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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말

어울리다 교감하다

2년 전,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의 5부 대본을 쓰고 있던 작가에게서, 주인공 남녀가 서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이야기를 제공해 달란 요청을 받았습니다. 『시경(詩經)』을 중시했던 정조 임금님이 떠올라, 『시경』의 「북풍(北風)」이란 시를 두 사람이 마음을 담아 번갈아 가며 암송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전했습니다. 이 의견은, 모함으로 영조의 의심을 받게 되어 갇히게 된 세손 이산과 그의 곁을 지키던 궁녀 성덕임이 방문을 사이에 두고 시를 읽고 암송하면서 서로의 마음을 나누는 장면에 반영되어 방송되었습니다.

이 장면 직후에 세손은 큰 시련을 만나게 되었고, 그 시련 끝자락에 두 사람은 서로에게 자신의 진심을 말하게 되었습니다. 하늘과 땅만큼이나 신분 차가 컸던 두 사람이, 『시경』을 통해 어울리게 되고 마음을 나누었기에, 시련 앞에서 서로의 진심을 전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시경』이 춘추시대 각 나라의 노래를 모은 책이니, 노래를 통해 어울리고 교감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어울리고 교감할 수 있는 어떤 매개가 있다면, 내 앞의 시련이나 시름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이번 호의 주제로 “선비, 음률로 시름을 잊다”라고 정하게 되었습니다.

정생일기의 주인공 정생에게, 『시경』은 음악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기에 좋은 책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문영 작가님은 이번 호에서는 봄을 맞아 정생이 답청 놀이를 다녀오게 해 주었습니다. 〈정생의 답청일기〉 속 정생은 답청 중 꿈에서 다산 정약용을 만나 음악에 대해 토론을 합니다. 음악으로 예를 바로 세울 수 있는데 그에 맞는 참된 음악이 사라졌다 한탄하는 다산 선생에게, 정생은 『시경』을 언급하면서 노래로 덕성을 함양할 수도 있고, 세상을 풍자할 수 있다고 합니다. 또한 『시경』의 원뜻을 생각한다면, 조선의 노래를 존중해야 한다고도 합니다. 정생은 잠에서 깬 후에야 정약용의 논리에 조목조목 반박하던 자신의 의견이 홍대용의 의견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정생과 정약용처럼, 어느 볕 좋은 봄날, 익위사 사직으로 서연에 들었던 홍대용은 『시경』을 펼쳐 놓고 음악에 대해 세손과 토론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1776년 어느 겨울밤, 홍대용의 집에서는 박지원, 김억 등 당대 지식인과 음악인들이 모여 악기 합주를 하게 되었고, 흥에 겨웠던 김용겸은 이 음악에 맞춰 『시경』의 「벌목」을 노래했습니다. 합주는 장소를 옮겨 달빛과 눈이 내린 청계천 수표교 위에서 계속되었습니다. 이날의 풍경과 의의를 황병기 교수님은 〈김용겸과 홍대용, 두 음악 대가의 수표교 거문고 협주〉라는 글에 담아 주었습니다. “조선 셀럽들의 버스킹”이라 할 만한 이 합주에는, 나이, 신분, 당색은 의미가 없습니다. 오직 이 합주에 필요한 소리만 있었을 터이니, 음악으로 이렇게 동시대를 살고 있던 사람과 사람이 격 없이 어울리고 교감하게 됩니다.

