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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 아래 봄바람과 우쿨렐레

봄을 노래하다



우쿨렐레(출처: 픽사베이)


봄바람이 불어온다. 가끔씩 우쿨렐레를 들고 신촌서당으로 나간다. 신촌서당은 불국사 아래 유스호스텔촌 한 가운데 있다. 이제 더 이상 수학여행을 이곳으로 오지 않으니 이곳은 한산하다. 조용하다. 은둔자에게 잘 어울리는 공간일지도 모른다. 어둠이 밀려오면 우쿨렐레에 맞춰 노래를 부른다. 오래된 노래도 부르고 동요도 부르고 뭔가 코드가 맞지 않는 최신 댄스곡을 부르기도 한다. 듣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 날에는 일기를 쓴다. 인생에서 뭔가 길게 꾸준히 잘 해 온 것이 있다면 바로 일기쓰기와 기타연주인데 요즘은 기타보다 작고 가벼운 우쿨렐레를 들고 다니는 날이 많다. 변하고 변한다. 그것들이 하루하루 고스란히 일기에 기록된다. 한국국학진흥원의 일기 데이터베이스인 ‘선인의 일상생활, 일기(https://diary.ugyo.net/)’는 가끔 검색해 보면 시대를 넘어 누군가와 만나게 된다.


(출처: 경북일보, 2021.04.22)


“1606년 1월 7일, 저녁에 자개가 석천정(石泉亭)에 와서 하인을 보냈다. 김령과 금도제(琴道濟)는 즉시 갔다. 세 사람은 현아(懸衙) 근처에 벌여 앉아 저마다 가져온 술로 가득 부어 실컷 마셨다. 산천엔 눈과 얼음이요 새로 돋은 달이 밝았다. 자개가 종의 처를 시켜 가곡(歌曲) '춘천불한(春天不寒)' 을 부르게 했다. 밤이 깊어 가는 줄을 알지 못했다.”

김령, 『계암일록』, 1621년 1월 27일.
노비의 아내에게 가곡을 부르게 하다 - 겨울, 석천정에서 밤 깊은 줄 모르는 술자리

김령(金坽, 1577~1641)은 조선 중기 예안(안동) 출신의 문신이다. 벼슬에서 물러나 처음에는 제자들과 경치가 아름다운 곳을 찾아 마음을 달랬으나 죽을 때까지 마지막 20여 년 간은 문밖출입을 삼가며 오가는 사람도 방에 앉아 영접하고 보낼 정도로 철저히 은거하였다고 한다.

『계암일록』은 그의 나이 27세부터인 1603년부터 그가 사망한 해인 1641년까지 쓴 일기다. 1621년의 일기를 보면 종의 처를 시켜 가곡(歌曲) ‘춘천불한(春天不寒)’을 부르게 했다고 적혀있다. 당시 유행가였을까. 반주도 없이 겨울밤에 봄을 생각하면서 봄날은 얼마나 따뜻할까 그렇게 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석천정(출처: 한국국학진흥원_스토리테마파크)




음악에 취하다



1년에 한두 번 『논어(論語)』를 신촌서당 고전읽기모임에서 읽는다. 주로 배병삼 선생님이 지으신 『한글세대가 본 논어』를 가지고 대화를 나눈다. 얼마 전 새롭게 눈에 띄는 구절이 있었다.


“제나라에서 고전 음악을 듣고는 석 달 동안 심취하여 고기를 먹어도 그 맛을 모를 정도였다. 흥취에서 깨어나서 토로하기를 '음악의 세계가 이 경지에까지 이르렀을 줄은 차마 몰랐노라'라고 하였다.”

『논어』 (「술이편」 7:13).

공자님도 음악적 취향이 있으셔서 그 좋아하는 고기 맛을 잊을 정도로 선율이 마음속을 떠나지 않았나 보다. 신나는 음악이었을까. 아니 잔잔하게 애잔하게 흘러가는 느린 곡이 아니었을까. 스승 공자의 일상도 이랬으니 아마도 조선 시대 많은 선비들은 최소한 음악 소양을 기르는 일을 맘껏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사실 시도 노래가 아닌가.


