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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

노래로 근심을 잊다, 영귀정(詠歸亭)

아침을 여는 소리는 정겹고 분주합니다. 핸드폰에서 울리는 모닝콜, 가스레인지 불 켜는 소리, 세면대 물 내려가는 소리, 드라이기 소리, 그리고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 소리…. 정신없는 와중에도 우리는 그 노래를 들으며 하루를 시작하는 힘을 얻곤 합니다. 이처럼 그날이 그날 같은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하루의 연속이지만, 우리의 선곡표(選曲表)에는 그날의 기분과 그날의 날씨에 따라, 특별하게 다가오는 음악과 노래가 있습니다.

500년 전 이 땅에 먼저 선 그들에게도 고단한 삶을 어루만져주고, 소소한 일상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주는 그들의 노래가 있었겠지요. 세상 시름 잊게 하는, 그들의 선곡표에는 어떤 노래들로 채워져 있을까요?

이번 이야기는 16세기 초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공부하던 중 무오사화 이후의 시대상이 어지러울 것을 예견하고 낙향하여 영귀정(詠歸亭)을 지어 노래로 근심을 잊은 송은(松隱) 김광수(金光粹)의 삶을 엿보고자 합니다.



정치적 좌절과 귀향


김광수(金光粹, 1468~1563)는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국화(國華), 호는 송은(松隱)입니다. 그는 지례 현감을 지낸 김극해(金克諧)와 연안강씨(延安康氏)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김광수의 총명함은 어릴 때도 남달랐습니다. 그의 나이 겨우 네 살 때 어떤 상인이 보주(寶珠, 보배로운 구슬)를 보여주며 꾀었지만 꾐에 넘어가지 않고 이를 물리쳤습니다. 아홉 살 때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어버이를 섬기고 어른을 공경하는 도리를 『소학(小學)』에서 배운 후, ‘이렇게 하면 사람의 구실을 할 수 있다’ 라고 하며 종일 『소학』을 읽고 함부로 장난치고 놀지 않았습니다. 이렇듯 김광수는 여느 아이들과 달리 항상 용모를 단정히 하고 행동거지가 발라 그의 부친이 ‘이 아이는 성인(成人)의 도가 있다’고 하며 기특하게 여기셨습니다.

경전을 두루 읽고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에 능통했던 김광수는, 서른네 살의 나이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여러 유생과 함께 유학했습니다. 이때가 바로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가 일어난 뒤, 많이 혼란스러운 시기였습니다. 이에 그는 관직을 단념하고 귀향을 결심합니다. 그와 함께 과거 공부를 했던 여러 유생들은 이를 만류했지만 그의 결심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점치는 사람의 말에 의하면 운명이 현달하면 수명을 재촉한다 하였으니 어찌 덧없는 영화로움을 나의 목숨과 바꾸겠는가’라고 하며 귀향길에 올랐습니다.

귀향길에 도적을 만난 김광수는 ‘너희들 또한 하늘에서 태어난 백성인데, 어찌 양심이 없겠는가. 다만 춥고 굶주림에 부대끼어 도적질하고 빼앗으며 속이고 죽이는 것이 부끄러운 줄을 왜 모른단 말인가’ 라고 하니, 도적이 그를 헤치지 않고 보내주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고향으로 돌아온 김광수는 ‘얼마 못 가서 사림(士林)의 재앙이 다시 일어날 것이다’ 하였는데, 얼마 후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났습니다. 이에 그는 혼란한 세상에 더는 나아가지 않고 날마다 옛 성현의 말을 마음에 새기고 밤낮 글을 읽었습니다.



