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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로 본 역사이야기

당신을 키운 8할의 무엇

‘덕심’, 열정과 겸손의 산물


50대인 내가 아이돌 음악에 관심 있다고 하면 주변 대부분의 사람들은 피식 웃고 만다. 아마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모양이다. 나는 꽤 진지한데.

새로운 그룹이 나오면 그들의 면면이 어떠한지, 그룹의 색깔과 세계관(요즘은 각 그룹마다 독특한 세계관을 구성해놓고 그에 맞는 컨셉으로 활동하곤 한다)은 어떠한지 살펴보고, 어떤 그룹이 컴백했다는 소식이 들리기 무섭게 새로운 앨범과 뮤직비디오를 찾아듣고 본다. 온전히 음악만이 아닌, 아이돌의 동향(?) 같은 부분에 있어서는 케이팝 음악 작곡을 하는 큰 딸보다 내가 더 잘 안다고 자부한다.

사실 나는 대중음악이나 트렌드에 민감한 편은 아니다. 오히려 뒤처지는 쪽이다. 아이돌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순전히 내가 그러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음악이란 그저 내 귀를 스쳐 지나가도록 놓아두기만 했을 뿐, 특정 가수를 열렬히 응원해본 적 없는 나로서는, 아이돌 팬들의 '덕심'은 대단한 열정과 겸손의 산물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누군가를 응원하겠다는 강렬한 목표의식으로 음악을 듣다보니, 순수하게 음악을 즐긴다는 느낌을 받지 못할 때가 있다. 음악이란 귀를 스쳐 흘러 지나가도록 놓아두었다가, 어떤 한 순간에 꽂혀서, 그 노래를 부른 가수를 찾아보고, 그 가수의 다른 음악을 찾아보며 혼자만의 보물을 발견해가는 기쁨도 있는데 말이다.


aespa Single 'Next Level'(출처: SM엔터테인먼트)




나를 키운 건 8할이 음악


내가 중학교에 입학했을 무렵, 어떤 노래 하나가 귀에 꽂혔다. 테너 엄정행이 부른 ‘아침의 노래(mattinata)’였다. 집에 나뒹굴던 낡은 이태리가곡 카세트테이프에서였는데, 그 노래에 빠진 나는 그 테이프 A면, B면을 반복해가며 듣고 또 들어 거기 담긴 노래들을 외울 지경이 되었다. 뭐 다른 거 없나 하고 찾다보니, 오페라 아리아 테이프가 있었고, 그렇게 들어가며 클래식에 대한 관심도 덩달아 넓어졌다. 만약 내게 누군가 강요해서 듣기 시작했다면 내가 그렇게 즐기면서 클래식을 듣게 되었을까.

조금 더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초등학교 2학년 때,

‘하얀 손을 흔들며 입가에는 예쁜 미소 짓지만
커다란 검은 눈에 가득 고인 눈물 보았네에이에이~’

내 귀에 꽂힌 건 다름 아닌 ‘밤에 떠난 여인.’ 그녀의 손보다 더 하얗게 느껴지던 가수 하남석의 호소력 짙은 목소리, 그 떨림에 사랑이 뭔지 이별이 뭔지 쥐꼬리만큼도 모르던 내 가슴에 미세한 파동이 일었다. 물론 엄마 앞에서 소리 내어 부르진 않았다. 가수의 창법과 가사로 미루어보건대, 몹시 희망적이거나 건전한 노래는 아닌 것 같다는 느낌적인 느낌 때문이었다. 순진한 얼굴에 능구렁이 같은 정신을 가졌던 아홉 살 소녀는 그저 ‘밤에 떠난 여인’을 가슴 깊숙한 곳에 소중하게 접어두었을 뿐이다.


(출처: 월간 오디오. 2020.10.09)


생각해보면 숱한 가수와 노래들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 80년대의 에어서플라이, 듀란듀란, 그리고 마이클잭슨, 70년대 나나 무스꾸리와 사이먼 앤 가펑클, 트윈폴리오… 그보다 훨씬 오래 전엔, 엄마 손에 이끌려 교회 구역예배에 가서는, 장로님과 권사님들을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 불러제낀 김추자의 ‘님은 먼 곳에’와 남진의 ‘님과 함께’. 참으로 이율배반적인 곡 선정이지만, 이 모든 음악의 정서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출처: 아시아경제. 2021.07.15)


