『과정록』의 기록도 아들이 아버지의 구술을 기억하여 남긴 것이니, 서로의 기억이 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이날 이 몇 사람의 모임은 조선의 음악사에서도 역사적인 날이고, 서울의 콘텐츠 스토리 구성에서도 매우 재미있는 날이었다.


『연암집』(출처: 서울대학교_규장각한국학연구원)


『과정록』(출처: 국립중앙도서관)




청계천, 새로운 핫 플레이스의 등장


18세기 조선판 르네상스(문예부흥기)로 평가받는 영조와 정조 임금의 때에 조선의 음악, 미술, 무예, 문학 등 다양한 분야의 발전이 있었다. 서양문물에 대해서도 상당히 개방적이었다. 더욱이 두 임금의 현명한 정치 덕에 중인 계층의 경제적 여건이 좋아지고 신분적 상승도 있었으며, 홀대받던 서얼 출신들도 정관계에 진출하는 등 사회적 변화도 활발했다.

음악을 향유하는 계층도 사대부에서 점차 민간으로 확대되었다. 연행사를 통해 서양의 신문물도 여과 없이 수용되었고, 당시 청나라의 발달된 문화도 서서히 수입되기 시작했다.

홍대용의 집에 먼저 와 있던 박지원은 1768년부터 1778년까지 10여 년간 오늘날 종로구 탑골공원 근처 전의감동(종로1가 종로타워 부근)에 살면서 그 주변에 살던 지인들과 함께 백탑시사(白塔詩社)를 결성하여 이른바 연암 그룹을 형성하였다. 백탑은 원각사지 10층 석탑을 가리킨다. 이들은 대부분 나중에 북학파가 되었다. 그는 1778년 황해도 연암골로 이사하였다가 1781년 다시 서울 서대문 밖 평계(종로구 평동)로 이사하였는데 이때 오랜만에 시사 회원 몇몇을 만나 종각 쪽으로 거닐며 청계천 광통교 난간에 이르러 6년 전의 일을 회상하였다. 6년 전이라 하였으니, 1776년 즈음일 것이다. 이해는 영조 임금이 죽고 젊은 정조 임금이 즉위한 해이다. 백탑파 회원들이 왕성하게 활동하던 때였다.

청계천 주변은 원래 사대부가 거주하던 곳이 아니었고, 평민이나 빈민들이 모여 살던 곳이었으나, 1760년 영조가 처음으로 대규모 준설을 하고 돌로 제방을 쌓은 이후 핫 플레이스로 떠올랐다. 광통교 주변인 구리개(을지로입구역 부근) 근처에 도화서가 있었는데 이 주변으로 지물포, 그림가게 등이 들어섰고, 광통교와 수표교 일대는 오락과 유흥의 중심지가 되어 놀이터와 술집, 찻집 등이 들어섰다. 이곳은 연암 그룹이 활동하던 주 무대였다.


〈상원야회도(上元夜會圖)〉(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도성 제1의 다리 광통교』, 2021/원자료 : 국사편찬위원회)




서울 한복판에서 들려오는 양금 소리


다시 그날의 홍대용의 집으로 돌아가 보자. 홍대용의 집에는 양금(洋琴)이 여러 대 있었다고 한다. 서양 가야금으로 불리는 양금은 달리 구라철현금(歐邏鐵絃琴)이라 했고, 중국인들은 이 악기를 번금(藩琴) 또는 천금(天琴)이라 했다. 조선에는 영조 임금 때 1765~66년 동안 홍대용이 연행사로 갔을 때 직접 구입해 들여온 것으로 추정된다. 양금은 유럽에서 덜시머(Dulcimer)로 불렸던 피아노의 원형으로 채로 현을 쳐서 소리를 내는 악기인데, 후에 채 대신 건반을 달아 피아노로 발전하였다. 그런데 조선의 음계와 맞지 않아 연주할 수 있는 이가 없었다. 박지원의 『연암집』에 따르면, 조선에서 최초로 양금을 우리나라 음조에 맞게 연주한 것은 담헌 홍대용이라 한다. 박지원은 양금 연주법이 해득되어 조선에서 진정한 악기로 재탄생한 시간까지 정확히 기록으로 남겨주었다. 때는 1772년(영조 48년) 임진년 6월 18일 오후 6시 경 비로소 홍대용이 이 악기를 해득하였다. 박지원의 말에 따르면 이날은 조선에서 처음으로 홍대용의 천재성과 이날 함께한 음악인들의 집단지성을 통해 양금연주법이 해득된 역사적인 날이었다.