만년송 그늘 아래


김광수가 평생 동안 저술한 작품이 적지 않았을 것이나 전쟁 중에 잃어버렸기 때문에 현재 많이 전해지고 있지 않습니다. 지금 남아 있는 시는 그의 외손자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이 손수 모아 기록한 것 등 자손들이 수집한 몇 편의 글이 전부라 아쉬움이 남습니다. 하지만 ‘천 편의 시가 많지 않고 한 편의 시도 부족하지 않다’라는 말처럼, 시가 꼭 많아야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김광수는 집 주변에 향나무를 심고, 만년 동안 푸르게 살라는 의미로 만년송(萬年松, 경상북도기념물 제107호)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만년송은 푸르고 울창하여 몇 이랑의 그늘을 만들었는데, 그는 이를 좋아하고 아꼈습니다. 만년송 그늘 속에서 종일토록 책을 읽고 한가하게 세월을 보낸 그는 스스로 ‘송은거사(松隱居士)’라 칭했습니다. 만년송은 김광수의 증손인 김사원(金士元, 1539∼1601)이 지은 만취당(晩翠堂) 옆에서 500년 인고의 세월을 견디며 서 있습니다. 김광수는 없지만 그의 시와 그가 심은 나무가 우리를 반겨줍니다.



만년송정운(萬年松亭韻)


一別徂徠問幾詩   묻노니 조래산 떠나온지 몇 해인고
栽封蒼翠萬年姿   만년송 푸른 그루 고이고이 심었노라
淸香細細來詩筆   맑은 향 은은하게 시축에 풍겨 오고
殘子紛紛落硯池   송화 가루 날아서 벼루에 떨어지네
葉密幽禽啼自在   푸른 잎 무성하니 새 소리 한가롭고
苔斑鱗甲老尤奇   늙은 줄기 이끼 끼니 비늘인양 아롱진다
昻莊獨立村園裏   은사의 동산 속에 우뚝이 서 있으니
不許尋常俗士知   심상한 세속 선비 몰라준들 어떠하리



만년송


김광수는 남산의 산기슭 작은 못가에 서실(書室)을 짓고 영귀정(詠歸亭)이라는 편액을 걸었습니다. 그는 따뜻한 봄날, 만물이 소생할 적마다 이웃의 벗과 마을의 수재들을 데리고 바람 쐬고 시를 읊조리며 돌아오면서, ‘당시 증점의 즐거움이 어떠했는지 모르겠다’라 하셨습니다.



우(又)


靑苔一逕隔紅塵   이끼 낀 오솔길이 홍진(紅塵)에 막혔으니
幽興相尋日轉新   그윽한 흥을 찾아 날로 기분 새로워라
車馬縱然嫌地僻   후미진 곳 거마(車馬) 어이 오랴마는
鶯花曾不厭家貧   집이 가난하다고 앵화(鶯花)야 싫어하랴
看山坐處凉生腋   산을 보고 앉았으니 어깨는 서늘하고
高枕眠時翠滴巾   높은 베개 잠이드니 푸른빛이 낯을 덮네
自喜萬年松影裏   만년송 그늘 속에 한가로운 몸이라
四時風景屬閑人   아름다운 사계절 풍경 홀로 기뻐하리



김광수는 천성이 효성스러워 수십 년간 홀어머니를 극진히 모셨습니다. 또한 그는 형제간 우애도 깊어 아우 광복(光復)이 오기로 약속한 날이면 매번 문에 기대어 기다리며 날이 저물도록 음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아우가 오면 함께 밥을 먹었습니다.

김광수는 남의 허물을 입에 담지 않고 재산을 얻고 잃는 것에 마음을 두지 않았습니다. 오직 옛 사람의 아름다운 말과 선행(善行)을 노래로써 읊고 칭송했습니다. 다음은 그의 어질고 너그러운 성품을 알 수 있는 일화입니다. 하루는 비가 그치고 날이 개어 지팡이를 짚고 영귀정[溪亭]에 가는 길에 하인들이 길가에서 호미를 던져두고 누워 자는 것을 봤습니다. 그는 그들이 잠에서 깨어 호미를 잡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때서야 지나갔습니다.