사회 초년생 시절, 직장 회식 때마다 왜 그리 노래들을 시켜대는지. 첫 순서는 늘 신입사원들이었고, 연차별로 거슬러 올라왔다. 모든 직장인들이 교가처럼 부르던 윤수일의 ‘아파트’와 ‘황홀한 고백’은 K씨를 따라갈 사람이 없었다, 진지하기로 소문난 우리 팀 P과장님은 ‘충청도 아줌마’를 정말 재미없게 끝까지 열창하시는 바람에 흥을 깨뜨리기 일쑤, 그렇게 꺼진 분위기는 나의 동료 Y가 기막힌 요들송으로 다시 살려내곤 했다. Y는 ‘사랑은 유리 같은 것’도 정말 잘 불렀는데…

음악만 떠올리려 해도, 엄마 손 놓치면 큰일 나는 아이처럼 추억이 헐레벌떡 뒤좇아 와 등을 찔러댄다. 그러니 음악은 곧 인생이며, 어떤 SNS 문구처럼 ‘나를 키운 건 8할이 음악’일지도.




조선의 마음, 정가(正歌)


옛 사람들의 삶 속 음악은 어떠한 형태였을까. 안타깝게도 우리 음악에 대해 모차르트 음악만큼의 관심과 지식도 없는 것이 나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사극 영화나 드라마에서 음악 그 자체를 다루는 일 역시 흔치 않다. 그나마 판소리를 다룬 영화로는 〈서편제〉, 〈도리화가〉, 〈소리꾼〉 등이 있는데, 그 밖의 음악을 다룬 콘텐츠는 찾기 힘들다.

그 흔치 않은 ‘그 밖의 음악’을 다룬 영화 중 하나가 바로 2016년 개봉한 〈해어화〉다. 〈해어화〉에는 ‘정가’가 등장한다. 백성들이 즐긴 음악이 민요와 판소리였다면, 선비들이 즐긴 시조, 가사, 가곡창 등을 '정가'라 부른다.


영화 〈해어화〉, 2016(출처: 롯데엔터테인먼트)


이 영화는 1943년, 경성 대성권번의 마지막 기생 소율과 연희를 중심으로 ‘조선의 마음’이라는 곡을 부르기 위한 두 여인의 사랑과 열망, 질투를 다루고 있다. 소율은 미모와 예인으로서의 재능이 그 누구보다도 뛰어나며 특히 정가를 잘 부른다. 소율의 둘도 없는 친구인 연희 역시 모범 기생으로 호소력 있는 목소리를 지니고 있다. 그들의 스승 산월은 늘 ‘기생은 몸을 파는 창기(娼妓)가 아닌 예인(藝人)’임을 강조하고, 소율과 연희는 그 말을 믿어 의심치 않지만, 바야흐로 조선에는 새로운 문화, 새로운 음악이 떠오르고 있었다. 소율과 연희 역시 대중가수인 이난영을 동경하며 그녀의 노래를 즐겨 듣곤 했는데, 작곡가 윤우의 주선으로 이난영을 만나게 된다. 소율이 이난영에게 팬이라 고백하자 이난영은, 자신은 오히려 정가를 무척 좋아한다며 소율에게 정가 한 소절을 청해 듣는다.


영화 〈해어화〉, 2016(출처: 롯데엔터테인먼트)


이 영화는 삼각관계 속에서 갈등하고 질투심에 괴로워하던 주인공 소율이 결국 연희를 배신하며, ‘예인’의 길을 버리고 일본 관리에게 몸을 파는 창기의 길로 들어서는 것을 보여준다. 그녀가 ‘정가’를 버리고 ‘대중가요’를 선택한 행위가 바로 그 상징이었다. 영화에서 ‘정가’는 소율의 순수함과 동시에 조선의 마음 그 자체였던 것이다.


영화 〈해어화〉, 2016(출처: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의 스토리는 별반 인상적이라 볼 수 없지만, 촬영 몇 개월 전부터 직접 정가를 배우고, 1940년대 창법을 익혀, 대역 없이 영화의 모든 장면을 직접 소화한 배우들의 노력은 박수 받아 마땅하다.




조선판 라이브 공연


1727년 9월 18일, 남쪽지방 유람을 다니던 김도수 일행은 또 40리를 가서 진양[晉陽, 진주(晉州)의 옛 이름]에 도달하였다. 성문의 병졸이 급하게 병사(兵使) 이사주에게 보고하여 촉석루(矗石樓)에서 만났는데, 누대의 형세가 웅장하고 컸다. 성의 아래로는 남강(南江)이 만리를 흘러간다. 정귀녕(鄭龜寧)이 나를 이끌어 서남쪽 산기슭 아래에 있는, 예전에 수사(水使)를 역임했던 박창윤(朴昌潤)의 집을 가리켰다. 박창윤은 영남우도의 부호이다. 누대와 연못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즐거움을 누리다가 때로는 가동(歌童), 무녀(舞女)들과 노를 저어 푸른 강에서 유희를 즐기거나, 많은 수의 꽃다운 청년들로 하여금 앞에서 웅위하고 뒤에서 따라오게 하여, 꽃이 활짝 피고 수양버들이 드리운 곳에서 북을 치고 춤을 추게 하며 산다고 한다.