양금(출처: 국립중앙박물관)


박지원의 아들 박종채는 『과정록』을 지어 아버지의 일거수일투족과 이들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겼는데, 이날 박지원 등이 홍대용의 집에 모여 가야금과 철현금의 음조를 맞춰가며 몇 차례 합주를 시도한 끝에 가야금 선율에 맞게 연주할 수 있었고, 이때부터 철현금이 우리나라에 성행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자리엔 장악원의 금사(琴師) 김억(金億)이 함께했는데, 아마도 철현금의 연주법을 터득하고자 했던 것 같다. 조선의 음악을 관장하던 장악원의 가야금 연주자가 홍대용의 집에 와서 함께 연주를 하였으니, 홍대용의 음악적 천재성을 가히 짐작할 만하다.




조선 셀럽(Celeb), 수표교 위에서 버스킹 하다


홍대용은 북학파의 선구가 되는 인물로 박지원과는 여섯 살 위였으나 박지원과 지우로 지냈다. 홍대용이 사망하고 나서 박지원은 그와 노닐었던 운치를 더 이상 가질 수 없다는 실망감에 소장하고 있던 모든 악기를 다 주변에 나눠주고 수년간 악기를 멀리했을 정도로 두 사람의 우애는 매우 깊었다.

박지원은 당대의 명문장가이자 문학의 새 지평을 연 사람이다. 시세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문학으로 당대의 셀럽 중의 셀럽이었는데, 그 자유지성의 파괴력이 조선이 감당하기엔 힘들었던지 그 문명한 정조 임금조차도 박지원풍의 문체를 배격하고 문체반정(文體反正)을 주장할 정도였다.

백탑파, 곧 연암 그룹에는 박제가, 이덕무, 이서구, 이한진, 정철조, 서상수, 유금, 유득공 등 당대의 셀럽들이 모여 있었는데, 박제가(朴齊家, 1750~1805)의 「백탑청연서」에 따르면, 한번 모이면 열흘이고 한 달이고 서로의 집을 돌아가며 시도 짓고 연주도 하고 유흥도 즐겼다고 한다. 박지원의 집 주변에 이덕무가 살았고, 이서구, 서상수, 유금, 유득공 등이 다 지척에 살고 있었다. 이들과 달리 홍대용은 청계천 남쪽 마을에 살았다. 이들이 홍대용을 만나러 가기 위해서는 수표교를 지나야 했다.

아마도 1776년이었을 어느 겨울 달빛 교교한 날 김용겸은 흥에 겨워 「벌목」시를 읊고 즐기다가 소리 없이 자리를 떴다. 모두들 얼마나 흥에 겨웠던지, 한참을 지나서야 김용겸이 사라진 걸 알게 되었다. 김용겸은 이 모임에서 가장 어른이었는데 홍대용과 박지원은 혹 어른에게 실수한 건 아닌가 싶어 급히 그를 찾아 나섰다. 그들이 합주를 하고 가무를 즐기는 동안 큰 눈이 내린 뒤였다.


