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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생의 일기

정생의 답청일기

“훈장 어르신, 가시지요?”

접장이 마당에서 외쳤다. 정생이 끙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문을 여니 쌉쌀하지만 상큼한 봄바람이 꽃향기를 머금고 버드나무가지 휘어지듯 부드럽게 밀려들어왔다.

“날씨가 참 좋구나.”

하늘에는 서기가 어리듯 구름조차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저 남쪽 하늘 아래서는 과거가 열리고 있을 것이었다.

“과거날이라 그런지 날이 더 좋습니다.”

접장이 물색없이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정생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루지 못한 꿈이 저 남녘에 있었다.

사계절마다 특별한 날에 과거를 치는데 그것을 절제(節製)라 부른다. 겨울에는 정월 초이레에 치는데 인일제(人日製)라 하고, 봄에는 바로 오늘인 삼월 삼짇날에 치는데 그것을 화제(花製)라고 한다. 여름은 칠월칠석날 치르는 오제(梧製), 가을은 구월 구일 날에 치르는 국제(菊製)가 있어 계절마다 한 번씩 치르게 되는 것이다.

야망을 가진 선비들이 먹을 갈고 붓을 적실 오늘 이젠 그런 희망도 모두 사라진 채 꽃구경이나 가는 자신의 신세가 어쩐지 처량했다. 정생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렇지. 천하의 명필 왕희지(307~365)가 삼월 삼짇날에 명사 마흔 명과 더불어 회계 산음에 있는 정자 난정(蘭亭)에서 물가에 모여서 놀았는데, 이때 지은 시들을 모아 왕희지가 글을 썼으니 그것을 「난정집서(蘭亭集序)」라 부르지. 이 글씨를 가리켜 천하제일의 행서(行書)라 부른다네. 글을 쓰는 이들이라면 누가 왕희지와 같은 글씨를 써보고 싶지 않겠나.”


〈난정회서도(蘭亭會序圖)〉(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접장이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제가 듣기로는 그때 왕희지는 많이 취해 있었다고 하던데, 오늘 훈장 어르신도 대취한 후에 일필휘지를 남겨보시죠!”

접장의 실없는 소리에 정생이 껄껄 웃었다.

“그래, 어디 그럼 답청놀이를 한 번 가보지.”

삼월이라 삼짇날. 제비가 돌아오는 날이라고 하는 이 날에 푸르러지기 시작하는 들판을 지나 산에 놀러가는 것을 답청(踏靑)이라 부른다. 말 그대로 푸르름을 밟는 날이다. 또는 새로 돋아난 풀을 밟는다고 하여 답백초(踏白草)라고도 부른다.

오늘은 양주 백석골의 내로라하는 양반들이 모두 모이게 되어 있었다. 홍복산에 계곡에 있는 백석정에서 만나기로 약조했는데 정생이 도착하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와 있었다.


〈영남기행화첩(嶺南紀行畵帖)〉(출처: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


“훈장 어르신 오셨습니까?”

제일 먼저 인사를 올린 사람은 정생의 제자이기도 한 오 진사의 손자 오명하였다.

“너는 조정에 나가지 않고 어찌 이곳에 있느냐?”

오명하가 비록 꼴찌로 붙긴 했지만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답청에 온 것이 희한했다.

“아직 발령을 못 받았습니다. 명을 기다리는 중이죠.”

오명하가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했다. 권세가의 자제들이 과거를 치지 않고 가문의 힘으로 관직에 나가는 문음(文蔭)이 성행하고 있어서 과거에 급제해도 벼슬을 못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오명하는 할아버지가 진사를 한 것이 마지막인 집안이고, 진사는 대과를 치지 못한 것이라 집안이 기울대로 기운 상태였다. 그러니 아직 벼슬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걱정 말게. 곧 더 좋은 자리로 가겠지.”

“네! 걱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명하가 정자 안쪽으로 정생을 안내했다.

“어서 오십시오.”