김도수 「남유기」

지금이라면 휴대폰 하나만 있으면 어디에서든 음악을 즐길 수 있지만, 전에는 음악을 듣고 싶으면 본인이 직접 연주하든가, 악공과 창기(倡妓)들을 줄줄이 몰고 다니며 연주하게 해야 했으니, 그야말로 엄청난 사치였다. 게다가 모든 음악은 ‘라이브’ 공연으로 재생된 것 아닌가!

이런 모습은 영화 〈스캔들 조선남녀상열지사〉에도 잘 드러나 있다. 등장인물들이 배를 띄워놓고 즐기는 곳은 강이 아니라 집 후원 연못이다. 막강한 권력의 좌의정대감 댁이란 설정이니 그럴 법도 하다. 이 장면에서 그들이 듣는 것은 역시 기생의 가사창이다.


영화 〈스캔들, 조선남녀상열지사〉, 2003(출처: CJ ENM)


어떤 드라마인지 기억나지 않지만(MBC 〈여인열전〉 중 한 편이 아니었나 싶다), 그 사극 드라마의 배경음악으로 줄곧 여성의 노래가 흐르던 것을 기억한다. 간혹 들어보았던 판소리도 아니고 민요도 아니었는데, 소리가 너무 좋았다. 대체 무슨 음악인지 알고 싶었지만 중학생인 나로서는 도무지 알아낼 수 없어 단념했다. 그러다 대학교 3학년, 고전문학 교수님이 카세트테이프를 하나 들고 와 틀어 주셨는데, 바로 어릴 때 들었던 그 음악이 흘러나오는 게 아닌가! 노래의 정체는 바로 정가(가사창)였다. 아니, 이렇게 매력적인 우리 음악을 왜 이제까지 모르고 지냈나 싶을 정도였는데, 이후로도 정가는 들을 기회가 거의 없었다.


국립국악원 정악단 기획공연 〈정가 깊이듣기〉, 2019(출처: 국립국악원)


어찌 양반이라고 정가만, 백성이라고 속가만 즐겼겠는가. 한 사람의 인생에 대중가요와 재즈, 클래식과 사물놀이, 판소리와 K-POP이 공존하는 것처럼 우리 민족들도 그들의 시름을 잊게 해주는 것이라면 뭐든 부르고 즐겼을 것이다.

이제는 그 풍성한 음악의 세계를 다룬 콘텐츠가 나왔으면 좋겠다. 타고 난 목소리가 나빠 회합 때 가사창만 하면 비웃음을 사는 한 승문원 관리의 노력을 다룬 조선판 〈위플래시〉, 임금님께 인정받기 위해 생황을 불고 또 부는 초보 궁중악사, 조선판 〈아마데우스〉가 나와, 우리를 새로운 음악의 세계로 인도해주길 기대한다.




집필자 소개

홍윤정
홍윤정
1999년에 KBS 시트콤 작가로 데뷔, 드라마와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 중이다.
대표작은 영화 〈수상한 그녀〉, 〈반창꼬〉, 〈블랙가스펠〉, 〈최강로맨스〉 등이며, 〈수상한 그녀〉로 춘사영화상 각본상을 수상했다.
“대나무 숲에서 백성들을 걱정하다, 광대의 피리 소리와 승려의 춤으로 울적한 마음을 떨치다”