〈후원유연(後園遊宴)〉 부분 《행려풍속도 8폭 병풍(行旅風俗圖八幅屛風) 복제품》 8폭 중 제4폭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일행은 김용겸의 집으로 가기 위해 수표교로 향했다. 박지원은 이날의 일을 아들 박종채에게 들려주며 김용겸을 회상했다. 막 눈이 그쳐 달빛에 수표교가 영롱하게 반짝이고 있었고, 김용겸이 그 다리 위에 앉아 거문고를 무릎에 걸쳐 놓고 갓도 쓰지 않은 채 달빛을 바라보며 그 아름다운 정취에 취해 있었다. 아마도 막 거문고 한 곡조 연주를 마쳤으리라. 그 광경을 보고 홍대용과 박지원 등은 술상과 악기를 수표교로 가지고 와서 연주하고 마시고 한바탕 즐긴 뒤에 헤어졌다.


생황(출처: 국립민속박물관)


거문고(출처: 한국국학진흥원_스토리테마파크)


가야금(출처: 국립민속박물관)


퉁소(출처: 국립민속박물관)


달빛 교교한 밤 눈 내린 청계천 수표교 위에서의 야외협연.

생황과 거문고와 가야금과 퉁소와 양금이 어우러졌을 한밤의 야외음악회는 유례없는 아마도 이들이라서 가능했던 역사적 사건일 것이다. 새로운 시대에 대한 기대와 문화적 자부심으로 가득했던 신지식인들, 수표교 위에서는 막 해득된 서양 악기를 협주하는 음악인들. 이들이 만들어간 문화콘텐츠는 오늘날 우리의 정서를 아름답게 격동시킨다.




집필자 소개

황병기
연세대학교에서 조선후기 실학의 집대성자 다산 정약용의 철학사상을 전공하여 문학석사학위와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경대학교 동양학과 특임교수로 재직중이며, 연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연구원 및 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중점연구소 연구원을 겸하고 있다.
저서로 『여가, 선인들의 지혜와 여유』, 『동아시아와 문명 : 지역공동체 지평의 인문실크로드』, 『정약용의 주역철학』, 『역, 위대한 미메시스』, 『한국인의 일상과 문화유전자』, 『길 위의 인문학』 등이 있다. 현재 문화와 문명 연구를 통해 한국인의 미래 전략을 구상하고 있다.
“대나무 숲에서 백성들을 걱정하다, 광대의 피리 소리와 승려의 춤으로 울적한 마음을 떨치다”

김일손, 두류기행록, 1489-04-17 ~

1489년 4월 17일, 지리산을 유람중이던 김일손은 5리를 가서 묵계사에 이르렀다. 절은 두류산에서 가장 빼어난 사찰로 이름이 나 있었지만, 와서 보니 전에 듣던 것처럼 빼어나지는 않았다. 다만 절간이 밝고 아름다우며 사이사이 금실을 넣어 특이한 비단으로 청홍색으로 만든 부처의 가사와 거처하는 20여명의 승려들이 묵묵히 정진하는 모습이 금대암의 승려들같이 볼 만하였다. 조금 쉬었다가 말을 돌려보내고 지팡이를 짚고 왕대 숲을 헤치며 나아갔는데, 길을 잃고 헤매다가 간신히 좌방사(坐方寺)에 이르렀다. 거주하는 승려는 3, 4명뿐으로 절 앞의 밤나무가 모두 도끼에 찍혀 넘어져 있었는데, 승려에게 왜 이렇게 되었냐고 물었더니, 한 승려가 말하기를, “백성들 중에 밭을 일구려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렇게 되었는데, 못하게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김일손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높은 산 깊은 골짜기까지 이르러 개간하여 경작하려 하는 것을 보면, 국가의 백성이 많아진 것인데, 그들을 부유하게 하고 교화시킬 방법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조금 앉았다가 광대를 불러 생황과 피리를 불게 하여, 답답하고 울적한 마음을 떨쳐버리려 하였다. 누더기 승복을 걸친 한 승려가 뜰에서 서성이다가 덩실덩실 춤을 추는데 그 모습이 배를 움켜잡고 웃을 만하였다. 드디어 그와 함께 앞 고개로 오르는데, 나무가 길을 가로막고 있어서 그 위에 올라앉아 보니 앞뒤에 큰 골짜기가 있었다. 푸른 기운이 어스름한 저녁나절 생황소리가 피리와 어우러져 맑고 밝은 소리가 산과 계곡을 울려 정신이 상쾌해졌다. 흥이 다하여 바로 내려오면서 시냇가 넓은 바위에 앉아 발을 씻었는데, 이 날도 여전히 음산하여, 동상원사(東上元寺)에서 묵기로 하였다.