김용진 작가님은 봄날 불국사 아래서 우쿨렐레를 연주하면서 옛사람들의 일기 속에 남아 있는 그들의 음악과 그 흥취를 떠올렸던 것 같습니다. 겨울밤에 봄을 기대하면서 노래를 듣던 김령, 음악에 취해 있던 공자, 들었던 음악을 기록해 남겼던 서찬규에 관한 이야기를 〈불국사 아래 봄바람과 우쿨렐레〉라는 글에 담아 주었습니다. 시간도 흐르고 음악도 변했겠지만, 그들처럼 연주하고, 그 음악에 취하고, 그것을 기록하는 것은 여전하기에, 글을 통해서라도 지금 우리가 옛사람과 어울리고 교감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서은경 작가님의 스토리 웹툰 〈거문고 손님〉에는 노상추가 변방에서 근무하면서 그곳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던 중에, 남쪽에서 온 거문고 연주자를 통해 북쪽 변방의 사람들과 어울리고 그곳 문화를 즐기게 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어서도 낯설었던 이들이 함께 즐길 수 있었던 것은 음악을 통해 어울리고 교감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의 음악이 나의 음악이 됩니다. 지난 시절들을 떠올리면, 마치 배경음악처럼 당시에 들었던 음악들도 함께 떠오릅니다. 어떨 때는 음악이 나의 지난 시절을 떠오르게 합니다. 그들의 음악이었지만, 내 시절의 일부가 된 이상 나의 맥락에서 읽히는 나의 음악이기도 합니다. 홍윤정 작가님은 〈당신을 키운 8할의 무엇〉에서, 그 무엇이 음악일지 모른다하며, 미디어에 소개된 옛사람들 삶 속의 음악을 전하고 있습니다. 영화 “해어화”와 “스캔들 조선남녀상열지사”에서 등장하는 ‘정가(正歌)’라는 음악에 주목하여, 이 음악을 향유했던 이들과 그들이 살았던 시절이 작품 속에서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지 살펴보고 있습니다. “해어화”에서 정가는 조선의 마음을 상징했고, “스캔들 조선남녀상열지사”에서 정가를 향유하는 모습은 당시 권세가의 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에서는 송은 김광수(松隱 金光粹) 선생이 지은 ‘영귀정(詠歸亭)’을 소개합니다. 연산군 시절을 맞아 낙향할 수밖에 없었던 김광수는, 영귀정의 글귀처럼 “나를 알아주는 사람과 함께 노래를 읊조리며 돌아오는” 소소한 기쁨과 희망을 노래하면서, 나라와 자신에 대한 근심을 잠시 잊었던 것 같습니다.

편집자의 글을 쓰려고 위에 소개한 글들을 읽다 보니 마치 글에서 음악이 들리는 듯하여 기분이 무척 좋아졌습니다. 시끌벅적하지만 잘 어우러진 합주, 사색의 길에 흐르는 고요한 독주, 단아하고 맑은 소리의 정가…. 이런 음악들을 듣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차이에서 조화를 만들어내는 것이 음악이기에, 음악을 통해 서로 다른 사람들이 어울려 교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어울림과 교감으로 갈등과 전쟁이 멈춰지길, 그 속에서 희망과 용기를 품을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편집자 소개

글 : 조경란
조경란
재밌는 이야기를 좀 더 많이 알고 싶어서, 서강대에서 역사 공부를 하였습니다. 박사과정(한국사전공)을 마치고 나서는 사단법인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계속 역사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스승님께 배운 수많은 이야기를 혼자만 알고 있는 게 안타까워 알고 있는 것을 나눌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드라마 “주몽” 작가와 같이 공부할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시작해서, 드라마 제작진의 역사 자문에 응한 드라마가 “정도전”, “징비록”, “장영실”, “역적”, “녹두꽃” 등 약 15편 정도 됩니다.
“대나무 숲에서 백성들을 걱정하다, 광대의 피리 소리와 승려의 춤으로 울적한 마음을 떨치다”

김일손, 두류기행록, 1489-04-17 ~

1489년 4월 17일, 지리산을 유람중이던 김일손은 5리를 가서 묵계사에 이르렀다. 절은 두류산에서 가장 빼어난 사찰로 이름이 나 있었지만, 와서 보니 전에 듣던 것처럼 빼어나지는 않았다. 다만 절간이 밝고 아름다우며 사이사이 금실을 넣어 특이한 비단으로 청홍색으로 만든 부처의 가사와 거처하는 20여명의 승려들이 묵묵히 정진하는 모습이 금대암의 승려들같이 볼 만하였다. 조금 쉬었다가 말을 돌려보내고 지팡이를 짚고 왕대 숲을 헤치며 나아갔는데, 길을 잃고 헤매다가 간신히 좌방사(坐方寺)에 이르렀다. 거주하는 승려는 3, 4명뿐으로 절 앞의 밤나무가 모두 도끼에 찍혀 넘어져 있었는데, 승려에게 왜 이렇게 되었냐고 물었더니, 한 승려가 말하기를, “백성들 중에 밭을 일구려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렇게 되었는데, 못하게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김일손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높은 산 깊은 골짜기까지 이르러 개간하여 경작하려 하는 것을 보면, 국가의 백성이 많아진 것인데, 그들을 부유하게 하고 교화시킬 방법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조금 앉았다가 광대를 불러 생황과 피리를 불게 하여, 답답하고 울적한 마음을 떨쳐버리려 하였다. 누더기 승복을 걸친 한 승려가 뜰에서 서성이다가 덩실덩실 춤을 추는데 그 모습이 배를 움켜잡고 웃을 만하였다. 드디어 그와 함께 앞 고개로 오르는데, 나무가 길을 가로막고 있어서 그 위에 올라앉아 보니 앞뒤에 큰 골짜기가 있었다. 푸른 기운이 어스름한 저녁나절 생황소리가 피리와 어우러져 맑고 밝은 소리가 산과 계곡을 울려 정신이 상쾌해졌다. 흥이 다하여 바로 내려오면서 시냇가 넓은 바위에 앉아 발을 씻었는데, 이 날도 여전히 음산하여, 동상원사(東上元寺)에서 묵기로 하였다.