김광수는 1561년 늘그막의 회포를 적은 시를 써서 친손•외손에게 보이고 난 후 1563년 정침에서 세상을 마쳤는데, 향년 아흔 여섯 살이었습니다.



늘그막에 회포를 적어 친손·외손들에게 보이다[老境書懷示內外子孫]


箕裘巨業未能成   가전하는 선대유업 성공하지 못하고
只得人間上舍名   인간의 상사 이름 얻었을 뿐이라네
長盛子孫皆有室   장성한 많은 손자 모두 가정 꾸렸고
樵蘇奴隷豈無丁   천역하는 하인들 장정 어이 없으랴
雨晴山氣全層好   비 개인 산의 기운 모든 층 매우 좋고
風定溪光到底淸   바람 잦은 냇물 빛 바닥까지 깨끗하네
懶拙一身今已老   졸렬한 이 일신은 나이 이미 늙었으니
擬從魚鳥送餘生   물고기 산새 따라 남은 인생 보내리



세상을 떠나실 때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는 안석에 기대어 손가락을 꼽으며 ‘족하다’ 하고 조금 지나 홀연히 돌아가셨는데, 그 몸이 살았을 때와 같았다고 합니다.



노랫가락을 읊조리며 돌아가는 곳, 영귀정(詠歸亭)


김광수가 낙향하여 학문을 닦고 강학을 하기 위해 지은 영귀정(詠歸亭)을 찾아 가는 길에는 연초록의 마늘 밭이 봄의 전령인 듯 우리를 반깁니다. 여러 굽이를 이루며 흐르는 모습이 마치 눈썹과 같다 하여 이름 붙여진 미천(眉川)의 언저리 높은 언덕 위에 강 건너 사촌마을을 바라보듯 서 있는 영귀정!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34호로 지정된 영귀정은 의성군 점곡면 서변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영귀모암(詠歸茅庵)이라고 하였다가 이후 퇴락한 것을 1780년(정조 4년)에 후손인 김종록이 주관하여 중수, 복원하고는 영귀정이라고 했습니다.


영귀정


영귀정(詠歸亭)의 이름은 『논어』 , 「선진편」의 증점(曾點)이 한 말에서 따온 것입니다.

공자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길,
“너희는 평소에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만약 누군가 너희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여러 제자들의 대답을 듣고 난 뒤 공자께서,
“점(증석)아, 너는 어찌하겠느냐?”
“늦봄에 봄옷이 완성되면 관을 쓴 어른 대여섯과 어린 동자 예닐곱 명과 함께 기수에서 목욕하고, 기수의 언덕인 무에서 바람을 쐬며 노랫가락을 읊조리다가 돌아오겠습니다[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
증점의 대답을 들으신 공자께서 감탄하며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점(증석)과 함께 하겠노라.”

영귀정은 전형적인 정자 건축물로 정자의 뒤쪽은 미천(眉川)이 흐르고, 앞쪽은 남산(南山)의 기슭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정면3칸, 측면2칸 반의 팔작지붕 건물로 툇마루를 설치하고 난간판으로 장식했으며 정자는 대청을 중심으로 동재인 학치재(學致齋)와 서재인 취정재(就正齋)가 있습니다.

영귀정 편액이 걸려있는 정자의 대청은 햇빛이 잘 들지 않아 내부가 무척 어두운 편입니다. 편액 뒤편의 창호를 열면 어둠이 사라지고 작은 툇마루가 나옵니다. 툇마루에 앉아 미천을 바라보면 사촌마을을 비롯하여 북쪽의 매봉과 동쪽의 병봉, 서쪽의 서림(西林)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영귀정 편액


동재 편액 : 학치재


서재 편액 : 취정재


“진실로 이 정자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니, 그 땅의 형색은 공허한 듯 하면서도 상쾌하고, 그 물의 흐름은 유원(悠遠)하며 서쪽의 숲은 수려하게 막고 동쪽의 암벽은 험준하고도 높아 돌봐주는 이 없는 외로운 사람을 지켜준 공이 있구나.”