풍류를 즐기는 양반 (출처: 한국국학진흥원_스토리테마파크)




선비, 음악을 기록하다



“1857년 5월 4일, 서찬규 일행은 10리를 가서 어원곡에서 점심을 먹고 10리를 가서 복귀정에 도착했다. 도로변에 초옥이 있었는데 소나무로 친 담이 단출하고 엉성했다. 거문고 소리가 냉랭하게 들려왔다. 예중과 함께 그 문밖에 가서 주인에게 한번 듣고 싶다고 하니 주인도 기쁘게 허락해 주었다. 몇 곡을 연주해 내는데 거문고 현의 소리가 맑고도 시원했다. 조율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지만 그 거문고는 이른바 양금이었다. 그의 선조인 홍준(洪俊)이라는 분이 이 거문고를 처음으로 통달했으며 우리나라에서 이 양금의 첫 연주는 바로 홍준이라는 분에게서 시작된 것이라고 말했다.”

서찬규, 『임재일기』, 1857년 5월 4일.
10리를 가서 거문고 소리를 얻어 듣고, 20리를 가서 저녁밥을 얻어먹다



〈암하탄금도(岩下彈琴圖)〉(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임재일기(臨齋日記)』는 임재(臨齋) 서찬규(徐贊奎, 1825∼1905)가 기록한 생활일기로 1845년 정월 1일부터 1861년 5월말까지 16년 5개월간의 일기이다. 매일 매일의 일기를 꼬박꼬박 기록하고 있다. 하루에 이렇다 할 내용이 없는 날이라도 날씨만은 꼭 기록하고 있어서 저자가 매우 부지런하고 꼼꼼한 성격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또 어디를 가서 누구를 만났다는 것과 누가 찾아왔다는 것을 치밀하게 적고 있다.


『임재일기』 (출처:한국국학진흥원_선인의 일상생활, 일기)


남의 일기를 훔쳐보는 맛일까. 그 속에 음악과 인생이 남겨있는 건 시대를 지나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 내 20년 치 일기를 한 장 한 장 넘겨보게 된다면 거기서도 이렇게 어떤 날의 음악일기가 담겨 있을 것이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 2018 (출처: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봄바람이 불어온다. 가끔씩 우쿨렐레를 들고 신촌서당으로 나간다. 신촌서당은 불국사 아래 있다. 이제 더 이상 수학여행을 이곳으로 오지 않으니 이곳은 한산하다. 조용하다. 은둔자에게 잘 어울리는 공간일지도 모른다. 어둠이 밀려오면 우쿨렐레에 맞춰 노래를 부른다. 가곡(歌曲) '춘천불한(春天不寒)'을 부르면 어떨까, 제나라 고전음악을 연주하면 어떨까, 거문고 소리에 마음도 같이 흘러가면 어떨까.




집필자 소개

피터김용진
음악가. 〈신촌서당〉 고전읽기모임 튜터
“대나무 숲에서 백성들을 걱정하다, 광대의 피리 소리와 승려의 춤으로 울적한 마음을 떨치다”

김일손, 두류기행록, 1489-04-17 ~

1489년 4월 17일, 지리산을 유람중이던 김일손은 5리를 가서 묵계사에 이르렀다. 절은 두류산에서 가장 빼어난 사찰로 이름이 나 있었지만, 와서 보니 전에 듣던 것처럼 빼어나지는 않았다. 다만 절간이 밝고 아름다우며 사이사이 금실을 넣어 특이한 비단으로 청홍색으로 만든 부처의 가사와 거처하는 20여명의 승려들이 묵묵히 정진하는 모습이 금대암의 승려들같이 볼 만하였다. 조금 쉬었다가 말을 돌려보내고 지팡이를 짚고 왕대 숲을 헤치며 나아갔는데, 길을 잃고 헤매다가 간신히 좌방사(坐方寺)에 이르렀다. 거주하는 승려는 3, 4명뿐으로 절 앞의 밤나무가 모두 도끼에 찍혀 넘어져 있었는데, 승려에게 왜 이렇게 되었냐고 물었더니, 한 승려가 말하기를, “백성들 중에 밭을 일구려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렇게 되었는데, 못하게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김일손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높은 산 깊은 골짜기까지 이르러 개간하여 경작하려 하는 것을 보면, 국가의 백성이 많아진 것인데, 그들을 부유하게 하고 교화시킬 방법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조금 앉았다가 광대를 불러 생황과 피리를 불게 하여, 답답하고 울적한 마음을 떨쳐버리려 하였다. 누더기 승복을 걸친 한 승려가 뜰에서 서성이다가 덩실덩실 춤을 추는데 그 모습이 배를 움켜잡고 웃을 만하였다. 드디어 그와 함께 앞 고개로 오르는데, 나무가 길을 가로막고 있어서 그 위에 올라앉아 보니 앞뒤에 큰 골짜기가 있었다. 푸른 기운이 어스름한 저녁나절 생황소리가 피리와 어우러져 맑고 밝은 소리가 산과 계곡을 울려 정신이 상쾌해졌다. 흥이 다하여 바로 내려오면서 시냇가 넓은 바위에 앉아 발을 씻었는데, 이 날도 여전히 음산하여, 동상원사(東上元寺)에서 묵기로 하였다.