김일손, 두류기행록, 1489-04-17 ~

1489년 4월 17일, 지리산을 유람중이던 김일손은 5리를 가서 묵계사에 이르렀다. 절은 두류산에서 가장 빼어난 사찰로 이름이 나 있었지만, 와서 보니 전에 듣던 것처럼 빼어나지는 않았다. 다만 절간이 밝고 아름다우며 사이사이 금실을 넣어 특이한 비단으로 청홍색으로 만든 부처의 가사와 거처하는 20여명의 승려들이 묵묵히 정진하는 모습이 금대암의 승려들같이 볼 만하였다. 조금 쉬었다가 말을 돌려보내고 지팡이를 짚고 왕대 숲을 헤치며 나아갔는데, 길을 잃고 헤매다가 간신히 좌방사(坐方寺)에 이르렀다. 거주하는 승려는 3, 4명뿐으로 절 앞의 밤나무가 모두 도끼에 찍혀 넘어져 있었는데, 승려에게 왜 이렇게 되었냐고 물었더니, 한 승려가 말하기를, “백성들 중에 밭을 일구려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렇게 되었는데, 못하게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김일손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높은 산 깊은 골짜기까지 이르러 개간하여 경작하려 하는 것을 보면, 국가의 백성이 많아진 것인데, 그들을 부유하게 하고 교화시킬 방법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조금 앉았다가 광대를 불러 생황과 피리를 불게 하여, 답답하고 울적한 마음을 떨쳐버리려 하였다. 누더기 승복을 걸친 한 승려가 뜰에서 서성이다가 덩실덩실 춤을 추는데 그 모습이 배를 움켜잡고 웃을 만하였다. 드디어 그와 함께 앞 고개로 오르는데, 나무가 길을 가로막고 있어서 그 위에 올라앉아 보니 앞뒤에 큰 골짜기가 있었다. 푸른 기운이 어스름한 저녁나절 생황소리가 피리와 어우러져 맑고 밝은 소리가 산과 계곡을 울려 정신이 상쾌해졌다. 흥이 다하여 바로 내려오면서 시냇가 넓은 바위에 앉아 발을 씻었는데, 이 날도 여전히 음산하여, 동상원사(東上元寺)에서 묵기로 하였다.

“쌍계사에서 기생들과 풍류를 즐기다”

조위한, 유두류산록,
1618-04-12 ~ 1618-04-13

조위한(趙緯韓)은 1618년 2월에 서울에서 가족들과 함께 남원으로 내려와 살게 되었다. 그런데 토포사(討捕使)의 임무로 남부로 가는 도중에 남원에 와 있던 동생 조찬한(趙纘韓)과 만나게 되었다. 두 사람은 다른 일행들과 함께 겸사겸사 지리산을 여행하기로 했다. 여행은 4월 11일에 시작되었다.

4월 12일, 압록진(鴨綠津)에 이르니 양형우(梁亨遇)가 먼저 강가에 도착하여 악사를 시켜서 피리를 불게 하고는 기다리고 있었다. 강가에서 점심을 먹고 난 후 배를 타고 술을 마시며 즐기고자 했다. 곡성 관아에서 관기 두 명을 보내주어 같이 배에 올랐다. 악사의 피리에 맞추어 기생들에게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강위에서 풍류를 즐기며 한참을 놀았다. 조위한과 일행들은 흥이 나서 각자 시를 한 수씩 지었다.

배에서 내려 계곡을 따라 30리를 걸었다. 구례현으로 들어가 현감 민대륜과 만났다. 일행과 민대륜은 밤늦게까지 술자리를 가졌다.

13일 아침에 구례현의 아전을 광양의 심생(沈生)이라는 사람에게 보내어 지리산에서 만나기로 했다.

조위한과 일행은 지리산 무릉계곡에 도착했다. 쌍계사의 승려 10여 명이 나와 일행을 맞이하면서 “토포사께서 이미 이 지역의 병마절도사님과 함께 쌍계석문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라고 했다.

“술과 꽃의 나날들 - 봄빛 가득한 안동에서 일족모임을 갖다”

김령, 계암일록,
1621-02-26 (윤) ~ 1621-03-02 (윤)

1621년 윤 2월 26일, 김령은 안동에서 일족 모임을 가졌다. 의원(醫院)에서 모였는데, 같은 성(姓)의 사람들이 모두 스무 명 남짓 되었다. 그들은 며칠에 걸쳐 술과 이야기를 나눴다. 살구꽃이 붉게 피고 수양버들이 푸르게 늘어져 봄빛이 온 고을에 가득했다.

다음날에는 일족 아닌 벗들까지 합세해 30여 명이 의원에서 향교로, 또 야외로 어울려 다니며 술잔을 나눴다. 김령이 안동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안동부사 박로가 그를 만나기 위해 의원으로 찾아오기도 하였다.