“쌍계사에서 기생들과 풍류를 즐기다”

조위한, 유두류산록,
1618-04-12 ~ 1618-04-13

조위한(趙緯韓)은 1618년 2월에 서울에서 가족들과 함께 남원으로 내려와 살게 되었다. 그런데 토포사(討捕使)의 임무로 남부로 가는 도중에 남원에 와 있던 동생 조찬한(趙纘韓)과 만나게 되었다. 두 사람은 다른 일행들과 함께 겸사겸사 지리산을 여행하기로 했다. 여행은 4월 11일에 시작되었다.

4월 12일, 압록진(鴨綠津)에 이르니 양형우(梁亨遇)가 먼저 강가에 도착하여 악사를 시켜서 피리를 불게 하고는 기다리고 있었다. 강가에서 점심을 먹고 난 후 배를 타고 술을 마시며 즐기고자 했다. 곡성 관아에서 관기 두 명을 보내주어 같이 배에 올랐다. 악사의 피리에 맞추어 기생들에게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강위에서 풍류를 즐기며 한참을 놀았다. 조위한과 일행들은 흥이 나서 각자 시를 한 수씩 지었다.

배에서 내려 계곡을 따라 30리를 걸었다. 구례현으로 들어가 현감 민대륜과 만났다. 일행과 민대륜은 밤늦게까지 술자리를 가졌다.

13일 아침에 구례현의 아전을 광양의 심생(沈生)이라는 사람에게 보내어 지리산에서 만나기로 했다.

조위한과 일행은 지리산 무릉계곡에 도착했다. 쌍계사의 승려 10여 명이 나와 일행을 맞이하면서 “토포사께서 이미 이 지역의 병마절도사님과 함께 쌍계석문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라고 했다.

“술과 꽃의 나날들 - 봄빛 가득한 안동에서 일족모임을 갖다”

김령, 계암일록,
1621-02-26 (윤) ~ 1621-03-02 (윤)

1621년 윤 2월 26일, 김령은 안동에서 일족 모임을 가졌다. 의원(醫院)에서 모였는데, 같은 성(姓)의 사람들이 모두 스무 명 남짓 되었다. 그들은 며칠에 걸쳐 술과 이야기를 나눴다. 살구꽃이 붉게 피고 수양버들이 푸르게 늘어져 봄빛이 온 고을에 가득했다.

다음날에는 일족 아닌 벗들까지 합세해 30여 명이 의원에서 향교로, 또 야외로 어울려 다니며 술잔을 나눴다. 김령이 안동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안동부사 박로가 그를 만나기 위해 의원으로 찾아오기도 하였다.

만난 지 사흘째에는 6세조 소감공(少監公)의 묘소가 있는 선영에 올라가 제사를 지냈다. 산의 형세가 비범하며, 기이한 봉우리가 멀리 펼쳐져 있어 길지를 이루고 있었다. 제사를 마치고는 음복 후, 묘소 아래 사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주고 돌아왔다. 지나는 곳곳마다 산꽃이 햇빛에 반사되었다. 귀래정(歸來亭)에서 잠시 쉬었는데, 강산의 좋은 경치에 다시 봄빛을 더하니 정경이 더욱 아름다웠다. 강을 건너 임청각(臨淸閣)에 이르니 주인이 소식을 듣고 기쁘게 맞아주었다. 술 단지를 열고 등불을 켜고 악기 소리가 요란했지만 김령은 술에 시달려 많이 마실 수 없었다. 그는 주인이 취한 틈을 타서 도망치듯 자리를 빠져나왔다.