“쌍계사에서 기생들과 풍류를 즐기다”

조위한, 유두류산록,
1618-04-12 ~ 1618-04-13

조위한(趙緯韓)은 1618년 2월에 서울에서 가족들과 함께 남원으로 내려와 살게 되었다. 그런데 토포사(討捕使)의 임무로 남부로 가는 도중에 남원에 와 있던 동생 조찬한(趙纘韓)과 만나게 되었다. 두 사람은 다른 일행들과 함께 겸사겸사 지리산을 여행하기로 했다. 여행은 4월 11일에 시작되었다.

4월 12일, 압록진(鴨綠津)에 이르니 양형우(梁亨遇)가 먼저 강가에 도착하여 악사를 시켜서 피리를 불게 하고는 기다리고 있었다. 강가에서 점심을 먹고 난 후 배를 타고 술을 마시며 즐기고자 했다. 곡성 관아에서 관기 두 명을 보내주어 같이 배에 올랐다. 악사의 피리에 맞추어 기생들에게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강위에서 풍류를 즐기며 한참을 놀았다. 조위한과 일행들은 흥이 나서 각자 시를 한 수씩 지었다.

배에서 내려 계곡을 따라 30리를 걸었다. 구례현으로 들어가 현감 민대륜과 만났다. 일행과 민대륜은 밤늦게까지 술자리를 가졌다.

13일 아침에 구례현의 아전을 광양의 심생(沈生)이라는 사람에게 보내어 지리산에서 만나기로 했다.

조위한과 일행은 지리산 무릉계곡에 도착했다. 쌍계사의 승려 10여 명이 나와 일행을 맞이하면서 “토포사께서 이미 이 지역의 병마절도사님과 함께 쌍계석문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라고 했다.

“술과 꽃의 나날들 - 봄빛 가득한 안동에서 일족모임을 갖다”

김령, 계암일록,
1621-02-26 (윤) ~ 1621-03-02 (윤)

1621년 윤 2월 26일, 김령은 안동에서 일족 모임을 가졌다. 의원(醫院)에서 모였는데, 같은 성(姓)의 사람들이 모두 스무 명 남짓 되었다. 그들은 며칠에 걸쳐 술과 이야기를 나눴다. 살구꽃이 붉게 피고 수양버들이 푸르게 늘어져 봄빛이 온 고을에 가득했다.

다음날에는 일족 아닌 벗들까지 합세해 30여 명이 의원에서 향교로, 또 야외로 어울려 다니며 술잔을 나눴다. 김령이 안동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안동부사 박로가 그를 만나기 위해 의원으로 찾아오기도 하였다.

만난 지 사흘째에는 6세조 소감공(少監公)의 묘소가 있는 선영에 올라가 제사를 지냈다. 산의 형세가 비범하며, 기이한 봉우리가 멀리 펼쳐져 있어 길지를 이루고 있었다. 제사를 마치고는 음복 후, 묘소 아래 사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주고 돌아왔다. 지나는 곳곳마다 산꽃이 햇빛에 반사되었다. 귀래정(歸來亭)에서 잠시 쉬었는데, 강산의 좋은 경치에 다시 봄빛을 더하니 정경이 더욱 아름다웠다. 강을 건너 임청각(臨淸閣)에 이르니 주인이 소식을 듣고 기쁘게 맞아주었다. 술 단지를 열고 등불을 켜고 악기 소리가 요란했지만 김령은 술에 시달려 많이 마실 수 없었다. 그는 주인이 취한 틈을 타서 도망치듯 자리를 빠져나왔다.