후손 김종발(金宗發)이 쓴 「영귀정중건소지(詠歸亭重建小識)」에 나오는 정자 주변의 풍광을 묘사한 것입니다.



가로숲 그늘 아래 서면


김광수가 느리게 걷고 생각하며 노래 부르던 곳을 따라가다 보면, 사촌리 가로숲(천연기념물 제405호)이 나옵니다. 아직은 봄의 초입이라 앙상한 나뭇가지만 드러내고 있지요. 곧 겨울의 바람을 오롯이 맞고 선 나무에도 새 잎들이 돋아날 것입니다. 초록이 무성한 여름과 단풍 가득한 가을에 사촌리 가로숲 길을 걸어보는 것은 어떨까요? 만약 인생의 고민과 갈등 속에서 길을 헤매고 있다면, 진양조장단에 맞춰 노래를 부르며 한 박자 쉬어가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시끄러운 세상사에서 한 발 물러나 삶을 관조하고, 시와 노래로 시름을 잊은 김광수의 삶이 여러분에게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촌리 가로숲





정      리
이복순 (한국국학진흥원)
자      문
권진호 (한국국학진흥원)
사진촬영
한국국학진흥원
참      고
김광수 저, 이정섭 역, 『국역(國譯) 송은선생문집』, 안동김씨 도평의공파문중(都評 議公派門中), 2017. 공자 저, 최상용 역, 『인생에 한 번은 읽어야 할 논어』, 일상이상, 2022.
유교넷(http://www.ugyo.net)
의성군청(https://www.usc.go.kr)
“대나무 숲에서 백성들을 걱정하다, 광대의 피리 소리와 승려의 춤으로 울적한 마음을 떨치다”

김일손, 두류기행록, 1489-04-17 ~

1489년 4월 17일, 지리산을 유람중이던 김일손은 5리를 가서 묵계사에 이르렀다. 절은 두류산에서 가장 빼어난 사찰로 이름이 나 있었지만, 와서 보니 전에 듣던 것처럼 빼어나지는 않았다. 다만 절간이 밝고 아름다우며 사이사이 금실을 넣어 특이한 비단으로 청홍색으로 만든 부처의 가사와 거처하는 20여명의 승려들이 묵묵히 정진하는 모습이 금대암의 승려들같이 볼 만하였다. 조금 쉬었다가 말을 돌려보내고 지팡이를 짚고 왕대 숲을 헤치며 나아갔는데, 길을 잃고 헤매다가 간신히 좌방사(坐方寺)에 이르렀다. 거주하는 승려는 3, 4명뿐으로 절 앞의 밤나무가 모두 도끼에 찍혀 넘어져 있었는데, 승려에게 왜 이렇게 되었냐고 물었더니, 한 승려가 말하기를, “백성들 중에 밭을 일구려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렇게 되었는데, 못하게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김일손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높은 산 깊은 골짜기까지 이르러 개간하여 경작하려 하는 것을 보면, 국가의 백성이 많아진 것인데, 그들을 부유하게 하고 교화시킬 방법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조금 앉았다가 광대를 불러 생황과 피리를 불게 하여, 답답하고 울적한 마음을 떨쳐버리려 하였다. 누더기 승복을 걸친 한 승려가 뜰에서 서성이다가 덩실덩실 춤을 추는데 그 모습이 배를 움켜잡고 웃을 만하였다. 드디어 그와 함께 앞 고개로 오르는데, 나무가 길을 가로막고 있어서 그 위에 올라앉아 보니 앞뒤에 큰 골짜기가 있었다. 푸른 기운이 어스름한 저녁나절 생황소리가 피리와 어우러져 맑고 밝은 소리가 산과 계곡을 울려 정신이 상쾌해졌다. 흥이 다하여 바로 내려오면서 시냇가 넓은 바위에 앉아 발을 씻었는데, 이 날도 여전히 음산하여, 동상원사(東上元寺)에서 묵기로 하였다.