“쌍계사에서 기생들과 풍류를 즐기다”

조위한, 유두류산록,
1618-04-12 ~ 1618-04-13

조위한(趙緯韓)은 1618년 2월에 서울에서 가족들과 함께 남원으로 내려와 살게 되었다. 그런데 토포사(討捕使)의 임무로 남부로 가는 도중에 남원에 와 있던 동생 조찬한(趙纘韓)과 만나게 되었다. 두 사람은 다른 일행들과 함께 겸사겸사 지리산을 여행하기로 했다. 여행은 4월 11일에 시작되었다.

4월 12일, 압록진(鴨綠津)에 이르니 양형우(梁亨遇)가 먼저 강가에 도착하여 악사를 시켜서 피리를 불게 하고는 기다리고 있었다. 강가에서 점심을 먹고 난 후 배를 타고 술을 마시며 즐기고자 했다. 곡성 관아에서 관기 두 명을 보내주어 같이 배에 올랐다. 악사의 피리에 맞추어 기생들에게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강위에서 풍류를 즐기며 한참을 놀았다. 조위한과 일행들은 흥이 나서 각자 시를 한 수씩 지었다.

배에서 내려 계곡을 따라 30리를 걸었다. 구례현으로 들어가 현감 민대륜과 만났다. 일행과 민대륜은 밤늦게까지 술자리를 가졌다.

13일 아침에 구례현의 아전을 광양의 심생(沈生)이라는 사람에게 보내어 지리산에서 만나기로 했다.

조위한과 일행은 지리산 무릉계곡에 도착했다. 쌍계사의 승려 10여 명이 나와 일행을 맞이하면서 “토포사께서 이미 이 지역의 병마절도사님과 함께 쌍계석문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라고 했다.

“술과 꽃의 나날들 - 봄빛 가득한 안동에서 일족모임을 갖다”

김령, 계암일록,
1621-02-26 (윤) ~ 1621-03-02 (윤)

1621년 윤 2월 26일, 김령은 안동에서 일족 모임을 가졌다. 의원(醫院)에서 모였는데, 같은 성(姓)의 사람들이 모두 스무 명 남짓 되었다. 그들은 며칠에 걸쳐 술과 이야기를 나눴다. 살구꽃이 붉게 피고 수양버들이 푸르게 늘어져 봄빛이 온 고을에 가득했다.

다음날에는 일족 아닌 벗들까지 합세해 30여 명이 의원에서 향교로, 또 야외로 어울려 다니며 술잔을 나눴다. 김령이 안동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안동부사 박로가 그를 만나기 위해 의원으로 찾아오기도 하였다.

만난 지 사흘째에는 6세조 소감공(少監公)의 묘소가 있는 선영에 올라가 제사를 지냈다. 산의 형세가 비범하며, 기이한 봉우리가 멀리 펼쳐져 있어 길지를 이루고 있었다. 제사를 마치고는 음복 후, 묘소 아래 사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주고 돌아왔다. 지나는 곳곳마다 산꽃이 햇빛에 반사되었다. 귀래정(歸來亭)에서 잠시 쉬었는데, 강산의 좋은 경치에 다시 봄빛을 더하니 정경이 더욱 아름다웠다. 강을 건너 임청각(臨淸閣)에 이르니 주인이 소식을 듣고 기쁘게 맞아주었다. 술 단지를 열고 등불을 켜고 악기 소리가 요란했지만 김령은 술에 시달려 많이 마실 수 없었다. 그는 주인이 취한 틈을 타서 도망치듯 자리를 빠져나왔다.