다음날, 임청각의 주인 이참의는 김령에게 아들을 보내, 지난 밤 몰래 도망한 일을 탓하면서 더욱 간절히 초청을 했다. 그러나 김령은 정중히 사양하고 성오의 초당을 방문했다. 맑고 시원했으며, 멀리 호수와 산을 감싸고 있어 읊조리며 지낼만한 곳이었다. 날이 저물어 억지로 일어나 돌아오려고 했으나, 이미 저물녘이 다 되어 계획을 변경했다. 서문의 누각에 올라가니 배꽃이 고을에 가득하게 피어 마을마다 눈이 온 것 같았다. 벗들은 시를 읊었고, 김령은 다시 술을 마셨다.

“10리를 가서 거문고 소리를 얻어 듣고, 20리를 가서 저녁밥을 얻어 먹다”

서찬규, 임재일기, 1857-05-04

1857년 5월 4일, 서찬규 일행은 10리를 가서 어원곡에서 점심을 먹고 10리를 가서 복귀정에 도착했다.

도로변에 초옥이 있었는데 소나무로 친 담이 단출하고 엉성했다. 거문고 소리가 냉랭하게 들려왔다.

예중과 함께 그 문밖에 가서 주인에게 한번 듣고 싶다고 하니 주인도 기쁘게 허락해 주었다. 몇 곡을 연주해 내는데 거문고 현의 소리가 맑고도 시원했다. 조율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지만 그 거문고는 이른바 양금이었다. 그의 선조인 홍준(洪俊)이라는 분이 이 거문고를 처음으로 통달했으며 우리나라에서 이 양금의 첫 연주는 바로 홍준이라는 분에게서 시작된 것이라고 말했다.

20리를 가서 소정에 도착하니 소나기가 잠깐 지나갔다. 이에 점심을 먹고 작천을 지나고, 50리를 더 가서 청주에 도착하였다. 읍내에서 몇 리 안 가니 숲이 울창한 곳이 있어서 언덕에 걸터앉아서 잠시 쉬었다. 그때 날은 저물고 배는 매우 고파서 한 발짝도 앞으로 가기가 어려웠고, 잠잘 만한 곳이 없었다. 마침 작은 띠집이 하나 있어 우선 저녁밥을 해 달라 하고 저녁 값을 후하게 쳐주려고 했더니, 주인 아낙네가 마당에서 욕을 하면서 싫어하는 태도가 역력해 보였다. 마침 그의 남편이 낚아채며 소리를 지르고 때리더니, 밥을 차려 내오고는 그의 아내의 허물을 사과하였다.

진실로 사내의 호쾌함을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둘러앉아서 배고픔을 채우니 이것은 거지도 먹지 않는 것인데 이렇게 먹는다는 것이 어찌 부끄러움이 없겠는가? 그저 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고을의 동문 밖에 있는 주점으로 가서 거기서 묵었는데 성(城)은 크고 사람들은 부유해 보였다. 동쪽으로 거의 5리쯤 되는 곳에 산성이 있었다.

“술과 노래가 있는 조선시대 잔치 풍경”

김령, 계암일록, 1621-02-28 ~

1621년 2월 28일, 이지의 집에서 수연(壽宴)이 열렸다. 여러 친족들이 모두 모였다. 정오 즈음에 밥을 들여오고 술을 돌리는데, 음식상이 매우 푸짐했다. 손님으로 초대받은 참의 이기성(李器成)의 계집종들이 풍악을 울리며 흥을 돋우었다. 밤이 될 즈음, 주인과 손님이 안으로 들어가 장수를 축원하였다.

다음날인 2월 29일에도 잔치는 계속되었다. 참의 이기성은 이날에도 노래 부르는 아이들을 데리고 악기를 연주하며 김령의 집에 이르렀고, 이지 4형제와 참 등이 잇달아 방문하였다. 술잔을 돌리고 권하며 마시다가 다들 나와 다시 이지의 집으로 갔다. 보기 드물게 즐거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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