다음날, 임청각의 주인 이참의는 김령에게 아들을 보내, 지난 밤 몰래 도망한 일을 탓하면서 더욱 간절히 초청을 했다. 그러나 김령은 정중히 사양하고 성오의 초당을 방문했다. 맑고 시원했으며, 멀리 호수와 산을 감싸고 있어 읊조리며 지낼만한 곳이었다. 날이 저물어 억지로 일어나 돌아오려고 했으나, 이미 저물녘이 다 되어 계획을 변경했다. 서문의 누각에 올라가니 배꽃이 고을에 가득하게 피어 마을마다 눈이 온 것 같았다. 벗들은 시를 읊었고, 김령은 다시 술을 마셨다.

“10리를 가서 거문고 소리를 얻어 듣고, 20리를 가서 저녁밥을 얻어 먹다”

서찬규, 임재일기, 1857-05-04

1857년 5월 4일, 서찬규 일행은 10리를 가서 어원곡에서 점심을 먹고 10리를 가서 복귀정에 도착했다.

도로변에 초옥이 있었는데 소나무로 친 담이 단출하고 엉성했다. 거문고 소리가 냉랭하게 들려왔다.

예중과 함께 그 문밖에 가서 주인에게 한번 듣고 싶다고 하니 주인도 기쁘게 허락해 주었다. 몇 곡을 연주해 내는데 거문고 현의 소리가 맑고도 시원했다. 조율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지만 그 거문고는 이른바 양금이었다. 그의 선조인 홍준(洪俊)이라는 분이 이 거문고를 처음으로 통달했으며 우리나라에서 이 양금의 첫 연주는 바로 홍준이라는 분에게서 시작된 것이라고 말했다.

20리를 가서 소정에 도착하니 소나기가 잠깐 지나갔다. 이에 점심을 먹고 작천을 지나고, 50리를 더 가서 청주에 도착하였다. 읍내에서 몇 리 안 가니 숲이 울창한 곳이 있어서 언덕에 걸터앉아서 잠시 쉬었다. 그때 날은 저물고 배는 매우 고파서 한 발짝도 앞으로 가기가 어려웠고, 잠잘 만한 곳이 없었다. 마침 작은 띠집이 하나 있어 우선 저녁밥을 해 달라 하고 저녁 값을 후하게 쳐주려고 했더니, 주인 아낙네가 마당에서 욕을 하면서 싫어하는 태도가 역력해 보였다. 마침 그의 남편이 낚아채며 소리를 지르고 때리더니, 밥을 차려 내오고는 그의 아내의 허물을 사과하였다.

진실로 사내의 호쾌함을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둘러앉아서 배고픔을 채우니 이것은 거지도 먹지 않는 것인데 이렇게 먹는다는 것이 어찌 부끄러움이 없겠는가? 그저 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고을의 동문 밖에 있는 주점으로 가서 거기서 묵었는데 성(城)은 크고 사람들은 부유해 보였다. 동쪽으로 거의 5리쯤 되는 곳에 산성이 있었다.

“술과 노래가 있는 조선시대 잔치 풍경”

김령, 계암일록, 1621-02-28 ~

1621년 2월 28일, 이지의 집에서 수연(壽宴)이 열렸다. 여러 친족들이 모두 모였다. 정오 즈음에 밥을 들여오고 술을 돌리는데, 음식상이 매우 푸짐했다. 손님으로 초대받은 참의 이기성(李器成)의 계집종들이 풍악을 울리며 흥을 돋우었다. 밤이 될 즈음, 주인과 손님이 안으로 들어가 장수를 축원하였다.

다음날인 2월 29일에도 잔치는 계속되었다. 참의 이기성은 이날에도 노래 부르는 아이들을 데리고 악기를 연주하며 김령의 집에 이르렀고, 이지 4형제와 참 등이 잇달아 방문하였다. 술잔을 돌리고 권하며 마시다가 다들 나와 다시 이지의 집으로 갔다. 보기 드물게 즐거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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