벌떡 일어나 인사를 하는 사람은 배 정승네 손자 배진구였다. 배진구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 자리에 앉으라 이야기하고 문간 자리로 옮겨 앉았다. 정생은 먼저 와 있던 황 초시와 오 진사에게 인사를 했다. 일각도 지나지 않아 배 정승네 주인인 배 첨지가 와서 제일 상석에 앉았다. 배 정승네라고 부르지만 배씨 가문이 정승을 배출한 것은 오래 전의 일이었다. 동네에서는 대대로 그 집을 배 정승네라고 불렀고 마을의 제일 큰 집으로 여기고 있었다. 실제로 제일 커다란 집을 가지고 있기도 했고. 첨지라는 것은 본래 벼슬이지만 배 첨지가 환갑을 넘자 나라에서 붙여준 이름만 있는 허직(虛職)이었다.

“다들 이렇게 답청절 꽃놀이에 모여 주셔서 감사하오.”

배 첨지가 허연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배 정승네 하인들이 개다리소반에 음식을 담아 모인 사람들에게 돌렸다.

접시에는 진달래 꽃잎을 넣어 지진 화전과 탁주를 담은 술병이 올라 있었다. 술이 일순배 돌고 나자 분위기가 무척 좋아졌다. 이때 기생과 악공들이 올라왔다.


〈수갑계첩(壽甲稧帖)〉(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사람들이 반색을 했는데 배 첨지만 안색이 좋지 않았다. 주빈들보다 기생이 더 늦었기 때문에 기분이 안 좋았던 것이다. 기생과 악공들이 문안 인사를 올렸다. 나이가 스물댓쯤 되어 보이는 기생이 눈웃음을 치며 절을 올렸다.

“소첩, 춘절 인사 올리옵니다.”

정생의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한마디 안 할 수가 없었다.

“삼월 삼짇날이 춘절인데, 기생의 이름도 춘절이니 참 묘한 인연이구나.”

정생은 우스갯소리로 분위기를 풀어볼까 해서 한 말이었지만, 노기가 사라지지 않은 배 첨지는 인사도 없이 명령하듯 말했다.

“어서 노래를 불러라.”

춘절은 시조창을 불렀는데 소리가 낮고 끊어질 듯 끊어질 듯 끊기지 않고 이어지는 것이 절창이라 할 만했다. 하지만 초장을 부르고 중장으로 들어가는 차에 배 첨지는 붉어진 얼굴로 꽥 소리를 질렀다.

“집어치워라! 그게 무슨 창이란 말이냐!”

배 첨지가 화를 냈지만, 춘절은 놀라지도 않고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마음에 아니 드시는 곳을 말씀해주시면 다시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배 첨지가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연초에 양주 관아에 들러 너희가 노는 것을 본 일이 있다. 그때는 큰 소리로 시원하게 창을 뽑더니 어찌 오늘은 이렇게 느려터지고 들리지도 않는 소리를 쥐어짜고 있는 것이냐!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 것이 분명하다!”

“어머, 어찌 소첩이 나리를 무시하겠습니까? 다른 노래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춘절이 악공을 바라보며 눈짓을 하고 새로 노래를 불렀는데 이번에는 〈춘향가〉의 한 대목을 불렀다.


조선의 기녀 시인들(출처: 유튜브_아리랑TV)


“만첩청사안~ 느을근 범이~ 살진 암캐를 물어다 놓고~ ”

사설도 없이 대뜸 우조(羽調)로 소리를 질러댄 것인데, 목청껏 노래를 지르자 배 첨지의 안색이 펴졌다. 배 첨지는 연신 탁자를 두들기며 좋아라 했다.

“좋고 좋도다. 노래란 마땅히 이래야 하지 않겠느냐!”

그러나 정생이 듣기에는 그저 소리를 높이 질러대는 것일 뿐, 노래가 갖는 울림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기생이 단단히 삐쳐서 대충 노래를 부르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배 첨지가 인상을 쓰면 같이 인상을 쓰고, 배 첨지가 웃으면 같이 웃을 뿐 노래를 즐기는 사람도 보이지가 않았다.

노래를 잘하는 기생을 불러다 놓고 아무 소리나 하게 만든 것이니, 정생은 입맛이 썼다. 그 쓴 입맛을 달래려 탁주를 계속 마시다가 깜빡 정신을 잃고 말았다.

“일어나게.”

정생은 누가 흔드는 통에 정신을 차렸다. 잔치가 언제 파했는지 달이 둥실 떠 있는데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정자관을 쓴 낯선 양반이 눈앞에 있었다.

“뉘신지요?”