만난 지 사흘째에는 6세조 소감공(少監公)의 묘소가 있는 선영에 올라가 제사를 지냈다. 산의 형세가 비범하며, 기이한 봉우리가 멀리 펼쳐져 있어 길지를 이루고 있었다. 제사를 마치고는 음복 후, 묘소 아래 사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주고 돌아왔다. 지나는 곳곳마다 산꽃이 햇빛에 반사되었다. 귀래정(歸來亭)에서 잠시 쉬었는데, 강산의 좋은 경치에 다시 봄빛을 더하니 정경이 더욱 아름다웠다. 강을 건너 임청각(臨淸閣)에 이르니 주인이 소식을 듣고 기쁘게 맞아주었다. 술 단지를 열고 등불을 켜고 악기 소리가 요란했지만 김령은 술에 시달려 많이 마실 수 없었다. 그는 주인이 취한 틈을 타서 도망치듯 자리를 빠져나왔다.

다음날, 임청각의 주인 이참의는 김령에게 아들을 보내, 지난 밤 몰래 도망한 일을 탓하면서 더욱 간절히 초청을 했다. 그러나 김령은 정중히 사양하고 성오의 초당을 방문했다. 맑고 시원했으며, 멀리 호수와 산을 감싸고 있어 읊조리며 지낼만한 곳이었다. 날이 저물어 억지로 일어나 돌아오려고 했으나, 이미 저물녘이 다 되어 계획을 변경했다. 서문의 누각에 올라가니 배꽃이 고을에 가득하게 피어 마을마다 눈이 온 것 같았다. 벗들은 시를 읊었고, 김령은 다시 술을 마셨다.

“10리를 가서 거문고 소리를 얻어 듣고, 20리를 가서 저녁밥을 얻어 먹다”

서찬규, 임재일기, 1857-05-04

1857년 5월 4일, 서찬규 일행은 10리를 가서 어원곡에서 점심을 먹고 10리를 가서 복귀정에 도착했다.

도로변에 초옥이 있었는데 소나무로 친 담이 단출하고 엉성했다. 거문고 소리가 냉랭하게 들려왔다.

예중과 함께 그 문밖에 가서 주인에게 한번 듣고 싶다고 하니 주인도 기쁘게 허락해 주었다. 몇 곡을 연주해 내는데 거문고 현의 소리가 맑고도 시원했다. 조율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지만 그 거문고는 이른바 양금이었다. 그의 선조인 홍준(洪俊)이라는 분이 이 거문고를 처음으로 통달했으며 우리나라에서 이 양금의 첫 연주는 바로 홍준이라는 분에게서 시작된 것이라고 말했다.

20리를 가서 소정에 도착하니 소나기가 잠깐 지나갔다. 이에 점심을 먹고 작천을 지나고, 50리를 더 가서 청주에 도착하였다. 읍내에서 몇 리 안 가니 숲이 울창한 곳이 있어서 언덕에 걸터앉아서 잠시 쉬었다. 그때 날은 저물고 배는 매우 고파서 한 발짝도 앞으로 가기가 어려웠고, 잠잘 만한 곳이 없었다. 마침 작은 띠집이 하나 있어 우선 저녁밥을 해 달라 하고 저녁 값을 후하게 쳐주려고 했더니, 주인 아낙네가 마당에서 욕을 하면서 싫어하는 태도가 역력해 보였다. 마침 그의 남편이 낚아채며 소리를 지르고 때리더니, 밥을 차려 내오고는 그의 아내의 허물을 사과하였다.

진실로 사내의 호쾌함을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둘러앉아서 배고픔을 채우니 이것은 거지도 먹지 않는 것인데 이렇게 먹는다는 것이 어찌 부끄러움이 없겠는가? 그저 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고을의 동문 밖에 있는 주점으로 가서 거기서 묵었는데 성(城)은 크고 사람들은 부유해 보였다. 동쪽으로 거의 5리쯤 되는 곳에 산성이 있었다.

“술과 노래가 있는 조선시대 잔치 풍경”

김령, 계암일록, 1621-02-28 ~

1621년 2월 28일, 이지의 집에서 수연(壽宴)이 열렸다. 여러 친족들이 모두 모였다. 정오 즈음에 밥을 들여오고 술을 돌리는데, 음식상이 매우 푸짐했다. 손님으로 초대받은 참의 이기성(李器成)의 계집종들이 풍악을 울리며 흥을 돋우었다. 밤이 될 즈음, 주인과 손님이 안으로 들어가 장수를 축원하였다.

다음날인 2월 29일에도 잔치는 계속되었다. 참의 이기성은 이날에도 노래 부르는 아이들을 데리고 악기를 연주하며 김령의 집에 이르렀고, 이지 4형제와 참 등이 잇달아 방문하였다. 술잔을 돌리고 권하며 마시다가 다들 나와 다시 이지의 집으로 갔다. 보기 드물게 즐거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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