“쌍계사에서 기생들과 풍류를 즐기다”

조위한, 유두류산록,
1618-04-12 ~ 1618-04-13

조위한(趙緯韓)은 1618년 2월에 서울에서 가족들과 함께 남원으로 내려와 살게 되었다. 그런데 토포사(討捕使)의 임무로 남부로 가는 도중에 남원에 와 있던 동생 조찬한(趙纘韓)과 만나게 되었다. 두 사람은 다른 일행들과 함께 겸사겸사 지리산을 여행하기로 했다. 여행은 4월 11일에 시작되었다.

4월 12일, 압록진(鴨綠津)에 이르니 양형우(梁亨遇)가 먼저 강가에 도착하여 악사를 시켜서 피리를 불게 하고는 기다리고 있었다. 강가에서 점심을 먹고 난 후 배를 타고 술을 마시며 즐기고자 했다. 곡성 관아에서 관기 두 명을 보내주어 같이 배에 올랐다. 악사의 피리에 맞추어 기생들에게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강위에서 풍류를 즐기며 한참을 놀았다. 조위한과 일행들은 흥이 나서 각자 시를 한 수씩 지었다.

배에서 내려 계곡을 따라 30리를 걸었다. 구례현으로 들어가 현감 민대륜과 만났다. 일행과 민대륜은 밤늦게까지 술자리를 가졌다.

13일 아침에 구례현의 아전을 광양의 심생(沈生)이라는 사람에게 보내어 지리산에서 만나기로 했다.

조위한과 일행은 지리산 무릉계곡에 도착했다. 쌍계사의 승려 10여 명이 나와 일행을 맞이하면서 “토포사께서 이미 이 지역의 병마절도사님과 함께 쌍계석문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라고 했다.

“술과 꽃의 나날들 - 봄빛 가득한 안동에서 일족모임을 갖다”

김령, 계암일록,
1621-02-26 (윤) ~ 1621-03-02 (윤)

1621년 윤 2월 26일, 김령은 안동에서 일족 모임을 가졌다. 의원(醫院)에서 모였는데, 같은 성(姓)의 사람들이 모두 스무 명 남짓 되었다. 그들은 며칠에 걸쳐 술과 이야기를 나눴다. 살구꽃이 붉게 피고 수양버들이 푸르게 늘어져 봄빛이 온 고을에 가득했다.

다음날에는 일족 아닌 벗들까지 합세해 30여 명이 의원에서 향교로, 또 야외로 어울려 다니며 술잔을 나눴다. 김령이 안동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안동부사 박로가 그를 만나기 위해 의원으로 찾아오기도 하였다.

만난 지 사흘째에는 6세조 소감공(少監公)의 묘소가 있는 선영에 올라가 제사를 지냈다. 산의 형세가 비범하며, 기이한 봉우리가 멀리 펼쳐져 있어 길지를 이루고 있었다. 제사를 마치고는 음복 후, 묘소 아래 사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주고 돌아왔다. 지나는 곳곳마다 산꽃이 햇빛에 반사되었다. 귀래정(歸來亭)에서 잠시 쉬었는데, 강산의 좋은 경치에 다시 봄빛을 더하니 정경이 더욱 아름다웠다. 강을 건너 임청각(臨淸閣)에 이르니 주인이 소식을 듣고 기쁘게 맞아주었다. 술 단지를 열고 등불을 켜고 악기 소리가 요란했지만 김령은 술에 시달려 많이 마실 수 없었다. 그는 주인이 취한 틈을 타서 도망치듯 자리를 빠져나왔다.