“허허, 나를 모른다고? 이 눈썹을 보면 누군지 알겠나?”

그 양반이 가리키는 눈썹은 세 조각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 눈썹… 세 조각이니, 삼미… 삼미자… 아니, 다산 선생님이십니까?”

눈앞에 있는 사람은 다산 정약용이 분명했다.


정약용 초상(출처: 다산박물관)


“선생님은 20여 년 전에 돌아가셨다고 들었는데…”

“자네가 삿된 노래를 듣고 불쾌히 여기는 것을 보고 장차 음악에 대해 내 뜻을 이을 수 있을 것 같아 잠시 들렀네.”

“잠시 들르다니… 지금 어디 계시는데…”

하지만 정약용은 정생의 말은 신경을 쓰지 않고 자기 말만 했다.

“음악은 귀를 통해 그 마음으로 들어가 사람의 혈맥을 움직이고 흔들어서 화평하고 화락한 뜻을 고동치게 하는 것일세. 자네도 금방 보지 않았나. 화가 나 있던 배 첨지가 비록 잘못된 음악이긴 하지만 마음에 드는 음악을 듣자 금방 즐거워지는 것을.”

맞는 말이었다. 노래가 어떻든 간에 배 첨지는 흥겨워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사람이 즐거웠으니 그것으로 된 것 같기도 했다.

“인간에게는 오욕칠정이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쉽게 일어나고 가장 다스리기 어려운 것이 분노일세. 분노와 원한을 형벌을 통해 일시 없애줄 수는 있는데, 음악으로 그 마음을 풀어주는 것만 못한 것일세.”

정약용이 슬픈 얼굴로 밤하늘을 올려다보고는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하지만 오늘날 진정한 음악은 사라지고 말았네. 인간 세상에 제대로 된 음악이 없으니 형벌은 점점 더 무거워지고 전쟁 역시 자주 일어나게 된 것이라네. 자네도 들어서 알다시피 오늘날의 음악은 음란하고 슬프고 바르지 못한 소리일 뿐이네. 예를 바르게 세우려면 먼저 음악이 바르게 서야 하는 것일세.”

정생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맞는 말씀입니다만 오늘날 음악이 바르지 못한 소리라는 건 잘못 아신 겁니다. 본디 노래란 정(情)입니다. 기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졸렬한 음악? 중요하지 않습니다. 선악을 잊어버리고 자연스러움에 기대어 하늘의 기운을 표현하면 되는 것입니다. 본래 『시경(時經)』의 노래 역시 민간의 노래에서 나온 것이잖습니까. 노래로 덕성을 함양할 수도 있는 것이고, 세상을 풍자할 수도 있는 것이죠.”


『시경』(출처: 국립중앙도서관)


정약용은 깜짝 놀란 얼굴이 되었다가 은근히 노여움을 담아 말했다.

“그래서, 춘절의 노래가 훌륭했던가?”

“춘절의 노래는 배 첨지 어르신의 분노를 누그러뜨리지 않았습니까? 말씀하신 것처럼 그것이 음악이 가진 큰 힘 아니겠습니까?”

정약용이 혀를 찼다.

“그건 자네가 잘 몰라서 그러는 것이네. 옛날 진시황이 분서갱유를 할 때 음악을 다룬 책들도 전부 없어졌네. 참된 음악이 망실되고 이후 망령된 음악들이 세상을 채우게 되었네. 내가 그것을 올바로 잡아 고쳐놓은 바 있네. 진나라 시대 이전의 음악을 찾아내야 음악으로 세상의 예법을 되찾을 수 있는 것이네.”

“어찌 옛 중국의 음악만이 올바른 것이라 하겠습니까?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다면 농부와 나무꾼의 노래라고 해도 사대부의 음악보다 못할 것이 없습니다. 오늘의 음악과 옛날 음악이 곡조는 다르다 해도 그 마음만은 같은 것입니다.”

정약용이 멍한 얼굴로 정생을 바라보았다.

“조선에는 조선의 노래가 있습니다. 억지로 뜯어고쳐 중국 것에 맞추려 하면 오히려 자연스러움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것은 『시경』의 원 뜻과도 맞지 않습니다.”

정약용이 깊이 생각에 잠겼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는 중국 고대의 황종(黃鐘: 동양음악의 기본 음률)을 바로 잡기 위해 노력했는데… 그런 노력이 의미가 없었던 건가…”

정생이 쐐기를 박듯 말했다.