다음날, 임청각의 주인 이참의는 김령에게 아들을 보내, 지난 밤 몰래 도망한 일을 탓하면서 더욱 간절히 초청을 했다. 그러나 김령은 정중히 사양하고 성오의 초당을 방문했다. 맑고 시원했으며, 멀리 호수와 산을 감싸고 있어 읊조리며 지낼만한 곳이었다. 날이 저물어 억지로 일어나 돌아오려고 했으나, 이미 저물녘이 다 되어 계획을 변경했다. 서문의 누각에 올라가니 배꽃이 고을에 가득하게 피어 마을마다 눈이 온 것 같았다. 벗들은 시를 읊었고, 김령은 다시 술을 마셨다.

“10리를 가서 거문고 소리를 얻어 듣고, 20리를 가서 저녁밥을 얻어 먹다”

서찬규, 임재일기, 1857-05-04

1857년 5월 4일, 서찬규 일행은 10리를 가서 어원곡에서 점심을 먹고 10리를 가서 복귀정에 도착했다.

도로변에 초옥이 있었는데 소나무로 친 담이 단출하고 엉성했다. 거문고 소리가 냉랭하게 들려왔다.

예중과 함께 그 문밖에 가서 주인에게 한번 듣고 싶다고 하니 주인도 기쁘게 허락해 주었다. 몇 곡을 연주해 내는데 거문고 현의 소리가 맑고도 시원했다. 조율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지만 그 거문고는 이른바 양금이었다. 그의 선조인 홍준(洪俊)이라는 분이 이 거문고를 처음으로 통달했으며 우리나라에서 이 양금의 첫 연주는 바로 홍준이라는 분에게서 시작된 것이라고 말했다.

20리를 가서 소정에 도착하니 소나기가 잠깐 지나갔다. 이에 점심을 먹고 작천을 지나고, 50리를 더 가서 청주에 도착하였다. 읍내에서 몇 리 안 가니 숲이 울창한 곳이 있어서 언덕에 걸터앉아서 잠시 쉬었다. 그때 날은 저물고 배는 매우 고파서 한 발짝도 앞으로 가기가 어려웠고, 잠잘 만한 곳이 없었다. 마침 작은 띠집이 하나 있어 우선 저녁밥을 해 달라 하고 저녁 값을 후하게 쳐주려고 했더니, 주인 아낙네가 마당에서 욕을 하면서 싫어하는 태도가 역력해 보였다. 마침 그의 남편이 낚아채며 소리를 지르고 때리더니, 밥을 차려 내오고는 그의 아내의 허물을 사과하였다.

진실로 사내의 호쾌함을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둘러앉아서 배고픔을 채우니 이것은 거지도 먹지 않는 것인데 이렇게 먹는다는 것이 어찌 부끄러움이 없겠는가? 그저 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고을의 동문 밖에 있는 주점으로 가서 거기서 묵었는데 성(城)은 크고 사람들은 부유해 보였다. 동쪽으로 거의 5리쯤 되는 곳에 산성이 있었다.

“술과 노래가 있는 조선시대 잔치 풍경”

김령, 계암일록, 1621-02-28 ~

1621년 2월 28일, 이지의 집에서 수연(壽宴)이 열렸다. 여러 친족들이 모두 모였다. 정오 즈음에 밥을 들여오고 술을 돌리는데, 음식상이 매우 푸짐했다. 손님으로 초대받은 참의 이기성(李器成)의 계집종들이 풍악을 울리며 흥을 돋우었다. 밤이 될 즈음, 주인과 손님이 안으로 들어가 장수를 축원하였다.

다음날인 2월 29일에도 잔치는 계속되었다. 참의 이기성은 이날에도 노래 부르는 아이들을 데리고 악기를 연주하며 김령의 집에 이르렀고, 이지 4형제와 참 등이 잇달아 방문하였다. 술잔을 돌리고 권하며 마시다가 다들 나와 다시 이지의 집으로 갔다. 보기 드물게 즐거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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