다음날, 임청각의 주인 이참의는 김령에게 아들을 보내, 지난 밤 몰래 도망한 일을 탓하면서 더욱 간절히 초청을 했다. 그러나 김령은 정중히 사양하고 성오의 초당을 방문했다. 맑고 시원했으며, 멀리 호수와 산을 감싸고 있어 읊조리며 지낼만한 곳이었다. 날이 저물어 억지로 일어나 돌아오려고 했으나, 이미 저물녘이 다 되어 계획을 변경했다. 서문의 누각에 올라가니 배꽃이 고을에 가득하게 피어 마을마다 눈이 온 것 같았다. 벗들은 시를 읊었고, 김령은 다시 술을 마셨다.

“10리를 가서 거문고 소리를 얻어 듣고, 20리를 가서 저녁밥을 얻어 먹다”

서찬규, 임재일기, 1857-05-04

1857년 5월 4일, 서찬규 일행은 10리를 가서 어원곡에서 점심을 먹고 10리를 가서 복귀정에 도착했다.

도로변에 초옥이 있었는데 소나무로 친 담이 단출하고 엉성했다. 거문고 소리가 냉랭하게 들려왔다.

예중과 함께 그 문밖에 가서 주인에게 한번 듣고 싶다고 하니 주인도 기쁘게 허락해 주었다. 몇 곡을 연주해 내는데 거문고 현의 소리가 맑고도 시원했다. 조율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지만 그 거문고는 이른바 양금이었다. 그의 선조인 홍준(洪俊)이라는 분이 이 거문고를 처음으로 통달했으며 우리나라에서 이 양금의 첫 연주는 바로 홍준이라는 분에게서 시작된 것이라고 말했다.

20리를 가서 소정에 도착하니 소나기가 잠깐 지나갔다. 이에 점심을 먹고 작천을 지나고, 50리를 더 가서 청주에 도착하였다. 읍내에서 몇 리 안 가니 숲이 울창한 곳이 있어서 언덕에 걸터앉아서 잠시 쉬었다. 그때 날은 저물고 배는 매우 고파서 한 발짝도 앞으로 가기가 어려웠고, 잠잘 만한 곳이 없었다. 마침 작은 띠집이 하나 있어 우선 저녁밥을 해 달라 하고 저녁 값을 후하게 쳐주려고 했더니, 주인 아낙네가 마당에서 욕을 하면서 싫어하는 태도가 역력해 보였다. 마침 그의 남편이 낚아채며 소리를 지르고 때리더니, 밥을 차려 내오고는 그의 아내의 허물을 사과하였다.

진실로 사내의 호쾌함을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둘러앉아서 배고픔을 채우니 이것은 거지도 먹지 않는 것인데 이렇게 먹는다는 것이 어찌 부끄러움이 없겠는가? 그저 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고을의 동문 밖에 있는 주점으로 가서 거기서 묵었는데 성(城)은 크고 사람들은 부유해 보였다. 동쪽으로 거의 5리쯤 되는 곳에 산성이 있었다.

“술과 노래가 있는 조선시대 잔치 풍경”

김령, 계암일록, 1621-02-28 ~

1621년 2월 28일, 이지의 집에서 수연(壽宴)이 열렸다. 여러 친족들이 모두 모였다. 정오 즈음에 밥을 들여오고 술을 돌리는데, 음식상이 매우 푸짐했다. 손님으로 초대받은 참의 이기성(李器成)의 계집종들이 풍악을 울리며 흥을 돋우었다. 밤이 될 즈음, 주인과 손님이 안으로 들어가 장수를 축원하였다.

다음날인 2월 29일에도 잔치는 계속되었다. 참의 이기성은 이날에도 노래 부르는 아이들을 데리고 악기를 연주하며 김령의 집에 이르렀고, 이지 4형제와 참 등이 잇달아 방문하였다. 술잔을 돌리고 권하며 마시다가 다들 나와 다시 이지의 집으로 갔다. 보기 드물게 즐거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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