“왜 굳이 우리나라의 황종을 중국 것에 맞춰야 하겠습니까?”

정생의 말에 정약용의 얼굴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얼굴이 흔들리다니? 그러더니 그 얼굴은 접장의 얼굴로 점점 바뀌었다.

“훈장 어르신, 정신 좀 차리십시오.”

개다리소반에 처박힌 얼굴을 들어보니 침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다산 선생님은… 다산 선생님은 어디 가셨지?”

그 말에 주변에서 폭소가 터졌다. 배 첨지가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꿈에서 다산 선생을 만났나? 자네, 술이 참 약해졌군 그래. 보약이라도 한 재 지어먹게.”

“아니, 저, 분명히 다산 선생님이… 제가 다산 선생님을 논쟁에서 이겼는데…”

그 말에 더 큰 폭소가 터졌다.

“인물 났네, 인물 났어. 시나 한 수 지어놓게나. 몽배정다산(夢拜丁茶山)이라고 하면 되겠구만.”

정생은 억울했지만 어쩔 수 없어서 분함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 답청연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접장에게 꿈 이야기를 해주자 접장이 웃으며 말했다.

“그거 홍대용의 『담헌서(湛軒書)』에 나오는 이야기 아닙니까?”

“뭐?”

“지난달에 읽어보라고 빌려주셔서 제가 지금 읽고 있습니다.”

“아, 그게… 그, 그랬던가?”

“네, 『담헌서』에 있는 ‘대동풍요서’와 ‘황종고금이동지의’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담헌서』(출처: 국립중앙도서관)


정생은 민망한 나머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접장이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갑자기 왜 웃으십니까?”

“즐거워서 웃지! 선현의 말씀을 잘 익혀서 내가 말했으니 그 아니 훌륭한가! 공자 가라사대 ‘배우고 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라 하셨지.”

하지만 정생은 접장의 얼굴은 바라보지 않고 밤하늘만 올려다보며 하산 길을 재촉했다. 접장도 더는 묻지 않았다.




집필자 소개

이문영
이문영
역사, 추리, SF, 판타지를 넘나들며 글쓰기를 하고 있다. 소설 뿐만 아니라 인문서 쪽으로도 출간을 하고 있으며, 청소년 글쓰기 사이트 글틴의 소설게시판지기로도 활동했다. 장르소설 전문 출판사 파란미디어 편집주간으로 있으면서 여전히 활발한 창작활동을 겸하고 있다. 역사추리소설 『신라 탐정 용담』, 어린이 그림책 『색깔을 훔치는 마녀』, 역사동화 『역사 속으로 숑숑』, 어린이 인문서 『그게 정말이야?』, 역사인문서 『만들어진 한국사』를 비롯해서 MMORPG 『무혼』 등 여러 편의 게임 시나리오도 만든 바 있다.
“대나무 숲에서 백성들을 걱정하다, 광대의 피리 소리와 승려의 춤으로 울적한 마음을 떨치다”

김일손, 두류기행록, 1489-04-17 ~

1489년 4월 17일, 지리산을 유람중이던 김일손은 5리를 가서 묵계사에 이르렀다. 절은 두류산에서 가장 빼어난 사찰로 이름이 나 있었지만, 와서 보니 전에 듣던 것처럼 빼어나지는 않았다. 다만 절간이 밝고 아름다우며 사이사이 금실을 넣어 특이한 비단으로 청홍색으로 만든 부처의 가사와 거처하는 20여명의 승려들이 묵묵히 정진하는 모습이 금대암의 승려들같이 볼 만하였다. 조금 쉬었다가 말을 돌려보내고 지팡이를 짚고 왕대 숲을 헤치며 나아갔는데, 길을 잃고 헤매다가 간신히 좌방사(坐方寺)에 이르렀다. 거주하는 승려는 3, 4명뿐으로 절 앞의 밤나무가 모두 도끼에 찍혀 넘어져 있었는데, 승려에게 왜 이렇게 되었냐고 물었더니, 한 승려가 말하기를, “백성들 중에 밭을 일구려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렇게 되었는데, 못하게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김일손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높은 산 깊은 골짜기까지 이르러 개간하여 경작하려 하는 것을 보면, 국가의 백성이 많아진 것인데, 그들을 부유하게 하고 교화시킬 방법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조금 앉았다가 광대를 불러 생황과 피리를 불게 하여, 답답하고 울적한 마음을 떨쳐버리려 하였다. 누더기 승복을 걸친 한 승려가 뜰에서 서성이다가 덩실덩실 춤을 추는데 그 모습이 배를 움켜잡고 웃을 만하였다. 드디어 그와 함께 앞 고개로 오르는데, 나무가 길을 가로막고 있어서 그 위에 올라앉아 보니 앞뒤에 큰 골짜기가 있었다. 푸른 기운이 어스름한 저녁나절 생황소리가 피리와 어우러져 맑고 밝은 소리가 산과 계곡을 울려 정신이 상쾌해졌다. 흥이 다하여 바로 내려오면서 시냇가 넓은 바위에 앉아 발을 씻었는데, 이 날도 여전히 음산하여, 동상원사(東上元寺)에서 묵기로 하였다.

“쌍계사에서 기생들과 풍류를 즐기다”

조위한, 유두류산록,
1618-04-12 ~ 1618-04-13

조위한(趙緯韓)은 1618년 2월에 서울에서 가족들과 함께 남원으로 내려와 살게 되었다. 그런데 토포사(討捕使)의 임무로 남부로 가는 도중에 남원에 와 있던 동생 조찬한(趙纘韓)과 만나게 되었다. 두 사람은 다른 일행들과 함께 겸사겸사 지리산을 여행하기로 했다. 여행은 4월 11일에 시작되었다.

4월 12일, 압록진(鴨綠津)에 이르니 양형우(梁亨遇)가 먼저 강가에 도착하여 악사를 시켜서 피리를 불게 하고는 기다리고 있었다. 강가에서 점심을 먹고 난 후 배를 타고 술을 마시며 즐기고자 했다. 곡성 관아에서 관기 두 명을 보내주어 같이 배에 올랐다. 악사의 피리에 맞추어 기생들에게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강위에서 풍류를 즐기며 한참을 놀았다. 조위한과 일행들은 흥이 나서 각자 시를 한 수씩 지었다.

배에서 내려 계곡을 따라 30리를 걸었다. 구례현으로 들어가 현감 민대륜과 만났다. 일행과 민대륜은 밤늦게까지 술자리를 가졌다.

13일 아침에 구례현의 아전을 광양의 심생(沈生)이라는 사람에게 보내어 지리산에서 만나기로 했다.

조위한과 일행은 지리산 무릉계곡에 도착했다. 쌍계사의 승려 10여 명이 나와 일행을 맞이하면서 “토포사께서 이미 이 지역의 병마절도사님과 함께 쌍계석문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라고 했다.

“술과 꽃의 나날들 - 봄빛 가득한 안동에서 일족모임을 갖다”

김령, 계암일록,
1621-02-26 (윤) ~ 1621-03-02 (윤)

1621년 윤 2월 26일, 김령은 안동에서 일족 모임을 가졌다. 의원(醫院)에서 모였는데, 같은 성(姓)의 사람들이 모두 스무 명 남짓 되었다. 그들은 며칠에 걸쳐 술과 이야기를 나눴다. 살구꽃이 붉게 피고 수양버들이 푸르게 늘어져 봄빛이 온 고을에 가득했다.

다음날에는 일족 아닌 벗들까지 합세해 30여 명이 의원에서 향교로, 또 야외로 어울려 다니며 술잔을 나눴다. 김령이 안동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안동부사 박로가 그를 만나기 위해 의원으로 찾아오기도 하였다.

만난 지 사흘째에는 6세조 소감공(少監公)의 묘소가 있는 선영에 올라가 제사를 지냈다. 산의 형세가 비범하며, 기이한 봉우리가 멀리 펼쳐져 있어 길지를 이루고 있었다. 제사를 마치고는 음복 후, 묘소 아래 사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주고 돌아왔다. 지나는 곳곳마다 산꽃이 햇빛에 반사되었다. 귀래정(歸來亭)에서 잠시 쉬었는데, 강산의 좋은 경치에 다시 봄빛을 더하니 정경이 더욱 아름다웠다. 강을 건너 임청각(臨淸閣)에 이르니 주인이 소식을 듣고 기쁘게 맞아주었다. 술 단지를 열고 등불을 켜고 악기 소리가 요란했지만 김령은 술에 시달려 많이 마실 수 없었다. 그는 주인이 취한 틈을 타서 도망치듯 자리를 빠져나왔다.

다음날, 임청각의 주인 이참의는 김령에게 아들을 보내, 지난 밤 몰래 도망한 일을 탓하면서 더욱 간절히 초청을 했다. 그러나 김령은 정중히 사양하고 성오의 초당을 방문했다. 맑고 시원했으며, 멀리 호수와 산을 감싸고 있어 읊조리며 지낼만한 곳이었다. 날이 저물어 억지로 일어나 돌아오려고 했으나, 이미 저물녘이 다 되어 계획을 변경했다. 서문의 누각에 올라가니 배꽃이 고을에 가득하게 피어 마을마다 눈이 온 것 같았다. 벗들은 시를 읊었고, 김령은 다시 술을 마셨다.

“10리를 가서 거문고 소리를 얻어 듣고, 20리를 가서 저녁밥을 얻어 먹다”

서찬규, 임재일기, 1857-05-04

1857년 5월 4일, 서찬규 일행은 10리를 가서 어원곡에서 점심을 먹고 10리를 가서 복귀정에 도착했다.

도로변에 초옥이 있었는데 소나무로 친 담이 단출하고 엉성했다. 거문고 소리가 냉랭하게 들려왔다.

예중과 함께 그 문밖에 가서 주인에게 한번 듣고 싶다고 하니 주인도 기쁘게 허락해 주었다. 몇 곡을 연주해 내는데 거문고 현의 소리가 맑고도 시원했다. 조율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지만 그 거문고는 이른바 양금이었다. 그의 선조인 홍준(洪俊)이라는 분이 이 거문고를 처음으로 통달했으며 우리나라에서 이 양금의 첫 연주는 바로 홍준이라는 분에게서 시작된 것이라고 말했다.

20리를 가서 소정에 도착하니 소나기가 잠깐 지나갔다. 이에 점심을 먹고 작천을 지나고, 50리를 더 가서 청주에 도착하였다. 읍내에서 몇 리 안 가니 숲이 울창한 곳이 있어서 언덕에 걸터앉아서 잠시 쉬었다. 그때 날은 저물고 배는 매우 고파서 한 발짝도 앞으로 가기가 어려웠고, 잠잘 만한 곳이 없었다. 마침 작은 띠집이 하나 있어 우선 저녁밥을 해 달라 하고 저녁 값을 후하게 쳐주려고 했더니, 주인 아낙네가 마당에서 욕을 하면서 싫어하는 태도가 역력해 보였다. 마침 그의 남편이 낚아채며 소리를 지르고 때리더니, 밥을 차려 내오고는 그의 아내의 허물을 사과하였다.

진실로 사내의 호쾌함을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둘러앉아서 배고픔을 채우니 이것은 거지도 먹지 않는 것인데 이렇게 먹는다는 것이 어찌 부끄러움이 없겠는가? 그저 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고을의 동문 밖에 있는 주점으로 가서 거기서 묵었는데 성(城)은 크고 사람들은 부유해 보였다. 동쪽으로 거의 5리쯤 되는 곳에 산성이 있었다.

“술과 노래가 있는 조선시대 잔치 풍경”

김령, 계암일록, 1621-02-28 ~

1621년 2월 28일, 이지의 집에서 수연(壽宴)이 열렸다. 여러 친족들이 모두 모였다. 정오 즈음에 밥을 들여오고 술을 돌리는데, 음식상이 매우 푸짐했다. 손님으로 초대받은 참의 이기성(李器成)의 계집종들이 풍악을 울리며 흥을 돋우었다. 밤이 될 즈음, 주인과 손님이 안으로 들어가 장수를 축원하였다.

다음날인 2월 29일에도 잔치는 계속되었다. 참의 이기성은 이날에도 노래 부르는 아이들을 데리고 악기를 연주하며 김령의 집에 이르렀고, 이지 4형제와 참 등이 잇달아 방문하였다. 술잔을 돌리고 권하며 마시다가 다들 나와 다시 이지의 집으로 갔다. 보기 드물게 즐거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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